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생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이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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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아무리 짧은 인생이었더라도

살아 있는 시간이 더 길다.

마스다 미리는 말한다.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은 없습니다.”라고. 매일매일 우리에게 반복되는 하루의 일상들을 한번 돌아보자. 오늘 나는 어떤 하루를 보냈던가.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고, 내일은 또 어떨까. 하지만 역시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같은 일상의 반복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이 너무 설레이고, 오늘은 또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한 사람들은 아마도 사랑에 빠진 연인들 외에는 없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새로운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날들일 것이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다 보면 조금씩 생각이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에 굉장히 특별한 사건이나, 엄청난 감정의 변화를 겪게 만드는 일들은 없다. 그녀는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도 사소한 일상의 모든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시간들 속에서 위로 받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신의 하루 또한 절대 별 볼 일 없지 않다고, 일상의 수많은 그 순간들이 쌓여 당신이라는 세계를 만들어 간다고, 그러니 당신의 오늘은 너무도 소중한 시간들이라고 말이다.

눈이 있어서 좋다. 코가, 입이 있어서 좋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도 당연하게 우리의 삶에 주어진 것들. 우리가 숨쉬는 공기들,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것 같은 부모님과 가족들, 내가 매일 먹고 마시는 음식들과 내가 쉴 수 있는 따뜻한 집들.. 그런 것들에 고마워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테고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감사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오늘 태어난 아기가 그 작은 입에서 토해내는 숨도,

오늘 죽은 사람이 토해내지 못하는 숨도,

전부 다 의미를 지닌다.

있어도 없어도 똑같다는 말을, 세계는 허락하지 않는다.

모처럼 예쁘게 꾸미고 외출했는데, 바깥 거울로 본 자신의 모습이 상상만큼 멋있지 않아서 초라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 한정판 세트를 주문했는데, 내가 주문하자마자 매진이 되고 나니, 이상하게 더 맛있게 느껴진 적이 있다. 집에 있는 책장에 계속 그대로 놓여있는 작품, 거듭 도전해도 좌절하는 책들이 몇 권은 있다. 전철에서 발 옆에 작기 엎드려 있는 맹인안내견을 보며, 나는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전철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슬그머니 옆에 서는 사람을 막아 끼어들지 못하게 해본 적이 있다. 푹 자고 일어난 토요일, 슈퍼에서 커피를 사고, 빵집에도 들러 집에 가는 길에 날은 맑고, 맛있는 빵도 있고, 그 순간 인생은 정말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있다. 마스다 미리의 일상들이다. 나의 일상이라고 해도, 당신의 일상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이질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편린들이다.

 

 

마스다 미리는인생은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의 인생을 넘기면, 그 다음의오늘의 인생이 있습니다. 내일의 내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작품의 제목에 대해 말한다. 힘들었던 날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마음을 담은 제목이라고 말이다. 원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시선을 사로 잡는 표지도, 속지가 빨강, 초록, 파랑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도, 작가의 꿈을 보여주는 검정색 내지에 은색으로 인쇄되어 있는 독특한 페이지도, 모두같은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 허무한 날이 있는가 하면,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도 있을 것이다. 마스다 미리는 '보통의 매일이 지금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소박하고, 나름의 모습으로 활기찬 이들의 일상을 엿보면서 마음이 괜시리 따뜻해졌다. 너무도 평범해보이는 그 일상들 속에 따뜻함도, 뭉클함도, 서글픔도, 쓸슬함도 다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러니 마스다 미리의 작품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나 이번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100개의 손글씨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에피소드마다 '오늘의 인생'이라는 소제목이 쓰여 있는데, 이 부분을 독자들의 손글씨를 통해 채운 것이다. 덕분에 자연스레 단 하루도 똑같은 <오늘의 인생>은 없어졌다. 각자 외모도, 성격도, 환경도, 삶도 전부 다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손글씨 덕분에 이 작품은 정말 특별한 하루들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초판 한정으로 양장본도 소장용으로 너무 좋고, 현재 만날 수 있는 무선제본 역시 양장본 못지 않게 소장 가치가 있다. 바로 책 구매 시 받을 수 있는 '마스다 미리가 찍은 오늘의 식탁 사진이 본문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 덕분에 양장본을 가지고 있는 나도 무선제본 특별판이 또 탐이 나서 선물용으로 또 구매해볼 까 고민 중이다.

마스다 미리의 작품은 매번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매번 그만큼 더 좋아지는 것 같다. 신간이 나올 때마다 더 좋아지니, 그 책들이 쌓이고 쌓이면 대체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해야 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쉽게 읽히지만 자꾸만 다시 읽고 싶은 작품, 그리고 오늘 하루 마음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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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견주 1 - 사모예드 솜이와 함께하는 극한 인생!
마일로 지음 / 북폴리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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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일도 그렇고 해서 좀처럼 웃을 일이 없는 12월이다. 그런데 대형견의 로망을 산산조각 내주겠다는 만화 <극한견주> 덕분에 얼마나 배꼽잡고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깔깔대고 웃었던 적이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안나는데, 사묘예드 솜이 덕분에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유쾌하고, 가슴 찡하고, 행복했다.

사모예드는 시베리아의 눈처럼 하얀색 털이 인상적인 개인데, 썰매를 끌던 대형견이다. 웃는 듯한 얼굴을 가진 순한 인상이지만, 뭐 딱히 그렇지 만도 않다는 건 개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들 알 것이다. 보통 20~25키로 정도이니 정말 커다란 몸집의 '대형견'이다. 눈이 많이 내리는 시베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털이 매우 길고 풍성하다. 사모예드를 기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외모만을 보고 사모예드를 입양하지는 말 것을 권한다. 유난히 털이 많이 빠지는 견종이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 사묘예드를 목욕시키고 털을 말리는 과정을 공개한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솜사탕 기계에서 솜사탕을 만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변에 흰 눈처럼 털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바로 그 사모예드의 털에 관한 일화가 1화부터 펼쳐지는데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옥의 털갈이 시즌이었다.

우리 집 토토가 코카스패니얼로 중형견인데 무게가 15키로 정도된다. 우리 토토도 산책을 나가 보면 항상 큰 편에 속했는데, 사묘예드에 비하면 어린애처럼 보일 덩치라는 게 재미있다. 토토도 사실 털이 많이 빠지는 견종이라 집안 구석구석에 초코렛색 털 뭉치들이 굴러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어두운 색 옷들에도 개털 천지라 외출 시에는 반드시 정리가 필요하다. 그래도 사모예드 만큼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비로소 솜이의 에피소드들을 보고 나니 들었다. 그래도 토토는 이 정도는 아니니까 라는 위안이 살짝 들었으니 말이다.

 

 

  

털갈이부터 훈련, 산책, 목욕, 놀이 등등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잔뜩 담겨 있는데, 평범할 수도 있는 그 에피소드들이 다 너무 위트있게 그려지고, 센스있게 그려져 있어서 자연스럽게 킥킥댈 수밖에 없는 지점으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개를 키워본 적이 없는 이들이 보통 길거리에서 늠름한 자태의 대형견을 만나게 되면 로망이나 환상을 품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바로 그 대형견에 대한 환상을 극사실주의 에피소드들로 차근차근, 무참하게 박살내 준다. 북극곰과 솜사탕을 닮은 사모예드 솜이와 개그 만화작가 마일로,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언니까지 더해 이들의 일상은 그야말로 개그가 빵빵 터지는 순간들이었다.

 

  

토토도 외출 시에 돌아왔을 때 엄청나게 달려들어서 진정하라고 소리쳐야 할 만큼 격하게 반기는 편이었는데, 솜이의 주둥이 미사일 발사 에피소드는 정말 완전 공감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었다. 물론 지금은 토토도 나이를 먹으니 문 소리가 들릴 때부터 뛰쳐 나오던 애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름을 불러도 자느라 못듣거나,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경우가 더 많지만 말이다. 작가가 솜이의 그 버릇을 고쳐보겠다고 했다가 솜이의 울상에 마음이 약해지는 장면은 정말 너무도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볼 때마다 배꼽잡고 웃게 만든다.

솜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천둥번개라고 하는데, 개들이 거의 비슷한 지 토토 역시 천둥번개를 엄청 무서워한다. 쿠르릉 쾅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비가 많이 쏟아지기만 해도 혼자 있지 않고 사람의 체온을 느끼며 붙어 앉아 있거나, 무릎에 올라오거나 했으니 말이다. 솜이의 경우 파리채에 반응하는 에피소드는 정말 웃겼는데, 왜 그렇게 그 말을 무서워하는 지는 정말 솜이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했다.

 

 

동물들의 부위별 스킨십 호불호를 그려 놓은 페이지도 너무 웃겼는데, 고양이에 비해 강아지들은 대부분 어떤 부위도 스킨십 호불호 없이 좋아하는데 비해 솜이만은 싫어하는 부위가 많았다. 나름 순한 인상과는 달리 성깔이 있는 솜이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막 상상이 되었다. 침대에서 함께 잘 때 솜이가 거의 반 이상 자리를 차지해 정작 주인들은 이리 저리 피하다 결국 쇼파에 내려와서 자게 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실제 나도 경험해 본 적이 있어 중형견 이상의 개들을 데리고 사는 가족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식탁 위에 있는 하얀색 이불을 솜이인줄 알고 빨리 내려오라고 버럭 소리지른다거나, 병원에서 귀 치료를 하고 와서 건드리면 안되서 얼굴에 깔대기를 하고 있는 모습까지.. 아 정말 전부 토토를 통해서 경험해봤던 에피소드들이라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토토와의 지난 추억들도 떠올리는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마일로 작가는 데뷔작 <여탕보고서>로 독특한 개성과 유머 감각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케이툰 릴레이 웹툰 <진짜 멍> 시리즈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정식 연재하게 된 《극한 견주》는 요즘 가장 핫한 반려동물 웹툰이다. 덩치는 우람하지만 터널과 작은 개를 무서워하는 귀여운 허당 솜이와의 특별 에피소드와 실제 솜이의 사진들도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단행본에서만이라고 하니, 웹툰을 즐겨 봤던 이들에게도 특별한 선물이 될 것 같다. 사실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웹툰이나 만화는 굉장히 다양한데 비해, 개를 주인공으로 한 것은 조금 적은 편이라 아쉬웠었는데, 그 갈증을 <극한견주>가 일시에 해소해준 것 같다. 2권도 빨리 만나보고 싶고, 이 시리즈는 앞으로 무조건 챙겨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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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이름은 유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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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라는 이름의 게임입니다. 여기에는 면밀한 계획과 대담한 실행력이 요구됩니다. 게임인 이상 이겨야 합니다. 게임이라고 얕봐서는 곤란합니다. 세상에는 목숨을 건 게임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것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게임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습니다.

 

사쿠마는 대학 입시, 취업, 연애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게임으로 여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서 기쁨을 느껴왔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게임에서 진 적이 거의 없었다. 모든 일들에 대해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승리를 거둬 왔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광고기획사에서도 성공시키지 못한 기획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자신이 기획한 오토모빌 파크 아이디어로 기획이 마무리되어 이제 실행 사인만 나는 단계인데, 갑자기 닛세이자동차 측에서 해당 기획에 대해 전면 백지화를 선언한다. 오토모빌 파크에 딴죽을 건 사람은 새로 부사장에 취임한 회장의 아들인 가쓰라기였다. 게다가 가쓰라기는 새로운 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테니, 팀의 스태프를 새롭게 짜고, 리더인 사쿠마는 교체해달라는 요구를 한다. 사쿠마는 분노와 굴욕감으로 화가 치밀어 올라, 술김에 가쓰라기의 저택을 찾아간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그 집에서 젊은 여자가 담을 넘어 나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바로 부사장의 딸이었고, 사쿠마는 가쓰라기 와의 관계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기로 한다.

내 마음속에는 굴욕감과 투지가 믹서에 넣은 듯이 소용돌이쳤다. 게임이라고? 그렇군. 당신은 게임의 고수인 척하고 있다. 그렇지만 게임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고수인지 확실히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알고 보니 부사장의 딸 주리는 가스라기의 정식 딸이 아니었다. 가쓰라기는 20년 전에 합의 이혼했고, 지금 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는데, 주리는 전처의 딸도 아닌, 전 애인의 딸이라고 한다. 어릴 때 엄마가 병으로 죽고 나서 가쓰라기 집안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지금의 생활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왔다는 거다. 새엄마와 이복 동생들이 웃는 표정의 가면을 쓰고 그 동안 자신을 계속 무시해왔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는 말도, 행동도 다 공허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가출을 하고 보니 당분간 생활할 수 있는 돈이 필요했고, 주리는 사쿠마에게 자신을 유괴하지 않겠냐는 이상한 제안을 받게 된다. 부사장에게서 받은 굴욕감에 복수하고 싶었던 사쿠마는 주리의 제안에 응하게 된다. 주리는 가쓰라기 집안에서 돈을 빼낼 수 있고, 그는 가쓰라기와 제대로 된 승부를 겨뤄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두 남녀가 각자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기괴한 유괴 게임을 시작한다.

 

 

범죄라는 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돈을 노린 범죄는 회사에서 하는 일과 똑같다. 법망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궁리하는 대신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다. 협박도 거래와 다를 게 없다. 아니, 고집스러운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상담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편한 일이다.

 

이 작품은 '유괴'라는 범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전혀 어둡거나 심각하지 않다. 대부분 범죄 소설에서 유괴가 소재로 등장할 때는 남겨진 가족들 내지는 피해자의 시점과 범인을 쫓는 경찰의 시점이 등장하게 마련인데, 그 역시 전혀 없다. 시종일관 범인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유괴라는 범죄는 마치 장난처럼 경쾌하고,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로 속도감 있게 그려지고 있다. 부사장을 대상으로 그의 딸과 사쿠마가 함께 벌이는 이 게임은 전문 범죄자에 의해 진행되는 유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진행이 되고 있어 끊임없이 긴장감을 제공한다. 특히나 전혀 속을 알 수 없는 가쓰라기 부사장의 행동이 유괴 범죄의 성공여부와 별개로 미스터리를 더해주고,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게임처럼 살아온 사쿠마라는 독특한 캐릭터 역시 일반적인 범죄자와는 전혀 다른 매력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야. 맨얼굴을 드러내면 언제 어느 때 얻어맞을지 몰라. 이 세상은 게임이야. 상황에 따라 얼마나 적절한 가면을 쓰느냐 하는 게임."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에서도 손에 꼽히는 반전을 자랑하는 작품이라,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게다가 인질과 범인이 모의한 유괴 사건이라는 소재 역시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평범한 회사원과 아름다운 여대생이 쓰고 있는 가면 뒤의 진짜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이 작품의 묘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모두가 납득하는 살인 동기가 아니라, ‘이런 이유로도 사람을 죽여?’ 하는 추리 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그 현실적인 작의가 씁쓸하기도, 섬뜩하기도 하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다거나, 특별한 동기가 있어서 벌어지는 살인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다반수인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번 작품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 개정판으로 더 세련되고 감각적인 표지로 새로 출간되었으니, 이 작품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 분들은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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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재우고 나서 한숨 돌리는 시간, 밀린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어느덧 열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많이 안 좋으시다고, 간병인에게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살아 계실 때 얼굴이라도 보려면 지금 내려오셔야 할 것 같다고. 아빠는 몇 년 째 요양 병원에 계시다 얼마 전 폐에 이상이 생기고 상태가 나빠져 근처 큰 병원으로 옮기신 상태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고, 서둘러 가고 싶은 마음에 남편은 거의 공중 곡예 하듯이 차선을 바꾸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에도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즐비했고, 어두운 도로를 달리며 남편의 운전 속도 때문에 불안해지는 순간, 차라리 이대로 사고라도 나서 한날, 한시에 모두 함께 간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고, 그 뒤에 벌어질 많은 절차와 시간들이 두렵기만 했고, 이 모든 게 다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잠깐 휴게소에 들렀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에서 내내 주르륵 흐르던 눈물도 멈춰 버렸고, 갑자기 그 모든 비극이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차에 탔고 병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 톨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갑작스레 병원 냄새가 확 풍겼다. 추운 날씨라 당연히 차 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진 상태였고, 다들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와 약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차 안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걸까. 마치 시간이 멈춰버리고 만 것 같았다. 그것은 오늘 오후까지 내가 살아가던 세계와 동일한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직감했다. 아빠가 오셨구나. 저 세상으로 떠나시기 전에 우리를 보러 오셨구나. 나는 아빠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먹먹해져 버린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냥 여느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미워할 모든 것을 갖추고 사랑할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런 아버지였다. (215)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아빠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수술 뒤의 회복 과정을 지켜보고, 아버지가 실수로 욕실을 온통 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수습했던 그런 시간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제 다시는 손을 잡을 수도,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빠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는 동안 아무 것도 해드린 게 없었던 것이다. 요양 병원에 계신 이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겨우 서너 달에 한번씩 내려가서 잠깐 얼굴을 뵙고 오는 게 다였다. 치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엉뚱한 소리를 하실 때도, 처음에는 상대해드리다가 이내 지쳐버렸고, 나중에는 전화도 거의 받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 모든 시간을 후회하면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 필립이 노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고 말았다. 책 속에서 필립이 죽음이란 이십 대의 젊은이에게나 여든여섯의 노인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거라는 걸, 같은 크기의 두려움과 같은 크기의 절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죽음은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또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홀로 남겨진 엄마를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엄마를 챙기거나 존중했던 적이 없었던 아빠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언젠가는 겪게 될 죽음의 과정들이 두렵지는 않으셨는지. 엄마와 아빠가 살아오신 삶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부부가 뭔지 모르겠어... 새벽에 잠에서 깨, 그 사람 손을 슬그머니 그러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옆에 누워 잠든 그 사람이 이생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멀고멀게 느껴져서. (29)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대부분 결혼을 하는 순간에는 이와 비슷한 맹세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상대만 보이는 시간, 당신만 있다면 세상이 내 것만 같던 시간은 점차 당신이 있기 때문에 참지 못할 것 같던 시간으로 변해간다. 황혼 이혼이란 말이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뉴스에서 들리더니, 이제는 사후 이혼이라는 말까지 일본에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죽은 배우자와 이혼을 하겠다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김숨의 <당신의 신>에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설집 속 단편들은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혼>에서 민정의 어머니는 평생을 남편의 무시와 폭력에 시달리며,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아이 셋을 낳고 오십삼 년을 참고 사는 어머니를 보며 울화가 치민 민정은 직접 부모님의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소송을 청구해서라도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막상 어머니는 망설인다. 자신이 이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어머니의 삶이란 사실 현실 속 수많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곪아가는 부부도 있고, 이혼 후 추문에 휩쓸려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힘겹게 사는 여자도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삶도 그다지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40여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사셨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내 어머니가 뒤늦게라도 이혼을 하셨더라면, 조금은 더 편한 노후의 삶을 보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세상 속에서 완벽히 자유롭게 지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아빠가 먼저 떠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는 딸의 모습이 야박하다 싶기도 하지만, 나는 평생 뭐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산 엄마의 남은 여생이 더 걱정이 되었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182)

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 그들과 내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요즘 유행이다 싶은 것들, 혹은 이미 유행도 한참 전에 지나서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건 당연하고, 그들에겐 소소한 일상들이 내겐 너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투성이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한 생활이 3년 정도 되었는데,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새 3억 광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에 등장하는 '유리 볼 속 겨울'처럼,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가 바로 내 이야기였던 것이다. 김애란의 이번 작품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계절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과 결핍의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는 삶은 계절을 느낄 수 없다. 너무 이른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타인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그들 모두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과 뜨거운 열기 가득한 여름이라는 계절은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인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선택들과 내가 잃어버린 결핍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앞으로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 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자연스레 서울을 비웠던 그 며칠 이전과 별다를 바 없는 매일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아빠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이 든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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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12-13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필립 로스의 책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랍니다.
저도 3년 전 아버지 돌아가신 후 한동안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어요. 피오나님이 하시는 그런 주문이 여전히 필요하거든요.
피오나님의 이 글을 읽으니 또 울컥하고 뭐가 저 밑에서 올라오네요.

피오나 2017-12-13 18:46   좋아요 0 | URL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렇군요.. 평생을 함께한 부모이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겠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괜찮아 질 그 날까지.. 오래오래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해요.
 
골목길 자본론 -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가
모종린 지음 / 다산3.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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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가요에서도 가사로 골목의 쓸쓸함을 노래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골목길' 하면 핫한 카페 골목, 잘 나가는 상권들이 먼저 떠오르는 시대가 되었다. 가로수길, 망리단길, 샤로수길, 방배동 카페 골목, 성수동 카페골목 최근에는 서촌, 연남동 경의선 숲길 등등... 전부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말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는 예쁜 가게들, 웅성거리며 유행을 쫓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골목들을 가득 채운다. 밥을 짓고 세탁기를 돌리는 수수한 생활의 소리가 들리는 진짜 골목이 아니라, 주말마다 북적이는 상점들의 골목에서 생활은 자꾸만 사라지고 상업화는 계속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골목길 경제학자 모종린 교수는 "왜 다시 골목길에 사람이 모이는가?"에 대해서 주목한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공간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사람과 돈이 모이는 도시는 어떻게 디자인되는지 , 다양한 도시문화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어서 골목길을 하나의 자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1990년대 중반 무렵 홍대에서 시작된 골목길 상권은 2000년대 중반 급성장해 연남동, 연희동, 부암동, 성수동 등 서울시 내에서만 20~30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최근에는 전주 한옥마을,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해운대 달맞이고개, 대구 김광석거리 등 지방 도시의 골목도 떠오르는 골목상권으로 주목받고 있다.

 

골목길 경제학은 골목길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단순하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정부 지원과 보호, 골목을 바라보고 즐기는 감상적인 접근만으로는 우리의 소중한 골목문화를 지켜내고 발전시킬 수 없으니 말이다. 골목 상품에 대한 수요,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의 상품을 공급할 수 있는 생산자, 그리고 상권 공공재에 대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투자를 창출할 수 있는 상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도심의 골목이 더럽고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인식되던 시절을 알지 못한다. 도심의 골목길이 막 부활하던 시기에, 가로수길, 삼청동, 이태원 등에서 그 문화를 함께 즐겼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골목길이 중요한 관광과 문화자원으로 주목받는 현상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대구의 근대문화거리, 전주의 한옥마을 등은 지역 정부가 주도적으로 조성한 골목상권으로 지역의 특수성도 살리고, 관광산업으로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홍대 지역이 연남동, 연희동, 상수동, 합정동으로 점점 확정되어 핫한 플레이스들이 늘어나는 것도 좋다. 놀 거리, 먹 거리, 살 거리, 그리고 풍성한 볼거리들이 가득한 골목들이 많아지는 것이니 말이다.

 

 

골목상권이 뜨면서 골목경제와 골목문화 발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골목상권 정책이 일반 시민들에게도 중요한 정책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은 그것도 꾸준히 성장해 젠트리피케이션이 주요 사회적 논쟁거리가 될 만큼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됐던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저자는 말한다. '장인 공동체' 만이 젠트리피케이션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상인이든 건물주든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파트너로서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같은 배를 탔다는 공동체 정신을 발휘할 때에만 골목상권의 경쟁력은 지속 가능해진다.

이 책에서는 서울 시내 주요 상권의 분석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다루고 있다. 골목문화는 단순히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소비문화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도심에서 일하고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동차를 포기한 일본 소도시의 사례,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완벽한 골목상권을 보여주고 있는 도쿄, 전통문화를 위해 골목길을 복원하고 있는 상하이, 역사가 작품이 되는 도시 에든버러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사례들은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이 지역 문학 공동체의 중심지는 독립서점이다. 독립서점들이 지역 장가와 독자를 연결한 새로운 출판문화와 공동체문화를 창조했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토론하고 다양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면 작가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지역의 유능한 작가를 발굴하고 독자와 직접 소통하도록 연결해주는 독립서점이 가득한 브루클린을, 우리는 문학 중심지로 여긴다.

 

세 집 중에 적어도 한 집은 소설가가 산닫고 할 정도로 소설가들이 많이 산다는 브루클린의 사례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작가의 거리는 사라지는 추세이지만, 뉴욕의 독립서점, 독립출판의 중심지로 부상한 브루클린만큼은 예외다. 뉴욕 언론은 여행자에게 조언한다. 미국 현대 문학의 거장을 거리에서 만나고 싶다면 브루클린 독립서점 여행을 떠나라고. 독립서점들은 지역 작가를 위해 독서회와 저자 사인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브루클린 작가들은 유별나게 출신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한다. 독립서점이 지역 독자와 작가가 만나고 대화하는 일종의 사랑방이라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이 부분은 요즘 국내의 독립 서점들이 부활하고 있는 시점이라 더욱 공감할 만한 부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지난 2016년 젠트리피케이션은 언론과 SNS의 가장 뜨거운 이슈로 주목받았다. 한 유명 연예인 소유 건물에 임차한 음식점의 강제 철거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한 것이다. 골목상권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하고 골목상권의 공급이 원활할 때 새롭게 골목상권으로 형성된 지역에서 주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다. 저자는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의 조건이 골목상권에 대한 수요 증가라면 골목상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수요 분석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모델로 장인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도시재생부터 젠트리피케이션 대책까지, 사람 중심의 골목길을 제안하는 저자의 프로젝트는 경제학의 눈으로 경쟁력이 있는 도시와 골목길의 비밀을 알려준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골목길을 즐겨야 하는지를 제안하는 것을 시작으로, 골목길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물리적 조건과 문화적 조건을 모두 검토하고 있는 이 책은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제 이야기이면서 우리가 익히 접하고, 이용하는 골목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경제학에는 전혀 문외한인 나같은 독자도 이제는 골목길에 왜 경제학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 알 것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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