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그레이스
E. C. 디스킨 지음, 송은혜 옮김 / 앤티러스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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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 그레이스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다급하게 차를 타고 출발한다. 손가락이 하얘지고 얼얼할 정도로 운전대를 꽉 쥐고 있을 만큼 긴장한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을 뒤쫓아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백미러를 바라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무들 사이에서 사슴 한 마리가 튀어 나오고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꺾었지만 그녀의 차는 포장도로를 벗어나 뭔가를 들이받으며 사고가 난다. 그리고 8일 후,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는 외상성 뇌손상으로 모든 기억을 잊어 버린 상태였다. ,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침대로 돌아가 누워 눈을 감았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았다.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은 오지 않았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온갖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마치 십자말풀이 놀이라도 하듯 머리 속의 질문들을 이리저리 늘어놓았다가 순서를 바꿔보기도 하면서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일 필요한지, 무엇을 알아야 다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집으로부터 그녀는 과연 또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로가 몰려오면서 그녀는 겨우 잠이 들었다.

퇴원 준비를 하는 그레이스 곁에는 언니 리사가 함께 했지만, 리사는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기분은 집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곳도 역시 낯선 공간이긴 마찬가지였고, 잠시 후 두 명의 형사가 그녀를 찾아 온다. 그레이스의 전남자친구인 마이클이 숨진 채로 발견되었기에, 수사 중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이다. 그레이스는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마치 연극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줄거리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고, 인물들도 모두 낯설기만 한 이상한 연극 말이다. 형사들이 떠난 후 리사는, 사실 그날 아침에 그레이스가 자신의 옷가지를 챙기겠다며 마이클의 집으로 간다고 나갔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물론 살인 사건은 그녀가 그 집을 나온 후에 발생했을 수도, 혹은 교통 사고 때문에 애초에 그 집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사건을 수사하는 두 남자는 헤켓과 비숍 형사이다. 비숍은 그레이스를 의심하는 상태이다. 애인이 죽었고, 마지막으로 본 게 그녀일텐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고 하는 상황 자체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반면, 헤켓은 무조건 여자친구가 살해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으니 동기부터 파악해야 한다며, 어쩐지 그레이스를 감싸고 도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상사인 비숍에겐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으나, 사고 전의 그레이스를 마치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을 수사해 나갈수록 비숏의 의심은 커져가고, 헤켓은 어떻게 해서든 그레이스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걸 믿게 하려고 애쓴다. 대체 그레이스와 헤켓 형사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내가 누군가를 죽였을 수도 있을까?"

"절대 그럴 일은 없어. ,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누군가 새미를 해치려 한다면 나는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레이스는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이라면 비키의 말에 동의할 지 궁금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한계점에 부딪치게 되면 살인도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까?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주인공의 '기억상실'이야말로 너무도 간편한 장치 중의 하나이다. 내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는 시종일관 이야기 전개에 긴장감을 부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극중 화자를 진짜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하고 싶은 마음과 우리의 주인공이 나쁜 짓을 했을 리 없다는 응원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싸우게 된다. 극중 화자는 내가 나를 모르는 상태이므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쉽사리 휘말리게 마련이고,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편도, 자신을 의심하겠다는 편도 모두 진정으로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거짓과 거짓이 쌓이고, 배신과 음모가 곁들여지고, 스스로의 자아 찾기는 그 자체로 사건 해결의 플롯으로 연결되어 기막힌 반전으로 치닫게 된다.

,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물들이 너무 빨리 자신의 속내를 보이면 결말까지 달려가는 그 과정이 루스 해지고, 지루해질 수 있다는 거다. 이 작품 역시, 처음부터 대놓고 수상해 보이는 언니 리사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헤켓 형사 덕분에 스토리 자체가 좀 맥 빠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기억을 다시 되찾게 되는 시점이 무려 사백여 페이지가 지난 상태라, 거기까지 가는 동안 좀 지루한 면도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짧게 토막 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내내 긴장감도 떨어지고, 반복되는 내용이 많은 탓에 이야기가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녀가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고 나서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의 반전 또한,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부분이라 '소름 끼치는 서스펜스'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다소 아쉬웠다. 내가 워낙 비슷한 구성과 플롯의 미스터리를 너무 많이 읽어왔던 탓도 있을 테니,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야기 자체만 보면 영화같은 구성에 실감나는 스토리 전개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긴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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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
M. J. 알리지 지음, 김효정 옮김 / 북플라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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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젊은 여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주로 혼자 사는 여성들이었고, 트윗을 통해서 자신의 근황을 종종 업데이트 했기에, 가족들 입장에서야 그녀들을 '실종'으로 치부하기엔 다소 애매한 상태이긴 하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여자들은 2~3년 후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특정 기간 동안 빛 한 점 없는 곳에 갇혀서 굶어 죽은 상태로 말이다. 범인의 유일한 흔적은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파랑새 문신이다. 대체 이 여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사우샘프턴에 서서히 밤이 내려앉았다. 햇볕 속에서는 평범해 보이던 건물들이 이제는 한층 음산한 외양을 띠고 있었다. 다니엘 브리어스는 14층 높이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밤하늘을 수놓은 반짝이는 조명들을 보고 가슴 벅찬 희망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그곳은 암흑천지일 뿐이었다. 그는 한밤의 어둠을 틈타 잔혹한 범죄를 숱하게 저지르는 살인자, 강간범, 절도범 등 온갖 타락한 인간들을 상상했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여타의 스릴러 작품과 비교해서 독특한 점이 주요 등장 인물들이 대부분 '여자'라는 점이다. 경찰서 강력범죄수사팀의 주요 인물들 모두 여자 형사이고, 과학수사대 팀장도, 총경도, 거기다 헬렌과 대립 관계에 있는 지역신문기자 역시 여자이다. 작가가 남자라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여성들의 내면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고, 형사 스릴러 작품에서 돋보이는 뚜렷한 여성 캐릭터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헬렌 그레이스는 꽤나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그다지 공감되지 않은 특별한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만 빼고는, 그녀의 말투, 행동, 사고방식 모두 매우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문장이나 플롯 보다는 언제나 캐릭터가 기대되는 이야기인데, 덕분에 새로운 시리즈가 출간될 때마다 거의 무조건 따지지도 않고 읽어보게 되는 것 같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여인들의 실종 사건과 해변에서 발견된 여성들의 시체와의 공통점을 찾아서 수사를 시작하는 헬렌 그레이스는 전작에 이어 역시나 뛰어난 활약을 선보인다. 그녀가 첫 번째, 두 번째 작품에서의 엄청난 사건 해결로 인해 너무도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리자, 하우드 총경은 사사건건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결국은 엄청난 음모를 꾸미기에 이른다. 그리고 전작에서 임신으로 인해 찰리가 수사팀에서 빠지게 되면서 거의 새로운 인물들로 다시 구성된 수사팀 내부의 갈등 또한 매우 리얼하게 그려진다.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여성들은 대부분 궁핍하고 외롭게 살아 왔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아직 '살아 잇는 듯이' 문자메시지나 트윗을 보내고 있는 상태이다. 사건을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와 실종된 여성 루비가 범인과 함께 겪어내는 시간이 교차로 진행되어 이야기에 더욱 긴장감을 부여해준다. 루비는 범인에게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헬렌 그레이스는 이번에도 연쇄 살인범을 찾아내고 복잡한 이 사건을 해결해 낼 수 있을 것인지, 하우드 총경이 놓은 덫을 헬렌이 무사히 피해갈 수 있을 것인지..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페이지는 쉴 틈 없이 넘어간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좀처럼 지루할 새가 없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둘은 인형을 하나씩 골라 이름을 붙여주고 각자의 분신으로 여기며 갖고 놀았다. 그들이 아는 모든 왕과 왕비처럼 머나먼 곳에서 낯설고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들을 상상했다. 둘은 날마다 매력적인 환상에 빠진 채 지겨울 때까지 인형놀이를 했다. 그러면서 둘만의 특별한 세상을 창조했다. 하지만 그는 인형의 집에 닥친 슬픈 최후를 떠올릴 때마다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제 손으로 그것을 산산조각 내 버렸다...그 인형의 집을 지금껏 간직했더라면 하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여형사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국내에 3권이, 영국에서는 5권이 출간되었고, 작가는 현재 6권을 집필 중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나게 빠른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작가가 거의 일 년에 두 편씩 글을 써내는 속도에 맞추어 국내에 출간되는 것도 무려 반 년마다 새로운 시리즈가 하나씩 나오고 있어 너무 반갑기 그지 없다. 사실 시리즈 작품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다들 경험해봤겠지만, 시리즈를 이렇게나 빨리 번역해서 출간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 시리즈가 끝나고 나면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지쳐 아예 원서를 사게 되는 경우도 생기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북플라자의 행보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헬렌 그레이스 시리즈는 마치 영화의 장면처럼 급박하게 진행되는 전개와 수수께끼를 자아내는 플롯과 구성, 게다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개성의 캐릭터까지. 시리즈로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많은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헬렌 그레이스는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살란데르 이후 가장 강렬하고 흥미로운 여주인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캐릭터이다. 터프하지만 상처를 감추고 있고, 거침없고 냉소적이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린 내면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수수께끼로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강인하고 책임감 넘치며 웬만한 일에는 겁먹거나 충격도 받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진실과 동떨어진 정체성이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항상 진행되는 범죄의 한 가운데 서 있다. 단순히 수동적으로 사건을 추적하고 조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범인이든 희생자든 그녀와 관계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사건에 발을 담글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독자 입장에서는 감정 이입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앞으로의 시리즈도 매우 기대가 된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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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수리공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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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장마도 끝나버리고, 낮에는 폭염, 밤에는 열대야로 정말 말도 못하게 푹푹 찌는 여름이다. 이런 날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는 꼼짝도 안하고 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디 그럴 수 있는 여건이 되야 말이지. 이럴 때 필요한 건 무조건 호러 물이다. 호러 영화든, 호러 소설이든, 오싹한 이야기야말로 무더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이니 말이다. 요즘 같은 날씨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고바야시 야스키의 엄청난 데뷔작을 읽었다.

[죽은 고양이를 들고 어디 가?]

[아빠한테 졸라서 고양이를 샀는데, 얘가 나를 할퀴기에 콱 밟았거든. 그랬더니 움직이질 않네. 요그소토호스후한테 가서 고쳐 달라고 할 거야. 아빠한테 들키면 분명 야단맞을 테니까.]

어린아이에게 애완동물과 장난감은 별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생물과 무생물이 어떻게 다른지조차 모를 것이다. 하지만 조금 크면 자연스레 그 차이를 깨닫게 된다.

"개는 죽은 고양이를 장난감 수리공의 오두막으로 끌고 갔어. 나는 국도 위의 육교를 건넜고."

-<장난감 수리공> 증에서-

무슨 장난감이든 공짜로 고쳐주는 장난감 수리공이 있었다. 새것이든, 헌것이든, 단순한 것이든, 복잡한 것이든 아이들은 가리지 않고 장난감 수리공한테 가져갔다. 장난감을 망가뜨렸다는 걸 어른들이 알면 야단칠 테니 그건 아이들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어느 무더운 날 그녀는 어린 남동생을 돌보며 근처 가게에 심부름을 하러 가다가 육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고 만다. 기절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린 동생은 자신의 밑에 조용히 깔려 있었고, 미동도 없이 움직이질 않았다. 더 이상 어린 동생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행복했지만, 부모님이 이 일을 알면 무슨 벌을 내릴지 생각하자 그녀는 장난감 수리공을 떠올린다. 장난감뿐만 아니라 죽은 고양이도 고쳐준다는 장난감 수리공이라면, 죽은 동생도 장난감이라고 속이면 장난감 수리공이 고쳐줄 것 같았던 것이다.

장난감 수리공은 망가진 장난감을 일단 산산이 분해한다. 나사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접착제가 사용된 부분도 전부 말끔하게 떼어 낸다. 장난감이 여러 개 일 때도 일단 분해부터 하고 나서 모두 한꺼번에 조립을 하기 때문에 간혹 부품이 뒤섞이는 경우도 생기지만, 어찌되었든 원래대로 멀쩡하게 고쳐 준다고 한다. 그에게 죽은 동생을 데려가고 나서 어떻게 되었을지, 그 뒤의 상황은 헉, 소리가 날만큼 놀랍고도 오싹하다.

나는 데고나가 사고를 당한 후로 어떻게 하면 데고나를 되찾을 수 있을지 계속 생각했어. 그리하여 두 가지 방법을 찾아 냈지. 하나는 네게 부탁한 방법, 죽은 세포로 복제 인간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의 역행이야. 둘 다 현실과 동떨어진 방법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방법은 그것뿐이었지. 처음에는 복제 인간이 좀 더 가능성 있게 느껴졌어. 그래서 의학부에 들어가려고 했지. 너만 합격했지만.

몇 번이고 도전할 생각이었지만, 둘이서 한 가지 방법에 매달리기보다 각각 다른 연구를 하는 편이 확실할 것 같아서 나는 시간 역행을 연구하기로 했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중에서-

<장난감 수리공>과 함께 실려 있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는 고바야시 야스키가 기존에도 보여주었던 SF를 호러에 접목시킨 이야기로, 굉장히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퇴근길에 들른 술집에서 낯선 남자를 만난 주인공이 굉장히 기묘한 사연을 듣게 된다. 자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이었는데, 남자는 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거다. 남자는 그들이 대학 시절 절친한 친구였다고 말하며, 그들만의 대학 시절 이야기에 대해 들려준다. 양자역학과 시간여행을 모티브로 한 이 스토리는 평범한 캠퍼스의 연인들과 친구들의 사연에다 매우 독특한 설정을 부여하고 있다. 전혀 호러스럽지 않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데, 그 재미란 고바야시 야스키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별함이 아닐까 싶다.

기존에 <앨리스 죽이기> <조커가 사는 집>에서 고바야시 야스키의 작품을 만나봤었는데,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작가라 그의 전설적인 데뷔작이라는 평가를 듣는 <장난감 수리공>은 정말 궁금했었다. 일본호러소설대상 수상 시 압도적인 만장일치를 받았고, 발표 당시 일본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걸로 유명한 작품은 과연 명성답게 무더운 여름 날씨를 한 번에 날려 줄만큼 오싹하고 무시무시하다. 유혈이 낭자한 것도 아니고,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도 잔혹하고 끔찍하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조차 작가의 어조가 너무도 태연자약해서 당황스럽기조차 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진정한 호러의 끝판왕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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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바이러스
티보어 로데 지음, 박여명 옮김 / 북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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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몸짱, 얼짱, 외모지상주의, 취업성형 등등 외모에 대한 관심과 관리는 이미 우리 삶의 한복판을 완전히 점령했다. 우리는 정상체중의 사람도 체중 강박증에 시달리게 되는 외모강박시대, 외모불안시대에 살고 있다. 과연 외모야 말로 삶의 덕목이자 재능인 걸까.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는 과연 나쁘기만 한 걸까.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선인가? 악인가? 그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소설이 여기 있다.

여자의 뒤로 조깅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행복에 겨워 조깅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격렬한 조깅이 엔도르핀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심지어 중독이 될 수도 있고.

아름다운 얼굴을 향한 광기. 아름다운 몸매를 향한 광기. 피트니스에 대한 광기. 최근 멕시코 납치 사건 이후 밀너는 이 모든 것들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밀너 자신은 훤칠한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현실을 바꾸려 한 적은 없었다.

멕시코의 아카풀코, 미스 아메리카를 결정짓는 본선 무대의 마지막 프로그램을 위해 미녀들이 도착한다. 그런데 참가자들은 버스로 이동 중에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실종되고 만다. 브라질 상파울루, 아무런 이유 없이 꽃가루를 채취하던 벌이 수직으로 추락해 떨어져버린다. 그리고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벌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한다. 독일의 라이프치히, 황금비율로 유명한 시청사의 성탑이 폭탄 테러로 무너진다. 프랑스의 불로뉴 빌랑쿠르, 이제 막 인쇄되어 나오는 잡지의 사진들이 모두 기이하게 변형되어 괴물처럼 보이도록 바뀌어 있다. 납치되었던 미스 아메리카들은 한 명씩 발견되는데, 모두 괴물처럼 성형이 된 상태로 나타난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은 특정 바이러스에 의해 공격 당하는 걸로 보이는데, 사건은 점점 더 심각해진다.

벌떼가 죽고, 미인들이 추하게 성형되고, 모든 사진들이 기이하게 변형되고,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들에 폭탄 테러가 가해지는 등 정신 없이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함께 이야기는 1500년경의 피렌체를 교차 진행시키고 있다. 과거의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의 에피소드는 지금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사건들과 어떤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야기의 중신에는 사건을 조사하는 FBI 요원 밀너와 거대 기업의 창업자와 함께 사라진 딸 매들린을 찾기 위한 신경미학자 헬렌이 있다. 특히 헬렌이라는 캐릭터가 독특한데, 그녀는 과거 패션모델로 활동했을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고, 현재는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두뇌의 반응을 연구하는 신경미학자로 일하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색을 듣고, 소리를 보는 것인데, 누가 무슨 말을 하면 눈 앞에 단어 하나하나마다 색이 나타나는 것이다. 거꾸로 색을 보면 소리가 들리기도 하는 등 공감각이라는 독특한 능력인데, 이건 헬렌이라는 캐릭터에 묘한 매력을 부여하기도 하고, 이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데 매우 흥미로운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황금비율을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인간의 뇌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에 영향을 줘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부분을 노린 거예요. 황금비율, 즉 아름다움이라는 바이러스의 소스코드를 파괴하기로 한 거죠."

"미쳤어요!" 헬렌이 소리 질렀다. "그 누구도 아름다움을 정복할 수 없어요. 근절할 수도 없고요. 그건 생물학적, 진화적 과정에 의해....."

",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인류를 대상으로 행동 치료를 시도한 거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황금비율을 끔찍한 이미지와 경험에 연결하다 보면 언젠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기준이 바뀔 것이고, 심지어 아름다움이라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될 거라고 여긴 거예요."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바로 "댄 브라운의 귀환"이라는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 처음 댄 브라운의 작품 <다빈치 코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암호들과 유럽의 성당과 성채를 넘나드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 수백 년 전의 진실과 어우러져 블록버스터 급 재미를 선사했었다. 작가의 치밀한 자료 조사를 통해 그려진 탄탄한 이야기라 매우 지적이라는 평가도 받았었고 말이다. 티보어 로데의 <모나리자 바이러스>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관련되어 스토리가 출발했고, 세계 여러 곳을 순식간에 장면 전환 시키며 긴장감 넘치게 진행하고, 다양한 매력을 가진 인물들이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화려하게 움직이고 있어 어느 정도는 댄 브라운의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기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플롯은 간단한데 비해, 스토리가 지나치게 장황하고, 범인의 목적과 정체가 어느 정도 쉽게 짐작이 가서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힘이 좀 떨어지는 건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아름다워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현대사회의 종말을 선언하려고, 아름다움을 추함으로 바꿔버린다는 바이러스에 대한 아이디어만큼은 매력적이었다. 황금비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그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상징적으로 사용하고, 컴퓨터와 인터넷상에 있는 모든 그림이 황금비율에 가까울 경우 그걸 찾아 뒤틀어 괴물로 만들어버린다는 설정 또한 흥미로웠고 말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는 거라고, 외모 보다는 성격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아름다운 외모야말로 삶의 중요한 덕목이자 재능이기도 하다는 걸 말이다. 예쁜 사람이 더 많은 애정과 배려를 받고, 예쁜 외모가 면접이나 승진에서도 유리하며, 같은 상황이라도 양보를 받는 건 대체로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러니 다들 성형외과를 찾아가며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을 꼭 나쁘다고만은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고, 인생을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아름다움을 향한 광기가 나쁜 건지, 당연한 건지는 각자의 판단이겠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 끝이 어떨지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진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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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팬스 : 깨어난 괴물 1 익스팬스 시리즈
제임스 S. A. 코리 지음, 최용준 옮김 / 아작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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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뒤늦게 미드의 세계로 이끌어준 작품이 익스팬스 시리즈라..책이 출간되기를 엄청 기다렸네요!!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가 뭔지 모르는 이들에게도 재미있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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