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 그레이스는 누군가에게 쫓기듯 다급하게 차를 타고 출발한다. 손가락이 하얘지고 얼얼할 정도로 운전대를 꽉 쥐고 있을 만큼 긴장한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을 뒤쫓아오고 있는 듯한 느낌에 백미러를 바라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무들 사이에서 사슴 한 마리가 튀어 나오고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핸들을 꺾었지만 그녀의 차는 포장도로를 벗어나 뭔가를 들이받으며 사고가 난다. 그리고 8일 후, 병원에서 깨어난 그녀는 외상성 뇌손상으로 모든 기억을 잊어 버린 상태였다. 자, 과연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침대로 돌아가 누워 눈을 감았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았다.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은 오지 않았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온갖 의문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마치 십자말풀이 놀이라도 하듯 머리 속의 질문들을 이리저리 늘어놓았다가 순서를 바꿔보기도 하면서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제일 필요한지, 무엇을 알아야 다음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집으로부터 그녀는 과연 또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로가 몰려오면서 그녀는 겨우 잠이 들었다.
퇴원 준비를 하는 그레이스 곁에는 언니 리사가 함께 했지만, 리사는 그녀에게 낯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기분은 집으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곳도 역시 낯선 공간이긴 마찬가지였고, 잠시 후 두 명의 형사가 그녀를 찾아 온다. 그레이스의 전남자친구인 마이클이 숨진 채로 발견되었기에, 수사 중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말이다. 그레이스는 이 모든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마치 연극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줄거리도 전혀 이해할 수가 없고, 인물들도 모두 낯설기만 한 이상한 연극 말이다. 형사들이 떠난 후 리사는, 사실 그날 아침에 그레이스가 자신의 옷가지를 챙기겠다며 마이클의 집으로 간다고 나갔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물론 살인 사건은 그녀가 그 집을 나온 후에 발생했을 수도, 혹은 교통 사고 때문에 애초에 그 집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사건을 수사하는 두 남자는 헤켓과 비숍 형사이다. 비숍은 그레이스를 의심하는 상태이다. 애인이 죽었고, 마지막으로 본 게 그녀일텐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난다고 하는 상황 자체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반면, 헤켓은 무조건 여자친구가 살해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으니 동기부터 파악해야 한다며, 어쩐지 그레이스를 감싸고 도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상사인 비숍에겐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으나, 사고 전의 그레이스를 마치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사건을 수사해 나갈수록 비숏의 의심은 커져가고, 헤켓은 어떻게 해서든 그레이스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걸 믿게 하려고 애쓴다. 대체 그레이스와 헤켓 형사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내가 누군가를 죽였을 수도 있을까?"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아, 절대라는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지.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예를 들어 누군가 새미를 해치려 한다면 나는 그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레이스는 기억을 잃기 전 자신이라면 비키의 말에 동의할 지 궁금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한계점에 부딪치게 되면 살인도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까?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주인공의 '기억상실'이야말로 너무도 간편한 장치 중의 하나이다. 내가 과거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자신도 모르는 상태는 시종일관 이야기 전개에 긴장감을 부여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극중 화자를 진짜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하고 싶은 마음과 우리의 주인공이 나쁜 짓을 했을 리 없다는 응원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싸우게 된다. 극중 화자는 내가 나를 모르는 상태이므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쉽사리 휘말리게 마련이고,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편도, 자신을 의심하겠다는 편도 모두 진정으로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거짓과 거짓이 쌓이고, 배신과 음모가 곁들여지고, 스스로의 자아 찾기는 그 자체로 사건 해결의 플롯으로 연결되어 기막힌 반전으로 치닫게 된다.
단,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인물들이 너무 빨리 자신의 속내를 보이면 결말까지 달려가는 그 과정이 루스 해지고, 지루해질 수 있다는 거다. 이 작품 역시, 처음부터 대놓고 수상해 보이는 언니 리사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헤켓 형사 덕분에 스토리 자체가 좀 맥 빠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기억을 다시 되찾게 되는 시점이 무려 사백여 페이지가 지난 상태라, 거기까지 가는 동안 좀 지루한 면도 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짧게 토막 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내내 긴장감도 떨어지고, 반복되는 내용이 많은 탓에 이야기가 너무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녀가 모든 것을 다시 떠올리고 나서 사건이 종결되고 나서의 반전 또한,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부분이라 '소름 끼치는 서스펜스'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다소 아쉬웠다. 내가 워낙 비슷한 구성과 플롯의 미스터리를 너무 많이 읽어왔던 탓도 있을 테니,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이야기 자체만 보면 영화같은 구성에 실감나는 스토리 전개가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긴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