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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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 반질거리는 흰 벽 뒤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위한 성스러운 오아시스를 지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사기극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쓸데없이 기웃거리지 말고 꺼지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난 어떻게든 이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더 굳게 마음먹었다.

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을.            p.26


난해한 현대 미술 앞에서 당황스러웠던 적 있을 것이다. 이게 대체 왜 아름다운 건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 앞에서 예술가들과 큐레이터,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낸다. 왜 예술은 대중을 따돌리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비앙카 보스커는 문화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팔고, 작업실에서 작가들을 돕고,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몇 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유는 단 하나, 현대 미술을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었고, 동시대 미술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장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정 분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가장 깊은 곳까지 완벽하게 들어가서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비앙크 보스커는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낸다. 철옹성 같은 ‘순수 예술계’에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신세계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그간 살아왔던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이 어디까지 지저분해질 수 있는지 목격한다. 우선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으로 갤러리에서 일해보기로 한다. 예술 작품을 노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에. 경험상 이런 일은 몸으로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작은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첫 업무는 아홉 겹의 페인트칠이었다. 그렇게 브루클린의 작은 갤러리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마이애미 아트 페어에서 그림 판매에 열을 올리고, 전시회 큐레이터와 신진 예술가의 작업실 조수를 거쳐,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기 까지의 여정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때까지 나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관객으로만 미술관을 경험했지 배지를 달고 출입 통제 구역을 드나든 적은 없었기에 미술계의 최상층이요, 궁극의 지향점이라는 이 공간의 내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도망갈 곳 없이 매일 몇 시간씩 예술 작품 옆에 있는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나는 줄리의 작업실에서 예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미술관 경비원 업무로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들 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 오래 작품을 보는 사람이 경비원일 것이다. 경비원은 컬렉터보다도 오래 본다.             p.382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위해 수년간 부단히 애를 쓴 저자의 이야기는 예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서, 예술 작품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예술 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한 작품에 할당하는 평균 시간은 17초라고 한다. 이 또한 작품 앞에 멈춰 선 경우만을 계산한 것이라, 실제 평균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한 작품을 40분간 노려보는 일 따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15대의 보안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휴대폰을 꺼내면 해고당한다는 위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구역을 지키는 40분 동안 단 한 작품만 바라보는 실험을 하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예술 작품과 관계를 맺을 때, 작품이 달라지고 자신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깨닫는다. 미술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있는 모든 작품을 꾸역꾸역 삼킬 필요없이, 원하는 몇 가지만 집중에서 보면 된다고 말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몇 주 동안 같은 작품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고, 관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예술은 선택이다. 안일함을 거부하는 선택이고, 더 풍요롭고 더 불편하고, 더 영혼을 강타하고, 더 불확실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다. 무엇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은밀한 진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 완전히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자신만의 미학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해 굉장히 흥미로웠다. 무언가를 이론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동시대 미술에서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날 것 그대로의 예술계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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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숨 - 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유경수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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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후변화, 악화하는 지구 생태계, 변화하는 식량 수요에 맞서, 이 집이 무너질 조짐은 없는지 물어볼 때가 되었다. 사 층짜리 집이 덩치에 걸맞게 좋은 이웃인지, 즉 모든 이에게 고르게 양질의 영양을 제공하며, 작은 규모에선 주변의 생태와 환경에 도움이 되고, 지구 규모에선 기후변화를 극복하는 데 기여하는지 물어볼 때가 되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은 계속해서 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아래층을 찾아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아래층에는 마법과도 같은 오래된 기술이 새로운 발견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p.169


식물을 많이 키우다 보니 흙 냄새를 맡을 일이 자주 있다. 흙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해서도,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찾아 보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흙을 만드는 데 식물과 동물 및 미생물이 맡은 역할이 크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흙에 대한 공부는 생태학으로 이어지고, 또 그것은 지질학으로 연결된다. 이 책은 미네소타대학의 토양학자 유경수 교수가 쓴 흙에 관한 탐구를 담고 있다. 토양생태학이라는 장르 자체가 생소하게 느껴졌는데, 그만큼 낯선 세계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매우 흥미진진한 책이었다. 


'수만 년 전 죽은 동식물에서 유래한 오래된 유기물부터 조금 전 뿌리에서 분비된 최신 유기물까지 서로 다른 시간이 뒤죽박죽 공존하는 곳이 흙'이라는 점이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흙은 수십만 년 혹은 수백 만년에 흐르는 시간들을 고스란히 겪고 그만큼의 이야기들을 축적시켜왔다. 그러한 흙이 숨을 쉬고 있다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20여 년 전 흙 공부를 시작할 무렵, 자신을 사로잡은 주제가 '토양 호흡'이었다고 말한다. 시작은 물리학이었는데, 점차 생태학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된 계기도 '토양 호흡'이라는 단어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토양학, 생태학, 지구과학에서는 토양 호흡 측정이 매우 흔한 작업이라고 한다. 그 방법은 사람이 수작업으로 하는 것인데, 직경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체임버를 통해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을 해 토양의 날숨을 알아보는 것이다. 토양 호흡을 대지의 숨결로 이해한 저자는 그 말이 가리키는 어떤 광대함과 아름다움에 홀려 숨이 막혔다고 하니, 과학자의 낭만인가 싶어 흐뭇해졌다. 




토양 호흡은 커다란 숨이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화석연료를 태워 나오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2023년을 기준으로 368억 톤이다. 흙이 해마다 뱉어내는 이산화탄소는 그것의 대충 열 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인류가 화석연료를 태우기 시작할 때까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지난 80만 년 동안 300피피엠을 넘지 않았다. 지구 규모에서 흙이 탄소중립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 같은 균형은 거대한 숨의 한 부분인 인간의 숨에서도 유효하다. 당신이 해마다 꼬박꼬박 배출하는 250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 또한 광합성을 통해 당신의 식량이 된 250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와 해마다 '퉁을 치고' 있는 것이다. 지구의 긴 역사를 통해 꾸준히 반복된 이 균형은 알면 알수록 위태롭다.                 p.339~340


이 책은 흙 속의 산 것과 죽은 것들의 순환, 농사와 지구 사이의 관계, 기후 변화, 지속가능성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부지런히 발로 뛰며 채집한 지구 곳곳의 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일 년에 수차례씩 답사와 탐사 여행을 떠난다고 하는데, 전라남도 진도부터 하와이의 화산섬, 인도 히말라야 기슭, 그리고 북극권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전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방대한 스케일만큼이나 깊이 있는 고민과 통찰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농경 방식 중 하나인 '화전'으로 경작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히말라야의 해발 1000~3000미터 사이에 자리 잡은 나갈랜드에 가고, 캘리포니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땅 구덩이를 파고 드러난 토양층을 관찰 기술하기도 한다. 스웨덴의 라플란드에서 100년 넘게 버려진 사미족의 순록 캠프를 방문해 대형 초식동물이 누비던 빙하기 시대의 북구를 상상해보고, 태평양의 화산섬 하와이와 사모아에서 수백만 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 흙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이 책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을, 시간적으로는 1만 년 전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 시점인 2100년까지를 아우른다. 그 장대한 여정에서 흙에 기반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고 지속가능성을 같이 고민해본다. 기독교에선 '재의 수요일'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라"는 경구와 함께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새긴다고 한다. 흙은 인간의 시작이자 끝인 것이다. 흙을 파괴하는 것은 본향을 죽이는 일이자 돌아갈 곳을 없애는 일임에도, 생계를 유지하려면 흙을 갈아 엎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기후변화와 생태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흙은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제외하고, 가장 오랜 시간 가장 깊이 경험한 자연이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부분인 '흙'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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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번 랜드 - 에드워드 리 셰프가 안내하는 버번 위스키 가이드북 에드워드 리 컬렉션
에드워드 리 지음, 정연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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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버번 위스키에는 말린 과일과 단맛이 느껴지는 동시에 쓴맛과 깊은 맛을 선사하는 풍미가 있다. 나는 이 맛을 오로지 '과일 가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마치 옥수수가 어두운 색의 달콤한 과일로 가득 찬 가죽으로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다. 홉피는 버번 위스키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옥수수 풍미가 정확히 어떻게 변하는지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호밀은 스파이시한 풍미를 냅니다. 보리는 전분 느낌이 있지만 단맛이 조금 더 강하죠. 그 어떤 것을 오크통에 넣는다 해도 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마찬가지예요. 마법의 비결은 바로 옥수수라고 할 수 있죠." 그가 말했다.             p.92


<스모크 앤 피클스>, <버터밀크 그래피티>에 이은 에드워드 리 셰프의 세 번째 책이다. <스모크 앤 피클스>에서는 에드워드 리의 개인적인 성장 과정과 요리 세계가 확장되는 여정을 따라 소, 돼지, 양, 해산물, 피클, 버번에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 다룰 수 있는 모든 식재료에 대해 이야기했다. ‘요리’가 단순한 조리 행위가 아닌 문화와 정체성, 가족, 인간관계를 탐구하는 방식이자 자신의 뿌리와, 딛고 사는 터전에 대한 사랑이라는 그의 철학이 페이지마다 담겨 있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버터밀크 그래피티>에는 그가 2년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 음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문화와 정체성에 관한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음식의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이민자를 만나고, 그 과정이 고스란히 이민자들의 요리와 미국 음식의 이야기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책이었다. 




이번에 나온 <버번 랜드>는 미국 대표 위스키인 ‘버번’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식재료로서의 버번을 활용한 레시피를 담은 책이다. 요리사지만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문학도이기도 한데,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더 좋아하기에 이번 책도 매우 기대하며 읽었다. 버번 위스키가 오크통 속에서 숙성되는 데는 4년에서 6년, 8년, 그보다 더 긴 세월이 필요하다. 그 세월 동안 액체가 숙성되는데, 기업의 비밀과 가문의 레시피, 전승되는 지식, 역사와 전통이 증류소 위를 맴도는 유령처럼 벽을 통과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그는 버번을 가리켜 언제 만나도 마음 편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소개하는데, 그만큼 모든 페이지에 애정이 듬뿍 묻어 있다. 


이 책에는 버번 위스키의 제조 과정과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버번 테이스팅 법, 잔과 얼음 고르는 법, 손님들에게 위스키를 대접하는 법, 위스키 수집하는 법 등 그가 애정을 갖고 공들여 탐구하며 알게 된 버번 위스키 정보들이 가득하다. 여타의 위스키 가이드북과는 다른 특별함은 버번을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에드워드 리만의 버번 활용 레시피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버번 위스키는 켄터키 최고의 증류주로 시작해서 미국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버번 위스키가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옥수수를 재배하고, 화이트 오크를 발견하고, 구리를 두들겨 증류기를 만들고, 효모를 잡아내고, 계절이 네 번 지나며 오크통 속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던 미국의 작고 구석진 하나의 주인 켄터키에서 시작된 것이다. 다음에 버번 위스키 병을 열 때 이 점을 생각해주길. 그리고 눈을 감고 맛을 보며, 그 모든 역사와 전도유망한 미래가 잔 속에서 뒤섞이는 것을 느껴보자. 건배!               p.278


이 책에는 버번 위스키의 제조 과정과 역사, 켄터키의 유명 증류소 투어와 버번의 주요 인물 인터뷰 등 위스키에 대한 정보들이 가득한데 그 중 어떤 것도 단순 나열식 설명으로 그치는 것이 없다. 그의 문장들은 감각적이고, 문학적이며, 사색적이고, 매혹적이다. 특히나 그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것을 단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위스키를 마셔본 적이 없는 사람조차 그 맛과 향, 풍미를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으니 말이다. 


버번 위스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핵심 요소는 불과 옥수수, 오크, 효모, 구리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구성 요소 안에 버번 위스키의 풍미를 결정하는 핵심이 존재한다. 여섯 번째 요소는 물이지만, 이건 풍미의 구성 요소라고 할 수는 없고, 누군가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지만, 이는 좀 더 철학적인 개념에 가깝다. 향과 단맛과 짠맛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쩐지 알 것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버번 위스키는 도수가 높은 술이라 아직 마셔볼 기회가 없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미국 출간 당시부터 위스키 애호가들의 필독서로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고, 2025 IACP 어워드 와인, 맥주 부문 파이널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단순한 위스키 교본이 아니라 버번을 만들고, 마시고, 소비하는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며, 한 잔의 술이 담아낸 욕망과 갈등, 자부심과 상처의 기록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리 셰프를 작가로서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음식과 요리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름의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웬만한 소설 읽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책 역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버번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요리로 즐기는 버번의 세계도 매우 흥미로웠다. 버번을 요리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끓여서 에탄올을 거의 날리고 알코올은 최소한만 남긴 상태로, 풍미가 농축된 액체 상태로 만든 다음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렇게 졸인 버번 위스키는 유리병이나 기존 위스키 병에 담아서 실온에 수 개월간 보관할 수도 있다. 고기에 풍미를 더해주고,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도 하고, 생선을 효과적으로 절여주기도 하며, 날카로운 맛을 부드럽게 다듬어주기도 한다. 음식과 페어링해서 마시는 버번 위스키의 맛도 궁금하고, 버번 농축액을 사용한 요리의 풍미도 너무 궁금해졌다. 위스키를 즐기고,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잘 몰라도 상관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버번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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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소비 생활
가제노타미 지음, 정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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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돈을 쓰지 않고 지내는 것은 근력 운동과 같다. 가끔 생각났을 때만 하면 충분하지 않고,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야 좋은 습관이 생긴다. 오지에 살지 않는 한, 요즘 시대를 사는 사람은 대부분 돈을 조금 내면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불편도 해소할 수 있다. 상당히 돈을 쓰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어떻게 생각해도 바로 돈을 쓰는 편이 쉽다. 그렇다고 해서 일일이 절약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앞으로 소개하는 방식처럼 돈을 쓰지 않을 방법을 일상에 녹여두면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p.88~89


월급은 늘어나지 않는데, 물가는 높아만 가고, 카드값은 줄지 않고, 필요한 소비는 많아진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매달 생활비며 식비 등 고정 지출비를 제외하고, 일정 금액을 저축하며, 과소비는 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지만 모아 놓은 돈은 많지 않고, 월급은 카드값으로 다 빠져 나가고, 늘 돈이 부족하기만 하다. 딱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 나왔다. 이름하여 '저소비 생활'! 기존의 통념과 다른 절약 방식으로 화제를 모아 출간 후 아마존 재팬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던 화제의 책이다. 




저자인 가제노타미는 돈과 생활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라이프 스타일 유튜버이다. 갖은 시행착오를 겪고 현재 월세 포함 한 달 생활비 70만 원 이하의 생활에 도달했다고 하는데, 가능한 걸까? 도쿄 도심에서 살면서 생활비가 70만원이라니... 너무 궁금해졌다. 어떻게 해야 생활비를 줄이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하고 싶은 일을 참기보다 불필요한 물건을 짊어진 생활이나 소비 흐름을 제자리로 되돌린다고 생각하면, 자연스레 생활이 간소화되고 돈이 이전보다 필요 없어진다고. 그래서 이 책은 돈의 사용과 관리 방법, 의식주와 관련된 생활 습관과 사고방식까지 저자가 스스로 만족스러운 상태를 추구하며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어낸 저소비 생활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 준다. 




사람의 의식은 참으로 신기해서 이미 가진 게 많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많다고 느껴지고, 없다고 생각하면 없다고 느껴진다. 그렇다면 자신이 만족하는 쪽을 선택해야 마음도 가벼워지고, 불필요한 일도 줄어든다... 이미 가지고 있고, 이미 갖추고 있음을 의식하면 초조함이나 불안함을 느낄 때 신기하게도 마음이 안정된다... 처방은 단 하나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바꾸면 된다.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만 있어도 낭비가 줄어들어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생활할 수 있다.                p.244~245


'보복 저축'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는 해외여행, 명품, 외식에 지갑을 열던 '보복 소비'의 반대 개념으로, 생활필수품 이외에는 거의 소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극단적 소비 절제 현상이 MZ세대 사이에서 특히 관심을 끌고 내 집 마련 꿈을 이뤄줄 유일한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외식비가 급등하는 등 고물가로 인해 '짠물 소비'가 확산되고 있어, 편의점 마감세일 등이 인기라는 보도도 있었다. 절약에 관련된 키워드는 세대를 불문하고 관심이 뜨겁지만, 문제는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실제 자신의 월 생활비를 고정비와 변동비로 나누어 항목별로 보여준다. 생활비를 먼저 정하고, 그 이외의 금액은 모두 저축하는 방식으로 했더니, 생활비 낭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수입대비 돈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부터 소비를 줄이는 도구까지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돈, 의식주, 생각이라는 카테고리로 구성해 각각의 항목들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정리된 책이었다. 특히나 '저소비 생활'이 극단적인 절약이나 물건을 줄이는 미니멀리즘과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의 나'로 돌아가는 작업'이라는 저자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회사원으로 일할 때는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돈을 들여 보충해야 할 일이 많았다면, 회사를 그만 두고 지금의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다.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자가발전 시스템을 설치하는 것과도 같다고, 자가소비 시스템으로 생활과 내면이 채워지면 누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추가 서비스 요금이 필요하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생활비가 줄어든다는 거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돈을 쓰는 행위나 돈 자체가 아니라 결국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달려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아무리 절약해도 힘이 들다면 행복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내가 무엇에 행복을 느끼고, 평소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면 좋을지 의식하기 시작하면 불필요한 소비도 줄어들고, 저소비 생활도 더 충실해진다고 말이다. 자, 총 조회 수 2,400만 화제의 절약법이 궁금하다면, 의미 없이 쓰고 후회하는 소비 패턴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소비가 줄면 행복도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한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더 건강하고, 여유롭게, 저비용 고만족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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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안 스파르 그림,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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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는 내가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아도 괜찮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은 남다른 사람을 보면 불편하다고 말해. 자기들이 생각하는 '정상'의 개념에 맞지 않는 걸 보는 게 싫은 거야. 그런데 '정상'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집단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특별해 보이는 걸 억누르려고 '정상'이라는 개념을 스스로한테 강요하는 것뿐이야. 이제 백여 년 전 걸작을 너한테 보여 줄게. 그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그림이야."               p.47


11살 오로르는 신비한 힘을 가진 아이다. 사람들의 눈을 보면 하고 싶은 말과 생각하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로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자폐아라고 부른다. 오로르는 소리내어 말을 하는 대신 태블릿에 글을 써서 말한다. 학교에 가는 대신 조지안느 선생님과 공부하고, 선생님이 제안한 태블릿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데 1년도 넘게 걸렸다. 지금은 아빠보다도 빠르게 타자를 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의사 소통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오로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읽는 힘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 엄마와 아빠, 세살 많은 언니도 모른다. 조지안느 선생님과 주베 형사님만 알고 있다. 이 특별한 능력 덕분에 오로르는 주베 형사의 부관이 되기로 하는데, 이번 작품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데 아주 큰 활약을 하게 된다.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에서는 오로르가 드디어 학교에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진짜 학교에 다니는 건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라 오로르는 신이 난다. 하지만 친구들은 오로르가 아는 게 많다고 잘난 체 한다고, 왜 그렇게 유별나느냐고 생각한다. 남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고, 다른 사람들처럼 입으로 소리 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로르는 남들과 다른 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은 슬픈 일도 화낼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편에서 루시 언니의 실종 사건을 통해 만난 주베 형사의 부탁으로 오로르는 용의자 심문에 참여하게 된다. 열아홉 살 소녀가 아주 심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르의 역할은 델핀의 생각을 읽고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거였다. 하지만 오로르는 보다 깊숙이 사건 해결에 참여하게 되고, 매우 위험한 상황 처하게 되기도 하지만, 정말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오로르, 인생은 아주 거대한 이야기야. 우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렇지만 곧 끝나겠지. 그래서 나는 조금 슬펐다. 물론 나는 선생님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이야기는 그 사람의 삶에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이, 모든 모험이, 자기 인생이라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다음 모험으로!                  p.298


더클라스 케네디는 자폐 스펙트럼 안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이 작품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다섯 살 때 아들은 병원에서 평범한 삶을 살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런던 대학교 석사 학위를 따고 사진가로 완전히 독립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아들을 보며 다름은 틀린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덕분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장애로 규정된 인물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다름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멋지게 활용할 줄 아는 주인공, 오로르가 탄생한 것이다. 오로르는 세상에 없는, 너무도 용기있고, 긍정적이며, 밝은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캐릭터이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있으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리고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아주 끔찍한 생각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걸 두려워할 때가 많다.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 자신들이 어떻게 비칠지 두렵기 때문에, 누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거나 그냥 좀 남다르면, 불편하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로르는 세상 무해한 얼굴로, 진실을 말한다. 우리 각자가 다른 건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 내가 남들과 다른 것도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오로르의 주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상황 속에서 고민과 슬픔을 갖고 있다. 오로르는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생각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통해 그들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나서서 문제가 해결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너무도 순수하고, 현명한 시선으로 말이다. 오로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에 아이들이 읽기에도 좋지만, 사실 동심을 잃어 버린 어른들에게 더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이번에 오로르 시리즈의 두 번째 이야기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은 오로르>가 새 옷을 입고 나왔다. 이 시리즈는 국내에 세 권 출간되었는데,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가 첫 번째, 그리고 <뉴욕의 영웅이 된 오로르>가 세 번째 작품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이 예쁜 리커버가 나왔으니, 곧 세 번째 이야기도 새로운 표지로 나올 것 같아 기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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