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업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행과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릴 텐데..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속 주인공에게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로 그런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곤 한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가 없을 만큼.. 정말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주인공을 불행으로 몰아넣고, 그렇게 생이란 경기장에서 강 펀치를 연속으로 맞는 그들에게 '그래도 삶은 살아야 한다' 는 것을 알려주려는 그의 노력은 그 동안 매우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 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편집이다. 복잡한 플롯과 다양한 인물 군상들과 기막힌 반전과 화려한 구성까지, 장편을 너무 잘 쓰는 작가의 유일한 단편소설집이라니 기대가 되지 않을 수가 없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사람은 평생 자유를 꿈꾸지. 그러다가 갑자기 반전이 일어나 재판을 다시 받고 교도소에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거야. 그러자 무기수는 간수에게 말하지.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워 떠날 수 없습니다."

자유를 갖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넌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맘껏 누리도록 해.

아니, 못해.

지금 네가 맞이한 순간을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꿈꾸는 것과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달라.

-'전화' 중에서

                                                                                                   

<픽업>에선 횡령과 금융사기로 유명한 고학력 사기꾼이 등장한다. 그는 유령 회사를 차려 수많은 사람들의 돈을 가로채지만, 그는 단 한번도 법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고, 스스로에게 당당하기까지 하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자신이 벌이는 횡령과 사기는 그저 세상을 살아가는 일종의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일생 일대의 위기가 닥쳐오지만, 배심원을 매수해 결국 무죄로 풀려나고 승리에 고무되어 자축의 술을 마신다. 하지만 뜻밖의 순간에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전화>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는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그 동안 애써 이루어놓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로 한다. 고객과의 약속을 무례하게 취소해버리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의 비밀에 대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폭로해버리고, 길거리에서 술을 먹다 경찰에게 쫓기기도 하고, 5년 동안 함께 해온 아내와 아이에게도 무책임한 발언을 해버린다. 그가 저지른 짓들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지만 절대로 실행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사람들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누군가를 업신여기고 괴롭히는 놈에게 쓴 소리를 해주고, 권위를 앞세우는 이들을 면전에서 망신 주고, 성공지상주의와 알량한 책임감도 집어 던지고 말이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한 통의 전화, 그리고 결국 그의 삶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실수>에서 촉망 받는 변호사인 그는 만난 지 일 년도 안 되어 첫 번째 부인과 결혼하지만,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다 결국 아홉 살이 된 딸을 두고 떨어져 지내기로 한다. 이후에 그는 또 변호사인 다른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만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매 순간마다 그녀가 보여 주었던 모습들 속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뒤돌아보면 너무도 뚜렷이 보이는 명백한 순간들 조차 사람들은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니 말이다. 살다가 별안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순간이 되어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미 오래 전에 진실을 목도하고도 스스로 애써 외면하려 해 왔다는 것을.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흔한 명제가 얼마나 끔찍하게 스스로에게 되돌아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각성>에서는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촉망 받는 젊은 소설가였던 남자가 결혼을 하고 생활에 치이면서 점점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희대의 작품을 완성시키겠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일을 벌이게 된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는 퇴근해 집으로 돌아와 딸들과 놀아주고, 저녁을 먹은 뒤 밤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 서재에 틀어박혀 하루에 다섯 페이지씩 소설을 써나갔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내리막길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조바심 때문에 점점 더 작품에 집착하고, 급기야 약물에 의지해 잠을 자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하는데... 처음 약을 두 알 먹었을 때만 해도 31페이지를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원고는 448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이야기는 바로 그의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누구나 어딘가로 떠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꿈꾼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가 스스로 가두어버린 굴레에서 벗어나 단지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디디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 텐데 무엇이 두려워 옴짝달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술집에서 우연히 어느 여자를 본다. 가능성을 본다. 우리가 마땅히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삶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하지만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그 자리를 보면 그 여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

                                                                                        -'가능성' 중에서

 

이렇게 짧지만 다양한 12편의 단편들은 더글라스 케네디 특유의 장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만나왔던 그의 장편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중에 겨우 몇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별도로 다른 소설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를 이끌어가던 그의 능력이 단편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편에서도 여지없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던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주는 그의 탁월한 능력이 돋보이고 있다.

다들 매일 순간을 살아내기 바빠서 고민조차 없이 지나가버리는 것들에 대해서, 더글라스 케네디는 삶의 순간들을 멈추고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를 해준다. 물론 '모멘트' '리빙 더 월드', '파리5구의 여인'이나 '비트레이얼'에서처럼 스펙타클한 모험과 화려한 플롯은 없었지만, 오직 단편이라서 느낄 수 있는 예리한 순간 포착과 반짝거리는 매력이 가득해서 특유의 이야기로서의 즐거움은 여전히 가득 안겨주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는 딱 질색인 분들이라면, 아마도 이 작품집이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고 말이다. 꿈만 꾸는 것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르다. 소문으로만 짐작하는 것과 직접 체험해보는 것 역시 차원이 다른 일이다. 그 동안 더글라스 케네디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을 당신, 이번에야말로 그 실체를 직접 경험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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