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체 : 2부 암흑의 숲
류츠신 지음, 허유영 옮김 / 단숨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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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엄청난 역사 속의 정보가 흘러 넘치는 기이한 가상현실 게임부터, 웬만한 스릴러 뺨치게 숨 막히는 군사 첩보전도 있고, 천체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매우 리얼한 자료들에 현대사의 광기와 폭력, 그리고 격정이 휘몰아치는 시대적인 배경에다 너무도 설득력 있는 외계 문명 탐사에 이르기까지 스펙 타클하게 아울렀던 첫 번째 시리즈에 이어 삼체가 그 두 번째 이야기로 돌아왔다.

".............정말로 개인이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건 옳고 그름을 증명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위인 몇 명을 죽인 뒤에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찰하지 않는 이상 말이죠. 물론 그 위인들이 쌓은 둑과 파낸 물길이 정말로 역사의 방향을 결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위인들이 역사의 거대한 물결을 타고 헤엄치는 수영 선수에 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세계 신기록을 내고 갈채를 받고 역사에 이름을 길이 남기기는 했지만 물결이 흐르는 방향과는 전혀 무관한 거지요..... 하긴, 이렇게 된 마당에 이런 얘긴 해서 뭐하겠어요?"

이 작품은 1960년대 문화 대혁명부터 시작해 텐안먼 사태, 양탄 공정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쳐 수백 년 후 외계 함대와의 마지막 전쟁까지 이어지는 '지구의 과거' 3부작, 그 두 번째 시리즈이다. 전작에서 삼체라는 가상현실 게임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었던 세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기이한 세계는 실재하고 있었던 외계 생명체였고, 인류 문명에 철저히 절망해 자신의 종을 증오하고 배반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과 자손을 포함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고 있는 지구 삼체 운동이 활발해지는 중이었다. 그들은 인류가 이미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광기를 억제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존재의 힘을 빌려 인류 사회를 강제적으로 감독하고 개조해서 전혀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인 은퇴한 천체 물리학자 예원제가 두 번째 시리즈의 포문을 연다.

옛 친구의 어머니이자 천체 물리학자인 예원제와 만난 주인공 뤄지는 그녀로부터 우주사회학을 연구해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별볼일 없는 평범한 학자인 뤄지가 지구를 구원할 면벽자 중 한 명으로 선발되게 되는 이유와 연결 될 것이다. 그렇다면 면벽자란 무엇인가. 지구인들의 면벽 프로젝트가 이번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플롯이다. 삼체인들이 지구 문명을 멸망시키기 위해 태양계로 거대한 우주 함대를 파견한다는 소식에, 지구에서는 일명 도피주의가 만연했다. 삼체인들이 지구로 도착하게 되는 것은 400여년 뒤로 예상되지만, 그들에 의해 인류의 첨단 과학 기술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도록 멈춰진 상태였다. 당연히 450년 후 지구와 태양계를 지키기 위한 그 어떤 방어 계획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으므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단 지구를 벗어나서 도피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에 정부는 지구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면벽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시행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회의론이 나타났어요. 아무리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이렇게 심한 대가를 치러야 하느냔 말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아이가 품에서 굶어 죽는 것과 인류의 문명을 존속시키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할까요? 두 분은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상황에 놓인다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미래가 어떻든 당장의 삶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죠. 처음에는 이런 말을 하면 인류의 적으로 몰렸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 생각이 점점 퍼지더니 세계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됐어요. 그때 유행한 구호가 명언으로 역사에 남았죠."

뤄지가 창 밖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시간이 문명을 위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시간을 위해 흐르는 것이다."

삼체인들의 소통 방법은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속임수나 거짓은 존재할 수가 없었지만, 지구인들은 다르다. 그래서 삼체인들은 지구에 양자 크기의 인공지능 컴퓨터지자를 수없이 보내 지구인의 말과 행동을 감시하게 된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지구에서는 네 명의 면벽자를 선발해, 그들 각자가 지구 구원을 위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시행하되, 지자에게 들키지 않도록 하게 한다. 한마디로 면벽자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최고의 사기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를 파악한 삼체인들은 지구인에게 반감을 품은 지구인들 중에서 파벽자를 선출해 면벽자의 속마음을 파헤쳐내려 한다. 무려 700페이지 분량의 이 묵직한 작품은 면벽 프로젝트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해 삼체 위기가 시작된 지 200여년 뒤 동면에서 깨어난 인물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색다른 미래의 풍경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전작에서부터 느꼈지만 작가의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천체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학문의 매우 리얼한 미래를 보여주고 있어 절대 가볍게 읽을 수만은 없는 작품이다. 삼체 함대와 태양계의 거리 4.21광년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약 200년 뒤, 삼체 함대와 태양계의 거리 2.10광년으로 점점 위기가 가까워진다. 네 명의 면벽자들이 등장해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전반부는 스릴러 장르에 가깝고, 수십억 인구 중에 선택된 그들이 동면에 들어갔다 다시 깨어난 후반부의 이야기는 디스토피아 장르처럼 읽히지만 과학 소설로서의 매력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철학적인 메세지도 있고, 과학적인 정보고 많고, 스토리 자체로서의 볼륨감도 있어 끝까지 읽어내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껏 만나왔던 그 어떤 SF 작품과도 다른 매력의 느낄 수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시리즈의 마지막 3부는 또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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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 라베 지음, 서지희 옮김 / 북펌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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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히키코모리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집 안에만 칩거한 채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지 않고 그 누구와도 사회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들이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세상은 너무도 치열하고, 무시무시해져 가니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안전하게 숨어 있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는 것이 너무 비정상 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가 비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여기, 무려 십일 년 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는 소설가가 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딛어야만 하는 일생 일대의 순간이 다가온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들어온 강타였다. 조피, 그 망가진 여성은 바로 나였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지금부터 시작될 대화는 꼭 해야만 하는 대화임을 마음속에 새겼다. 나는 고발자이자, 배심원이자, 또 판사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고발, 논증, 판결.

 

서른 여덟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린다 콘라츠, 그녀는 십일 년이 넘게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다. 십이 년 전에 여동생 안나가 살해당했고, 범인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상태이다. 그날 이후 부모님과의 관계도 소원해졌고,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벌써 몇 년째이다. 함께 살고 있는 개 부코스키와 가끔 들러 집안 일을 도와주는 도우미 샬로테, 그리고 출판사 사장인 노베르트 정도가 그녀가 현재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의 모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뉴스에서 자신의 동생을 죽인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만다. 십이 년 전 그날, 동생을 처음 발견한 것이 바로 린다였고, 그녀는 범인이 도망치는 걸 목격했던 것이다.

목덜미의 털이 쭈뼛 서고, 온몸에 닭살이 돋고, 분노의 감정이 목을 조여오는 그 순간, 그녀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를 반드시 붙잡고 말겠다고. 린다는 그때 그 사건을 범죄소설로 만들어 새 책을 쓰기로 한다. 범인을 유인하는 동시에 스스로에게 치료제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그녀는 그날의 사건을 스릴러로 재 탄생시키고, 그 동안 기피하던 인터뷰를 하기로 한다. 바로 그녀의 동생을 죽인 살인자를 지목해서. 그는 문학 담당 기자는 아니었지만, 폐쇄적인 유명 작가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온다. 린다는 그가 자백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를 기다린다. 과연 그녀의 계획대로 그는 자신의 범행 사실을 자백하게 될까. 혹시 범인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어떤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그가 범인이라는 건 확실한 사실인 걸까. 이야기의 화자인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인 걸까.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믿어도 되는 걸까.

그래,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몇 달간 내가 배운 게 있다면 바로 이 말일 것이다. '두려움은 어떤 일을 하지 않을 핑계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그 일을 해야만 했다. 진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십 일년 째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저명한 언론인이 된 살인범과의 대결이라는 플롯 하나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기 전부터 기대감을 주었다. 이야기는 사건을 해결하려고 스스로 함정이 되려고 하는 린다의 현재 이야기와 그녀가 사건을 바탕으로 쓴 소설 '피를 나눈 자매'가 교차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살인 사건의 목격자가 진범을 잡으려고 하는 플롯에서 중반 이후 갑자기 살인 사건의 주용의자였던 사람이 당시의 살인 사건에 관한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플롯으로 바뀌면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전개로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다. 거기서 커다란 망치와도 같은 반전에 이어 막판에 또 한번의 반전이 이어지며 독자들을 정신 못 차리게 만든다.

물론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주인공이 전체 이야기의 화자라는 점에서 '믿을 수 없는 화자'가 이끌어가는 반전 스릴러의 공식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될 수는 있겠다. 게다가 매력적인 설정의 함정에 비해, 그 장면을 이끌어가는 린다의 범인에 대한 취조 기술은 좀 허술해서 긴장감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언니이자,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며,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베스트셀러 소설가라는 캐릭터는 그 어떤 이야기도 만들어낼 수 있는 독보적으로 매혹적인 인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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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1 스토리콜렉터 47
마리사 마이어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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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동화의 결말은 여지 없이 해피 엔딩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래서 결국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라고 끝이 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뻔한 결말을 보자고, 우리는 왜 동화를 읽는 걸까. 바로 그 해피 엔딩이 안겨주는 위안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주인공이 이렇게 고난과 역경을 거치고, 괴롭힘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 잘 될 거야. 라는 식의 이상한 희망 같은 거 말이다. 게다가 SF 장르의 세계관으로 시작해 과학과 마법이 난무하고, 거기다 오글거리는 소녀 풍의 로맨스까지 첨가된 동화라면, 일상의 지루함까지 날려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갖춘 시리즈가 바로 이 작품이다.

제이신이 걸음을 멈췄다. 윈터는 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제이신을 돌아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여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윈터는 몸서리를 쳤다. 그 말의 뜻보다도 표현 자체의 섬뜩함이 먼저 와 닿았다. 충격 받아야 마땅한 소식인데, 어쩐지 그리 놀랍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레바나가 그녀의 얼굴에 흉터를 낸 이후 이런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해온 것 같았다.

의붓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보다 제이신이 결국은 사랑을 고백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더 실망스러웠다.

대망의 시리즈 마지막 이야기는 왕실 근위병이자 시빌 미라 마법사의 직속 경호원이었던 제이신의 재판 장면으로 시작한다. 루나인 도망자인 신더를 체포하지 못했고, 그녀의 편에 서서 여왕에 대해 모반을 일으켰다는 죄목에 대해 제이신은 신더를 속여서 그녀의 신뢰를 사 레바나 여왕을 위한 정보를 캐낼 목적이었다고 항변한다. 신문 장면을 지켜보면서 윈터는 속이 타 들어간다. 제이신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무력감에 휩싸인다. 그들은 소꿉 친구이자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하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한편, 신더는 카이토를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루나에 가서 레바나와 전쟁을 치룰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들 내일이라도 당장 떠나자고 보채지만, 신더는 조금이라도 더 완벽하게 준비해서 가고 싶은 마음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누구의 목숨도 헛되이 희생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지구의 신베이징 황궁을 공습한 루나의 늑대 병사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드디어 그들의 계획이 시작된다.

카이토는 지구로 돌아가 레바나와 결혼식 장소에 대한 협정을 시작하고, 루나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신더 일행이 카이토와 함께 몰래 루나로 입국하지만, 계획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레바나 여왕과 그의 수하들에 의해 쫓기게 되고 그 과정에서 크레스가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홀로 떨어지게 된다. 그 난리통에 윈터는 제이신과 함께 크레스를 숨겨주고, 신더 일행은 무사히 울프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레바나 여왕은 제이신에게 윈터를 죽이라 명하고, 제이신은 여왕을 속이고 윈터를 스칼렛과 함께 도망시킨다. 우여곡절 끝에 윈터는 신더 일행과 만나게 되고, 스칼렛도 드디어 울프와 다시 재회하게 된다. 크레스가 위험에 처하는 과정에서 카스웰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게 되고, 신더는 루나의 시민들에게 자신이 루나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인 셀린이며, 레바나의 폭정을 끝내고 왕좌를 돌려받기 위해 왔다고 연설한다. 루나의 시민들에게 자신의 군대가 되어 달라고, 레바나와 그 추종자들에게 맞서 싸우자고 말이다. 윈터와 스칼렛을 비롯해 신더의 일행들은 각각 다른 곳에서 군대를 모으고, 그들은 점점 하나가 되어 레바나에게 맞서 싸울 힘을 모으게 된다.

윈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면서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새콤한 사과맛 사탕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제과점 진열장 안에서 막 꺼낸 것처럼 매끈하고 예쁜 사탕이었다.

"어머나, 맛있게도 생겼네." 노파가 고개를 빼고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도 어렸을 때 먹어봤어요. 사과맛이지요?"

"맞아요." 윈터는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할머니도 하나 드세요. 이걸 제게 전해주셨으니 감사의 뜻으로 드리고 싶어요."

노파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정 그러시다면..... 한입 먹어도 죽지야 않겠지요. 그럼 저는 이걸 먹을게요. 봐요, 요건 껍질에 금이 가 있잖아요. 공주님께 이런 못난 걸 드릴 수야 없지요."

 

윈터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레바나는 수하들이 믿을 만 하지 않자 직접 나서기로 하고, 노파로 분해 윈터가 좋아하는 사과 맛 사탕을 건네 윈터가 레투모시스 병에 걸리도록 만든다. 윈터의 완벽한 피부에 발진이 생기고 피고름이 가득 찬 물집이 일어나고, 섬세한 손가락이 흉하게 쭈그러들 생각만해도 레바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한편, 신더 일행들은 그 소식을 듣고 전염병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연구실로 향한다. 과연 이들은 무사히 혁명을 성공할 수 있을까. 윈터는 돌연변이 전염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루나의 공격으로 위험에 빠진 지구는 살아날 수 있을지... 신더와 윈터의 활약으로 스펙타클하게 펼쳐지는 이들의 모험 스토리는 끝이 날 줄 모르고 휘몰아치듯 전개된다.

루나 크로니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동화의 플롯으로 시작해서 SF 장르의 세계관으로 과학과 마법이라는 화려한 소재를 통해서 구축되고 있는 굉장히 방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시리즈만 네 편이며, 책으로는 다섯 권이나 되고, 주인공도 시리즈에 맞춰 네 명의 여주인공과 또 네 명의 남주인공과 악의 축에 서 있는 캐릭터도 레바나 여왕을 비롯해서 꽤나 많다. 하지만 그 수많은 인물들이 제각각 뚜렷하게 개성 있고, 매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그들의 관계 또한 억지스럽거나 유치하지 않게 설정되어 있다. 게다가 애초에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스토리 전개가 스펙타클 해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모험 플롯에 모범답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그 외 인물들도 각 장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물들을 각기 자신의 파트너 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와 부딪히는 장면들을 만들어주어 색다른 시너지 효과를 만들고, 그 효과는 시리즈 마지막 편에 이르러 극대화된다. 한마디로 '해리 포터를 누른 이 시대 최고의 판타지'라는 찬사가 전혀 아깝지 않은 시리즈이고, 거기 더불어 소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로맨스 또한 매우 훌륭한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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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자 - 상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북스토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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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쿠다 히데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사소한 사건이나 계기로 산산조각 내어 버리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게 만들고는 한다. 가벼운 듯 보이는 유머와 너무도 평범해서 실제 일상처럼 보이는 삶과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사건들은 이야기로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어느 순간 외면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끝내 마주보게 만든다. 바로 그것이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가 가진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이고, 이 작품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볼까. 시게노리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좋다. 시계를 보았다. 서두르면 면회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괜히 또 시게노리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다.

별것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평범한 우리 집에 큰 사건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는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공부는 때려치운 유스케는 불량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되는 대로 살고 있다. 어느 날 밤 중년 남자에게 돈을 빼앗고, 기분에 취해 비슷한 일을 저지르려다 경찰을 만나 혼쭐이 난다. 유스케와 그의 친구들을 때린 건 강력계 형사인 구노이다. 그는 부서장의 지시로 동료 형사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장사를 하고 있는 전직 여경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어 복무규정 위반으로 처벌하기 위해 동료 형사의 뒤를 캐고 다니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았으나, 윗 선의 지시라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인 하나무라는 그걸 알고 있음에도 구노에게 복수의 이를 갈고 있는 중이다.

슈퍼마켓에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평범한 주부 교코의 삶은 소박하다. 가끔씩 사치를 부리는 남편은 취미인 경마에서 돈을 땄다고만 하지만, 그녀는 뜻하지 않은 수입이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그러다 남편 시게노리의 회사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마침 당직이자 최초 목격자인 남편을 형사들이 의심하기 시작한다. 남편의 회사 사람들이 집을 방문해 알 수 없는 당부를 하고, 형사들은 계속 찾아와서 남편에 대해 묻고, 교코의 가슴속에도 천천히 불안감이 생긴다. 점점 남편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증거들이 눈에 보이고, 그녀는 점점 초조하고 무서워져 현실을 외면하고만 싶다.

무서울 일은 전혀 없다. 우리 집은 가난하지도, 그렇다고 부자도 아닌, 평범한 가정인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은가.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들은 그렇게 평범한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시작되곤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버린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순간 일상에 스며들어 버리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범죄에 휘말리고, 자신도 모르게 위험한 일에 가담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번에 훅 가기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다.

교코의 목소리가 떨렸다. 완전히 관계 회복의 길을 잘라 버렸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본성을 다 드러낸 것 같기도 했다. 지금까지 온화한 척했던 것은 쫓기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늘 관객 편에 있었다. 감상만 말하면 되었다. 미칠 듯한 사랑도, 빵 하나를 열 명이 나눠 먹어야만 하는 치열한 싸움도, 아무 것도 경험하지 않았다. 지금 그것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추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유스케는 괜한 치기로 벌였던 일 덕분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구노를 눈엣 가시로 여기는 하나무라가 야쿠자와 결탁해 유스케를 이용하려고 하게 된 것이다. 하나무라는 유스케를 통해 구노의 폭력에 대한 피해 서류를 제출하게 만들고, 그것을 취하하게 만들기 위해 구노의 동료들은 유스케를 찾아가고, 유스케는 야쿠자와 형사들 사이에서 그저 도망치고만 싶다. 오래 전 교통사고로 임신한 아내를 잃고 장모에게 점점 더 의지하게 된 구노 역시 자의와 상관없이 상사의 지시대로 이행한 일 때문에 형사 일을 그만둬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구노는 시게노리의 방화 사건을 수사하면서 부인인 교코에게서 죽은 아내의 모습을 보게 되고, 자주 연락이 되지 않는 장모에게 더욱 신경을 쓰게 되면서 급기야 일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어 동료들의 걱정을 산다.

시게노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것은 일상을 부숴버릴 만한 짓이었을까.

남편에 대한 의심은 점점 커지고, 과거에 미심쩍었던 일부터 현재 의문이 가시지 않은 일들까지 모두 떠올라 교코를 괴롭힌다. 그러던 차에 아르바이트 사원의 처우 개선을 위한 시민운동에 가담하게 되면서 점점 직장에서 윗사람들과 부딪히게 되고, 급기야 계산대에서 창고로 업무 재배치가 된다. 매스컴이 남편의 범행을 의심하는 기사를 싣게 되자, 주변 사람들 모두 그들을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하고 그녀는 점점 더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진다. 어쩌면 교코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감당하기 힘든 일에 직면했을 때 부딪쳐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순간을 모면하려고 미루고, 피하려고만 했던 게 아닐까. 그녀는 남편의 결백을 직접 본인에게 물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의 대책을 함께 강구해보자고 의논하지도 않고, 그저 혼자 그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기만 한다. 남편은 소소한 부정을 저질렀을 뿐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으니 말이다.

사소한 절도만으로도 가족의 울타리는 간단히 붕괴되고, 가족 중에 누군가 범죄자가 되면 그 가족 모두 같은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보니, 교코는 어떻게 해서든 가정을, 아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 그녀가 선택하는 마지막 한 방도, 그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태연자약한 이기심도, 너무도 현실적이라 서글프고 쓸쓸하기만 하다. 10년 넘게 성실히 경찰 일을 해왔지만, 어이없고도 허무하게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상황에 처한 구노의 삶 역시 안타깝기 그지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결정되어도 좋은 것인지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지만, 사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자신만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방해하는 일상의 수많은 것들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이들을 보면서, 아마 누구라도 자신의 어떤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당장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니 말이다. 이들의 고군분투가 그저 허구의 이야기 속 상황 같지만은 않아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내내 이야기의 여운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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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업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행과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릴 텐데..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속 주인공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로 그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곤 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가 없을 만큼.. 정말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주인공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그렇게 생이란 경기장에서 강 펀치를 연속으로 맞는 그들에게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한다' 는 것을 알려주려는 그의 노력은 그 동안 매우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편집이다. 복잡한 플롯과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기막힌 반전과 화려한 구성까지, 장편을 너무 잘 쓰는 작가의 유일한 단편소설집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은 평생 자유를 꿈꾸지. 그러다가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 재판을 다시 받고 교도소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거야. 그러자 무기수는 간수에게 말하지.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워 떠날 수 없습니다."

자유를 갖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넌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맘껏 누리도록 해.

아니, 못해.

지금 네가 맞이한 순간을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꿈꾸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달라.

-'전화' 중에서

                                                                                                   

<픽업>에선 횡령과 금융사기로 유명한 고학력 사기꾼이 등장한다. 그는 유령 회사를 차려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지만, 그는 단 한번도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기까지 하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자신이 벌이는 횡령과 사기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일종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일생 일대의 위기가 닥쳐오지만, 배심원을 매수해 결국 무죄로 풀려나고 승리에 고무되어 자축의 술을 마신다. 하지만 뜻밖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전화>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는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그 동안 애써 이루어놓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로 한다. 고객과의 약속을 무례하게 취소해버리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의 비밀에 대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폭로해버리고, 길거리에서 술을 먹다 경찰에게 쫓기기도 하고, 5년 동안 함께 해온 아내와 아이에게도 무책임한 발언을 해버린다. 그가 저지른 짓들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절대로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누군가를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놈에게 쓴 소리를 해주고, 권위를 앞세우는 이들을 면전에서 망신 주고, 성공지상주의와 알량한 책임감도 집어 던지고 말이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한 통의 전화, 그리고 결국 그의 삶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실수>에서 촉망 받는 변호사인 그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어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하지만,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다 결국 아홉 살이 된 딸을 두고 떨어져 지내기로 한다. 이후에 그는 또 변호사인 다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매 순간마다 그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뒤돌아보면 너무도 뚜렷이 보이는 명백한 순간들 조차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살다가 별안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을 목도하고도 스스로 애써 외면하려 해 왔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흔한 명제가 얼마나 끔찍하게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각성>에서는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촉망 받는 젊은 소설가였던 남자가 결혼을 하고 생활에 치이면서 점점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희대의 작품을 완성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딸들과 놀아주고, 저녁을 먹은 뒤 밤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소설을 써나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내리막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점점 더 작품에 집착하고, 급기야 약물에 의지해 잠을 자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하는데... 처음 약을 두 알 먹었을 때만 해도 31페이지를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원고는 448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바로 그의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누구나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가 스스로 가두어버린 굴레에서 벗어나 단지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디디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두려워 옴짝달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술집에서 우연히 어느 여자를 본다. 가능성을 본다. 우리가 마땅히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삶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하지만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그 자리를 보면 그 여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가능성' 중에서

 

이렇게 짧지만 다양한 12편의 단편들은 더글라스 케네디 특유의 장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만나왔던 그의 장편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중에 겨우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별도로 다른 소설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를 이끌어가던 그의 능력이 단편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에서도 여지없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주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고 있다.

다들 매일 순간을 살아내기 바빠서 고민조차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더글라스 케네디는 삶의 순간들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모멘트' '리빙 더 월드', '파리5구의 여인'이나 '비트레이얼'에서처럼 스펙타클한 모험과 화려한 플롯은 없었지만, 오직 단편이라서 느낄 수 있는 예리한 순간 포착과 반짝거리는 매력이 가득해서 특유의 이야기로서의 즐거움은 여전히 가득 안겨주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는 딱 질색인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 작품집이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꿈만 꾸는 것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르다. 소문으로만 짐작하는 것과 직접 체험해보는 것 역시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 동안 더글라스 케네디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을 당신, 이번에야말로 그 실체를 직접 경험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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