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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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름을 삼킨 소녀>에서 열다섯 주인공 셰리든은 강간, 낙태에다 우발적인 살인까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은 모두 맞닥뜨렸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싶은 것들을 겪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삶은 과연 이제 평탄해졌을까. 그러나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는 그녀가 전편에서 마주해야 했던 그 모든 일들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잔인하고, 더 충격적이고, 더 혼란스러운. 사실 전작을 읽었을 때만 해도 엔딩 장면 이후 더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농장을 떠난 셰리든에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랬나? 내가 그를 믿은 건가? 그래, 그랬다. 내가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될 학교의 심리상담사인 패트릭 매커보이 박사는 객관적인 사람이다. 친절하고 싹싹했으며 이해심이 많았고 잘생겼다. 그것도 아주 미남이다. 그의 아내는 지금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고,이 집에는 그와 나뿐이다. 내가 안긴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에게 키스할까? 나와 잘까? 아니면 유혹을 물리치고 나를 밀어낼까? 이런 상상을 하니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나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꼬았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남자가 친절하게 대하거나 보호해주거나 위로해주면 나는 왜 곧장 섹스를 떠올리는 걸까? 내가 비정상인가? 시드니가 퍼부었던 욕설이 떠오르면서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불에 덴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열다섯 그 해 여름, 셰리든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고, 스스로가 어른인 줄 알았는데, 그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전작에선 엄마였던) 레이첼 이모가 벌을 줄 때도 고집을 부리며 불손하고 반항적으로 대응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 일쑤였던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사실 열다섯 이라는 나이에는 걸맞지 않게 문란한 애정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3주 동안 거의 매일 섹스를 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도, 단 세 시간 만에 잘생긴 카우보이를 만나 다시 몸이 달아올랐고, 남자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어도 섹스부터 생각하는 구제불능이었다. 거기다 친 오빠에게 하마터면 성폭행을 당할 뻔하고, 자신의 선생인 사람은 한때 그녀의 정부였고, 변태 경찰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첫사랑은 떠났고, 부모님은 그녀를 속였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는 그녀를 이용했다. 점입가경으로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고, 한 남자와 아기를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스스로 이런 죄를 지었으니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셰리든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였다. 열 여덟 살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믿었던 거다. 여긴 완전히 지옥이었으니,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지루한 농부들의 땅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셰리든의 삶은 과연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내가 예전에 거짓말을 많이 하고 숨기는 것이 많았던 이유는 어쩌면 레이첼 이모가 유도질문의 대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들에서 처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작은 거짓말이 고통과 언짢은 일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릴 때 깨달았다. 물론 처음에는 오로지 자기방어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을 테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이 생존전략이 되고, 결국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반응이 됐다.

, 그리고 이년 뒤, 열일곱이 된 셰리든의 삶이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 그려진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무시무시하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고용한 농장에서 엄청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려 다섯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셰리든은 마침 그날 집을 떠난 참이어서 무서운 비극에서 희생되지 않았다. 그녀는 전작에서 밝혀진 그 진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신을 괴롭히는 에스라 오빠에게 현재의 연인인 목사 호레이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기에 호레이쇼를 위해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거였다. 결국 그녀는 모텔에서 에스라 오빠가 가족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참극의 목적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절망에 휩싸인다. 레이첼 이모는 언론을 통해 셰리든을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인 것처럼 떠벌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의붓 오빠들을 유혹한 배은망덕한 입양아로 알고 증오와 의심 섞인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한다. 거기다 셰리든은 레이첼 이모가 자신의 시부모님을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상태로 다시 고향으로부터 벗어나려 도망치게 된다.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들 역시 만만치가 않다. 대체 이 소녀에게 어디까지의 시련과 고뇌를 줄 것인지 작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가는 곳마다 겪게 되는 것들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셰리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 지독한 여름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불쑥 깨운 꿈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폴 서튼이 생각났다. 꿈속에서 그에게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자 내 몸이 욕망에 떨리기 시작해서 금방 부끄러워졌다. 빌어먹을,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난 왜 실수에서 배우는 게 없을까? 사랑 받으려는 내 갈망은 지금까지 걱정거리만 안겨줬다. 하지만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어떻게 발견한단 말인가? 실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겁쟁이라서 비참한 노파로 늙어갈 건가? 아니,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숨어 지내기 싫었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아가고 사랑 받고 싶었다!

전작에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과 거침없는 사랑을 벌이는 모습에서 셰리든에게 공감하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그녀의 삶에 닥치는 풍파를 같이 느끼면서 보니 점점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셰리든에게 걱정에 대해 이야기할 자매나 친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삶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매번 모든 상황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 받고 싶었을 뿐인 10대 소녀에게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은 그녀를 결코 평범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대체 그녀의 삶에 해피 엔딩이 오긴 올까. 마음이 아팠다. 사실 전작인 <여름을 삼킨 소녀>는 넬레 노이하우스 답지 않게 '소녀의 성장 소설'이라 지루하다는 평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어도 될 것 같다. 첫 장면부터 파격적인 스토리로 시선을 잡아 끌어,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역시 넬레 노이하우스! 라는 생각부터 들테니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전작인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이 이야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자면, 이번 신작 <끝나지 않는 여름>을 먼저 읽고 나서, 플래시백으로 주인공의 과거를 만나는 느낌으로 <여름을 삼킨 소녀>를 만난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작품의 강도가 훨씬 세고, 스토리도 더 다이나믹해서 몰입도가 좋은데다, 그렇게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면 대체 이 소녀가 그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인지 자연스레 궁금해지기 때문에 바로 그 때 그녀의 과거를 만나보면 가독성 면에서 금상첨화라는 거다. 사실 전편은 다소 루즈하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순서를 바꿔서 읽으면 그런 부분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한 순간에 훅 읽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넬레 노이하우스라는 작가가 추리 소설만 잘 쓰는 게 아니구나 싶은 감탄을 새삼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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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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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텔 프런트 직원이 총에 맞아 죽고, 객실에 있던 여자는 강간의 흔적과 함께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용의자는 여자와 함께 체크인 했던 남자로 경찰은 지문감식을 통해 그의 신원을 파악해 조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집에는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건 외에는 없었고, 그가 누구인지 알만한 단서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소속된 회사도 유령회사에, 그가 졸업한 걸로 확인되는 대학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고, 초등학교건, 보건 기록이든 그에 관한 기록은 모두 찾을 수 없었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드는 의문, 대체 이 남자 정체가 뭐야?

그의 이름은 게이지 하트라인이다. 물론 본명은 아니다. 그는 미 육군에 입대해 훈련을 수석으로 마친 후 초고속으로 진급해 특수부대 후보생으로 차출되었고,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으로 보스니아에서 포격으로 인해 전사한 걸로 확인된다. 당연히, 이것은 기록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살짝 평균 키 이상에 체격 좋고 100킬로 조금 안 되는 몸무게. 머리는 연한 갈색에 짧고, 새치 조금 도는 턱수염이 덥수룩해. 독일어 완벽하고 미국식 영어하고."

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게이지 하트라인을 이보다 완벽하게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게이지는 누가 보더라도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옷차림도 평범했고, 근육질의 체격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며,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걸었고, 혹시라도 걷다가 남과 어깨라도 스치면 예의 바르게 죄송하다고 인사하는 사람이었으며, 여자를 위해서 언제나 문을 열어 주었고, 수작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남의 일에 개입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관심 있게 자세히 본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정글과 사막에서 입은 자잘한 상처로 얼룩진 크고 강한 손, 벙벙한 옷 밑으로 감춰져 있는 철저하게 가꾼 강인한 몸, 근육으로 꽉 들어차서 날렵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체격은 그를 절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게이지의 겉모습만으로는 그의 과거를 아무도 짐작할 수 없거니와, 그 자신에게도 과거란 필사적이고, 절대적으로 감추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조금씩 드러나는 그의 과거는, 현재의 그가 벌이는 행동에 어떤 실체를 부여해 점점 하나의 뚜렷한 캐릭터를 구축해나간다. 과거 최정예 요원으로 선발되기 위해 그가 받은 무시무시한 훈련들과 그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그 사건 이후 철저히 혼자로서 살아온 삶의 흔적들 또한 모두 현재의 그를 더 비밀스럽게, 더 매혹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한다. 그는 과거의 그 사건 이후 더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자신의 기술을 비폭력적인 일에만 동원해 피를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다. 이번 사건에 휘말리기 전에는 말이다.

이 일기장들은 안네 프랑크 이래 가장 엄청나고 가장 스펙터클한 문학적 발견이라고 전하심 돼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어 말했다. "아니다.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능가할 거요. 영화, 부수적 저작물과 연구는 물론이고 수 개월간, 수주가 아니라 수 개월간, 밤마다 뉴스 방송에 오르내릴 겁니다. 20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인물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릴 만한 파격적인 일기장이라고요.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이지를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만드는 시발점은 바로 프랑스 정보부의 의뢰를 수행하던 중에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남긴 일기장을 발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게다가 그 일기장 속 여인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아이를 임신하고, 그에게 학대당했던 여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히틀러가 유대인인 사생아를 남겼다니, 세계 역사가 놀랄 만한 일이 아닌가. 사실 히틀러는 정치적인 이유로 생전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염문설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반 자살한 그의 연인과 죽기 전 결혼 서약을 함으로써 공식적인 아내로 기록되긴 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자식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대한 진위 여부는 물론,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자식을 남긴 적이 없던 그의 자손이 생존해 있다는 주장과 자신이 히틀러와 연인 관계였고 그의 자식을 낳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기에, 척 드리스켈은 바로 그런 역사의 미스터리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소재를 전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면에 숨겨진 충격적인 진실의 폭로만큼이나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다. 아니 대체, 안네의 일기를 넘어선 놀라운 기록이라고 여겨지는 그것보다 더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바로 척 드리스켈의 진정한 한 방이다. 이렇게 엄청난 폭탄을 초반부터 빵하고 터트려놓고선, 정작 시종일관 작품에 몰입도를 주는 것은 다른 지점이다. 물론 그건 당신이 직접 이 책을 읽어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면, 게이지가 공개되면 전 세계 역사를 다시 써야 할 만큼 충격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일기장의 존재에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에게 바로 그 일을 맡겼던 장은 그가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걸 알아 차리고 그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한편, 게이지는 일기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선 그것의 가치를 알아 보기 위해 중고 서점을 운영중인 연인 모니카의 사촌오빠 미셸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재정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미셸이 일기장을 팔아 보려고 하다 프랑스 마피아와 마찰이 생긴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질의 프랑스 마피아 두목 '니키'와 그 일당들, 그리고 프랑스로 휴가를 왔다 우연찮게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된 미 육군 대위 데미안 엘리스는, 그리고 독일 경찰과 프랑스 경찰, 미국의 정보부원들까지. 각자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 복잡하게 얽힌 관계가 게이지 하트라인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엮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종횡무진 각국을 누비며 시종일관 쫓고 쫓기는 자의 긴장을 격렬한 박동으로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킨다. 어떻게든 자신을 쫓는 이들로부터 일기장을 지켜내어 기록 속에 있는 히틀러의 자손에게 일기장을 돌려주려하는 게이지의 신념은 결국 엄청난 것을 희생하게 만드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이 작품은 첩보 액션 장르만의 명쾌한 스릴과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극강의 재미를 통해 완벽하게 엔터테인먼트 적인 역할을 수행해낸다. 사실 우리가 소설을 읽는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바로 재미, 오락으로서의 목적이 아니던가. 그 누구도 공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단지 교훈을 얻기 위해 재미없고 지루한 소설을 읽으려 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정말 '끝장나게' 재미있다.

"저도 압니다. 제 잘못이 없었다는 거 압니다. 대령님 잘못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나쁜 일들은 생기기 마련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좋은 일을 해서 나쁜 일을 상계시켜야죠.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도록 할 수는 있을 겁니다."

, 여기서 대중들이 사랑하는 수많은 첩보 영화들을 잠시 떠올려 보자.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나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에단 헌트. 이들은 모두 넔을 잃을 만큼 재미있는 최상급 대중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 속엔 잘 만들어진 시리즈물 만이 창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중심에 있다.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에 박력 넘치는 액션이 시종 꼬리를 무는 탁월한 오락영화가 첩보 액션 장르의 걸작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탁월한 영화적 테크닉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인물의 힘이다. 나는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를 제임스 본 시리즈와 비교해보고 싶은데, 이유는 바로 제이슨 본이 마치 살인병기로 만들어진 것처럼 탄탄한 액션을 선보이지만, 인정 앞에선 흔들리는 킬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인을 죽인 킬러를 만난 그는 그녀가 살인을 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한다. 그가 진실한 마음과 도덕성을 지닌 캐릭터이기에, 언제나 그를 위기에 몰아넣는 요인 또한 바로 그 도덕성인 것이다. 그는 살인을 멈추고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폭력만을 행사하고자 한다. 그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있는 암살 대상자를 죽이지 못해 총상을 입은 채로 바다로 뛰어들고, 우연히 암살 대상자와 같이 있었기에 죽여야만 했던 여인에게, 기억을 잃은 다음에조차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사려깊은 킬러란, 매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게이지 하트라인은 과거 군 작전 수행 시 뜻하지 않은 실수로 민간인 아이들을 죽게 한 이후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는 단 한 명도 죽인 적이 없으며, 자신의 기술을 폭력적인 일에만 동원했고, 피를 볼 가능성이 있는 일은 무조건 피했다. 당장 월세와 생활비가 궁한 처지라 각국 정보부에서 청탁하는 비폭력적인 업무만을 싼값에 의뢰 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살인 용의자로 오해 받아 쫓기고 있는 와중에도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필요한 정보를 취하기 위해서 호텔 직원을 잠시 기절만 시키고, 자신을 추적한 경찰관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에도 그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의 인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그 순간이기도 했는데, 게이지를 쫓다가 오히려 그에게 경찰 재킷을 빼앗기고 포박당한 경찰은 그 긴장되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게이지가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있으면 해치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왠지 믿음이 갔던 것이다. 게이지에게서 어떤 악의도 발견하지 못했고, 폭력적인 상황에서 조차 상대에게 예의를 다하는 진심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과거 군에서 요원으로 복무했을 때의 평가 역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나무랄 데 없는 정직함과 성실함' '직업 군인의 표상' '뛰어난 지성과 논리적 사고력' 그와 함께 일을 했던 상관들은 모두 그에게 빛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정도까지만 보더라도, 게이지 하트라인 역을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맷 데이먼의 제이슨 본만큼 완벽한 캐릭터가 탄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연스레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그레타의 일기>는 판권이 팔려 영화로도 제작 중이라고 하니 말이다.

게이지는 자리에 기대어 모니카의 음성으로 그녀가 일기 내용을 전해주는 소리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였다. 그레타와 모니카. 비극적인 영혼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찢긴 여인들.

손으로 어깨를 문질렀다. 어깨 위에 숨겨 놓은 정의의 여신 테미스의 문신 위에 손을 가만히 올려 뒀다.

쓰다 보니 리뷰가 좀 많이 길어졌지만, 사실 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다 끌어온다고 해도 이 작품의 재미를 내가 글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별점 다섯 개의 곱배기를 준다고 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는 것만은 장담한다. 그리고 아마도 게이지 하트라인이 리 차일드의 잭 리처나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존 코널리의 찰리 파커, 켄 브루언의 잭 테일러,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 등의 매력적인 캐릭터 만큼이나 오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거란 것도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올해 초부터 5월 초까지 읽은 책이 86권이다. 그 중에는 헤닝 만켈, 이언 랜킨, 할런 코벤, 마이클 로보텀, 데니스 루헤인, 찬호께이, 프레드 바르가스, 요 네스뵈, 넬레 노이하우스까지 스릴러 분야에서 '재미'하면 절대 빠지지 않는 작가들의 작품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도 난 이 작품을 내가 올해 읽은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고 싶다. 척 드리스켈이라는 다소 낯선 작가의 데뷔작이자 현재 시리즈가 4권 출간되어 있는 게이지 하트라인의 첫 번째 이야기인 <그레타의 일기>는 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서 정말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한 부분이 없었으니 말이다. 순수하게 '재미' '스릴'을 줄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작품을 찾고 있다면, 당신에게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시리즈로서 작품의 주인공이 가져야 할 매력과 비밀스런 배경, 그리고 방대한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배치하는 구성과 호흡, 영화와도 같은 장면 전환과 상상도 못했던 거대한 맥거핀 효과에다 수많은 인물들의 욕망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내는 무시무시한 지옥도까지 이 작품의 장점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게다가 올해 안에 게이지 하트라인 두 번째 시리즈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당신이 스릴러 분야의 책을 사랑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참고로, 다가오는 7월에, 무려 9년 만에 맷 데이면이 새로운 본 시리즈로 돌아오지 않나.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영화 <제이슨 본>과 관련된 마케팅을 펼쳐 <그레타의 일기>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 알려졌으면 하는데, 어려울래나. 하긴 이 작품 또한 영화화 될 예정이라 현실적으로는 무리한 바램일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딱 본 시리즈만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그만큼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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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탐정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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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짙은 빨간색 운동복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린이 교통안전용 노란 우산을 든 소년이 허름한 탐정사무소를 찾아 온다. 어린 소년을 보며 사와자키가 맨 처음 한 생각은 이거다. 열두 살 미만 어린이가 탐정을 고용할 수 있을까? 혹은 그런 어린이 앞으로 발행한 탐정 비용 청구서가 정당한 것일까? 의뢰를 하겠다며 탐정 사무소를 찾은 열살 소년도, 그런 아이를 보며 당황스러워하는 탐정도, 모두 어딘가 평범하지 만은 않은 상황이다. 과연 소년은 무슨 일로 이곳을 찾은 것이며, 사와자키는 과연 열 살 꼬맹이에게 고용 당하는 탐정이 될 것인가. 이번 작품집은 시작부터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돈은 있어요. 그 사람을 내일 아침까지 지켜주는 데 얼마나 들죠? 여기 오만 엔이 있는데 모자라면....."

"잠깐만, 꼬마야." 내가 말했다. "다시는 돈 이야기 꺼내지 마. 난 너 같은 꼬마에게 고용되고 싶지 않아. 또 돈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문밖으로 쫓아낼 거야. 알겠니?

소년이 흠칫 놀라 수건을 떨어뜨리더니 얼른 집어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어린이인 네가 어른인 나한테 도움을 받고픈 일이 있는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나보다 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 또는 경찰이 너를 더 잘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쪽으로 넘길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소년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짓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모두 사악하지는 않듯 어린이라고 다 정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과작 작가로 유명한 하라 료의 작품답게 국내 출간도 매번 엄청난 기다림을 동반하는 것 같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 썼고, 사와자키 시리즈도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가는데 6년이 걸렸으며, 네 번째로 가는 데는 4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즐기려면 기다림과 인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출간되는 그의 작품도 역시나 그랬는데,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내가 죽인 소녀>에 이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를 만나는데도 무려 4년이나 걸렸고, 그 이후 또 3년이 다 되어서야 다음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 이 작품이 출시된 것은 <내가 죽인 소녀> <안녕, 긴 잠이여> 사이였고, 사와자키 시리즈 유일의 단편집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단편'집이라는 거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기존에 사와자키 시리즈를 한 권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 것이다. 하라 료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어떠했는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지난 세 번째 시리즈에서는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였다. 대체 의뢰인은 언제 나오는 거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가 되어서야 등장해서는, 그제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미스터리라니. 그러니 하라 료의 작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인내, 또 인내가 필요하다는데 다들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단편'이라니. 이건 뭐 전체 스토리 자체의 분량이 작으니 애초에 이야기의 호흡이 길어질래야 길어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번 작품집을 읽기도 전부터 신이 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볍게, 마음 편하게 하라 료를 만날 수 있겠다는 설레임 때문에 말이다.

".........세상에는 무보수라도 배워야 하는 일이 있겠지만 탐정 일은 그게 아니라는 건 내가 보증하마."

슌이치는 내 위악적인 말투에 미소를 지었지만 이윽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아저씨가 진심으로 자기 일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는 믿지 않아요. 탐정이라는 일은 훨씬 남자다운 삶이랄까,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그런 것에 깊이 뿌리를 내린..... 뭐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이 믿는 것에 확신을 갖고......"

"어디서 그런 어설픈 소리를 배워왔니? 탐정은 그냥 직업이야. 뭔가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그런 직업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그런 직업이라는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지."

이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에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고 있다. 다짜고짜 한 여인의 경호를 부탁하는 열 살짜리 소년부터, 자신의 친부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는 열여덟 소년, 자살하려는 유명 아이돌 여가수,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아버지를 미행하는 고등학생 딸 등...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다. 하지만 사와자키는 그들을 어린애로만 취급하지 않고, 언제나 어른과 대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성의 있게 대해준다. 어린애한테 고용 당하고 싶지는 않다며 뒤에서 투덜대긴 해도 말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 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장편에서만 빛을 발하는 줄 알았더니 단편에서도 독특한 아우마를 뿜어 내고 있다. 다소 무덤덤해 보이는 행동, 툭툭 뱉어내는 시크한 말투,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도 무모하게 용기 있고, 손익을 계산해서 자신만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하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드보일드'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이 아니라 '풍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논리적인 사고보다 인생관에 대한 사색을 중시하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예리함으로 기지가 번뜩이고, 트릭이나 의외성보다는 분위기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립탐정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어디선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진짜 보일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사와자키는 십대 아이들 곁에서 옆집 아저씨 같은 탐정으로 등장하더라도, ...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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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 살인 아르테 누아르
카밀라 그레베 지음, 서효령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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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이 살해된 채 발견된다. 사인은 목에 수업이 가해진 구타였고, 머리는 몸에서 잘려 현관을 향해 바닥에 세워진 상태였다. 피해자의 신원은 쉽게 밝혀지지 않고,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 또한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다. 용의자로 지목된 남자는 의류 회사의 논란 많은 CEO로 미디어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연예인과도 같은 유명인사이다. 여자가 끊이질 않았던 악명 높은 바람둥이인 그가 과연 범인이었을까. 게다가 이 사건은 10년 전에 있었던 살인 사건과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유사한 부분이 많다. 스웨덴 범죄 역사상 가장 대대적으로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어떤 복수가 공정한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난 망가질 것이다. 내 몸 전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에스페르 오레와 같은 남자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공과 돈, 여자,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예스페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동일하게 보복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가 내 집에 몰래 들어와 내 물건과 반려동물을 훔쳐갔다. 그는 내게서 직업과 돈, 아기를 빼앗아갔다. 하지만 올가가 옳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그에게 같은 짓을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화자는 모두 세 명이다. 각각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교차 진행되는데, 두 명은 현재, 한 명은 두 달 전에서 시작해 점점 현재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현재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두 인물과 그 사건의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르겠지만 연관이 있어 보이는 누군가의 과거 행적이 함께 진행된다는 건데 덕분에 이야기는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페이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흘러간다.

우선 강력계 형사인 페데르, 그는 일반적인 형사 캐릭터에 비해 성격이 좀 특이하다. 15년 전 사랑했던 야네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지만, 그는 부모로서의 책임도, 남편으로서의 의무도 회피한 채 여전히 혼자 지내고 있다. 아이는 엄마와 살고 있고, 그와는 일년에 한 두 번 만나는 정도로, 그는 스스로 여전히 부모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한네는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지배적인 남편 오베에게 질려서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심리학자였던 그녀는 10년 전만 해도 경찰들과 업무를 협조해서 범죄 수사를 함께 했었다. 한때 페데르와 사랑에 빠졌었고, 그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바로 10년 전에 그녀가 담당했던 사건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2개월 전, 클로즈 앤드 모어에서 점원으로 근무 중인 엠마는 회사 대표인 예스페르 오레와 비밀 연애를 하는 중이다. 그녀는 이모에게 물려받은 집과 재산으로 여유 있게 사는 편이었고, 알콜 중독이었던 엄마와의 불행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약혼 기념 식사를 하기로 한 어느 날 저녁, 아무런 연락도 없이 예스페르가 그녀의 집에 오지 않는다. 그렇게 그에게서 갑작스럽게 소식이 끊기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집에서 중요한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그 소녀에게 벌어질지 알 것 같았다. 아이는 오늘밤 얼어 죽거나 어딘가에 숨겨질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면 아이를 다시는 찾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엠마에게 다가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내게 남은 목숨이란 게 어떤 건가? 이 수사가 끝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 남겠는가?

북유럽 스릴러 하면 그 독특한 분위기와 배경 때문인지 덮어놓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카밀라 그레베가 출판사의 소개 문구처럼 요 네스뵈와 헤닝 만켈을 뛰어넘는 작가인지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더 만나봐야 하겠지만, 이 작품이 매우 흥미로운 것은 분명하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캐릭터와 구성인데, 중심 인물 세 명은 여타의 스릴러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비해 굉장히 복잡하다. 그것도 심리학적으로, 그리고 내면적으로 말이다. 스릴러에서 '배경적'으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복잡한 인물을 선택하는 경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범인이든, 형사든 대부분 환경적인 요소에서 현재의 수사나 성격에 영향을 받게끔 설정하는 것이 현재의 플롯을 진행시키는데 유리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사실 사건 수사 자체보다 각각의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시선을 잡아 끌고 있다.

그리고 세 명의 인물에게 저마다의 시점과 목소리를 부여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방식은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속에서 어느 순간 교집합이 되며 마주하게 되는 극강의 충격과 반전의 힘이 대단하다. 사실 작가가 중간 중간 복선과 단서를 잘 설정해두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 대부분 짐작할 것이다. 화자의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뭔가 이상한데? 라고 말이다. 그렇게 조금씩 싹트는 의심들이 쌓여 산처럼 높아져서 직면하게 되는 현실은 매우 끔찍하기도 하고, 소름 끼치기도 한다. 내가 역대 급 캐릭터한테 홀딱 넘어가 속았구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다시 쓰이기 때문이다. 카밀라 그레베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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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전이의 살인 스토리콜렉터 42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말썽꾸러기에 성적이 바닥인 남학생과 세침 떼기에 모범생인 여학생이 서로 몸이 바뀌게 되면서 벌어지는 헤프닝을 그렸던 영화 <체인지>, 그리고 무술감독을 꿈꾸는 스턴트 우먼 길라임과 '까칠한' 백만장자 백화점 사장 김주원의 영혼이 바뀌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시크릿 가든>까지.. 그 동안 내가 보아왔던 작품에서 영혼 체인지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판타지' 였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성별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판이하게 다른 두 남녀가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직접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완전한 상대방이 되어 그가 매일 느끼는 고민과 생각과 환경을 전부 체험해보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판타지를 통해서 영혼과 몸이 바뀌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두 사람을 세워 놓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 사랑이란 이런 거라고.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러한 판타지를 빌리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렇게 로맨틱한 판타지로 읽어 낼 수도 있는 그것을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SF 미스터리, 본격 추리물로 그려내고 있다. 사실 몸을 놔두고 인격이 바뀐다는 것만 보자면, 무시무시한 이야기이기도 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 사이에서 서로서로 교체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아주 공포 영화가 따로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A라는 백인과 B라는 흑인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문제의 '체임버'에 들어간다. 그러면 A B는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동으로 '스플릿 스크린'이라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 같은 것에 막혀 방 안쪽과 입구 쪽으로 갈라진다.

갈라졌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의 인격이 바뀌어 있다. , A라는 백인 육체에는 B라는 흑인의 '정신'이 들어가 있고, 반대로 B라는 흑인의 몸에는 A라는 백인의 '정신'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격이 육체를 떠나 전이하는 현상을 매우 과학적으로 설명하면서 배경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놓고는, 한정된 공간에서 제한된 사람들이 서로의 인격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밀실 속 연쇄살인으로 매우 흥미로운 본격 미스터리를 선보이고 있다.

마치 옷을 갈아입듯이 하나의 인격이 각각 다른 육체에 잇달아 옮겨지고, 인간이 이 기능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면 어떨까. 좋은 방향으로 이용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지겠지만, 악용한다면 그렇게 무시무시한 무기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매스커레이드' 현상이라고 이름 붙인 이것은 인격 교환 시작되면, 피험자 중에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교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게다가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지 그 주기와 법칙성 또한 밝혀지지 않았으니, 피험자들 사이에는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매스커레이드가 평생 따라다닌다는 말이다. 게다가 한쪽 피험자의 육체가 사망한 경우, 그와 동시에 사멸하는 것은 그쪽 육체에 들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의 것이 아닌 정신이 들어 있는 상태에서 죽게 되면 남은 피험자는 평생 다른 사람인 채로 여생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인격이라는 게 일단 실체화되지 않는 한 그것을 교환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하지만 자네의 말을 듣고 의문이 생겼지. 물론 실체화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의 그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를 수도 있어. 하지만 전이 과정으로 실체화되는 것이라면 눈에 보일 수 있지 않나, 하는 자네의 지적으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났지. , 어쩌면 형이상학적인 상태로 인격이 전이될지도 모른다고. 아니, 애초에 '교환'이나 '전이'같은 발상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이 들기 시작했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실체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설마 교환이나 전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말은 아니겠죠? 실제로 이렇게....."

캘리포니아의 조그만 햄버거 가게에 우연히 손님으로 모이게 된 7명의 남녀는 갑작스런 지진으로 가게에 있던 셀터로 대피하게 되는데, 사실 그곳은 사람의 인격을 교체하는 매스커레이드 현상을 연구하는 연구 시설이었다. 성격도, 성별도, 국적도 너무도 다른 7명의 남녀.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 미국으로 날아온 일본인 토마 에리오, 할리우드 배우 지망생인 미모의 여성 재클린, 가게의 유일한 종업원인 우락부락한 흑인 바비, 프랑스와 일본인 남녀 커플 알랭과 아야, 대머리 마초 스타일의 미국인 랜디, 아랍계 외국인 유학생 하니. 그들의 인격은 서로에게 교체되고, 앉아 있는 순서대로 인격전이가 순차적으로 계속 교체된다. 치료 방법은 없고, 매스커레이드는 평생 반복되는데, 모두 살아 있는 한 아무도 이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물론 인격 전이가 끝없이 반복되다 육체와 정신이 일치하는 순간에, 나머지 6명이 그 상태 그대로 죽는다면 마지막 1명은 이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침 다른 사람들이 죽은 시점에서 자신의 마음이 원래 자기 몸에 들어가 있을 확률은 상당히 낮기 때문에, 그들이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란 없어 보인다.

탈출 할 수 없는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체험을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 이들 사이에서는 급기야 누군가 누군가를 죽이는 연쇄살인이 벌어지는데... 그 누구도 범인을 섣불리 추리할 수 없는 것은 계속해서 인격전이 현상이 예고도 없이 뒤죽박죽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반 쯤 가면 누가 누구인지 독자들까지 막 헷갈리게 되는데, 그래서 인물들의 인격전이를 수첩에 정리하면서 읽을 수 있도록 사은품으로 예쁜 수첩을 주고 있다. 하지만 잘 집중만 한다면 사실 메모를 하지 않고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이야기에 오롯이 집중해야만 하지만 말이다. 대체 누가 누구를 죽인 건지에 대한 반전의 추리 속에 마지막에 살아남게 되는 생존자와 드러나는 범인에 대한 추리만큼이나 로맨틱하기까지 해서 거짓말 같은 엔딩의 재미 또한 매우 흥미진진하다. 전작에서도 느꼈지만 역시 니시자와 야스히코는 평범한 소재도 특별하게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이나 영화 <체인지>보다는 훨씬 복잡하고 어렵지만, 그들에게선 만날 수 없었던 특별한 플롯과 뭉클한 엔딩이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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