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재우고 나서 한숨 돌리는 시간, 밀린 일들을 해치우다 보니 어느덧 열두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많이 안 좋으시다고, 간병인에게 연락이 왔는데 아무래도 살아 계실 때 얼굴이라도 보려면 지금 내려오셔야 할 것 같다고. 아빠는 몇 년 째 요양 병원에 계시다 얼마 전 폐에 이상이 생기고 상태가 나빠져 근처 큰 병원으로 옮기신 상태였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고, 서둘러 가고 싶은 마음에 남편은 거의 공중 곡예 하듯이 차선을 바꾸고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에도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즐비했고, 어두운 도로를 달리며 남편의 운전 속도 때문에 불안해지는 순간, 차라리 이대로 사고라도 나서 한날, 한시에 모두 함께 간다면 그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고, 그 뒤에 벌어질 많은 절차와 시간들이 두렵기만 했고, 이 모든 게 다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잠깐 휴게소에 들렀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결국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이상하게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차에서 내내 주르륵 흐르던 눈물도 멈춰 버렸고, 갑자기 그 모든 비극이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차에 탔고 병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전 톨게이트를 지나는 순간, 갑작스레 병원 냄새가 확 풍겼다. 추운 날씨라 당연히 차 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진 상태였고, 다들 아무 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병원 특유의 냄새와 약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차 안의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걸까. 마치 시간이 멈춰버리고 만 것 같았다. 그것은 오늘 오후까지 내가 살아가던 세계와 동일한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직감했다. 아빠가 오셨구나. 저 세상으로 떠나시기 전에 우리를 보러 오셨구나. 나는 아빠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나는 먹먹해져 버린 마음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냥 여느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존재에게서 미워할 모든 것을 갖추고 사랑할 모든 것을 갖춘 바로 그런 아버지였다. (215)

필립 로스의 <아버지의 유산>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아빠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수술 뒤의 회복 과정을 지켜보고, 아버지가 실수로 욕실을 온통 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수습했던 그런 시간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이제 다시는 손을 잡을 수도,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빠의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는 동안 아무 것도 해드린 게 없었던 것이다. 요양 병원에 계신 이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겨우 서너 달에 한번씩 내려가서 잠깐 얼굴을 뵙고 오는 게 다였다. 치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엉뚱한 소리를 하실 때도, 처음에는 상대해드리다가 이내 지쳐버렸고, 나중에는 전화도 거의 받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 모든 시간을 후회하면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 필립이 노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고 말았다. 책 속에서 필립이 죽음이란 이십 대의 젊은이에게나 여든여섯의 노인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거라는 걸, 같은 크기의 두려움과 같은 크기의 절망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죽음은 무자비하지만, 그만큼 또 누구에게나 공정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홀로 남겨진 엄마를 생각한다. 살아오면서 한번도 엄마를 챙기거나 존중했던 적이 없었던 아빠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언젠가는 겪게 될 죽음의 과정들이 두렵지는 않으셨는지. 엄마와 아빠가 살아오신 삶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부부가 뭔지 모르겠어... 새벽에 잠에서 깨, 그 사람 손을 슬그머니 그러잡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 옆에 누워 잠든 그 사람이 이생에서는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멀고멀게 느껴져서. (29)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대부분 결혼을 하는 순간에는 이와 비슷한 맹세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오직 상대만 보이는 시간, 당신만 있다면 세상이 내 것만 같던 시간은 점차 당신이 있기 때문에 참지 못할 것 같던 시간으로 변해간다. 황혼 이혼이란 말이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뉴스에서 들리더니, 이제는 사후 이혼이라는 말까지 일본에서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죽은 배우자와 이혼을 하겠다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김숨의 <당신의 신>에는 결혼과 이혼에 관한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소설집 속 단편들은 결혼제도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혼>에서 민정의 어머니는 평생을 남편의 무시와 폭력에 시달리며,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았다. 아이 셋을 낳고 오십삼 년을 참고 사는 어머니를 보며 울화가 치민 민정은 직접 부모님의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소송을 청구해서라도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지만 막상 어머니는 망설인다. 자신이 이혼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어머니의 삶이란 사실 현실 속 수많은 우리들의 어머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 속은 곪아가는 부부도 있고, 이혼 후 추문에 휩쓸려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힘겹게 사는 여자도 있었다. 아빠와 엄마의 삶도 그다지 평화롭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40여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사셨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내 어머니가 뒤늦게라도 이혼을 하셨더라면, 조금은 더 편한 노후의 삶을 보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온전히 하나의 존재로 세상 속에서 완벽히 자유롭게 지내실 수 있지 않았을까. 아빠가 먼저 떠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하는 딸의 모습이 야박하다 싶기도 하지만, 나는 평생 뭐하나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산 엄마의 남은 여생이 더 걱정이 되었다.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182)

오랜 만에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가끔 그들과 내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요즘 유행이다 싶은 것들, 혹은 이미 유행도 한참 전에 지나서 이제는 다들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가 전혀 모르고 있는 건 당연하고, 그들에겐 소소한 일상들이 내겐 너무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투성이였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한 생활이 3년 정도 되었는데,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어느 새 3억 광년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에 등장하는 '유리 볼 속 겨울'처럼,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가 바로 내 이야기였던 것이다. 김애란의 이번 작품집에 등장하는 이들은 계절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지고 있다. 살면서 누구나 겪게 되는 상실과 결핍의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깥은 여름인데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는 삶은 계절을 느낄 수 없다. 너무 이른 아이의 죽음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사는 부부, 타인을 위해 죽은 남편을 이해해야 하는 아내, 가족 같은 개가 편하게 죽을 수 있도록 혼자 힘으로 안락사를 준비하는 소년 등.. 그들 모두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과 뜨거운 열기 가득한 여름이라는 계절은 감당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지나가고 인생은 흘러가게 마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느 한 순간부터 그저 상실된 시간, 멈춰진 삶인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선택들과 내가 잃어버린 결핍들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앞으로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 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일상은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네 살짜리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엄마가 감정이란 사치를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에게 애도의 시간을 가질 여유란 전혀 없었다. 자연스레 서울을 비웠던 그 며칠 이전과 별다를 바 없는 매일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빵집에 들렀는데 이제 막 구운 소보로를 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다지 좋아하는 종류가 아니었음에도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고른 빵들과 함께 계산을 했다.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집으로 향하는데, 들고 있는 봉투 속 빵의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가슴이 꽉 메어져 왔다. 아빠는 이제 좋아하는 소보로 빵을 드시지 못하는 구나. 하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거리를 걸어가는 중이었으므로, 눈물을 참고 꾹꾹 삼켜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하루의 대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살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에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았지만, 시간은 여전히 째깍째깍 흘러가고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상실과 결핍의 순간보다, 나는 그 이후의 시간들이 더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다. 남아 있는 이들은 부재의 무게를 이겨내고 살아가야만 하니까. 아침은 매일 같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어제와 같은 아침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잃어버린 것은 영원히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누가 세상에서 사라졌든 말든,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흘러갔지만, 아빠에겐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그대로 일 테니까. 가끔은 나만 빼고 지구가 자전하기라도 하는 듯, 혼자 그렇게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한 기분이 든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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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7-12-13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필립 로스의 책을 선뜻 선택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랍니다.
저도 3년 전 아버지 돌아가신 후 한동안 허무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지금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어요. 피오나님이 하시는 그런 주문이 여전히 필요하거든요.
피오나님의 이 글을 읽으니 또 울컥하고 뭐가 저 밑에서 올라오네요.

피오나 2017-12-13 18:46   좋아요 0 | URL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렇군요.. 평생을 함께한 부모이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하겠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괜찮아 질 그 날까지.. 오래오래 부모님의 모습을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