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짙은 빨간색 운동복에,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어린이 교통안전용 노란 우산을 든 소년이 허름한 탐정사무소를 찾아 온다. 어린 소년을 보며 사와자키가 맨 처음 한 생각은 이거다. 열두 살 미만 어린이가 탐정을 고용할 수 있을까? 혹은 그런 어린이 앞으로 발행한 탐정 비용 청구서가 정당한 것일까? 의뢰를 하겠다며 탐정 사무소를 찾은 열살 소년도, 그런 아이를 보며 당황스러워하는 탐정도, 모두 어딘가 평범하지 만은 않은 상황이다. 과연 소년은 무슨 일로 이곳을 찾은 것이며, 사와자키는 과연 열 살 꼬맹이에게 고용 당하는 탐정이 될 것인가. 이번 작품집은 시작부터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돈은 있어요. 그 사람을 내일 아침까지 지켜주는 데 얼마나 들죠? 여기 오만 엔이 있는데 모자라면....."
"잠깐만, 꼬마야." 내가 말했다. "다시는 돈 이야기 꺼내지 마. 난 너 같은 꼬마에게 고용되고 싶지 않아. 또 돈 이야기를 꺼내면 바로 문밖으로 쫓아낼 거야. 알겠니?
소년이 흠칫 놀라 수건을 떨어뜨리더니 얼른 집어 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은, 어린이인 네가 어른인 나한테 도움을 받고픈 일이 있는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주겠다는 거야. 하지만 나보다 네 부모님이나 학교 선생님, 또는 경찰이 너를 더 잘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되면 그쪽으로 넘길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소년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거짓이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른이 모두 사악하지는 않듯 어린이라고 다 정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과작 작가로 유명한 하라 료의 작품답게 국내 출간도 매번 엄청난 기다림을 동반하는 것 같다. 데뷔 이래 19년 동안 단 여섯 권만 썼고, 사와자키 시리즈도 두 번째에서 세 번째로 가는데 6년이 걸렸으며, 네 번째로 가는 데는 4년이 넘게 걸렸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즐기려면 기다림과 인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그래서 국내에서 출간되는 그의 작품도 역시나 그랬는데,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와 <내가 죽인 소녀>에 이은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안녕 긴 잠이여>를 만나는데도 무려 4년이나 걸렸고, 그 이후 또 3년이 다 되어서야 다음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실제 이 작품이 출시된 것은 <내가 죽인 소녀>와 <안녕, 긴 잠이여> 사이였고, 사와자키 시리즈 유일의 단편집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단편'집이라는 거다. 그게 뭐 대단하냐고? 기존에 사와자키 시리즈를 한 권이라도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 것이다. 하라 료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어떠했는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지난 세 번째 시리즈에서는 탐정이 의뢰인을 만나기까지 할애되는 페이지가 무려 100페이지였다. 대체 의뢰인은 언제 나오는 거냐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가 되어서야 등장해서는, 그제야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미스터리라니. 그러니 하라 료의 작품을 제대로 즐기려면 인내, 또 인내가 필요하다는데 다들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단편'이라니. 이건 뭐 전체 스토리 자체의 분량이 작으니 애초에 이야기의 호흡이 길어질래야 길어질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번 작품집을 읽기도 전부터 신이 났다. 이번에는 정말로 가볍게, 마음 편하게 하라 료를 만날 수 있겠다는 설레임 때문에 말이다.
".........세상에는 무보수라도 배워야 하는 일이 있겠지만 탐정 일은 그게 아니라는 건 내가 보증하마."
슌이치는 내 위악적인 말투에 미소를 지었지만 이윽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말했다.
"아저씨가 진심으로 자기 일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는 믿지 않아요. 탐정이라는 일은 훨씬 남자다운 삶이랄까, 살아가는 방식이랄까, 그런 것에 깊이 뿌리를 내린..... 뭐라고 해야 좋을지. 저는 잘 표현할 수 없지만 어쨌든 자신이 믿는 것에 확신을 갖고......"
"어디서 그런 어설픈 소리를 배워왔니? 탐정은 그냥 직업이야. 뭔가 수상하고 야비하고 하찮은, 그런 직업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그런 직업이라는 각오도 되어 있지 않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거지."
이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에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고 있다. 다짜고짜 한 여인의 경호를 부탁하는 열 살짜리 소년부터, 자신의 친부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는 열여덟 소년, 자살하려는 유명 아이돌 여가수, 아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니는 아버지를 미행하는 고등학생 딸 등...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하지만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다. 하지만 사와자키는 그들을 어린애로만 취급하지 않고, 언제나 어른과 대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성의 있게 대해준다. 어린애한테 고용 당하고 싶지는 않다며 뒤에서 투덜대긴 해도 말이다.
사와자키 탐정은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이나 시크 하고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장편에서만 빛을 발하는 줄 알았더니 단편에서도 독특한 아우마를 뿜어 내고 있다. 다소 무덤덤해 보이는 행동, 툭툭 뱉어내는 시크한 말투, 가끔은 위험한 순간에도 무모하게 용기 있고, 손익을 계산해서 자신만 빠진다거나, 정의롭지 못한 일에 가담하거나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캐릭터. 그야말로 온몸으로 '하드보일드'를 보여주는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음식으로 치자면 '맛'이 아니라 '풍미'가 좋다고 해야 할까. 논리적인 사고보다 인생관에 대한 사색을 중시하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는 날카로운 예리함으로 기지가 번뜩이고, 트릭이나 의외성보다는 분위기로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립탐정이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어디선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이 진짜 보일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사와자키는 십대 아이들 곁에서 옆집 아저씨 같은 탐정으로 등장하더라도, 여.전.히.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