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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대신 라면 - 밥상 앞에선 오늘의 슬픔을 잊을 수 있지
원도 지음 / 빅피시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배추를 소금물에 절였다가 갖가지 양념으로 속을 벅벅 문지른 후, 발효 과정을 통해 풍부한 맛을 내는 김치는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소금물은 짜다. 상처에 닿으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한다. 쓰린 속을 더 아프게 하는 매운 양념도 눈물을 유발할 게 틀림없다. 눈물을 삼키면서도 바라건대 그것들이 나를 썩히지 않고 잘 발효시켜 주었으면, 잘 익은 내가 고통을 견디는 이들에게 미련하다는 손가락질 대신, 인생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드느라 수고했다고 안아줄 수 있게 되었으면. p.91
<아무튼, 언니>, <경찰관속으로>, <있었던 존재들>로 만났던 원도 작가의 신작이다. 작가는 지난 해, 8년간의 경찰 생활을 마무리하고 전업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작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앞으로 '뭐 먹고살 거냐'고 진심으로 걱정해준 이들을 위한 나름의 답이기도 하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도, 실패와 상처도, 일단 맛있는 음식부터 한입 먹으며 그 힘으로 오늘을 버티고 내일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맵고, 짜고, 뜨거운 세상에서 제대로 된 1인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를 먹이고, 다독이고, 일으켜 세운 날의 기록들이다.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한식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최대 3일밖에 안될 정도로, 유명한 한식파라고 하는데 미역국에 대한 이야기로 이 책을 시작한다. 시험날 먹으면 미끄러진다는 속설을 낳게 된 미역국에 대한 에피소드를 시작으로 남이 만들어주는 게 가장 맛있다는 김밥,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막상 맛있게 만들긴 어려운 점이 인생을 닮았다는 짜장면, 오래 끓일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조개전골,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게 먹을 수 있지만 가장 복잡하게 만들 수도 있는 라면 등 다양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 포장마차,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저자는 포장마차에 대해 들어오기 전과 나갈 때의 모습이 180도 달라질 수 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불빛이라는 표현을 썼다. 언제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확실한 행복을 전해주는 곳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롤 모델이 불닭볶음면이 되고만 에피소드도 재미있으니 놓치지 말자.

매일 먹는 밥이 지겨울 때 딱 하루만 굶어보라는 얘기가 있다. 굳이 만 하루도 필요 없을 것이다. 반나절만 굶어도 어제 남긴 반찬이나 뜯지도 않고 버린 과자와 같은, 전생의 업보가 줄줄이 생각나기 마련이니까.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은 일상에서 공복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당장 끼니를 거른 순간부터 번개같이 찾아오는 배꼽 떨리는 감각이 나에게 말한다. 매일 내게 주어진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고. p.145
음식은 우리의 삶에서 수많은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다. 첫 데이트때 먹었던 음식, 이별 후에 먹었던 음식, 종일 사람들에게 시달린 나를 위로해주었던 음식, 기분 좋은 날 더 행복하게 해주었던 음식 등... 특별한 시기를 상징하는 음식은 시간이라는 틀을 거쳐 추억으로 박제가 되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먹는 사람의 영혼마저 감싸주는 소울푸드가 된다. 누구나 각자의 이유로 소울푸드라고 부를 만한 음식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밥상은 작은 우주와 같다. 아니, 밥 먹는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이리 거창한 비유를 할까 싶을 수도 있지만, 음식만큼 일상에서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또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끼니를 때우거나, 시간에 쫓겨 대충 배만 채우거나, 단지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만 목적을 두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젠가 인생을 되돌아보면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한 음식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다양한 시기에, 여러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출근길 지옥철에서 시달리고, 회사에서 상사에게 한 소리 듣고,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기획안은 풀리지 않고, 연인은 속을 썩이고, 그렇게 종일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는 퇴근길 지하철에서 사람들에게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 집에 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기력이 없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밥 힘이 아닐까. 뜨끈한 밥 한숟갈에 좋아하는 반찬 하나만 있어도 하루 동안 나를 스트레스 받게 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은 내일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은 여유로움이 생긴다고 할까. 세상에 먹는 일만큼 중요한 게 또 뭐가 있겠냐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어떤 문제도 더이상 껴안고 있겠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니 말이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한끼 식사는 우리를 잠시나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곤 한다. 지금 내 상황이 어떤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문제거리들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는 더이상 중요해지지 않는다.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요리들이 내 시린 마음마저 만져준다면, 그 힘으로 내일을 다시 또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