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홈즈 Miss 모리어티
헤더 W. 페티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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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수많은 셜록 홈즈 이야기를 만나왔고, 그를 소재로 변주된 또 많은 이야기를 봐왔지만 셜록 홈즈 최고의 숙적인 모리어티가 여자라는 설정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토리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 시리즈만큼이나 색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셜로키언은 커녕 셜록 홈즈 시리즈의 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어정쩡한 셜록을 그렸을 리도 없고, 모리어티라는 이름을 이렇게 황당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시도는 신선했으나, 원작에서 너무 멀어진 두 캐릭터는 다소 아쉬웠다

딱히 문 뒤에서 무엇을 보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셜록의 침실이 너무나 정상적이라 놀라고 말았다. 프레디가 살고 있었을 것 같기도 했고, 쇼니도 몇 년은 살았을 것만 같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옷들이 널려 있었고 벽에는 포스터까지 몇 장 있었다. 셜록 홈즈는 특이하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셜록도 결국 런던에 사는 남자애일 뿐이라는 것을 이상하고도 생생하게 상기하게 된 기분이었다. 그 허탈한 느낌에 내가 직면해야 할 현실성이 되돌아왔다.

여고생 제임스 모리어티는 6개월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경찰 아빠 대신 세 남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다. 죽은 엄마에게 집착하는 아빠는 술만 마시면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특히나 엄마를 쏙 빼 닮은 모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모리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는 공간이었고, 그녀는 언제나 집에 들어가길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화재 대피 훈련이 있던 날 선생님의 부탁으로 반에서 가장 괴이하기로 악명 높은 홈즈를 데려오기 위해 극장 지하에 있는 그의 비밀 연구실에 가게 된다. 화학 실험실 자체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마치 거품과 연기를 지휘하는 미친 교향악단 지휘자처럼 묘하게 격정적으로 우아하게 실험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셜록은 그렇지 않았다. 너저분한 교복과 앞으로 뻗친 대걸레 같은 웃기는 머리카락에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자신의 추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린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막아서고 동생을 잘 토닥이고 난 뒤 모리는 집에서 나와 자신만의 아지트인 리젠트 파크 공원에 가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셜록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함께 해결해보자고 게임을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화학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셜록과 수학 천재 모리어티가 함께 살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라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안하무인에 거들먹거리고, 관찰력과 추론이 뛰어난 셜록과 계산에 밝고 영리한 모리어티가 함께라면, 비록 그들이 고등학생일지라도 무능한 경찰이 찾지 못하고 있는 어떤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가 허리를 쭉 펴자, 나를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여전히 내 눈에는 그가 너무나 어리게만 보였다. 스스로를 진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를 찾고 있는 그냥 또 하나의 어린아이가.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지. 이건 공원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거고, 나의 세계는 100만 덩어리 무쇠로 박살이 나서는 전부 내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내가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게 이 일의 의미야, . 이건 온전히 혼자서 산사태와 싸우는 나에 대한 거라고. 그리고 네 규칙에 맞춰 주지 못하고 이번에 너의 게임을 섞여 들게 한 것은 미안해."

이 작품의 화자가 셜록이 아니라 모리어티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원작에서도 셜록이 주체로 등장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모리는 '왓슨'의 역할도 아니고 (심지어 그녀가 대역을 맡고 있는 배우의 남자친구가 왓슨으로 등장한다) '모리어티'라는 역할로 보기에도 상당히 애매하다. 그저 수학 천재에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만 모리어티스럽다고 할까. 애초에 셜록과 사랑에 빠지는 모리어티라는 설정이 시작이었으니 뭐 할 수 없지만. 사실 왜 이들 캐릭터를 셜록과 모리어티라고 설정했는지 조차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아해진다. 이 설정을 빼고 보자면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지 않다. 베리 리가의 '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의 느낌도 나고, 극중 모리와 그의 아버지 관계, 그리고 그녀가 사건을 파헤쳐가는 스토리 자체는 흥미로우니 말이다.

, 이 모든 과정에서 셜록의 역할이 거의 없다. 그는 가끔씩 등장해 그녀에게 키스를 하거나,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거나, 위험한 순간에 그녀를 구해주는 게 전부다. 그냥 모리어티의 남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역할. 나의 셜록을 이렇게 평범하고 존재감 없게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모리가 셜록을 ''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오글거린다. '셜록'도 아니고, '홈즈'도 아니고 ''이라니...... 만약 이 작품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 번째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 번째 작품부터 셜록이 제대로 활약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프리퀄 같은 거였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 반해서 생기는 반발심이니,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스터리가 섞인 가벼운 로맨스로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지루할 틈 없이 시작하면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작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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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7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정 오페라 밀키 홈즈>라는 일본 만화가 있는데요, 거기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가 탐정으로 나오는데 이름이 ‘셜록 셰린포드’입니다. 심지어 이 캐릭터의 할아버지가 홈즈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

피오나 2016-09-07 19:46   좋아요 0 | URL
오..그런 작품도 있군요ㅋ 홈즈는 정말 많이 변주되었던터라...제가 모르는 작품들도 많더라고요. 그러니 완성도보다는 아무래도 다양성을 인정해야겠죠? ^^;;;
 
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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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였으면 좋겠군요." 개빈 삼촌이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쪽이, 이미 일어난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어떻게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일 수 있죠? " 보안관이 말했다. "그가 마음먹었던 일을 어떻게 끝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감옥에 갇혀 있는 데다, 그를 자유로이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주민은 본인이 죽였다고 자백한 아내의 아버지인데?"

                                                                       -윌리엄 포크너 '설탕 한 스푼'

한 남자가 보안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를 한다. "나는 내 아내를 죽였습니다" 이 한마디에 상황은 종료되고 그는 구치소에 갇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마치 감옥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거였다. 아내를 죽였으니까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감시 받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는 곧 감옥에서 감쪽같이 탈옥해버린다. 그럴 거였으면 대체 왜 들어갔던 걸까. 탈출하기 위해서? 굳이 전화를 걸어 살인을 자백해놓고 붙잡혔다가 다시 탈옥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미스터리는 의외의 순간에 밝혀진다. 사람이란 잘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습관과 버릇처럼 아주 사소한 부분이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며 진상이 드러나는 이 이야기는 짧지만 날카로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들이 결국 잡히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버릇을 못 끊기 때문이라는 건 수많은 범죄 소설에서 이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던 잡지를 보고, 먹던 음식을 먹고, 마시던 맥주를 마시고, 같은 여자한테 전화를 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탄생한 거장들의 미스터리 모음집은 이렇게 한편, 한편이 모두 하나의 문학작품 과도 같다.

"아니오, 피터스." 지방 검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살인을 저지른 동기 말고는 모든 것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여성에 관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기만 하면... 뭔가 내세울 물건이 말이죠.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 이렇게 어설픈 살인사건과 일맥상통하는 증거가 필요해요."

헤일 부인은 은밀한 눈길로 피터스 부인을 바라봤다. 피터스 부인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급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전 글래스펠 '여성 배심원단'

엄청난 거금을 도둑맞았고, 그 도둑을 잡았지만 세상에 드러낼 수 없어 그 돈을 되찾을 수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아서 밀러의 '도둑이 필요해', 흉악범과 경찰들과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맥킨레이 캔터의 '헤밍웨이 죽이기',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여인을 같은 여성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간파하는 수전 글래스펠의 '여성 배심원단, 그리고 반전이 돋보이는 마크 코널리의 '사인 심문'과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기밀 고객' 등등... 12편의 단편들은 범죄라는 행위가 발생하지만 오로지 그것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기에 기존의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조금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존 코널리는 '죽이는 책'에서 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는 몇몇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장르란, 아름다움처럼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미스터리 소설은 형식이자 메커니즘이므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위대한 소설들은 흥미롭게도 장르를 불문하고 그 핵심에 범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노벨문학상.퓰리처상 수상 작가 12인의 미스터리 걸작선인 이 작품 <헤밍웨이 죽이기>를 엮은 엘레러 퀸의 의도는 매우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범죄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 파괴되지 않는 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며, 범죄 요소를 없앨 경우 무너져버리는 소설이 범죄소설이라는 공식'에 대입해보자면, 이 작품의 꽤 많은 이야기들이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 속에 미스터리의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만큼 장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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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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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미스터리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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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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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중 한 문장을 비유 삼아 말해보자면, 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바로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그것이다.

 

누군가 넬라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삶을 흔들고 있다. 만약 이 물건이 실수로 배달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요람은 아직 한 번도 쓰지 못한 결혼 침대와 영원히 순결을 지키게 될 것 같은 그녀에 대한 조롱이다. 감히 누가 그토록 무례한 장난을 치는 걸까? 개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의자도 지나치게 정확하고, 요람은 지나치게 암시적이다. 미니어처리스트는 그녀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열 여덟 가난한 소녀 넬라가 서른아홉의 부유한 상인에게 시집을 온다. 소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빚을 잔뜩 남겼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엄마와 철없는 두 동생,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궁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녀는 그저 그곳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이 앞날이 그 동안과는 달라질 거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그녀를 맞이한 건 차가운 시누이와 어둡고 낯선 하인들이었다. 시누이의 날 선 목소리와 하녀의 경멸 어린 눈빛, 남편의 무관심은 어린 소녀를 좌절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소녀는 밤바다 남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기를 기다리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면 자신이 여전히 혼자라는 걸 깨닫고 만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 남편과,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시누이와, 숨어서 키득거리는 것 외엔 웃을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하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크고 웅장한 캐비닛을 집에 가져온다. 결혼선물이라며 넬라에게 말을 건네는 요하네스가 커튼을 젖히자 드러난 캐비닛 내부는 아홉 칸으로 나뉘어진 미니어처 집이었다. 마치 실제 집이 줄어든 것처럼 정교함이 돋보이는 아홉 칸의 방과 작업용 부엌, 응접실, 다락방까지.. 완벽한 복제품이었다. 요하네스는 그것을 주의를 분산시킬 소일거리라고 표현했지만,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던 넬라에게는 집안에서의 부실한 입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난 이미 소꼽 놀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대체 실제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이런 곳을 가꾸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후 넬라는 우연히 명부에서 발견한 미니어처리스트의 연락처를 보고 캐비닛 안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주문하고, 얼마 뒤 주문한 상품을 받아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녀가 주문했던 줄이 달린 류트와 약혼 기념 컵, 그리고 마지팬 한 상자는 마치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기술과 정성이 들어가 있다. 마지팬에선 장미수 향기까지 풍기고, 류트의 줄을 당기면 실제로 선율이 흘러나오고, 약혼 기념 컵은 곡식 한 알보다 작은 크기지만 그 무엇보다 실제 같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더 등장한다. 아래층 응접실에서 마린이 앉아 있던 아름다운 나무의자와 아기 요람이 바로 그것이다. 넬라는 이것이 실수라고, 다른 사람이 주문한 물건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요하네스가 키우는 개 레제키와 다나 마저 미니어처로 등장하자 이건 진짜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뭔가 침범 당한 것 같은 기분, 새 신부의 어리석음이 철저히 관찰 당하는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기 시작한다. 그 물건들은 그녀에게 혼란과 날카로운 두려움과 함께 휘몰아치는 호기심마저 불러오고, 그렇게 넬라의 삶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넬라는 다시 칼베르스트라트로 돌아선다. 미니어처리스트의 특별한 존재가 곰보딱지 같은 사람들에게 낭비되고 있다고, 넬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밝혀지건, 그 눈동자만으로도, 그 꿰뚫어보는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단서와 이야기로 가득 찬 믿을 수 없는 소포만으로도, 그녀의 존재는 특별할 것이다. 태양 간판 집에 그녀의 몸이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뒷목이 당겨지는 것 같아 얼른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칼베르스트라트는 여전히 고요하다. 그 한복판에 이상한 존재를 숨기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애초에 넬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미니어처 속의 세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캐비닛 속의 미니어처 세계가 해답을 쥐고 있다고, 미니어처리스트가 구원의 불빛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미래가 담겨져 있는 미니어처를 넬라에게 보내기 시작하고, 넬라는 점점 더 그것들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그녀가 미니어처의 세계 속에 푹 빠지게 될수록 그녀 주변의 실제 삶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결국 그녀의 남편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캐비닛을 선물하려고 했던 생각이 옳았던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이 그녀의 주의를 분산시켜 엉뚱한 곳만 쳐다보게 만든 거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이 집에서의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게임이고, 가짜 연습이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그리고 열여덟의 넬라 앞에 닥쳐오는 일들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마치 일생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헤어날 길 없는 온갖 추측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충격적인 남편의 비밀과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없다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절망하지만, 그렇지만 그녀의 삶에 닥칠 파도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엄마가 될 수도 없고, 은밀한 밤의 비밀을 나눌 수도 없고, 살아 있는 영혼이 자랄 수 없는 캐비닛 말고는 집안 살림을 꾸려갈 필요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삶에 닥쳐온 일들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전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넬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자신의 사생활을 원했으며, 그럴수록 점점 더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내는 물건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 캐비닛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마도 넬라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작 이야기를 하는 이는 넬라가 아니다. 그녀가, 의문의 미니어처리스트가 넬라의 삶을 실로 짜고 있는데, 정작 넬라 본인은 그 직물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저자인 제시 버튼은 아직 작가가 되기 전에, 낮에는 개인비서로, 저녁에는 배우로 무대에 서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네덜란드에서 보낸 휴가로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에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재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니어처 하우스를 보고, 소유자의 인생에 대해 상상하다가 그것을 소설로 써보겠노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사 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 열일곱 번에 이르는 퇴고 끝에 탄생한 이 작품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이다. 특히 책 전체를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과 눈부신 묘사가 압도적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표현들이다.

'사랑은 리넨 헝겊 위의 핏자국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해진 얼룩처럼 공격성이 번져간다', '그의 말이 한 조각 얼음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힌다', '설탕을 뿌린 과일 조각처럼 선명한 방 안의 에너지에 넬라는 진이 빠진다', '10월 말의 아침 햇살은 방 안의 모든 것에 냉혹한 선명함을 드리운다', '코르넬리아의 나눔 덕분에 껍질에 금이 가고 넬라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흐너스는 불규칙한 파장으로 불행을 발산하는 것 같다', '찰나의 발가벗은 친밀감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면서 춥고 어두운 밖으로 나가려던 욕망을 잠재운다', '넬라의 상상력이 자아낸 실이 대화를 수놓고, 대화의 조각보를 헐겁게 꿰매기 시작한다', '그녀의 심장이 콩알만큼 작아져서 갈비뼈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밤은 깊어지고, 별들은 다정하지 않고, 추위는 그녀의 목에 닿는 칼날 같다', '달려가 편지를 집어 들고 읽는 순간 날카로운 두려움이 그녀를 벤다', '여자의 친절이 넬라를 찢어놓는다' 등등...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은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런 순간에 단어를 사용하다니, 이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이 작품은 나에게 너무 압도적이라 두 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한 번 읽을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날이 될 수 없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치 세상이 변해 버린 것만 같은 강렬한 감각을 줄 수 있는 종류의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신은 절대 이 작품을 놓치면 안 된다. 더없이 새롭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매혹적인 이 작품은 당신의 세계도 변화시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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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2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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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옷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날씨다. '태양이 하늘에서 심벌즈처럼 작열하고, 발 밑에서 올라오는 습기는 물이 끓는 솥뚜껑을 연 느낌에, 누군가 뜨거운 물로 방금 샤워하고 나온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 마저 든다. 그렇게 마치 공기를 응결시키면 물처럼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은 축축하고, 후덥지근하고, 무더운 계절'이다. 이건 극중 찌는 듯한 더위로 가득 찬 방콕의 날씨 속에서 해리 홀레가 느끼는 계절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한민국의 여름 역시, 올해는 이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역대 최고의 무더위 속에서 최악의 여름이라 칭해도 과하지 않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요 네스뵈는 이 작품을 쓸 때 머나먼 방콕에서 완전히 땀에 젖은 채, 이야기를 쓰고 또 썼다고 한다. 그러니 이 작품은 반드시 요즘 같은 계절에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해리 홀레가 느끼는 대로 주어진 환경을 체감하고, 요 네스뵈가 구축하고자 했던 그 상황 속으로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이 작품은 페이지 마다 더위와 습기를 우리의 얼굴 가득 내뿜으면서 마치 최면처럼 우리를 이야기 속으로 이끌고 있다.

"여기 온 지 24시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 사건은 전혀 진전이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은폐하려는 뭔가가 있으니까요. 국장님이 아직 밝히지 않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몰네스에 관해 뭘 알고 계시고, 그가 어떤 일에 연루됐는지."

"당신이 알아야 할 건 다 말했소. 그 이상은 없어요. 그렇게 못 알아듣겠소?" 토르후스가 신음소리를 냈다. "솔직히 얻고 싶은 게 뭡니까, 홀레? 당신도 이 일을 조속히 마무리하기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

'저는 경찰이고 제 할 일을 하는 겁니다, 토르후스."

서른 셋의 해리 홀레는 전작인 <박쥐>에서 출장간 호주에서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돌아와 다시 음주를 시작한 상태로, 경찰에서 진작 쫓겨났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던 중 방콕의 사창가에서 노르웨이 대사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정치적인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 했던 터라 작년 겨울 호주에서 살인 사건을 해결한 이력이 있는 해리가 그 일을 맡게 된다. 해리는 방콕으로 가서 현지 경찰과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용히 사건을 해결하라는 특명을 받고, 그는 동생의 사건을 조사할 기회를 달라는 조건으로 태국으로 향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사건의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러나는 진실들은 윗 선에서 뭔가 은폐하려는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하고, 해리가 그저 적당하고 조속히 사건을 마무리하기를 바랐던 윗 선은 점점 그의 행보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왜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게요, 홀레?

방콕에서 그가 할 일은 사건을 깔끔하게 매듭짓고 소란을 피우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모두에게 골치 아픈 일을 피하고, 그 동안 그래왔던 대로 모르는 척 덮어두기도 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흘러가는 대로 두면 서로 편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오히려 해리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이 할 일은 그저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것이지, 오슬로의 몇몇 관료들의 뒤를 봐주는 일이 아니라는 거다. 사건 수사에 있어서 만큼은 융통성 제로, 고집 불통, 그리고 진실을 향한 무조건 적인 열정, 30대 초반의 해리 홀레도 역시나 우리가 그 동안 보아 왔던 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의 오랜 팬으로서 그래서 젊은 그가 더 반갑고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바퀴벌레'는 한 마리가 눈에 띄면 보이지 않는 곳에 수십 마리는 숨어 있다는, 그러니까 박멸하기 쉽지 않은 벌레이다. 그렇게 어디에나, 아무 곳에나 존재하는 바퀴벌레들은 평상시에는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다. 그저 못 본 척했을 뿐, 사방에 존재하는 불편한 진실들처럼 말이다. 요 네스뵈는 방콕이라는 배경 설정에 대해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며, 완전히 미아가 될 수도 있는 도시' 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작품의 집필을 시작할 때, 아이디어라고는 오로지 장소, 하나뿐인 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배경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야기인 셈이다. 어두운 구석구석 바퀴벌레가 느물대며 기어 다니고, 성산업과 아동성애자들을 위한 시장이 엄청나게 거대하고, 밝은 도시의 관광지 뒤에 숨겨진 타락한 이면과 찌는 듯한 더위 너머 달콤한 휴양지의 매력이 넘쳐나는 그곳, 바로 방콕에서 해리 홀레는 숨겨진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 또 한번 자신을 '무모하게' 내던진다. 시니컬 해 보이고, 반항적이고, 무심한 듯 보여도 살인 사건 앞에서는 언제나 세상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계산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히어로 해리 홀레이니 말이다.

너무 막중한 책임이군요." 해리가 말했다.

", 그래도 때로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을 책임지는 편이 더 쉬운 것 같아요.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을 보살펴야 해요, 해리. 산 사람들요. 어쨌든 그런 책임감이 우리를 이끌어주죠."

책임감. 작년에 해리가 묻어두려던 것이 있다면 바로 책임감이었다. 산 사람을 위해서든 죽은 사람을 위해서든, 자신을 위해서든 남을 위해서든. 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릴 뿐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아니, 책임감이 어떻게 그를 이끌어주는지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이번 일에 대해서 토르후스가 옳았는지도, 어쩌면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은 해리의 동기는 그리 고상하지만은 않았는지도 모른다.

국내에 시리즈가 열 권이 넘게 인기를 얻어 출간되는 작품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은데, 제프리 디버의 링컨 라임 시리즈도,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도, 나는 시리즈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은 편이다. 그런데 유독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시리즈 출간 순서가 뒤죽박죽이다. 현재 10권으로 시리즈는 2013년에 끝이 났는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번역본으로는 아마도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폴리스>는 내년이 되어도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말이다. 물론 시리즈라고 해도 반드시 출간된 순서대로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순서대로 읽을 경우 성장하는 캐릭터와 독자가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나 공감이 쉬워 몰입도도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해리 홀레 시리즈는 역주행을 했을 때 그 매력이 더 빛이 발하는 시리즈가 아닌가 생각한다. , 출판사에서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읽었을 때 말이다. (스노우맨->레오파드=>레드브레스트->네메시스->데빌스스타=>박쥐->바퀴벌레)

왜냐하면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그의 과거를 궁금해한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 전 그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누굴 만나고,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시간을 보냈었는지 말이다. 그가 겪어온 시간은 고스란히 그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가 없으니까. 시간 여행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사랑에 빠진 대상의 과거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만큼은 얘기가 달라진다. 당신이 영어 원서를 한글만큼 술술 읽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국내에 출간된 순서 그대로 해리 홀레를 만나왔을 것이다. 마흔 살의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이었던 <스노우맨> <레오파드>를 거쳐서 삼십 대 중반의 이제 막 경위로 승진한 <레드브레스트>에서 <네메시스>, <데빌스스타>를 거쳐오면서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외톨이에 술고래인 그를 보아 왔고, 다시 삼십대 초반의 젊고 열정적인 <박쥐> <바퀴벌레>를 통해 해외에서 활약하는 그를 만났다. 우리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 그는 전대 미문의 연쇄 살인범을 만나 손가락을 하나 잃어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아들이 연쇄 살인범 손아귀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최악의 상황만 골라가며 겪었던 지치고 엉망으로 피폐했던 모습이었다. 지금 만나고 있는 젊은 해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지금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 속에 서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혐오스럽다고 꼭 나쁜 건 아니지."

"그럴지도. 그래도 착한 애들은 아닌 것 같아요. 개들은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수십 년의 시간 동안 형사계 살인 사건 전담반에서 일을 하는 하는 형사라면 매일 다른 범죄가 매일 새로운 방법으로 일어나는 것을 겪으며 조금씩 스스로의 모습에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매일같이 사람들의 거짓말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들으며, 피묻은 옷과, 창백한 시체, 냉혹한 범행 수법들이 어느 순간에는 무덤덤해질 때도 올 것이고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고스란히 축적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과거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먼저 사랑에 빠지고, 천천히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따라갈 수 있는 기회라는 건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물론 이건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오슬로 삼부작에서 해리 홀레만큼이나 큰 역할을 하는 매력적인 악당(?) 톰 볼레르가 해리 홀레를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 같은 건 숨겨놓은 보물상자를 찾은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게 했다. 그들의 대립이 절정에 이르는 <데빌스 스타>에서 각자의 역할을 떠올려보자면, <바퀴벌레>에서 그들의 첫만남이 더욱 흥미진진하고 말이다.

 

<박쥐>에서 32살의 풋풋하고 열정 넘치는 해리 홀레는 호주라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특유의 젊음을 보여주었고, <바퀴벌레>에서 33살의 그는 찌는 듯한 더위의 방콕에서 사건을 은폐하려는 철벽방어를 뚫고 노르웨이 대사의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 <레드브레스트>에서 35살의 그는 미국 비밀경호원 총격사건으로 경위로 승진해서 국가정보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네메시스>에서는 은행 강도 사건과 전 여자친구의 자살 사건에 전작에서 죽은 동료에 대한 의혹을 수사하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기도 한다. <데빌스스타>에서 36살의 해리 홀레는 강력반 최고의 형사이자 이단아로, 경찰청의 외톨이이자 심각한 알콜 중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즈음에 이미 자기파괴적인 성향 속으로 파고 들어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우리는 더 이상 경찰이 아닌 해리 홀레의 모습까지 상상해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여기 '오슬로 삼부작'까지가 해리의 30대를 담은 시리즈 전반부이다.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될 <리디머>에서는 아마도 38살에서 40살 사이의 나이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스노우맨> 바로 전 작품이다 보니 점점 더 어둠에 가까워지는 해리 홀레의 모습이 심도 있게 그려지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여기서 다시 돌아보자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스노우맨> <레오파드>에서 오슬로 경찰청 강력반 반장인 40살 그의 외모는 이랬다. 눈동자는 충혈됐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 빡빡 깍은 금발 머리에 192센티의 거대한 몸은 비쩍 마른 북극곰처럼 살이 빠져 근육질 몸에 지방만 쏙 빠진 상태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알콜 중독 상태였다. 그러니 시리즈를 거듭할 때마다 주인공을 지독하게 고생시키고 있는 요 네스뵈가 이어지는 <팬텀> <폴리스>에서는 대체 해리 홀레를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뜨릴지 심히 걱정이다. 하지만 시리즈를 역주행으로 읽고 있는 덕분에 그 고민을 아직은 조금 더 미룰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최악의 끝을 만나기 전에 아직 우리에겐 해리 홀레의 삼십대 후반 모습이 <리디머>에서 한번 더 남았으니 말이다. 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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