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에 담긴 문화사, 끽다점에서 카페까지 - 이길상 교수가 내려주는 커피 이야기
이길상 지음 / 싱긋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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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첫번째 커피 붐이 일었다. 1820년대에 시작되어 1840년대까지 지속된 제1차 커피 붐을 거치면서 커피는 국제적으로 거래되는 무역품의 지위에 올랐다. 생산과 소비가 동시에 급증한 것이다. 먼저 생산 측면에서는 새로 등장한 커피 생산국 브라질이 본격적으로 커피의 대량 생산과 수출을 시작함으로써 커피가격을 떨어뜨렸다. 커피가격이 하락하면서 상류층뿐 아니라 중산층 시민들과 지식인들도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도시를 중심으로 커피하우스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p.19


언젠가 커피에 관한 통계를 보고 놀랐던 적이 있다. 한해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신 커피가 약 250억잔에 달한다는 기록이었다. 1인당 연간 500잔의 커피를 마신 셈이니, 전 국민이 하루에 최소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 것이다. 게다가 인구 10만 명당 카페 수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작년 기준 전국의 카페가 10만 개를 돌파했다고 한다. OECD 국가 중에서 스타벅스 매장이 가장 많은 도시가 서울이라는 점도 이런 특성을 잘 보여준다. 국민 1인당 커피전문점에서의 소비액도 세계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하니, 가히 커피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일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커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나라에 커피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누구이며, 언제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일까. 이 책은 커피라는 작은 물질 하나로 역사라는 거대 서사를 다루고 있다. 교육학자이면서 커피인문학자인 저자는 개항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커피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 문화를 전체적으로 살펴본다. 커피는 인류의 역사와 희로애락을 함께해왔는데, 끽다점에서 시작해 발전한 카페 문화, 세기의 발명품인 커피믹스의 등장,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책, 커피에 관한 논쟁과 유행 등 역사책으로 읽어도 흥미롭고, 커피에 관한 인문학책으로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사무실이든 집이든 손님이 오면 손님의 취향과는 관계없이 커피를 끓여 내오는 '새 예절'이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1973년 기준 노동자가 하루 일하고 받는 일당이 300원이던 때 커피 한 잔은 100원이었고 우리나라의 연간 커피 원두 소비량은 3500톤을 넘어섰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갑자기 불어닥친 오일 쇼크는 커피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나라 커피 역사에서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커피가 다시 희생양으로 등장했다. 신년 초부터 언론에서는 "도심 다방들 커피값 인상" "협정료 위반 다방 집중 단속" "커피값 올리면 조처" 등의 소식이 끊이지 않았다.              p.302


밥은 어쩌다 한 두끼를 안 먹더라도 상관없지만, 하루라도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히는 사람, 바로 나다. 어릴 적에 커피라는 음료를 마시면 안 되는 그 나이에,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렇게 쓴 걸 왜 먹냐고. 엄마가 그때 농담처럼 말했었다. 너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라고. 인생의 여러 면을 겪어본 다음에 어른이 되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거라고. 어릴 때는 하면 안 된다.는 금기에 대해 다소의 반항심같은 것도 있었으므로,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커피가 점점 더 맛있게 느껴지면 질수록, 어쩐지 어린 시절 엄마의 그 말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아, 내가 인생의 쓴맛, 단맛을 어느 정도는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쓴 커피가 달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겠다. 뭐 이런 생각 말이다. 게다가 커피에는 쓴 맛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 속에는 깊은 풍미와 향과 그윽한 맛이 숨어져 있다. 


이렇게 커피를 사랑하는 나이기에, 이 책은 정말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커피를 둘러싼 이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니 아직 한참 멀었구나 생각하면서 말이다. 긴 인생에서 하루의 시작이 괴로운 날도 많다. 하지만 커피 한 잔의 향기에 휩싸여 있는 동안, 어느새 그 감정에서 구원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내가 지금 마시는 커피 한 잔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 그 한 모금의 위로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커피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시대의 기록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말이다. 갓 로스팅 된 원두로 내린 커피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유의 향기가 있는데, 이 책을 읽는 내내 페이지 곳곳에서 그 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하면 오버일까. 착각일지라도 그만큼 커피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어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 책은 커피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은 이들에게도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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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철학 - 고대 철학가 12인에게 배우는 인생 기술
권석천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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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가 이토록 '뼈 때리는' 문장으로 설득하려는 독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아우렐리우스 자신입니다. 이렇듯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진심일 때 타인과의 대화에도 진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대화, 자기 성찰을 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과의 만남 같은 건 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나 자신과 갈고 닦은 진심은 남들과 대화할 때도 우러나오기 마련입니다. 자기에게 성실한 사람은 남에게도 성실합니다. 그는 "인간의 낙은 인간다운 일을 하는 것"이라며, 가장 첫 번째 인간다운 일로 "동족을 호의로 대하는 것"을 꼽습니다.             p.103~104


<사람에 대한 예의>로 만났던 권석천 작가가 5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왔다. 그는 ‘중앙일보의 송곳’으로 불렸을 만큼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JTBC 보도총괄이었던 당시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 속 이야기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희비극을 읽어 냈던 것이 전작이었다. 이번에는 고대 철학가 12명에세 배우는 삶의 지혜와 인생에 대한 해답이다. 2500년 전 고대 철학가들의 딱딱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삶의 불확실성 앞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충실히 살아내는 '최선의 삶'을 위한 철학이다. 그리스 로마 고전을 연구한 전공자도, 철학자도 아니기에 저자의 고전 읽기는 조금 더 친숙해서 와 닿고, 엉뚱해서 재미있다. 



사회생활을 하며 겪게 되는 동료와의 관계, 신념을 지키며 일하는 법, 타인을 이해하는 법에 대한 통찰로 누구나 철학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소크라테스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질문의 힘을, 소포클레스를 통해 신념을 위해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드시 성공하는 설득의 법칙과 플루타르코스의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호메로스의 철학을 다루고 있는 챕터가 특히 흥미로웠는데, 저자는 고대 그리스 고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서사시인 <일리아스>가 공감의 중요성을 잘 알려주는 최고의 참고서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호메로스의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공감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약 2500년 전 인생 선배인 고대 철학가들에게 듣는 삶의 지혜와 인생 해답들은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식상하지 않았다. 이천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삶과 고민 등이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공감이 위안처럼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이는 우리가 여전히 고대 철학가들의 고민과 사유로부터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배워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선택을 보면서도 우리는 '아,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아, 저때 저것을 했어야 하는데' 하는 가상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이러한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제 상황에서 겪기 전에 간접 체험을 하고 나면 보다 나은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책을 늘 곁에 두는 사람의 판단이 남다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여러분, AI에게 책 내용을 요약하라고, 책 읽는 것까지 맡기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책은 꼭 자신의 눈으로 읽으십시오. 그래야 사람을 익히고 배울 수 있습니다.               P.205


뉴스의 유통기간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이는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덕분에 현재 상황이나 시기에 딱 맞는다는 뜻의 '시의성'은 더 중요해졌다. 저자도 기자를 할 당시에 시의성이 전부인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의성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 바로 '맥락'이라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고 한다. 맥락이란 어떤 일이 발생한 배경이나 전후 관계를 뜻하는 말로 이야기의 전체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맥락을 모르면 상황을 잘못 판단하기 쉽기 때문에, 같은 팩트를 다루더라도 어떤 맥락을 갖고 글을 쓰느냐에서 차이가 날 수 있다. 저자는 맥락과 시의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가져온다. <역사>는 양질의 팩트가 넘쳐나는 서술임에도, 팩트 너머에 있는 맥락을 볼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어떤 맥락 안에 있는지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 좀 더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렇게 이 책은 인간과 삶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며, 철학들의 사유를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지식으로 읽어 낸다. 또한 책의 커버를 벗기면 12인의 철학가 마을 지도가 있어 포스터로 활용해도 좋을 것 같다. ‘철학가 마을 지도’는 철학가에게서 뽑은 인생 기술을 공간으로 시각화한 것으로 양면 표지로 만들어져 책과 함께 펼쳐보면 더 흥미진진할 것이다. 혹시 지금 삶의 방향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다면, 이 책 속 철학가들로부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가장 오래된 지혜에서 오늘날 필요한 삶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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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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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행복한 일도 있다네. 다음에 일어난 일을 알게 되면 오히려 괴로울지도 몰라."

"전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반드시 진실을 알고 싶어요." 나오는 고집을 부렸다.

"그럼 할 수 없지."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음 시로 나아갔다.               - '5월의 어둠' 중에서, P.75


은퇴한 노교사 사쿠타 노부오는 사람을 싫어하는 경향이 환갑 무렵부터 심해져 홀로 지내는 시간이 거의 대부분이다. 남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귀찮았기에 다른 사람과 말할 기회 자체가 줄어들다보니 혼잣말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데,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그날에는, 옛 제자가 수십 년 만에 그를 찾아 온다. 반가운 마음에 평소보다 들뜬 기분으로 그녀를 맞이한다. 나오는 오빠가 지난 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며, 그 이유를 알아보고자 집에 스무 권쯤 있던 시집을 가지고 왔다. 하이쿠 속에 담긴 오빠의 마지막 심경을 선생님이라면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살펴보며 시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쿠타에게는 치매 징후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고, 그날은 비교적 정신이 또렷한 날이었지만 시를 해석하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진다. 


사쿠타는 사라지는 기억과 싸우며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게다가 나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쿠타는 조바심이 나고, 이상한 추측을 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가, 기묘한 의혹이 솟구치기도 한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애인이라면 왜 오빠의 하이쿠 해석에 관해 그와 상의하지 않았을까, 자신에게 치매 증상이 있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이유는 뭘까... 그런 온갖 생각을 하며 하이쿠 해석에 이어진다. 하이쿠는 본래 한 편 한 편이 독립되어 있는데,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열세 편을 한 연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어 한꺼번에 읽기도 하고, 어떤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 지 작가의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듯한 스릴 넘치는 감각을 느껴보기도 한다. 시에 담긴 의미들을 더듬어가는 과정 제차도 흥미로웠지만, 조금씩 의심이 들게 하는 순간들이 이야기에 더 몰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야기는 곳곳에 포석처럼 깔아 두었던 복선들을 차곡차곡 회수하며 후반부에 이르러 충격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과연 그 시집 속 진실은 무엇일까. 




이것이 여우비란 것이리라. 무언가에 홀린 심정이지만, 어차피 계속 상대의 손바닥 위에 있다. 이제 와서 신경 써봤자 소용없으리라.

요시타케는 유혹하듯 나무 사이를 날아가는 검은 나비를 정신없이 쫓아갔다. 돌연 날씨가 우중충해졌다. 어? 드디어 구름이 나온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음침한 둥근 그림자가 태양을 잠식해가는 참이었다.

아아, 이건 개기일식이다. 이윽고 세계는 한밤중처럼 캄캄해질 것이다.             - '보쿠토 기담' 중에서, P.224


'비' 시리즈는 일본 설화문학의 진수로 꼽히는 에도시대의 고전 <우게쓰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우게쓰 이야기>는 아홉 가지 초자연적 이야기의 모음집으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하다. 기시 유스케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데뷔작 <13번째 인격 ISOLA>를 쓰기도 했는데,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비'를 주제로 해 두 권의 소설집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2009년부터 쓰기 시작한 글들을 2022년이 되어서 마무리하고 출간된 것이다. 그렇게 기시 유스케가 '비'를 주제로 쓴 암흑 기담집인 <가을비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 <여름비 이야기>가 드디어 나왔다. 


<가을비 이야기>에서는 운명에 절망하고, 일상에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마주하는 등 현실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포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번에 나온 <여름비 이야기>에서는 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는 오싹한 세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하이쿠, 곤충, 버섯이라는 소재로 펼쳐지는데, 때로는 가랑비처럼 조금씩 스며들고, 혹은 장마비처럼 줄기차게 쏟아져 흠뻑 젖게 만드는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고 있다. 장마철의 높은 습도와 눅눅한 공기처럼 이야기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분위기에 흠뻑 젖어 드는 이야기들이었다. 기시 유스케는 초자연적인 존재보다 인간과 인간이 품은 악의야말로 지독히 현실적인 최고의 공포라는 것을 보여준다. <검은 집>이라는 작품으로 최고의 호러소설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기시 유스케는 이후 SF 소설, 추리, 미스터리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여왔는데, 9년 만에 호러 작품을 내놓은 것이 바로 이 시리즈였다. 그가 만들어 내는 다차원의 공포를 좋아했다면 이번 작품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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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의 사랑들 - 흙과 틈 사이로 자라난 비밀과 상실 그리고 식물에 관한 이야기
쿄 매클리어 지음, 김서해 옮김 / 바람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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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깊이, 아주 깊이 심었다. 파내고, 끙끙대고, 들어올리고, 다져 넣었다. 마치 마음속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반복해서 되씹듯, 흙을 자꾸 뒤집었다. 엄마는 도저히 치유되지 않는 것들을 무디게 하기 위해, 세상과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 흙을 사용했다. 엄마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땅을 일구었고, 먹기 위해 심었으며, 수확한 것들을 작은 종이봉투에 담아 나에게 건넸다. 엄마는 익숙한 규범을 뒤집고, 일반적으로 예쁘다고 여겨지는 것을 거부하면서 내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이한 아름다움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돌나물에도, 유포르비아에도,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서양향나무에도.           p.207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자아와 텍스트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나와 책 사이에서 마법같은 화학적 반응이 느껴지는 그런 책 말이다. 한 권의 책이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누군가에게 말하는 한 방식이라면, 이 책은 분명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는 이 아름다운 작품을 그저 홀린 듯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다. 올해 읽었던 수많은 책들 중에 단연코 손에 꼽을 만큼 좋았던 책이다.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란 저자는 DNA 검사를 통해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서로의 진정한 말벗이라고 생각해왔기에 그 결과는 큰 충격이었다. 이 책은 오래도록 숨겨져 있던 가족의 비밀, 과거와의 연결고리, 생물학적 기원과 뿌리를 찾으려는 긴 여정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집 앞 뜰을 정원으로 가꾸고, 보살피는 식물의 언어였다는 점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사람이었고, 오래 묵혀둔 가족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유전적 계보를 추적하며 어머니의 또다른 언어인 가드닝을 통해 천천히 부모의 삶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식물의 시간으로 상상한다는 건 우리가 이 세상에 없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엄마를 따라서 나도 정원의 언어를 구사해보려고 애쓴다... 엄마는 나에게 겉껍질, 뼈대, 겨울의 줄기로 말하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단풍나무의 마지막 다섯 잎을 휩쓸어가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땅을 덮은 진흙의 칙칙함으로 말하고, 영양분 가득한 부패의 냄새로 말한다. 우리는 또한 공기로 말한다. 퇴비로 가득 찬 공기, 젖은 쇠와 피 냄새가 배어 있는 공기로, 우리는 언어로 채 담지 못하는 것들을 만진다. 나는 잠시 믿게 된다. 정원의 분해 과정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 엄마의 쇠약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죽은 꽃들이 건네는 본질적인 조언을 듣는다. 그것이 아름다운 풍경이 꾸며낸 거짓이든, 눈송이가 얇게 쌓인 매혹적인 폐허의 기만이든 상관없다.              p.338


이 책은 일본의 24절기를 단락의 제목으로 하고 있다. 덕분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지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부터 겨울을 마무리하는 대한까지 일 년 열두 달을 24절기로 나눈다. 봄비가 내리고 새싹이 돋아나는 우수, 본격적인 논농사 준비를 하는 청명, 보리 베고 모 심는 망종, 여름 더위와 장마의 시작 소서, 더위가 그치고 가을이 다가오는 처서,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는 한로, 겨울 첫눈이 내리는 소설, 겨울 중 가장 추운 때인 소한 등등 절기는 1년 동안 하늘을 지나가는 해의 발걸음을 스물네 걸음으로 나눈 것이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계절을 24개의 셋키(절기) 또는 계절의 마디들로 나누어 기록한다고 한다. 다이칸(대한), 슌분(춘분), 세메(청명)... 소코(상강), 릿토(입동), 토오지(동지)로 구분되어 있는 장들은 2019년 1월부터 시작해 2021년 9월까지의 시간들을 담고 있다. 


원제인 ‘Unearthing(파헤치다)’은 땅을 파헤치고, 식물을 심고 돌보는 행위와 작가 자신의 유전적 위치를 확인하는 일, 가족의 새로운 연대기를 구성하는 작업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은 백인 중심 사회에서 혼혈 여성으로 살아온 정체성, 부모 세대의 전쟁과 이주, 동화의 역사 등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종과 문화, 사랑의 경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한다. 식물을 엉뚱한 자리에 심으면, 정원은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사정없이 일러주며,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통제하려 드는 강박을 비웃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종이와 잉크로 좁아진 나의 길을 벗어나는 우회로였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어머니는 저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랑하는 딸, 또 하나의 이야기를 줄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로 만들어졌지만, 우리가 잊은 것들로 이루어지기도 했단다.' 라고. 그러니 모든 점이 선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모든 것이 무늬처럼 자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저자는 칼데콧 아너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림책 작가다. 국내에도 저자의 꽤 많은 그림책들이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많은 에세이, 논픽션을 써 주기를 고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여름은 고작 계절>의 김서해 작가가 번역을 맡았는데, 쿄 매클리어의 아름답고 사색적인 문장을 너무도 섬세하게 고스란히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모든 페이지를 옮겨 적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문장들로 가득한 이 눈부신 작품을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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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쳐가고 있는 기후과학자입니다 - 기후 붕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케이트 마블 지음, 송섬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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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 작은 마법이 존재한다. 우리가 받은 저주가 곧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위험과 종말을 예측하고자 사용하는 모델은 놀라움, 아름다움, 기쁨 역시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지는 미래를 보는 것, 세계를 우아한 방정식으로 걸러내 예언과 꼭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다. 그러나 지구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먼저 지구의 현재를 이해해야 한다. 뜨거운 열대와 차가운 극지대를, 축축한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는 습한 공기를, 더운 날 부드럽게 불어오는 서늘한 바닷바람을. 잠시 가만히 앉아 세계가 그 아름답고도 끔찍한 비밀들을 보여주길 기다려야 한다.               p.26~27


최근의 기후 변화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 지구의 온도가 이 정도로 올라가는 것도, 이렇게 급작스레 변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적어도 인간이 존재해온 이래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상실이 아니라 폭력이다. 이대로 가면 온난화는 계속될 것이고, 해수면 상승은 이어질 것이며 극단적인 기상 현상들을 피할 길이 없어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수십 년간 이러한 현상들을 예측해 왔고, 그렇게 상상한 최악의 공포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위기감으로 미래를 예측해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NASA 출신 기후과학자인 저자는 기후 예측 모델을 통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지구의 재앙적 미래를 시뮬레이션해본다. 매일 세상의 끝을 마주하는 기분으로 기후 변화가 일으킨 복잡한 감정들을 겪어 낸다. 분노와 죄책감, 슬픔과 두려움, 놀라움, 그리고 희망과 사랑의 감정이다. 물론 이런 감정들은 과학자가 느끼기에 적절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노에서 사랑까지, 아홉 가지 감정의 스펙트럼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주는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공감을 통해 우리 모두와 지구를 다시 강하게 연결시킨다. 아홉 가지 감정은 경이, 분노, 죄책감, 두려움, 애도, 놀라움, 자부심, 희망, 사랑으로 이 감정들이 각각 하나의 목차가 되어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비밀로서의 경이, 기후 변화의 진짜 원인은 우리라는 죄책감, 때 이르게 잃어가는 세계에 대한 애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자부심, 지금껏 아무도 한 적 없는 일을 해야 한다는 희망, 그리고 기후 모델이 말해주지 못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느끼는 무한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절절한 감정과 과학적 통찰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해피엔딩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더 나은 결말은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지적한 대로, 우리를 구원하러 올 사람은 없다. 만약 결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그건 결점 많고 한계도 있지만 각자 최선을 다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해낸 공동의 노력 덕분일 것이다. 과거에 환경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사례 중 지금 우리의 상황과 완벽히 들어맞는 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다.             p.313


'기후'는 장기간에 걸친 날씨의 평균치이자, 날씨가 일어나는 배경 조건이다. 기후의 변화는 지각 판이 움직이고, 지구가 궤도 속에서 흔들리고, 심해의 해류가 바뀌는 수백만 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일어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날씨가 인간이 짧은 생애 동안 경험하는 것이라면, 기후는 신들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기후를 이해하려면 세계를 형성하는 모든 힘을 이해해야 한다. 여기에는 대기뿐 아니라 해양도 포함된다. '기후과학자'들은 수많은 방정식을 바탕으로 작은 세계를 만들고, 견고한 기반 위에 복잡한 구조를 층층이 쌓아간다. 기후과학자들이 미래를 볼 수 있는 이유는 '물리학'이 있기 때문이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근사한 이유로, 우주는 얼음 덩어리로 뒤덮인 산꼭대기에서도, 우주의 허공에서도, 대양의 가장 깊고 어두운 바닥에서도, 그 어떤 맥락에서도 참인 방정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방정식을 풀면 비가 왜 내리는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어째서 지구에 기온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기온은 왜 상승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기후 모델은 바로 이러한 마법으로 만들어 진다. 


2003년 8월, 프랑스의 여름에 기후 변화로 발생한 최초의 대량 사망 사건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43도가 넘는 전례 없는 폭염이 예상된다는 우려스러운 보도 자료를 발표했지만, 여름은 원래 더운 거라고 다들 코웃음을 치며 매년 여름과 마찬가지로 긴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돌아온 그들을 맞이한 건 끔찍한 사태였다. 푹푹 찌는 아파트에 갇혀 떠날 수도, 휴가를 보내는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도 없었던 독거노인들이 해가 진 뒤까지도 이어지는 유례 없는 폭염을 마주한 것이다. 무려 1만 5,000명의 노인들이 고독사했고, 이들의 시신은 누군가 찾아가기를 기다리며 냉장 트럭 속에 쌓여 있었다. 기후 변화로 인해 2003년의 끔찍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할 가능성은 두 배 더 높아졌다. 북극의 기온은 지구상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상승하고 있으며, 50년 만에 찾아오던 폭염이 이제는 10년에 한번 꼴로 찾아온다. 게다가 더 길고, 더 뜨겁다. 우리는 사랑하는 세계를 때 이르게 빼앗기는 중이다. 상황이 얼마나 더 나빠질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미래는 여전히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기후 위기를 다루는 책들을 꽤 읽어 왔지만, 분노와 죄책감과 같은 인간 보편의 감정을 통해 지구온난화 문제를 들여다보는 책은 처음이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과학자의 문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장들로 가득해 매 페이지마다 밑줄을 긋느라 바빴던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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