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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오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아침에 내쉰 한숨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오전에 건넨 안부 문자에 답장이 없어 하릴없이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는 시간이다. 무작정 책을 펼쳐보지만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이다. 책 속의 주인공에게 도무지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는 시간이다. 베개에 고개를 처박고 발버둥을 치는 시간이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어떤 시간의 밀도는 지나치게 높다. 밤이다. 그것도 아주 깊은 밤. 너무 깊어서 한 번 빠지면 쉽게 헤어날 수 없는 밤. 진흙처럼 매시 매분 매초 달라붙는 밤. p.52~53
어릴 때는 늘 일찍 잠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제 시간에 잠들어야 한다고 믿는 부모님의 눈을 피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책을 보기도 했고, 몰래 불을 켜고 놀다가 후다닥 잠든 척 하기도 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아마도 어두운 밤이라는 시간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낮과는 또 다른 뭔가 비밀스러운 일이 생겨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오직 깊고 캄캄한 밤이 줄 수 있는 마법 말이다.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모두가 잠든 어두운 밤, 홀로 불을 밝히고 있는 가로등처럼 마음속 어둠을 환히 비춰준다.

'나를 위로해주는 말들은 대부분 속삭임'이었다고, 시인은 말한다. 편지에 쓰인 문장, 한두 줄의 문자 메시지조차 속삭이듯 다가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이다. 읽는 게 아니라 깃드는 글, 듣는 게 아니라 흘러드는 말이란 어떤 걸까 궁금해졌다. 잠들기 전이면 부모님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떼를 쓰던 아이는 자라서 밤마다 속삭임을 찾아 책을 펼치는 어른이 되었다. 책장과 책장이 스칠 때 들려오는 속삭임, 책 속 등장인물이 하는 심상치 않은 속삭임 등... 오직 한밤중에만 가능한 말과 이야기들.
밤바람, 밤바다, 밤공기, 밤경치, 밤마실, 밤하늘, 밤물, 밤안개, 밤물결... 밤이 전유한 단어들을 살펴보니, 밤은 액체와 기체 사이에 있는 것 같다고, 시인은 말한다. 흐르면서 서서히 퍼져 나가는 것 같은 밤이라니... 시인의 문장들은 내가 알고 있던 밤을 아주 특별한 밤으로 변신시켜준다.

"무슨 일 있어?" 묻고 나서 올려다본 친구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왜 우는지 차마 물을 수도 없었다. 온몸으로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다문 입을 드디어 열고 밤길에 울음을 뱉고 있었던 것이다. 꺼이꺼이 울 때조차 혼자였던 것이다. 비로소 혼자여서 우는 사람이 있고 혼자라서 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다. 혼자의 사연은 함께일 때 몸집을 키운다. 그를 따라서 어느새 나도 흐느끼고 있었다. 검디검은 밤, 흑과 흑이 만나 흑흑이 되고 있었다. p.102
유희경 시인의 필사 에세이 <천천히 와> 그리고 오은 시인의 필사 에세이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이 함께 출간되어 '고요한 밤의 필사단'으로 만나보게 되었다. 올해 만났던 책 중에서 만듦새가 가장 예쁜 책이다. 사철제본에 표지를 아주 두툼하게 만들고 창문을 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이미지와 내지 곳곳에 수록된 일러스트도 감각적이고, 종이를 묶은 실컬러까지 색상을 맞춰 얼마나 마음을 담아 만들었는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름다운 책이다.
필사용 글들만 모아놓은 필사집과는 달리 책을 읽다가 멈춰 문장을 따라 쓰고, 곱씹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에 단순한 따라 쓰기가 아닌 정서적 필사의 경험을 만들어 준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밤이라는 시간은 없던 감성도 불러 일으키는 이상한 힘이 있다. 밤에 나누었던 대화, 밤에 들었던 노래, 밤에 썼던 글들은 모두 다른 시간대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정취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오은 시인이 밤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감각하며 써 내려간 감성적인 에세이와 시인의 문장을 따라 써볼 수 있는 필사 공간을 함께 수록했다. 이 책은 꼭 밤에 읽기를 권해주고 싶은데, '깊은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주는 신비스러움이 더해져 글을 읽고, 쓰는 내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괜찮다고 토닥여 줄 것이다.
유희경 시인과 오은 시인은 각별한 우정을 나누어온 오랜 친구 사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을 드러낸 ‘친구의 말’을 덧붙이며 한 권의 책이 다른 한 권에게 마음을 건네는 구조로 만들어져 더욱 특별하다. 유희경 시인의 <천천히 와>가 시처럼 읽히는 산문이라면, 오은 시인의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은 소설처럼 읽히는 산문이다. 각각의 글들이 짧은 소설처럼 서사를 가지고 있고, 여운이 남는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앞에 놓여진 무수한 밤의 시간들을 함께 견디게 해줄 친구가 필요한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