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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홈즈 Miss 모리어티
헤더 W. 페티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그 동안 수많은 셜록 홈즈 이야기를 만나왔고, 그를 소재로 변주된 또 많은 이야기를 봐왔지만 셜록 홈즈 최고의 숙적인 모리어티가 여자라는 설정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현대의 런던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토리라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 시리즈만큼이나 색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셜로키언은 커녕 셜록 홈즈 시리즈의 팬도 아니었던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어정쩡한 셜록을 그렸을 리도 없고, 모리어티라는 이름을 이렇게 황당하게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시도는 신선했으나, 원작에서 너무 멀어진 두 캐릭터는 다소 아쉬웠다.
딱히 문 뒤에서 무엇을 보기를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셜록의 침실이 너무나 정상적이라 놀라고 말았다. 프레디가 살고 있었을 것 같기도 했고, 쇼니도 몇 년은 살았을 것만 같았다. 침대는 흐트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에 옷들이 널려 있었고 벽에는 포스터까지 몇 장 있었다. 셜록 홈즈는 특이하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전부였는데. 결론적으로는 셜록도 결국 런던에 사는 남자애일 뿐이라는 것을 이상하고도 생생하게 상기하게 된 기분이었다. 그 허탈한 느낌에 내가 직면해야 할 현실성이 되돌아왔다.
여고생 제임스 모리어티는 6개월전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가족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 경찰 아빠 대신 세 남동생을 돌보며 살고 있다. 죽은 엄마에게 집착하는 아빠는 술만 마시면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특히나 엄마를 쏙 빼 닮은 모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엄마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 모리에게 집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는 공간이었고, 그녀는 언제나 집에 들어가길 두려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화재 대피 훈련이 있던 날 선생님의 부탁으로 반에서 가장 괴이하기로 악명 높은 홈즈를 데려오기 위해 극장 지하에 있는 그의 비밀 연구실에 가게 된다. 화학 실험실 자체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마치 거품과 연기를 지휘하는 미친 교향악단 지휘자처럼 묘하게 격정적으로 우아하게 실험대 주변을 돌아다니는 셜록은 그렇지 않았다. 너저분한 교복과 앞으로 뻗친 대걸레 같은 웃기는 머리카락에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자신의 추리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어린 동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막아서고 동생을 잘 토닥이고 난 뒤 모리는 집에서 나와 자신만의 아지트인 리젠트 파크 공원에 가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셜록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공원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함께 해결해보자고 게임을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화학 실험실에 틀어 박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셜록과 수학 천재 모리어티가 함께 살인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라면 흥미로울 것 같았다. 안하무인에 거들먹거리고, 관찰력과 추론이 뛰어난 셜록과 계산에 밝고 영리한 모리어티가 함께라면, 비록 그들이 고등학생일지라도 무능한 경찰이 찾지 못하고 있는 어떤 단서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가 허리를 쭉 펴자, 나를 내려다보게 되었는데, 여전히 내 눈에는 그가 너무나 어리게만 보였다. 스스로를 진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를 찾고 있는 그냥 또 하나의 어린아이가.
"아니. 아니야, 그건 아니지. 이건 공원에서 죽은 사람들에 대한 거고, 나의 세계는 100만 덩어리 무쇠로 박살이 나서는 전부 내 주변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데, 거기에서 내가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게 이 일의 의미야, 록. 이건 온전히 혼자서 산사태와 싸우는 나에 대한 거라고. 그리고 네 규칙에 맞춰 주지 못하고 이번에 너의 게임을 섞여 들게 한 것은 미안해."
이 작품의 화자가 셜록이 아니라 모리어티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원작에서도 셜록이 주체로 등장한 적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모리는 '왓슨'의 역할도 아니고 (심지어 그녀가 대역을 맡고 있는 배우의 남자친구가 왓슨으로 등장한다) '모리어티'라는 역할로 보기에도 상당히 애매하다. 그저 수학 천재에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만 모리어티스럽다고 할까. 애초에 셜록과 사랑에 빠지는 모리어티라는 설정이 시작이었으니 뭐 할 수 없지만. 사실 왜 이들 캐릭터를 셜록과 모리어티라고 설정했는지 조차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의아해진다. 이 설정을 빼고 보자면 이야기 자체는 지루하지 않다. 베리 리가의 '나는 살인자를 사냥한다'의 느낌도 나고, 극중 모리와 그의 아버지 관계, 그리고 그녀가 사건을 파헤쳐가는 스토리 자체는 흥미로우니 말이다.
단, 이 모든 과정에서 셜록의 역할이 거의 없다. 그는 가끔씩 등장해 그녀에게 키스를 하거나,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거나, 위험한 순간에 그녀를 구해주는 게 전부다. 그냥 모리어티의 남자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역할. 나의 셜록을 이렇게 평범하고 존재감 없게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게다가 모리가 셜록을 '록'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오글거린다. '셜록'도 아니고, '홈즈'도 아니고 '록'이라니...... 만약 이 작품이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 번째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 번째 작품부터 셜록이 제대로 활약하고, 이들 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프리퀄 같은 거였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셜록 홈즈라는 캐릭터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에 반해서 생기는 반발심이니,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스터리가 섞인 가벼운 로맨스로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도 말하고 싶다. 지루할 틈 없이 시작하면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만드는 작품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