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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그런 거였으면 좋겠군요." 개빈 삼촌이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렇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쪽이, 이미 일어난 일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어떻게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일 수 있죠? " 보안관이 말했다. "그가 마음먹었던 일을 어떻게 끝낼 수 있겠습니까? 이미 감옥에 갇혀 있는 데다, 그를 자유로이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주민은 본인이 죽였다고 자백한 아내의 아버지인데?"
-윌리엄 포크너 '설탕 한 스푼'
한 남자가 보안관에게 전화를 걸어서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를 한다. "나는 내 아내를 죽였습니다" 이 한마디에 상황은 종료되고 그는 구치소에 갇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가 마치 감옥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는 거였다. 아내를 죽였으니까 순순히 체포에 응한다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감시 받기 위해 아내를 죽였다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그는 곧 감옥에서 감쪽같이 탈옥해버린다. 그럴 거였으면 대체 왜 들어갔던 걸까. 탈출하기 위해서? 굳이 전화를 걸어 살인을 자백해놓고 붙잡혔다가 다시 탈옥을 감행한 이유는 뭘까. 미스터리는 의외의 순간에 밝혀진다. 사람이란 잘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습관과 버릇처럼 아주 사소한 부분이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며 진상이 드러나는 이 이야기는 짧지만 날카로운 뭔가를 가지고 있다.
범죄를 저지른 도망자들이 결국 잡히는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버릇을 못 끊기 때문이라는 건 수많은 범죄 소설에서 이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보던 잡지를 보고, 먹던 음식을 먹고, 마시던 맥주를 마시고, 같은 여자한테 전화를 건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예리한 관찰로 탄생한 거장들의 미스터리 모음집은 이렇게 한편, 한편이 모두 하나의 문학작품 과도 같다.
"아니오, 피터스." 지방 검사가 날카롭게 말했다. "살인을 저지른 동기 말고는 모든 것이 뚜렷합니다. 하지만 배심원들이 여성에 관해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기만 하면... 뭔가 내세울 물건이 말이죠. 이야기를 들려주는 물건. 이렇게 어설픈 살인사건과 일맥상통하는 증거가 필요해요."
헤일 부인은 은밀한 눈길로 피터스 부인을 바라봤다. 피터스 부인도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급히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전 글래스펠 '여성 배심원단'
엄청난 거금을 도둑맞았고, 그 도둑을 잡았지만 세상에 드러낼 수 없어 그 돈을 되찾을 수 없는 부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아서 밀러의 '도둑이 필요해', 흉악범과 경찰들과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맥킨레이 캔터의 '헤밍웨이 죽이기',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여인을 같은 여성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간파하는 수전 글래스펠의 '여성 배심원단, 그리고 반전이 돋보이는 마크 코널리의 '사인 심문'과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기밀 고객' 등등... 12편의 단편들은 범죄라는 행위가 발생하지만 오로지 그것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기에 기존의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조금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존 코널리는 '죽이는 책'에서 장르소설과 순문학 사이의 경계는 몇몇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만은 않다고 말했다. 장르란, 아름다움처럼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미스터리 소설은 형식이자 메커니즘이므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위대한 소설들은 흥미롭게도 장르를 불문하고 그 핵심에 범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노벨문학상.퓰리처상 수상 작가 12인의 미스터리 걸작선인 이 작품 <헤밍웨이 죽이기>를 엮은 엘레러 퀸의 의도는 매우 멋지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물론 '범죄를 제거하고 난 뒤에도 파괴되지 않는 소설은 범죄소설이 아니며, 범죄 요소를 없앨 경우 무너져버리는 소설이 범죄소설이라는 공식'에 대입해보자면, 이 작품의 꽤 많은 이야기들이 미스터리 혹은 범죄소설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애매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 속에 미스터리의 본성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그만큼 장르의 경계를 지우는 매혹적인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