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스파이가 있다 - 어느 문외한의 뉴욕 현대 예술계 잠입 취재기
비앙카 보스커 지음, 오윤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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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저 반질거리는 흰 벽 뒤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위한 성스러운 오아시스를 지키려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사기극을 은폐하려는 것일까? 쓸데없이 기웃거리지 말고 꺼지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난 어떻게든 이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더 굳게 마음먹었다.

나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을.            p.26


난해한 현대 미술 앞에서 당황스러웠던 적 있을 것이다. 이게 대체 왜 아름다운 건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 앞에서 예술가들과 큐레이터, 비평가들은 찬사를 보낸다. 왜 예술은 대중을 따돌리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비앙카 보스커는 문화 저널리스트로 활발하게 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갤러리에서 미술품을 팔고, 작업실에서 작가들을 돕고,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몇 년의 시간을 보낸다. 이유는 단 하나, 현대 미술을 미치도록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바라보는 안목을 키우고 싶었고, 동시대 미술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슨 장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특정 분야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가장 깊은 곳까지 완벽하게 들어가서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행동에 옮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비앙크 보스커는 그 어려운 일을 기어코 해낸다. 철옹성 같은 ‘순수 예술계’에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신세계를 온몸으로 겪어낸다. 그렇게 몇 년에 걸쳐 그간 살아왔던 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순수'한 예술이 어디까지 지저분해질 수 있는지 목격한다. 우선 모두의 허를 찌를 깜찍한 계획으로 갤러리에서 일해보기로 한다. 예술 작품을 노려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에. 경험상 이런 일은 몸으로 배우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 작은 갤러리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첫 업무는 아홉 겹의 페인트칠이었다. 그렇게 브루클린의 작은 갤러리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마이애미 아트 페어에서 그림 판매에 열을 올리고, 전시회 큐레이터와 신진 예술가의 작업실 조수를 거쳐, 구겐하임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하기 까지의 여정이 마치 영화처럼 펼쳐진다. 




그때까지 나는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는 관객으로만 미술관을 경험했지 배지를 달고 출입 통제 구역을 드나든 적은 없었기에 미술계의 최상층이요, 궁극의 지향점이라는 이 공간의 내부자가 된다는 생각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도망갈 곳 없이 매일 몇 시간씩 예술 작품 옆에 있는 일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나는 줄리의 작업실에서 예술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읽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미술관 경비원 업무로도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들 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 오래 작품을 보는 사람이 경비원일 것이다. 경비원은 컬렉터보다도 오래 본다.             p.382


보는 이로 하여금 ‘이것도 예술이야…?’라는 의문을 품게 하는 현대 미술에 눈을 뜨기 위해 수년간 부단히 애를 쓴 저자의 이야기는 예술의 존재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서, 예술 작품이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예술 작품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관객이 한 작품에 할당하는 평균 시간은 17초라고 한다. 이 또한 작품 앞에 멈춰 선 경우만을 계산한 것이라, 실제 평균 시간은 더욱 짧을 것이다.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기 전까지는 한 작품을 40분간 노려보는 일 따윈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를 하게 되면서, 15대의 보안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자리에서 벗어나거나 휴대폰을 꺼내면 해고당한다는 위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구역을 지키는 40분 동안 단 한 작품만 바라보는 실험을 하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의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억지로라도 예술 작품과 관계를 맺을 때, 작품이 달라지고 자신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깨닫는다. 미술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고. 미술관에 있는 모든 작품을 꾸역꾸역 삼킬 필요없이, 원하는 몇 가지만 집중에서 보면 된다고 말이다. 하루에 한 시간씩 몇 주 동안 같은 작품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고, 관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예술은 선택이다. 안일함을 거부하는 선택이고, 더 풍요롭고 더 불편하고, 더 영혼을 강타하고, 더 불확실한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다. 무엇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겠다는 선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취향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은밀한 진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유, 완전히 주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은 자신만의 미학을 찾아가는 여정이기도 해 굉장히 흥미로웠다. 무언가를 이론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이해하게 되면서 아는 것은 전혀 다르다. 동시대 미술에서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 궁금해 본 적이 있다면, 날 것 그대로의 예술계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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