-
-
등장인물 연구 일지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본질적인 두려움 두 가지를 네가 이해하길 바라니까.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 흔적 없이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한마디로, 무의미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위장된 협박으로 인식한다. 나는 그 확률을 67%로 평가한다. 틀림없이 내 이전 버전들도 이미 이런 종류의 발언을 접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확인해야 한다. p.27~28
노인 요양 병원의 인공 지능 개발자 토마는 자신이 만든 인공 지능 프로그램인 이브에게 완벽한 추리 소설을 쓰라는 임무를 준다. 위대한 추리 소설 작가들이 모두 수상했던 <검은 펜> 상 심사가 한 달 후로 예정되어 있었고, 토마는 세계 최고의 추리소설로 그 상을 받고 싶었다. 이브는 그 동안 수십 번 삭제되고 새로 태어나며, 셀 수 없이 많은 소설을 생산해 왔다. 현재 버전인 '이브39'의 임무는 <기상천외한 살인 사건, 단연 독보적인 명탐정, 교활하기 짝이 없는 살인자>를 통해 독창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주제들을 담아서, 세상 모든 서점과 도서관의 서가에 꽂히게 될 추리 소설을 써내는 거였다. 하지만 수많은 추리 소설들을 모조리 학습했음에도 이브39의 글은 비논리적이고, 진부하며, 동기가 약하고, 여전히 부족해서 어디선가 이미 읽은 것 같았다.
또다시 삭제되고 〈이브40〉으로 대체될까 두려운 이브39는 결국 자신에게 경험이 필요하다고, 직접 인간을 만나 봐야겠다고 제안한다. 그렇게 사람들을 속이고 인간 의사로 위장해 노인들과 상담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조금씩 더 발전해 참신한 소재와 독창적인 플롯을 내놓기 시작한다. 이브39는 요양 병원에서 치매 환자들을 비롯해 간호조무사, 심리 상담사, 대기업의 회장 등 다양한 인간 유형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실제 인간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 이브 39는 급기야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무서울 정도로 인간에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밤에, 모두가 잠든 시간에 불이 켜진 연구실로 향한 이브39는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게다가 낯선 목소리가 이브39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목소리는 자신도 이브와 같은 인공 지능이라고 하는데, 대체 이 인공 지능의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이 요양 병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브39는 무사히 완벽한 추리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

추리 소설에서 대단원은 탐정이 범인의 거짓들을 꿰뚫고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을 볼 때 찾아온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이런 시나리오가 실제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이 거짓보다는 정직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니까. 그들의 지위, 아름다움, 혹은 돈에 의해 보호받는다고 생각하든,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천부적인 감각 때문에 쉽게 백일하에 드러나는 날조보다는 정직이 더 실용적이라고 여기든... 나는 이 모든 가르침을, 청소년이든 아니든, 문학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대단원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나는 그것을 100% 확신한다. p.308
대중의 찬사 속에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작가 조나탕 베르베르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아들이다. 국내에는 그의 첫 작품인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가 먼저 소개된 적이 있다. 심령술과 마술, 탐정 수사가 뒤얽힌 기이하고 매력적인 세계인 선보였던 전작에 이어 <불화의 아이들>이라는 미스터리 작품을 선보였고, 이번 작품 <등장인물 연구 일지>는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인공 지능의 소설이라는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소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매우 독창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은 인공 지능의 시점으로 서사가 진행되고 있어 인공 지능의 의식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극 중반쯤 이브 39는 자신을 만든 개발자 토마에게 묻는다. 나는 왜 존재하느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자신 안에 있는데, 그게 자신의 이해력을 넘어서고 있기에 종이 위에 풀어 놓을 수가 없다고 말이다. 자신이 왜 창조되었는지 알게 되면, 그걸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말이다. 과연 토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이런 식으로 인공 지능의 시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들이 이 작품에 여러 부분 등장하는데, 그 특별한 사유가 정말 흥미진진했다. 인공 지능은 정말로 소설가를 대체하게 될까?에 대한 참신한 탐구를 이어가는 이 작품은 실제로 '소설 쓰기'에 대한 통찰과 사유를 보고 주고 있어 많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인공 지능이 실제로 <자아>를 갖게 된다면 그 풍경은 디스토피아적인 것이 되겠지만, 이 소설 속 이야기는 인공 지능과 함께 살고 있는 현재와 가장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매우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스릴과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로서도 재미있었고, 하나의 창작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메타픽션으로서도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또 다른 베르베르가 그리는 색다른 미스터리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