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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리스트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극중 한 문장을 비유 삼아 말해보자면, 때로는 허구의 세계가, 비록 실제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걸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현실과 그것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삶에의 비유가 삶이 남긴 혼란보다 더 근사하게 되는 그것. 바로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그것이다.
누군가 넬라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삶을 흔들고 있다. 만약 이 물건이 실수로 배달된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요람은 아직 한 번도 쓰지 못한 결혼 침대와 영원히 순결을 지키게 될 것 같은 그녀에 대한 조롱이다. 감히 누가 그토록 무례한 장난을 치는 걸까? 개는 지나치게 세밀하고, 의자도 지나치게 정확하고, 요람은 지나치게 암시적이다. 미니어처리스트는 그녀의 사생활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열 여덟 가난한 소녀 넬라가 서른아홉의 부유한 상인에게 시집을 온다. 소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빚을 잔뜩 남겼고, 자신감을 잃어버린 엄마와 철없는 두 동생, 그리고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궁핍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소녀는 그저 그곳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한 남자의 아내로서 자신이 앞날이 그 동안과는 달라질 거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던 그녀를 맞이한 건 차가운 시누이와 어둡고 낯선 하인들이었다. 시누이의 날 선 목소리와 하녀의 경멸 어린 눈빛, 남편의 무관심은 어린 소녀를 좌절감에 휩싸이게 만든다. 소녀는 밤바다 남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기를 기다리지만, 아침에 눈을 떠보면 자신이 여전히 혼자라는 걸 깨닫고 만다. 그녀는 사랑을 말하지 않는 남편과, 끊임없이 자신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시누이와, 숨어서 키득거리는 것 외엔 웃을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하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럽기만 하다.
모든 여자는 자신의 운명을 설계하는 건축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크고 웅장한 캐비닛을 집에 가져온다. 결혼선물이라며 넬라에게 말을 건네는 요하네스가 커튼을 젖히자 드러난 캐비닛 내부는 아홉 칸으로 나뉘어진 미니어처 집이었다. 마치 실제 집이 줄어든 것처럼 정교함이 돋보이는 아홉 칸의 방과 작업용 부엌, 응접실, 다락방까지.. 완벽한 복제품이었다. 요하네스는 그것을 주의를 분산시킬 소일거리라고 표현했지만,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던 넬라에게는 집안에서의 부실한 입지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난 이미 소꼽 놀이를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대체 실제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이런 곳을 가꾸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이후 넬라는 우연히 명부에서 발견한 미니어처리스트의 연락처를 보고 캐비닛 안에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주문하고, 얼마 뒤 주문한 상품을 받아보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녀가 주문했던 줄이 달린 류트와 약혼 기념 컵, 그리고 마지팬 한 상자는 마치 진짜처럼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기술과 정성이 들어가 있다. 마지팬에선 장미수 향기까지 풍기고, 류트의 줄을 당기면 실제로 선율이 흘러나오고, 약혼 기념 컵은 곡식 한 알보다 작은 크기지만 그 무엇보다 실제 같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하지 않은 물건들이 더 등장한다. 아래층 응접실에서 마린이 앉아 있던 아름다운 나무의자와 아기 요람이 바로 그것이다. 넬라는 이것이 실수라고, 다른 사람이 주문한 물건일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요하네스가 키우는 개 레제키와 다나 마저 미니어처로 등장하자 이건 진짜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한다. 뭔가 침범 당한 것 같은 기분, 새 신부의 어리석음이 철저히 관찰 당하는 것 같은 기분 마저 들기 시작한다. 그 물건들은 그녀에게 혼란과 날카로운 두려움과 함께 휘몰아치는 호기심마저 불러오고, 그렇게 넬라의 삶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넬라는 다시 칼베르스트라트로 돌아선다. 미니어처리스트의 특별한 존재가 곰보딱지 같은 사람들에게 낭비되고 있다고, 넬라는 생각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으로 밝혀지건, 그 눈동자만으로도, 그 꿰뚫어보는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단서와 이야기로 가득 찬 믿을 수 없는 소포만으로도, 그녀의 존재는 특별할 것이다. 태양 간판 집에 그녀의 몸이 연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뒷목이 당겨지는 것 같아 얼른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칼베르스트라트는 여전히 고요하다. 그 한복판에 이상한 존재를 숨기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애초에 넬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미니어처 속의 세계를 부정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캐비닛 속의 미니어처 세계가 해답을 쥐고 있다고, 미니어처리스트가 구원의 불빛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미니어처리스트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내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들의 미래가 담겨져 있는 미니어처를 넬라에게 보내기 시작하고, 넬라는 점점 더 그것들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게 그녀가 미니어처의 세계 속에 푹 빠지게 될수록 그녀 주변의 실제 삶에서는 너무도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결국 그녀의 남편 요하네스가 그녀에게 캐비닛을 선물하려고 했던 생각이 옳았던 건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것이 그녀의 주의를 분산시켜 엉뚱한 곳만 쳐다보게 만든 거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이 집에서의 삶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게임이고, 가짜 연습이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이제 무얼 해야 하나?
그리고 열여덟의 넬라 앞에 닥쳐오는 일들은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나다. 마치 일생이 한꺼번에 몰아쳐서 헤어날 길 없는 온갖 추측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충격적인 남편의 비밀과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없다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렸으면 좋겠다고 절망하지만, 그렇지만 그녀의 삶에 닥칠 파도는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도 영원히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라고, 엄마가 될 수도 없고, 은밀한 밤의 비밀을 나눌 수도 없고, 살아 있는 영혼이 자랄 수 없는 캐비닛 말고는 집안 살림을 꾸려갈 필요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스스로의 삶에 닥쳐온 일들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사생활이라는 것이 전현 존재하지 않는 그곳에서, 넬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자신의 사생활을 원했으며, 그럴수록 점점 더 미니어처리스트가 보내는 물건들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이 캐비닛 속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아마도 넬라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작 이야기를 하는 이는 넬라가 아니다. 그녀가, 의문의 미니어처리스트가 넬라의 삶을 실로 짜고 있는데, 정작 넬라 본인은 그 직물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저자인 제시 버튼은 아직 작가가 되기 전에, 낮에는 개인비서로, 저녁에는 배우로 무대에 서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네덜란드에서 보낸 휴가로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에서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재료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니어처 하우스를 보고, 소유자의 인생에 대해 상상하다가 그것을 소설로 써보겠노라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후 사 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집필, 열일곱 번에 이르는 퇴고 끝에 탄생한 이 작품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이야기이다. 특히 책 전체를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과 눈부신 묘사가 압도적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표현들이다.
'사랑은 리넨 헝겊 위의 핏자국보다 훨씬 더 모호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익숙해진 얼룩처럼 공격성이 번져간다', '그의 말이 한 조각 얼음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힌다', '설탕을 뿌린 과일 조각처럼 선명한 방 안의 에너지에 넬라는 진이 빠진다', '10월 말의 아침 햇살은 방 안의 모든 것에 냉혹한 선명함을 드리운다', '코르넬리아의 나눔 덕분에 껍질에 금이 가고 넬라는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흐너스는 불규칙한 파장으로 불행을 발산하는 것 같다', '찰나의 발가벗은 친밀감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면서 춥고 어두운 밖으로 나가려던 욕망을 잠재운다', '넬라의 상상력이 자아낸 실이 대화를 수놓고, 대화의 조각보를 헐겁게 꿰매기 시작한다', '그녀의 심장이 콩알만큼 작아져서 갈비뼈 안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밤은 깊어지고, 별들은 다정하지 않고, 추위는 그녀의 목에 닿는 칼날 같다', '달려가 편지를 집어 들고 읽는 순간 날카로운 두려움이 그녀를 벤다', '여자의 친절이 넬라를 찢어놓는다' 등등... 밑줄 긋고 싶은 문장들과 행간 사이에 숨겨진 비밀들은 페이지마다 넘쳐 흐르는 우아한 기품과 매혹적인 미스터리들과 함께 어우러져 한 여성의 삶을 단단하게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런 순간에 단어를 사용하다니, 이런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이 작품은 나에게 너무 압도적이라 두 번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이미 한 번 읽을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날이 될 수 없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마치 세상이 변해 버린 것만 같은 강렬한 감각을 줄 수 있는 종류의 소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당신은 절대 이 작품을 놓치면 안 된다. 더없이 새롭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매혹적인 이 작품은 당신의 세계도 변화시킬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