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픽 미스터리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이재익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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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책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온전히 자기중심적인 흥분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바로 독서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책이 건네는 말을 찾는다. 작가들이 아무리 엉뚱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세상에!' 이건 내 이야기잖아!'라고 말하는 독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임신중절>이라는 작품에는 책으로 출간되지 못한 모든 원고와 문서를 기증받아 보관하는 캘리포니아의 도서관에서 일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이 도서관은 조금 특별한데, 출판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저술이든 보관해주는 공간으로, 누구든 직접 방문해서 저술에 대한 간단한 변을 밝힌 다음, 원하는 서고에 꽂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브라우티건이 창조한 도서관을 기념해 브라우티건 도서관이 세워졌고, 거기서는 실제로 출판되지 않은 책 원고들만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앙리픽 미스터리>는 바로 그 브라우티건 도서관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허구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현실을 바탕으로, 또 다른 허구의 이야기가 탄생한 것이다.

브라우티건 도서관 설립 소식을 뉴스에서 본 시립도서관장 구르벡은 프랑스판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을 만든다.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도서관에는 천 권에 달하는 원고가 쌓였지만, 초창기의 열광적인 반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여서 이제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않는 상태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일에 전념했던 구르벡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혼자 도서관 일을 도맡아하는 직원 마갈리는 일에 치여 버려진 원고들을 위해 마련한 서가에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내려온 파리의 대형 출판사 편집자 델핀과 그의 연인인 작가 프레드가 도서관에 들른다. 그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을 듯한 그 많은 원고를 읽는다는 사실에 매혹되었고, 그곳에서 걸작을 발견한다. 책의 저자는 평생 피자 가게를 운영했던 앙리 픽으로 이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남편이 글을 쓰는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다며, 생전에 책을 읽는 걸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가족도 모르게 비밀스러운 삶을 살았던 천재 작가였을까? 피자가게 주인에게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사람들이 픽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무엇보다 그의 인생이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픽은 누구도 몰랐던 문학적 감수성을 비밀스럽게 간직한 채 조용히 살아갔다. 그의 이야기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 놀라운 능력을 지녔지만 아무도 못 알아보는 슈퍼히어로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로망에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출판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원고를 위한 비밀의 도서관을 배경으로, 소설가, 편집자, 영업자, 문학평론가, 도서관 사서 등 책과 관련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는 조금 예상 외의 전개로 진행된다. 숨겨진 천재 작가의 삶에 주안점을 두고 펼쳐질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는, 오히려 출간된 그 책이 그와 연관된 다른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변화시키는 부분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가는 과정과 책이 누군가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책이 행할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스토리라고나 할까. 앙리 픽이 남긴 작품은 소설 자체로서의 가치도 훌륭하다고 언급되어 있지만, 사실 그것보다 소설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사람들의 삶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인 다비드 포앙키노스는 프랑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오드리 토투 주연의 [시작은 키스] 영화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다. 내년 봄에 이 작품 역시 영화화 될 예정이기도 하다. 문학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코미디와 미스터리 형식으로 쓴 이 작품은 가볍게 흘러가면서도 중간중간 뭉클하게 만드는 순간을 가지고 있다.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책들에 관한 이야기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설레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문학이 삶을 바꿀 수도 있고,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독자들을 위한 선물과도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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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12-1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카롱!! 따뜻하고 달달한 게 땡기는 날씨에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피오나 2017-12-12 09:52   좋아요 0 | URL
네. 오늘 정말 춥죠? 프레이야님도 기분 좋은 하루 되세요^^
 
속죄의 소나타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권영주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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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악당은 끝까지 악당이란 겁니까?"

"그게 아냐. 살인을 실행에 옮기려면 아까 말한 대로 이성이니 윤리니 하는 경계선을 뛰어넘어야 해. 그런데 한 번 뛰어넘고 나면 담이 낮아지거든. 엄청난 일인 줄 알았던 범죄가 실은 그냥 잠깐 힘만 쓰면 되더라 하는 걸 알고 나면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게 아무렇지도 않게 돼. 불쾌한 이야기지만 한 번 살인을 한 녀석은 아직 죽여 본 적이 없는 녀석보다 살인 행위에 대한 저항감이 줄어들어. 살인엔 면역성이 있는 거다."

이야기는 미코시바 레이지가 시체를 유기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가 살인을 한 건지, 누구를, 어떤 이유로 죽게 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이 장면에서는 그가 시체를 만지는 것이 두 번째 라는 것, 그리고 이전에 체포되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나 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법률사무소에 출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미코시바 레이지는 변호사였던 것이다. 그것도 경찰과 검찰 사이에서는 물론, 크고 작은 죄를 저지른 범법자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변호사. 그는 최고의 실력자인 만큼 엄청난 수임료를 요구하며 고객의 돈을 제일 많이 뜯어내는 변호사로도 악명이 높았다.

 

강가에 유기된 시체를 발견하고 수사를 시작한 경찰들은 피해자의 신원이 미코시바가 맡은 보험금 살인 사건을 취재하던 기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기자가 미코시바의 과거를 조사하던 흔적을 발견한다. 다름아닌 미코시바 레이지가 26년 전 엽기적인 살인으로 시체 배달부라고 불리던 열네 살 소년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의료 소년원에 수감되고 겨우 5년 만에 가퇴소했고, 3년 뒤 스물두 살 때 사법고시를 한 번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변호사 자격에 인격이란 항목도 없거니와, 소년원 수감 당시 개명을 했으니 그 동안 그의 과거가 알려지지 않은 것도 그럴 만했다. 취재 후 우연히 알게 된 사실로 공갈 협박하려던 기자, 잘 나가는 현재의 명성에 위협을 받을 만한 과거가 밝혀질 위기에 처한 살인 전력이 있는 변호사. 경찰의 수사 방향은 당연히 미코시바를 향하게 된다. 그는 과연 살인의 경험을 잊지 못하고 법을 이용할 줄 알게 된 살인마일까, 개과천선해서 속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변호사일까.

 

"전에도 말한 적 있지. 후회 따위는 하지 마라. 후회해 봤자 과거는 수복되지 않아. 사죄도 하지 마라. 잘못을 아무리 빌어도 잃어버린 생명이 돌아오는 건 아니다. 대신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러. 알겠냐. 이유가 뭐든 사람 하나를 죽였으면 그 녀석은 이미 악마다. 법이 용서해도, 세상 사람들이 잊어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악마가 도로 사람이 되려면 계속해서 속죄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죽은 사람 몫까지 열심히 살아라. 절대로 편한 길을 택하지 마라. 상처투성이가 돼서 진흙탕을 기어 다니면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괴로워해라. 자기 안에 있는 짐승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싸워라."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사건이 병행으로 진행되고 있다. 미카시바가 용의자로 지목된 기자 살인 사건과 그가 변호인으로서 맡고 있는 보험금 살인 사건. 그리고 그가 열네 살 소년이었을 때 벌였던 살인 사건과 그가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과거의 이야기도 현재의 사건들과 연결되어 보여진다. 한 번 악인은 영원히 악인인가,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좀처럼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질문이 아닌가 싶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최강이지만 최악의 변호사인, 선과 악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도 아니었고, 동기도 없이 그저 사람이 죽여 보고 싶었다는 소년은 얼핏 사이코패스의 원형처럼 보인다. 과연 선천적인 악인으로 태어난 것 같았던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변호사라는 직업으로,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의 첫 장면부터 그가 시체를 유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의 마음을 헷갈리게 만든다. 그가 변호한 소년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는 끊임없이 미카시바 주위를 맴돌며 그를 위협하고, 와타세와 고테가와 형사 역시 그를 향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누가 봐도 미카시바는 나쁜 인물의 전형처럼 보인다. 한 가지 의문은 현재 그가 맡고 있는 사건이 돈이든 명예든 얻을 것이 없어 보이는 재판이라는 것뿐인데,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 알게 되는 이 사건의 진상 또한 만만치가 않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 두 권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이번 작품도 굉장히 기대가 되었는데, 전작보다 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게 된 것 같다. 시리즈의 주인공 변호사를 과거 온 나라를 경악하게 했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설정하기란 결코 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우라와 의대 법의학 교실 시리즈에 나왔던 고테가와 형사와 그의 상사 와타세가 등장해 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다. 법정 미스터리로서도 훌륭하고,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보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서도 성공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어서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그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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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녹색 바람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구라치 준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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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살인이 일어났는데도 하루하루 생활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그것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흔해빠진 일상에는 망각이라는 자정작용이 있는 듯했다. 어느 가정이든 이렇게 일상을 되풀이함으로써 비극을 과거로 쫓아 보내는 것 아닐까.

죽은 후에 저 세상에서 아내와 만날 일이 두려운 노인은 아내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무서워서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젊었을 적에는 가정을 돌보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으며, 아내는 부리기 편한 무급 하녀로밖에 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아내의 영혼을 불러내겠다고 영능력자를 집으로 불러와 초심리학에 심취한다. 그런 노인을 말리려고 가족들은 그런 방면에 능통한 대학교 연구자에게 부탁해서 영능력자가 사기꾼이라는 걸 밝혀내겠다고 하는 와중에, 10년 전 진로 문제로 노인과 다투고 집을 나갔던 손자가 집에 돌아온다. 그렇게 온 가족과 초심리학 연구원과 영매까지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살인이 벌어진다. 노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입구는 열려 있었고 아무도 별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함께 있었던 가족들과 연구원, 영매에게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고, 그야말로 밀실에서 일어난 불가능한 범죄로 영매는 귀신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고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가족들은 노인이 생전에 원했던 죽은 부인의 영혼을 부르는 강령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강령회를 열기도 전부터, 어릴 적 사고로 몸이 불편한 사에코의 신변을 위협하는 징조가 발견되고, 세이치는 대학 선배인 네코마루에게 도움을 청한다. 독설과 괴상한 언동으로 교내에서 유명한 그는 행동력과 호기심, 자신감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입과 은근슬쩍 내비치는 다정함까지.. 사람을 별로 가까이 하지 않는 세이치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독특한 상대였다. 호기심이 강해서 흥미가 동하는 일에는 일단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네코마루에게 수상한 강령회와 밀실 살인이야말로 딱 맞는 건수였지만, 하필 지금 다른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라며 세이치에게 이것 저것 조사할 것들을 지시한다.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가족들을 하나씩 올려두고, 금전적인 문제가 있는 지 조사하고, 외부인인 영매와 연구원들의 알리바이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 보지만, 경찰도 찾아 내지 못한 것을 일반인인 세이치가 발견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게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의혹만 깊어져 가는 와중에, 드디어 문제의 강령회 날이 다가온다.

 

살아 있는 사람이 돌아가신 분을 불러내다니 어쩐지 불손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신 분은 그 사람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마음에서만 조용히 살아 숨 쉬는 법이다. 추억만이 사람이 살아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추억은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차게 생명의 기척을 전달한다. 소중한 것을 살그머니 감싸 안듯이.

이 작품은 전형적인 본격 미스터리인 구라치 준의 전작과 달리,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 풍경에서 의표를 찌르는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 미스터리이다. 특히나 이 작품은 출간 후 20년간 선배 열풍을 불게 한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 그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서 더 의미가 있다. 네코마루는 구라치 준의 첫 단편집에 등장한 이래로 이후 시리즈 캐릭터로 자리 잡아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 오고 있다. 세상 모든 일에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수학과 전기에는 유난히 취약한 이 남자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면 득달같이 달려와 참견하는 오지랖 넓은 한량이다. 서른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고등학생으로 오해 받을 만큼 몸집이 작고 동안이다. 한창 일할 나이인데도 일정한 직업 없이 빈둥빈둥 놀며 지내는지라 어떻게 생계를 잇는지 아무도 모른다. 학생 시절부터 기이한 행동으로 유명했고, 흥미가 없는 분야에는 초등학생 수준의 지식밖에 없는 독특한 인물이다. 네코마루는 구라치 준의 여러 작품에서 탐정으로 사건을 해결하며, 본격 미스터리를 너무 난해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본격 미스터리와 일상 미스터리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구라치 준과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괴짜 네코마루 선배의 조합이 너무도 매력적이다.

 

본격 미스터리물이지만 사건 해결의 단서들을 독자들에게 모두 제공하지 않고 있어서, 살인 사건의 트릭을 짐작하기란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밀실에서 살해당한 노인의 사건부터 연이어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그 동안 숱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들을 읽어온 나이지만 사건의 진상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트릭과 미스터리 자체에만 치중을 주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과학과 영능력자의 논쟁이라는 흥미로운 테마에 따른 여러 인물들의 해석과 의견에도 꽤나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어 재미있었고, 그 와중에 거의 바깥 세상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순진한 사에코는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신경을 긁는 신랄한 말과 신기한 다정함을 가지고 있는 예측 불가의 네코마루 선배 캐릭터도 매력적이지만, 예지몽으로 꾸고 걸핏하면 자신만의 테두리에 틀어박히려는 세이치 역시 독특한 캐릭터라서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동안 만나왔던 '일상 미스터리'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결국일상의 불안정함과 예측 불가능이 사건의 전체적인 트릭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구라치 준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네코마루 선배 시리즈가 더 출간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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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카네기 메달 수상작
사라 크로산 지음, 정현선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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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우리를 기괴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멀리 떨어져서 우리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확연히 둘이었던 몸이 허리에서 갑자기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에서부터 어깨까지만 나오도록 사진을 찍어 보여주면 우리가 쌍둥이이며 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내려오고 티피 머리카락은 더 짧다는 것 말고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못생겼다고? 에이. 이젠 좀 지겹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모두 누군가와 붙어 있었다고 한다. 팔도 네 개, 다리도 네 개,머리는 하나에 얼굴이 두 개지만 신을 위협할 정도로 강했기에, 신이 우리 영혼의 짝을 반으로 갈라 영원히 짝 없이 외롭게 살아가도록 만든 거란다. '헤드윅'이라는 작품 속 노래 가사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아주 오랜 옛날, 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를 가지고, 하나로 된 머리 안에 두 개의 얼굴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제우스가 번개 가위로 반쪽으로 갈라 영원토록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인간을 반쪽으로 가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모두 영혼의 짝과 한 몸인 상태로 살고 있을까.

 

여기, 엄마 배 속에서부터 이미 서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묶여 있는 두 사람이 있다. 머리가 둘, 심장도 둘, 폐와 신장도 두 쌍에 팔도 넷이지만, 제대로 움직이는 다리는 둘이고, 모양만 그럴듯한 다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달려 있는, 이들은 결합 쌍둥이였다. 일반적으로 샴쌍둥이는 불완전한 분할로 수정란이 나뉘어져 신체의 일부가 결합된 상태로 태어나는데, 생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두 개 달리거나, 두 개의 몸에 머리의 정수리 부근이 서로 붙어있거나. 쌍둥이의 머리를 분리하는 대수술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후 몇 시간, 혹은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요즘은 출산 전에 기형아 검사를 하기 때문에, 아이의 기형 사실을 부모가 미리 알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해 아이를 포기하는 부모도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아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진 부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모습 때문에 차별 받고, 고통 받게 되는 건 부모로서도 어쩔 수가 없다. 그들 스스로 겪어내고, 참아내고, 부딪쳐 싸워내야 한다. 물론, 그것도 살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허드슨가에서 꼬마 하나가 엄마를 툭 차고는 전속력으로 달아나다가 엄마를 뒤쫓으며 꺅꺅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티피도 키득거렸다. 폴이 카메라를 우리 쪽으로 돌리자 렌즈에 비친 햇살도 우리를 향했다. 캐롤라인이 말했다. “너흰 정말 많이 웃는구나. 그런 상황에서조차 삶을 받아들이고 있다니,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 하지만 삶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뭐가 있을까. 거부했어야 하는 걸까? 난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웃음을 택했다.

이 작품은 16년간 홈스쿨링을 받아온 결합 쌍둥이가 난생처음으로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꿈꾸던 평범한 학창 시절을 실현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라 크로산은 이 작품으로 그 해 최고의 청소년 문학 작품에 수여되는 카네기 메달을 받았다. 2016 카네기 메달, 2016 영어덜트 도서상, 2016 아일랜드 올해의 청소년 도서상 등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만큼, 특별한 이야기를 보편성 있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나 자유시 형식으로 쓰인 독특한 본문이 인상적인데, 덕분에 페이지가 굉장히 수월하게 넘어가서 가독성도 좋고, 이야기 전개에 속도감을 붙여주어 몰입감도 선사하고 있다.

 

그레이스와 티피의 상반신은 확실히 둘이지만 허리 아래로는 하나다. 좌골부 결합형 쌍둥이인 그녀들은 16살에 첫 학교생활을 시작한다. 그 동안은 홈스쿨링으로 공부해왔지만, 후원금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친구라는 존재가 생기게 되고, 그들의 인생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았던 우정과 사랑이라는 감정도 경험하게 된다. 이야기는 그레이스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데, 덕분에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보다는 따뜻하고 유쾌한 감정이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마치 쌍둥이 자매의 일기장을 엿보는 기분도 들고,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작품이다. 게다가 허구의 이야기지만 마치 실화 같은 느낌을 주는 진지함과 리얼함이 있다. 그럼에도 무겁지만은 않은 분위기라 더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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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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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 패터슨은 무시당하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세 달째 매일 이 체육관에 왔다. 그 긴 시간 동안 자기가 관심 있는 일에만 몰두하는 한가한 여자들을 지켜보았다. 이 여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자신에게만 집중했다. 앰버는 그들 중 누구와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매일 1.5미터 거리에서 운동하는 사이인데도 말이다. 그들에게 앰버는 붙박이 가구처럼 하찮고 주목할 가치 없는 존재였다.

평범한 시골 마을 출신의 앰버 패터슨은 부동산 사무소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자신이 현재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조사 끝에 잭슨 패리시를 표적으로 정하고, 그의 완벽한 아내인 대프니 패리시에게 접근한다. 잭슨 패리시는 포춘 500대 기업에 선정된 회사를 이끄는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외모를 가진 매력적인 남자이기도 했다. 그보다 열 살 어린 대프니는 너무도 아름답고 우아했으며, 낭포성 섬유증을 겪는 이들을 위한 자선 사업을 하고 있다. 어린 시절 동생이 같은 병으로 죽었기에 자신이 운영하는 줄리스 스마일 재단을 통해 기금을 마련해서 병든 사람들을 돕고 싶었던 것이다. 엠버는 대프니가 다니는 체육관에 세 달 째 다니다 어느 날 드디어 그녀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자신의 멀쩡한 여동생을 낭포성 섬유증을 앓다 죽은 걸로 만들어서는 그녀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호화로운 저택들이 비밀스럽게 자리한 코네티컷 비숍 하버에서도 수백만 달러의 저택에 살고 있는 잭슨과 대프니 부부는 마치 동화 속에서 빠져 나온 것처럼 완벽한 커플이었다. 앰버는 자신이 늘 꿈꾸던 것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대프니에게 질투를 느끼면서, 언젠가는 그 모든 것을 빼앗고 자신이 저택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대프니와 가까워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두 사람은 금새 서로를 이해해주는 하나뿐인 친구가 되어 간다. 앰버는 점점 대프니와 생활을 공유하며 그녀의 신뢰를 쌓아가고, 잭슨의 회사에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조금씩 그들의 삶에 더 발을 깊숙이 들여 놓게 된다. 대프니가 너무 착해서 죄책감이 들 지경으로 앰버의 계획은 술술 풀려 나간다.

 

앰버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대프니가 너무 착해서 죄책감이 들 지경이었다. 대프니가 패리시 인터내셔널에 일자리를 알아보게 하려면 은연중에 뜻을 비치고 교묘하게 행동해야 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미끼가 무슨 맛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 앰버 때문에 명성이 더러워지고 불쌍해질 행복한 유부남 마크 잰슨은 앰버에게 접근과 비슷한 행위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앰버는 오후에 마크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할 생각이었다. 자동차 엔진에서 부르릉 하고 소리가 났다. 이제 모든 일은 운전하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지나치게 완벽해 보이는 부부 앞에 나타난 한 여자. 그녀가 아내와 가까워지면서 친구가 되고, 결국 남편을 유혹해 가정을 파괴한다는 플롯은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한 동안 유행처럼 자주 출간되고 있는 심리 스릴러 장르에서도 유독 비슷한 플롯의 이야기가 많은 편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줄거리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술술 재미있게 읽힌다. 끊임없이 다음 장면이 궁금해져서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추지 못하게 만든다고 할까. 앰버와 대프니, 잭슨 모두 너무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라 마치 영상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고,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매 장면마다 넘쳐나서 지루할 틈이 없다. 게다가 구성과 반전 또한 매우 훌륭해서, 정말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이야기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대프니에게 접근해서 잭슨을 유혹하려는 앰버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녀의 계획이 막 성공하려는 시점에 시작되는 2부에서는 대프니가 잭슨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대망의 3부에서는 앰버와 대프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보여지는데, 충격적인 반전도 매혹적이고, 각자의 삶 속에서 감춰져 있던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나게 되는 구성도 훌륭하다. 1부가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상대를 파멸시키는 욕망에 불타오르는 여성이 등장하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같은 신분상승 드라마라면, 2부는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완벽해 보이는 부부의 삶에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는 B. A. 패리스의 <비하인드 도어> 같은 심리 스릴러이다. 그래서 같은 등장 인물이 등장하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작품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른 분위기로 차별화된 색깔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모두 군더더기 없이 빠른 전개와 흡입력 있는 전개로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하고 있어, 후반부의 반전에 더욱 놀라운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가독성 면에서도, 심리 스릴러라는 장르 속에서도 굉장히 빛을 발하고 있는 대단한 작품이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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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8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17-12-09 00:09   좋아요 0 | URL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이 멋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