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의 사랑 거장의 클래식 6
딩옌 지음, 오지영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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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융춰는 눈물을 흘리며 말없이 마젠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전을 바라보았다. 마전은 뻣뻣하게 서서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서 자신을 보았고 자신과 그녀의 관계를 보았다. 그것은 환상 속에 투영된 상상이었다. 환상 속 만물은 각자의 궤적에 따라 자라고 움직였다. 상상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실현할 길이 없었다. 그에게는 길이 없었고 그녀에게도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둘 다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 '설산의 사랑' 중에서, p.170~171


린탄에서 명성이 자자한 마씨 집안은 티베트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다 큰 화재가 발생해 전부 타버렸는데 불행하게도 점원으로 일하던 티베트인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양측은 목숨값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화재로 인한 손실이 막대해 비싼 보장금을 당장 내놓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마씨 집안의 막내아들 마전이 죽은 남자의 여동생과 할머니가 사는 집에 ‘인질’로 들어가게 된다. 마전이 할 일은 집안에 돈이 돌아 보상금을 지불할 수 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는 거였다. 그렇게 티베트식 가옥의 가장 아래층에 머물게 된 마전은 자신을 전혀 반기지 않는 두 사람과 함께 지내게 된다. 티베트족 여성인 융춰와 회족 출신인 마전, 두 사람은 알라의 모스크와 불교 사원의 오래된 벽화만큼이나 먼 거리에 있었다. 


마전은 그들에게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매일 과일을 사다 문 앞에 놓지만, 융춰는 과일을 봉지째 쓰레기통에 처박는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관심과 혐오, 그리고 호기심과 호감이라는 감정이 보일듯 보이지 않게 쌓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은 끝까지 서로에게 표현되지 않는다. 이 작품의 표제작인 <설산의 사랑>은 영하 20도를 훨씬 밑도는 눈 내리는 겨울을 배경으로 조용한 폭발력을 보여준다. 딩옌은 적막 속 은은한 분위기와 아직 녹지 않은 주변의 하얀 눈, 서로가 적대적인 두 집안 사이에서 오가는 은근한 긴장감과 완전히 다른 두 종교를 가진 두 사람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시종일관 짙은 슬픔을 배어 나오게 만든다. 사물과 풍경을 주의 깊게 파고들어 인물들의 감정을 은유하는 우아한 문장의 힘이 엄청난 몰입감을 불러 일으키며,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주 특별한 사랑의 감각을 느끼게 한다. 두 사람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것이라 더욱 먹먹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튀쥔은 진실과 인내심은 언젠가 보상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찌감치 현실에 의식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감정을 둘 곳이 없었다. 싫은 동료와 어쩔 수 없이 함께 지내야 했고 싫은 친구와 연락을 유지해야 했다. 싫은 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해야 했다. 싫은 삶은 다른 사람이 그에게 어설프게 씌운 올가미 같았다. 어두운 늪에서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기력이 없는 것처럼 그의 상태는 점차 무감각해졌고 삶에 대한 동경이나 자신에 대한 존중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 '아프리카봉선화' 중에서, p.191~192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 딩옌은 위화, 옌롄커 등으로부터 “젊은 세대 중 최고의 작가”라는 찬사를 받았다. 딩옌은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민족 둥샹족 출신으로, 중국 북서쪽 칭하이와 티베트의 탁 트인 땅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낸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히잡을 쓴 무슬림이 등장하고 이슬람교와 불교 신자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풍경 속에서 낯설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작품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서사 자체는 복잡하지 않지만, 그것을 통과하는 인물들의 내면이 너무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페이지마다 감정을 쥐고 흔드는 힘이 대단하다. 특히나 배경 묘사를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마음 상태가 드러나도록 쓰인 문장들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딩옌은 속세의 우여곡절이나 허무함을 세찬 바람이 불어 눈밭에 찍힌 발자국을 삽시간에 지워버리는 광경으로,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었던 감정을 깨닫게 되는 순간을 벽화 속 화염이 천천히 다가와 몸에 옮겨 붙은 것 같았다는 느낌으로, 애틋한 감정을 억누르며 예의를 갖춰 말하는 작은 목소리를 새 떼가 수면을 스쳐 일으킨 잔물결이 조금씩 넘실대며 수면 위의 평온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는 기분으로 그려낸다. 단 한 번도 고백되지 않는 사랑, 애써 유지하며 붙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희망, 이 쓸쓸한 세상을 견디게 해준 짧은 만남 등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 모두 수준급이다. 딩옌은 '삶은 극적인 감각으로 충만할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라고, 삶의 무정함은 연극의 편집과 연출보다 훨씬 더 강렬하다'고 말한다. 그만큼 강렬한 여운을 남겨주는 작품이었다. 딩옌의 다른 작품도 꼭 국내에 번역되어 만날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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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찢남의 인생 정식
조광효 지음 / 책깃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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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운명의 그날, 우리는 특별한 메뉴를 고민하다가 때마침 출출해져서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곁들여 먹던 밥버거가 우연찮게 떡볶이 접시 안에 툭 떨어졌는데 그게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만화책 <요리왕 비룡>에서 영감을 받아 접시 한가운데에 볶음밥을 놓고 주변을 떡볶이로 둘렀다... 우리는 이걸 '비룡 떡볶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만화책에 나온 요리를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 만든 음식이 만화방을 찾은 손님을 즐겁게 해주었고, 그 덕분에 장만동 책장을 만화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만화와 음식, 역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꿀조합’인 것이다.             p.115~116


전 세계적으로 요리 서바이벌 신드롬을 일으켰던 '흑백요리사'를 재미있게 보면서 눈에 띄는 셰프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코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었던 캐릭터가 바로 '만찢남' 조광효 셰프였다. 실제로 긴장감 넘치는 경연 중에 찢어온 만화책 낱장을 들고 요리를 하기도 했었는데, 만화책을 찢어서 요리하는 남자라는는 컨셉부터 정말 신기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만든 요리 이름이 ‘<맛의 달인> 2권 25페이지 동파육’, ‘<철냄비 짱!> 8권 23페이지 게살 춘권’ 이었을 정도이니 시선을 사로잡는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만드는 음식들의 맛이 궁금해졌다. 정통 셰프들 사이에서 꿋꿋하게 자신만의 요리 철학과 레시피로 당당하게 대결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요리를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고, 오직 만화책으로 요리를 배웠다는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셰프가 되었는지 궁금했다면 그의 첫 책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화방을 운영하며 만화책에 등장하는 요리를 따라 만들고 재해석해 음식을 만들고, 마라샹궈에 반해 쓰촨요리 전문점을 열기도 하는 등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일단 시작하는 사람의 인생 여정은 정말 만화처럼 재미있는 일들로 가득했다. 요리 만화를 덕질하다 레스토랑 오너 셰프가 되기까지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 있었지만, 좋아하는 일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는 그의 열정 덕분에 모든 순간이 즐거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맛의 고장 전라도에서 재야의 고수에게 1년 9개월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매일 특식 레시피들을 전수받았던 취사병 시절 덕분에 요리의 재미에 아주 살짝 눈을 뜨게 되었고, 마라샹궈를 처음 먹고는 '맛있다'라는 감탄과 '팔아야겠다'라는 각오가 한데 뒤섞여 쓰촨으로 가는 중국행 비행기표를 끊고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쓰촨 음식을 파는 장쓰동을 연다.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요리 인생이다. 




독학으로 요리를 하나하나 터득해나갈 수밖에 없었던 건 따로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레스토랑 막내로 들어가 기초부터 익힐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20대 때 어쩌다 시작하게 된 장사였기에 도중에 멈출 수는 없었고, 갑자기 가게 문을 닫고 요리사의 첫걸음을 떼기에는 생계 유지라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나를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보고 열심히 연습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음식을 손님들에게 내놓고, 손님이 음식을 남기고 가면 접시에 남은 요리를 먹어보고 뭐가 부족한지 분석해 날마다 조리법을 보완해가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p.198


전형적인 요리사의 길을 걷지 않은 비전공자가 셰프가 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만화책을 통해 요리를 배우다니, 이 무슨 만화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게다가 미술을 전공한 조광효 셰프 또한 자신이 요리사가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자전거 디자이너로 일하다, 돌연 만화방을 차린다. 그리고 자본금이 부족해 만화책을 사들이지 못해서 신메뉴를 개발하기로 하는데, 만화책에 등장하는 음식을 만화방 손님에게 대접하다 그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만화방보다 떡볶이 맛집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그 덕분에 책장을 만화책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었다니 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에피소드였다. 


그는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며 다양한 테스트를 해왔다. 만화책에서 영감을 얻은 메뉴,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메뉴를 구현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는데,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다고 말한다. 그건 특정한 분야에 정통한 셰프는 아니어도 나만의 길을 끊임없이 개척해나간다면 어느 때고 요리가 나에게 ‘맛’으로 보답하는 날이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만화 속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는 것처럼, 그도 타고난 근성과 특유의 성실함으로 크고 작은 위기와 어려움을 통과해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 책에는 20편의 에세이, 8편의 특별 만화, 22개의 레시피, 그리고 초판 한정 '만화방 떡볶이' 레시피가 삽입되어 있다. 요리 레시피 평범한 것이 하나도 없고, 요리 에피소드를 그린 만화 또한 너무도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흑백요리사> 만찢남 셰프의 달고 맵고 짜고 맛있는 인생 모험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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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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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건 더 그래.”

아빠는 그러면서 자신이 다시 강아지를 키우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어떤 예측 불가능한 일이 자신을 찾아왔고, 그렇게 이시봉을 만나게 되었다고.                p.123


이기호 작가가 11년 만에 본격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서사를 펼쳐보이는 국내 작가가 흔치 않기에, 더욱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시봉'으로 이기호 작가의 초기작부터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시봉은 올해 만 네 살이 된 수컷 비숑 프리제로 시봉이라고 부르면 알은척을 안 하고, 꼭 이시봉이라고 성까지 불러야지 뒤돌아보거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다. 아빠는 나주시 왕곡면까지 가서 이시봉을 데려왔고, 시봉, 시현 남매의 동생처럼 이시봉을 대했다. 아빠는 광주에 있는 한 타이어 공장에서 이십 년간 현장 노동자로 일하다 그만두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피자집을 차렸다. 그리고 매일같이 이시봉을 데리고 출근했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다 피자집 바로 앞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다 속도를 높여 달려오던 레미콘 차량에 그대로 치이고 말았다. 


알고보니 아빠 이시봉을 구하기 위해 도로에 뛰어들었던 거였다. 아빠에게 이시봉은 우리집의 막내였고,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빠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뒤, 엄마는 이시봉의 존재에 대해 무심해졌다. 이시습은 아빠의 사고 이후 음주에 의지하며 강아지 이시봉에게만 마음을 붙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 이시봉이 보통 비숑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들여온 희귀한 혈통의 후손이라고 자신들이 오랫동안 찾아 왔다며 삼천만원을 제시한다. 내 작고 소중한 개가 고귀한 신분이라니.. 시습은 이시봉이 자신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릴 것만 같아서, 그게 억울하고 불안하고 원망스러워서 자꾸 화가 난다. 그들에게 가면 이시봉은 더 행복해질까? 이시봉은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을까. 이시봉은 내가 없어도, 아니 나 없는 곳에서 더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던 시습은 이시봉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한다. 아빠가 어떻게 이시봉과 만나게 된 것인지, 무슨 인연으로 그 먼 곳까지 가서 이시봉을 데려온 것인지, 직접 나주시 왕곡면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고도이는 마구간에 갇혀 있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터무니없는 감상과 그에 따른 상심으로 받아들였으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혈통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오독하면서 동물들의 삶에 관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유일한 장점이자, 집사로서의 자격 요건이다. 집사란 직위는 대개 그런 사람들, 자기애가 충만하지만 그걸 잘 모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한 방식이다.                p.468~469


그렇게 이야기는 이시봉이라는 이름에 얽힌 아버지의 비밀로, 스페인 왕가의 가계도로, 개 농장과 공장 노동조합으로 종횡무진 퍼져 나간다. 이시봉에 대한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이시봉이 아닌,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비밀들을 하나둘씩 풀어내며 스페인과 프랑스, 한국을 잇는 파란만장한 대서사를 만들어 낸다. 이시봉이 '이시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에는 어쩔 수 없이 동료를 배반하게 된 미안함이 있었고, 유럽 왕실에서 길러지던 개의 일종이 개 농장에 팔려가게 된 과정에는 꿈을 좇은 대가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인간의 비참한 눈물이 있었다. 비숑 프리제 ‘이시봉’이 어느 가족의 삶에 깃들기까지의 여정이 그야말로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자신을 원망하는 존재를 향해서 '어둠 속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고 계속' 꼬리를 흔드는 이시봉의 모습처럼, 이 작품은 어떤 상황에서도 명랑하고 유쾌하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개의 마음을 알수는 없다. 반대로 개도 사람의 마음을 몰라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만으로 어쩐지 위로를 받은 듯한 기분이 되고, 계속 함께할 거라는 생각이 무언가를 견디게 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관계는 의미있는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작가가 팔 년째 함께 살고 있는 강아지 이름 또한 이시봉이라고 하는데, 초판 한정으로 받을 수 있는 포토카드로도 만날 수 있다. 작가의 사인 옆에 이시봉의 발도장도 함께 인쇄되어 있어 더욱 사랑스러운 책이다. 내 곁의 작고 소중한 존재들을 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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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오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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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내쉰 한숨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오전에 건넨 안부 문자에 답장이 없어 하릴없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시간이다. 무작정 책을 펼쳐보지만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다. 책 속의 주인공에게 도무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발버둥을 치는 시간이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어떤 시간의 밀도는 지나치게 높다. 밤이다. 그것도 아주 깊은 밤. 너무 깊어서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날 수 없는 밤. 진흙처럼 매시 매분 매초 달라붙는 밤.             p.52~53


어릴 때는 늘 일찍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제 시간에 잠들어야 한다고 믿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보기도 했고, 몰래 불을 켜고 놀다가 후다닥 잠든 척 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어두운 밤이라는 시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낮과는 또 다른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생겨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오직 깊고 캄캄한 밤이 줄 수 있는 마법 말이다.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처럼 마음속 어둠을 환히 비춰준다. 




'나를 위로해주는 말들은 대부분 속삭임'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편지에 쓰인 문장, 한두 줄의 문자 메시지조차 속삭이듯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이다. 읽는 게 아니라 깃드는 글, 듣는 게 아니라 흘러드는 말이란 어떤 걸까 궁금해졌다. 잠들기 전이면 부모님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떼를 쓰던 아이는 자라서 밤마다 속삭임을 찾아 책을 펼치는 어른이 되었다. 책장과 책장이 스칠 때 들려오는 속삭임, 책 속 등장인물이 하는 심상치 않은 속삭임 등... 오직 한밤중에만 가능한 말과 이야기들. 


밤바람, 밤바다, 밤공기, 밤경치, 밤마실, 밤하늘, 밤물, 밤안개, 밤물결... 밤이 전유한 단어들을 살펴보니, 밤은 액체와 기체 사이에 있는 것 같다고, 시인은 말한다. 흐르면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 같은  밤이라니... 시인의 문장들은 내가 알고 있던 밤을 아주 특별한 밤으로 변신시켜준다. 



"무슨 일 있어?" 묻고 나서 올려다본 친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왜 우는지 차마 물을 수도 없었다.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다문 입을 드디어 열고 밤길에 울음을 뱉고 있었던 것이다. 꺼이꺼이 울 때조차 혼자였던 것이다. 비로소 혼자여서 우는 사람이 있고 혼자라서 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혼자의 사연은 함께일 때 몸집을 키운다. 그를 따라서 어느새 나도 흐느끼고 있었다. 검디검은 밤, 흑과 흑이 만나 흑흑이 되고 있었다.               p.102


유희경 시인의 필사 에세이 <천천히 와> 그리고 오은 시인의 필사 에세이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함께 출간되어 '고요한 밤의 필사단'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올해 만났던 책 중에서 만듦새가 가장 예쁜 책이다. 사철제본에 표지를 아주 두툼하게 만들고 창문을 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와 내지 곳곳에 수록된 일러스트도 감각적이고, 종이를 묶은 실컬러까지 색상을 맞춰 얼마나 마음을 담아 만들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이다.


필사용 글들만 모아놓은 필사집과는 달리 책을 읽다가 멈춰 문장을 따라 쓰고,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에 단순한 따라 쓰기가 아닌 정서적 필사의 경험을 만들어 준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밤이라는 시간은 없던 감성도 불러 일으키는 이상한 힘이 있다. 밤에 나누었던 대화, 밤에 들었던 노래, 밤에 썼던 글들은 모두 다른 시간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정취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오은 시인이 밤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감각하며 써 내려간 감성적인 에세이와 시인의 문장을 따라 써볼 수 있는 필사 공간을 함께 수록했다. 이 책은 꼭 밤에 읽기를 권해주고 싶은데, '깊은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주는 신비스러움이 더해져 글을 읽고, 쓰는 내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괜찮다고 토닥여 줄 것이다. 


유희경 시인과 오은 시인은 각별한 우정을 나누어온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친구의 말’을 덧붙이며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에게 마음을 건네는 구조로 만들어져 더욱 특별하다. 유희경 시인의 <천천히 와>가 시처럼 읽히는 산문이라면, 오은 시인의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은 소설처럼 읽히는 산문이다. 각각의 글들이 짧은 소설처럼 서사를 가지고 있고, 여운이 남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무수한 밤의 시간들을 함께 견디게 해줄 친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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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나, 두 개의 세계에서
전혜진 지음 / 구픽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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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빼앗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우리들에게 친절해도, 그 친절에는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 물론 슈슬리사는 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새로운 기술을 가져다주었도,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와 어떤 정부도 해내지 못한 훌륭한 복지를 제공했다. 어떤 이유로든 특권층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가득했던 사람들은 지금의 세상에 만족하며,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p.58~59


외계인이 지구에 나타나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상상력은 대부분 SF영화나 소설을 통해서 만나온 외계인이라는 존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외계인이 지구를 박살내거나, 인간을 모두 노예로 삼거나, 인간을 식량자원으로 활용한다거나, 전쟁이 일어나거나, 혹은 외계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가 몰살당하는 그런 엔딩같은 거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상상력을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둥글둥글 알사탕 같은 외계인 함대가 하늘을 가득 뒤덮으며 나타난다. 하늘에 둥그런 우주선들이 잔뜩 떠 있는, 마치 택배 포장할 때 쓰던 뽁뽁이 비닐처럼 보이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한 달, 외계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사그러들고, 주가들이 곤두박질친 것 빼고는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는 일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외계인들이 지구에 온 이유는 뭘까. 외계 문명 슈슬리사는 지구인들에게 선언한다. 수많은 약자들이, 차별받고 굶주리고 폭력에 시달리고, 때로는 살 권리조차 보호받지 못한 채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지구의 문명을 발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억압받던 사람들이 자유로워지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청와대 자리에 외계인의 총독부, 일명 진화가속연구소가 들어선다. 앞으로 지구는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그래서, 정말 무엇이었을까. 바이블에 나오는 예언자, 선지자, 혹은 구세주였을까. 아니면 그저 외계인들의 과학이 빚어 낸 우연이었을까. 어느 쪽이라 해도 그 아이에게는 그동안 누구도 그런 말을 해 주었던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괜찮다고, 너의 선택이라고. 그 누구도 처음부터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도 깨달았다. 바로 그 아이를 만난 덕분에. 우리가 이곳에서 길 건너를 바라보던 지난 40년이, 아주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었으리라고, 부질없는 고집도, 시간낭비도 아니었다고.            p.245


외계인들은 지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존재들처럼 군다. 그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지구인들의 사상과 신체의 자유를 존중했으며, 모든 지구인은 평등하니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사회라니 말이다. 그렇게 지구는 진화 가속 기술 아래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다. 전쟁은 사라지고 기아와 환경파괴도 제어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 외계인들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가 낳은 어떤 정복자나 독재자보다도 관대했다. 아낌없이 선물을 풀어 주는 산타클로스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 출산이 아니라 진화 자궁에서 진보한 생명체를 태어나도록 했다. 마치 식물들 종자 개량하는 것과 같이. 덕분에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총명한 아이들이 태어났고, 사람들은 곧 그 시스템에도 익숙해진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아주 희박한 확률의 자연 출산을 통해 태어난 이사나는 이질적인 존재로 주목을 받는다. 이 작품은 이사나를 둘러싼 사회 속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통해 외계 문명이 지구에 도착한, 진화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280일>, <달의 뒷면을 걷다>, <규방에 미친 여자들>, <김밥천국 가는 날> 등의 다양한 장르를 선보여온 전혜진 작가의 신작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13년 전 네이버 <오늘의 문학>을 통해 발표한 후 단행본 『홍등의 골목』에 수록했던 ‘이시나’ 시리즈를 개작과 신작을 더해 처음으로 완결된 형태로 선보이는 것이다. 단편소설처럼 각기 다른 인물을 주인공으로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펼쳐지는 연작이다. 슈슬리사의 인공 자궁에서 사람이 태어나기 시작한 지 고작 15년 만에 사람들은 자연 출산으로 태어난 아이를 뭔가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존재인 듯 취급한다. 진화와 발전,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세계는 과연 진보된 사회가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시나라는 존재로 인해 생긴 윤리적 딜레마와 시스템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들어 준다. 여섯 편의 이야기는 외계인들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그들이 오고 나서 40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을 그려내고 있다. 외계 문명이 등장하는 ‘미래'이지만,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현실에 말을 딛고 있는 이야기라 어쩌면 근미래의 우리가 마주하게 될 세계가 아닐까 싶기도 했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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