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그리면 거짓이 된다
아야사키 슌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토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
"없어요. 어차피 똑같은 인생을 걸어갈 뿐이니 되풀이하는 의미가 없어요."
그도 역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년 인생에서 아무런 후회가 없다는 걸까. 하루토다운 대답이기는 했지만 속인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틀림없이 나는 내가 고르지 않았던 무수한 선택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에게 100퍼센트 납득하고 있다.        p.104

 

나는 어릴 때 그리던 인생을 살아왔을까. 만약 딱 한 번, 원하는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몇 살의 나에 시계바늘을 맞출까. 이룰 수 있었던 꿈, 이루지 못한 꿈... 바꾸고 싶은 과거의 한 순간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고르지 않았던 무수한 선택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딱히 다시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살아온 인생에 아무런 후회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없다고 말하는 두 사람이 있다. 지금의 자신에게 100퍼센트 납득하고 있어, 뭐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해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뿐, 이 두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넘쳤던 천재 소년, 소녀였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천재가 등장한다. 생활 태도를 포함해 모든 점에서 서투르기 짝이 없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은 망설임 없는 터치로 거침없이 그리는 다키모토 도코. 그리고 너무도 세밀하고 정밀해서 마치 그림이 아닌 사진과 같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또 한 명의 천재 하루토. 집안 형편이 어려운 도코는 일곱 살에 처음으로 세키나 미카가 운영하는 미술 학원에 온다. 도코의 엄마도, 아빠도 모두 화가를 지망했던 터라 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것이다. 도코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하고, 화를 못 참아 어느 학원을 가더라도 며칠 만에 문제를 일으켜 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미카는 도코에게 맞춰 여러가지 배려를 해줬고, 결국 그녀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곁에서 함께 하게 된다. 하루토는 동생인 고즈에와 함께 학원을 방문했다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미카의 아틀리에에 등록한다. 도저히 열한 살 소년이 그릴 법한 수준이 아닌 하루토의 그림을 보며 미카는 도코에 비견할 만한 천재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도코의 작품이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반면, 하루토의 작품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차이가 있었다.

 

 

 

"널 그리면 거짓이 돼."
이윽고 온화한 말투로 하루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하루토의 본심일까. 역시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괜찮아. 거짓이라도. 하루토가 그린 그림이라면 나한테는 거짓이 아니니까."
"넌 날 너무 지나치게 믿어. 언젠가 크게 다칠 거야."
"괜찮아. 하루토는 다정하니까 아파도 아무렇지 않아."        p.332

 

도코와 하루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스승 세키네 미카 역시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를 들어온 미술가다. 스스로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미카는 예술 분야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자신의 재능이 생각했던 것보다 독보적인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현실과 타협한 미카는 결혼이라는 선택도 버리고, 화가로서의 인생도 포기하는 대신, 제자를 가르치는 미술 학원을 운영하기로 한다. 그리고 줄곧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바란다. 그러다 다키모토 도코와 난조 하루토라는 뛰어난 재능의 천재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재능을 지켜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너무도 다르지만 서로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 두 천재와 그들을 지켜보고, 도와주고, 질투하고,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아야사키 슌은 국내에 라이트 노벨 작품들이 주로 번역되어 있는 작가로 연애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작품은 '연애 없는 사랑이야기'이자 압도적인 재능의 천재들이 빚어내는 청춘 예술 소설이다. 오글거리는 연애 소설은 딱 질색이라면, 색다른 사랑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레고리우스는 그 책방에 오래 머물렀다. 어떤 도시를 그곳에 있는 책을 통해 알아가는 것, 이는 그가 언제나 해오던 일이었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으로 처음 가본 외국 도시는 런던이었다. 칼레로 돌아오는 배에서, 지난 사흘 동안 유스호스텔과 대영박물관과 무수히 많은 책방과 그 주변만 빼고는 이 도시를 거의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잖아!"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넌 여기서 아주 많은 것을 놓쳤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래, 하지만 그 책들은 다른 곳이 아닌 여기에 있잖아.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p.94~95

 

때로 인생은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저 매일을 성실하게, 눈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멈추고 뒤돌아 보면 깨닫게 된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살거야,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하겠지, 해보고 싶었던 것들, 시간이 없어 미뤘던 것들을 배우고 해볼 시간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들이 내 삶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내가 꿈꾸던 많은 것들 없이 내 인생이 앞으로도 계속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래도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느끼는 순간, 그 동안 쌓아온 모든 삶을 박차고 일어나 다른 생을 선택하기 위해 훌쩍 떠날 수 있을까.

 

15년 만에 다시 이 작품을 만나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는 매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도시로 향한다. 우연히 포르투갈어로 적인 책 속에서 발견한 문장 때문에,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의 긴 여정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문장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보여준다. 충동적으로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뛰쳐나와 낯선 도시로 가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언어를 읽기 위해 어학원을 다니고, 사전을 뒤져가며 작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또 다른 자기 자신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흘러간 역사를 관통하는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뭔가? 그들이 외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내적으로도 뻗어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계발할 수 없고, 스스로를 향한 먼 여행을 떠나 지금의 자기가 아닌 누구 또는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발견할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살아간다.          p.339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처음 읽었던 것은 두 권으로 출간되었던 2007년이다. 이번에 나온 것은 세 번째 개정판으로 합본이라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양장본이다. 이미 많이들 읽어 봤을 만한 작품이라 현대의 고전 같은 느낌도 드는데, 이번 개정판은 감각적이고 무게감 있는 표지로 새롭게 단장했고 본문의 시작부터 끝까지 세심히 살펴 오늘의 감수성으로 다듬었기에 새롭게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자신의 본명인 페터 비에리라는 이름으로 다수의 인문, 철학서도 저술했는데 국내에도 여러 권 번역 소개되어 있다. 소설을 집필할 때는 두 명의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루이 세바스티앙 메르시에의 이름을 조합한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을 사용하한다. 작가의 최근작인 소설 《언어의 무게Das Gewicht der Worte》도 비채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기 전에는 세세한 내용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무려 15년 전에 읽었던 작품이니 말이다. 다만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가 어느 날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여자를 구한 뒤,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타게 된다는 서두의 이야기만은 여전히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반복되는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아 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켜켜이 쌓인 시간과 경험으로 알게 된 지금, 이 작품을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불안함과 혼란스러움, 수수께끼 같은 경험들과 철학적 사유, 역사와 미스터리를 넘나드는 비밀스러운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다.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조용하고 우아하며, 고풍스럽게 아름다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낯선 곳을 여행하고, 흘러가는 삶을 붙잡고 사유해야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버지니아 울프 -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수사네 쿠렌달 지음, 이상희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버지니아 울프는 <보통의 독자>에서 이렇게 썼다.
누군가 우리에게 지금 영국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작품이 100년 뒤에도 남아 있을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거기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어떤 책들은 그럴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어떤 책들은 그 존재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p.68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그의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 살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졌고,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이기도 했으며, 출판사를 운영하며 당대의 작가들을 발굴했고, 모더니즘 소설의 실험적인 작가로서 비평가와 독자 모두에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는 딸이었으며, 만성적인 정신 분열증을 평생 겪었고, 결국 스스로 강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했다.

 

평소에 버지니아는 별일 없는 한 매일같이 혼자 산책을 나서곤 했다. 그날 남편과 친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거실에 두고 집을 나섰을 때도, 이웃 주민 몇 명이 그녀를 목격했지만 평소처럼 산책 중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가 큼직한 돌멩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강물로 뛰어들어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남긴 글은 여전히 당대의 현실 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빛나고 있다.

 

이 작품은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사네 쿠란델이 감각적인 수채 일러스트를 통해 그려낸 버지니아 울프의 그래픽 노블 버전 전기이다. 만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형적인 프레임을 벗어나 이미지와 텍스트가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의식의 흐름'대로 읽어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발전시킨 새로운 서술 기법처럼 말이다.

 

보통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릴 때, 침울하고, 핏기 없는 안색의 신경쇠약증 환자 같은 이미지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인데, 이 책의 아름다운 수채화들은 그 어둡고 우울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어 더욱 의미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상징>에서 이렇게 썼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그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다. 나는 머리를 손질하지 않는다. 손톱도 깎지 않는다. 대체 왜 나는 이 모든 것을 쓰는 것일까? 왜 말도 안 되는 것을 쓰는 것인가?
나중에 그녀는 원고에서 이 구절을 삭제했다.         p.120

 

버지니아 울프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여름이면 그들은 콘월 지방의 세인트이브스의 톨랜드 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곳은 버지니아의 유년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섯 살이던 버지니아는 그곳에서 이부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으로 거울에 대항 공포를 가지게 된다. 열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고 슬픔에 잠긴 가족들 사이에서 아무런 감정도 표현하지 않는 그녀에게 다들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해댔다.

 

이 작품은 그렇게 버지니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와의 애증 관계로 고통 받았던 10대 시절과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했던 20대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마침내 글을 쓰게 되고, 독학으로 지성을 쌓아 젊은 지식인들의 모임인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그들과 교류하고, 레너드 울프와의 결혼 생활과 출판사를 만들어 남편과 책들을 출간하던 시절을 거쳐 생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특히나 버지니아 울프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내밀한 일기와 에세이, 편지 속 문장들을 다양하게 인용하며 그녀의 삶을 그려내고 있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수사네 쿠렌달은 버지니아 울프가 무언가를 읽거나 글을 쓰는 장면들이 유달리 많이 그렸다. 아홉 살 때 집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담아 잡지를 만들었던 일, 다양한 장소에서 작품을 쓰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들, 킹스칼리지에서 그리스어 수업을 듣는 장면과 헨리 제임스의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평론을 쓰는 장면 등등... 끊임없이 뭔가를 계속 쓰는 삶이 책 속에 가득 담겨 있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과 '매년 500파운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자기만의 방>이 출간된 것은 1929년이다. 그로부터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성들의 삶은 과연 자유로워졌을까. 여성들의 위상이야 확실히 당시보다는 나아졌겠지만, 여전히 가부장제와 불평등, 억압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나 기혼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는 경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며, 매년 500파운드에 해당되는 금전적인 지원 역시 전무할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버지니아 울프의 목소리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를 나타내는 구호처럼 당대의 현실 속에 살아 있다. 이는 우리가 지금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수채 일러스트를 통해 재구성된 버지니아 울프의 계속 쓰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윌북 클래식 호러 컬렉션
에드거 앨런 포 지음, 황소연 옮김 / 윌북 / 2022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느끼는 이 공포를 이해하기란 전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끔찍한 해역의 미스터리를 풀고 싶다는 내 호기심이 절망감마저 넘어선 이상, 더없이 참혹한 죽음과도 타협할 수 있게끔 나를 이끌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흥미로운 지식을 향해, 아는 자는 파멸할 수밖에 없어 결코 밖으로 새어나갈 수 없는 비밀을 향해 곧장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조류는 우리를 남극으로 데려가는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추정이 오히려 더 그럴듯 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병 안의 수기' 중에서, p.55

 

어릴 때부터 온순하고 인간적인 성품으로 알려졌던 나는 특히나 동물들을 좋아했다. 많은 시간을 동물들과 함께 보냈던 나는 결혼을 해서도 다양한 반려동물들을 집에 들였다. 새들과 금붕어, 개와 토끼, 원숭이, 고양이였는데, 그 중에서도 놀라우리만치 영리했던 고양이 플루토가 특히 나를 따랐다. 그런데 몇 년 뒤 나는 폭음을 일삼으면서 나날이 성격이 괴팍해져, 아내에게도 폭언과 폭력까지 휘두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얼큰히 취해 집에 온 나는 고양이에게 사악한 분노를 느끼게 되었고, 여러 방법으로 녀석을 괴롭히다 결국 죽게 만들고 만다. 하지만 얼마 뒤 플루토와 비슷한 검은 고양이를 집에 들이게 되고, 자신을 노골적으로 따르는 것에 반감을 느껴 점자 증오감을 불태우게 된다. 나의 극악한 악행은 점점 최악의 결말을 향해 가는데, 그야말로 광기가 불러온 끔찍한 이야기였다.

 

 

포의 대표적인 단편 중 하나인 <검은 고양이>는 작품을 실제로 읽어 보지 않은 이들조차 내용을 알만큼 유명하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고백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최초로 선보인 작품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받는 장르인 도메스틱 스릴러, 심리 스릴러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이 이렇게나 오래 전에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자신이 지극히 광적이고 야만스러운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 믿어주기를 바라지도 간청하지도 않겠다는 말로 서두를 연다. 자신에게는 공포 그 자체인 사건들이지만 참혹하다기보다 기괴하게 비칠 일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독자들은 화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지만,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의심스럽다. 게다가 '나'의 행동을 쉽사리 이해하기도 어려우니, 그 비정상적이고 통제력을 상실해가는 모습에서 점점 불편함과 오싹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재미있는 건 작가인 포는 실제로 고양이를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그가 이렇게나 거리낌 없이 고양이를 죽이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었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내 상상력이 깨어난 것이었을까, 아니면 공기 중의 안개탓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방 안에 감도는 왠지 모를 어스름 때문이었나, 베르니스의 몸을 감싸는 늘어진 잿빛 옷자락 때문이었나. 베르니스의 윤곽은 몹시 가물거리며 불분명해 보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싸늘한 한기가 온몸을 휘젓고,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나를 짓눌렀다. 거센 호기심이 내 영혼을 사로잡았다.           - '베르니스' 중에서, p.347

 

에드거 앨런 포의 삶은 비극적이고, 암울했으며,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마흔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지만, 수 세기 동안 그의 작품들은 여러 장르와 분야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왔다.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는 한 해의 최고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기리는 '에드거 상'을 만들었고, 숱한 호러, 미스터리, SF 작가들이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에 포의 <검은 고양이>를 읽고는 그 선명한 이미지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각인되어 한동안 길에서 검정 고양이만 보아도 피해갔었다. 짧은 분량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얼마나 섬뜩하고 오싹했던지 무서워서 책을 쳐다보지도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게 된 포의 작품들은 놀랍도록 시적이었다. 어둡고 그로테스크했지만, 그럼에도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소설들은 시처럼 간결하면서도 복합적으로 읽혔고, 그의 시들은 소설처럼 하나의 서사를 가지고 눈앞에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번에 호러컬렉션으로 다시 만나게 된 포의 작품들 역시 그러했다. 그의 어두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은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와 우리를 강력하고 완벽하게 미지의 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이 책을 읽는 누구든, 에드거 앨런 포의 마법에 홀리게 될 것이다.

 

고전문학을 현대적인 시각과 시대 정신을 담아 선보이는 윌북 클래식 신작이다. 시즌 1 걸클래식 컬렉션, 시즌 2 라이트 컬렉션, 시즌 3 환상 컬렉션에 이어 첫사랑 컬렉션이 나왔고, 이번에 선보이는 컬렉션의 주제는 '호러'이다. 모든 걸 끌어낼 수 있을 만큼 근원적이나 인간을 가장 연약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감정 ‘공포’를 이야기 속에 녹여 세기의 명작이 된 세 편의 고전<프랑켄슈타인>,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드라큘라>를 수록했다.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에는 그의 작품 세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작을 비롯해 섬뜩하고 기괴한 분위기의 단편 25편이 수록되어 있다. 윌북 클래식 시리즈는 '번역'에 중점을 두고 있어 지금 우리 시대가 걸어가는 방향에 발맞춘 번역을 통해 다시 읽어 보는 고전의 맛을 느낄 수 있으니 이번 기회에 고전 호러의 맛을 제대로 느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막여우 소금이의 따스한 사계절 컬러링북 사막여우 소금이의 컬러링북
소금이 지음 / 영진.com(영진닷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겨울에 하기에 딱 좋은 취미생활 중 하나가 바로 컬러링북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채색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게 되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컬러링북을 통해서 일상에 지친 스트레스를 해소 하고,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색칠공부하던 그 기억을 떠올리며 동심과 순수함을 되찾는 시간도 되고 말이다.

 

 

오랜만에 만난 컬러링북은 소금이 작가의 <사막여우 소금이의 따스한 사계절 컬러링북>이다. 소금사막에서 온 사막여우 소금이와 작은 선인장 친구 소소를 주인공으로 그들의 포근하고, 따스한 일상을 보여준다.  얼마 전에 티비에서 볼리비아의 소금사막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했었는데, 바로 그곳이 사막여우 소금이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호수의 소금들이 결정화되어 사막처럼 보이는 그곳은 마치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비현실적인 풍경을 자랑한다. 소금이라는 캐릭터가 그곳에서 탄생했다고 하니 더 반갑게 느껴졌다.

 

 

소금이는 우연히 떨어진 별똥별을 만나 새로운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낡은 빈 집에 혼자 남겨진 선인장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벗 삼아 다양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되는데, 컬러링북은 바로 그 사계절의 아름다운 모습들을 하나의 스토리처럼 보여준다.

 

함께 바이크를 타고 소풍을 떠나고, 풀밭에서 싱싱한 딸기를 먹고, 오후의 티타임도 가지며, 흐드러진 벚꽃 나무아래에서 그네를 타기도 한다.

 

 

여름이 되면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고, 푸르른 바닷속에서 스노쿨링을 즐기기도 하며, 캠핑 가서 바베큐도 먹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며 하늘을 날아보기도 한다. 가을이 되면 집 앞에 가득 쌓인 낙엽을 쓸고, 집에서 부침개도 부쳐 먹고, 할로윈 파티도 즐긴다. 겨울이 오면 따스한 난로 앞에서 뜨개질도 하고, 얼음 낚시와 썰매도 해보고, 온천에서 뜨끈한 물에 몸을 담가 보기도 한다. 소금이와 소소의 여정은 각각의 계절에 맞는 풍경을 일상과 판타지를 기묘하게 섞어 만들어 더욱 환상적이다.

 

 

컬러링 도안은 총 64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왼쪽에는 작가의 채색 원화, 오른쪽에는 라인 드로잉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180도로 쫙 펼쳐지는 제본이라 편하게 채색하기도 좋다. 컬러링북은 많은 재료가 필요하지 않아 더 좋다. 색연필과 책 한 권이면 되니 말이다. 특히나 사막여우 소금이와 선인장 소소 캐릭터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러워 컬러링북을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직접 채색을 하는 동안에는 점차 완성되어 가는 그림을 보는 재미도 있고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지쳐 있는 직장인들을 위한 취미 생활 중에 비용이며, 시간이며 따져보아도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컬러링북이 아닐까 싶다. 올 겨울에는 편안하고 따뜻한 집에서, 소금이와 함께 사계절 컬러링북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