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여름을 삼킨 소녀>에서 열다섯 주인공 셰리든은 강간, 낙태에다 우발적인 살인까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은 모두 맞닥뜨렸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싶은 것들을 겪어야 했던 어린 소녀의 삶은 과연 이제 평탄해졌을까. 그러나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는 그녀가 전편에서 마주해야 했던 그 모든 일들보다 더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잔인하고, 더 충격적이고, 더 혼란스러운. 사실 전작을 읽었을 때만 해도 엔딩 장면 이후 더 이야기가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농장을 떠난 셰리든에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랬나? 내가 그를 믿은 건가? 그래, 그랬다. 내가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게 될 학교의 심리상담사인 패트릭 매커보이 박사는 객관적인 사람이다. 친절하고 싹싹했으며 이해심이 많았고 잘생겼다. 그것도 아주 미남이다. 그의 아내는 지금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고,이 집에는 그와 나뿐이다. 내가 안긴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할까? 나에게 키스할까? 나와 잘까? 아니면 유혹을 물리치고 나를 밀어낼까? 이런 상상을 하니 심장이 두방망이질했다. 나는 시선을 떨어뜨리고 손가락을 꼬았다. 이런 생각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남자가 친절하게 대하거나 보호해주거나 위로해주면 나는 왜 곧장 섹스를 떠올리는 걸까? 내가 비정상인가? 시드니가 퍼부었던 욕설이 떠오르면서 나는 너무나 부끄러워 불에 덴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열다섯 그 해 여름, 셰리든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고, 스스로가 어른인 줄 알았는데, 그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전작에선 엄마였던) 레이첼 이모가 벌을 줄 때도 고집을 부리며 불손하고 반항적으로 대응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 일쑤였던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사실 열다섯 이라는 나이에는 걸맞지 않게 문란한 애정 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3주 동안 거의 매일 섹스를 하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서도, 단 세 시간 만에 잘생긴 카우보이를 만나 다시 몸이 달아올랐고, 남자가 조금만 다정하게 대해주어도 섹스부터 생각하는 구제불능이었다. 거기다 친 오빠에게 하마터면 성폭행을 당할 뻔하고, 자신의 선생인 사람은 한때 그녀의 정부였고, 변태 경찰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했다. 첫사랑은 떠났고, 부모님은 그녀를 속였고, 사랑한다고 믿었던 남자는 그녀를 이용했다. 점입가경으로 그녀는 성폭행을 당했고, 한 남자와 아기를 죽인 살인자가 되고 만다. 그리고 스스로 이런 죄를 지었으니 행복해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셰리든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였다. 열 여덟 살이 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믿었던 거다. 여긴 완전히 지옥이었으니,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 지루한 농부들의 땅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셰리든의 삶은 과연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내가 예전에 거짓말을 많이 하고 숨기는 것이 많았던 이유는 어쩌면 레이첼 이모가 유도질문의 대가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들에서 처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작은 거짓말이 고통과 언짢은 일을 막아준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어릴 때 깨달았다. 물론 처음에는 오로지 자기방어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을 테지만 나중에는 거짓말이 생존전략이 되고, 결국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반응이 됐다.

, 그리고 이년 뒤, 열일곱이 된 셰리든의 삶이 <끝나지 않는 여름>에서 그려진다. 그런데 첫 장면부터 무시무시하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고용한 농장에서 엄청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무려 다섯 명이 죽고,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셰리든은 마침 그날 집을 떠난 참이어서 무서운 비극에서 희생되지 않았다. 그녀는 전작에서 밝혀진 그 진실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신을 괴롭히는 에스라 오빠에게 현재의 연인인 목사 호레이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기에 호레이쇼를 위해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거였다. 결국 그녀는 모텔에서 에스라 오빠가 가족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고 충격을 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참극의 목적이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절망에 휩싸인다. 레이첼 이모는 언론을 통해 셰리든을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인 것처럼 떠벌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의붓 오빠들을 유혹한 배은망덕한 입양아로 알고 증오와 의심 섞인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한다. 거기다 셰리든은 레이첼 이모가 자신의 시부모님을 살해했다는 사실까지 깨닫게 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쓴 상태로 다시 고향으로부터 벗어나려 도망치게 된다. 그 이후로 벌어지는 일들 역시 만만치가 않다. 대체 이 소녀에게 어디까지의 시련과 고뇌를 줄 것인지 작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가는 곳마다 겪게 되는 것들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셰리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아직, 지독한 여름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불쑥 깨운 꿈은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폴 서튼이 생각났다. 꿈속에서 그에게 느꼈던 감정이 떠오르자 내 몸이 욕망에 떨리기 시작해서 금방 부끄러워졌다. 빌어먹을,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난 왜 실수에서 배우는 게 없을까? 사랑 받으려는 내 갈망은 지금까지 걱정거리만 안겨줬다. 하지만 모험을 감행할 용기가 없다면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어떻게 발견한단 말인가? 실망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겁쟁이라서 비참한 노파로 늙어갈 건가? 아니,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숨어 지내기 싫었다.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대로 살아가고 사랑 받고 싶었다!

전작에서는 너무도 파격적인 행동과 거침없는 사랑을 벌이는 모습에서 셰리든에게 공감하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그녀의 삶에 닥치는 풍파를 같이 느끼면서 보니 점점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셰리든에게 걱정에 대해 이야기할 자매나 친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그렇다면 그녀의 삶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녀는 언제나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매번 모든 상황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저 사랑 받고 싶었을 뿐인 10대 소녀에게 너무도 많은 시련과 고난은 그녀를 결코 평범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대체 그녀의 삶에 해피 엔딩이 오긴 올까. 마음이 아팠다. 사실 전작인 <여름을 삼킨 소녀>는 넬레 노이하우스 답지 않게 '소녀의 성장 소설'이라 지루하다는 평이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에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어도 될 것 같다. 첫 장면부터 파격적인 스토리로 시선을 잡아 끌어, 스토리가 진행되는 내내 역시 넬레 노이하우스! 라는 생각부터 들테니 말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전작인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았더라도 전혀 상관없이 이야기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개인적으로 추천하자면, 이번 신작 <끝나지 않는 여름>을 먼저 읽고 나서, 플래시백으로 주인공의 과거를 만나는 느낌으로 <여름을 삼킨 소녀>를 만난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작품의 강도가 훨씬 세고, 스토리도 더 다이나믹해서 몰입도가 좋은데다, 그렇게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되면 대체 이 소녀가 그 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인지 자연스레 궁금해지기 때문에 바로 그 때 그녀의 과거를 만나보면 가독성 면에서 금상첨화라는 거다. 사실 전편은 다소 루즈하고 지루한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순서를 바꿔서 읽으면 그런 부분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한 순간에 훅 읽어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나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넬레 노이하우스라는 작가가 추리 소설만 잘 쓰는 게 아니구나 싶은 감탄을 새삼 하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