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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그리면 거짓이 된다
아야사키 슌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1월
평점 :
"하루토는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어?"
"없어요. 어차피 똑같은 인생을 걸어갈 뿐이니 되풀이하는 의미가 없어요."
그도 역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년 인생에서 아무런 후회가 없다는 걸까. 하루토다운 대답이기는 했지만 속인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틀림없이 나는 내가 고르지 않았던 무수한 선택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다르다. 지금의 자신에게 100퍼센트 납득하고 있다. p.104
나는 어릴 때 그리던 인생을 살아왔을까. 만약 딱 한 번, 원하는 과거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나는 몇 살의 나에 시계바늘을 맞출까. 이룰 수 있었던 꿈, 이루지 못한 꿈... 바꾸고 싶은 과거의 한 순간들. 만약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고르지 않았던 무수한 선택을 놓고 고민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딱히 다시 하고 싶은 게 없다고, 살아온 인생에 아무런 후회도,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없다고 말하는 두 사람이 있다. 지금의 자신에게 100퍼센트 납득하고 있어, 뭐든지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해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천재뿐, 이 두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넘쳤던 천재 소년, 소녀였으니 말이다.
이 작품에는 두 명의 천재가 등장한다. 생활 태도를 포함해 모든 점에서 서투르기 짝이 없었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은 망설임 없는 터치로 거침없이 그리는 다키모토 도코. 그리고 너무도 세밀하고 정밀해서 마치 그림이 아닌 사진과 같은 퀄리티를 보여주는 또 한 명의 천재 하루토. 집안 형편이 어려운 도코는 일곱 살에 처음으로 세키나 미카가 운영하는 미술 학원에 온다. 도코의 엄마도, 아빠도 모두 화가를 지망했던 터라 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것이다. 도코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질 못하고, 화를 못 참아 어느 학원을 가더라도 며칠 만에 문제를 일으켜 나오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미카는 도코에게 맞춰 여러가지 배려를 해줬고, 결국 그녀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곁에서 함께 하게 된다. 하루토는 동생인 고즈에와 함께 학원을 방문했다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무렵부터 미카의 아틀리에에 등록한다. 도저히 열한 살 소년이 그릴 법한 수준이 아닌 하루토의 그림을 보며 미카는 도코에 비견할 만한 천재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도코의 작품이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는 반면, 하루토의 작품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차이가 있었다.
"널 그리면 거짓이 돼."
이윽고 온화한 말투로 하루토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하루토의 본심일까. 역시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괜찮아. 거짓이라도. 하루토가 그린 그림이라면 나한테는 거짓이 아니니까."
"넌 날 너무 지나치게 믿어. 언젠가 크게 다칠 거야."
"괜찮아. 하루토는 다정하니까 아파도 아무렇지 않아." p.332
도코와 하루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스승 세키네 미카 역시 어린 시절부터 특출한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를 들어온 미술가다. 스스로도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미카는 예술 분야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자신의 재능이 생각했던 것보다 독보적인 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결국 현실과 타협한 미카는 결혼이라는 선택도 버리고, 화가로서의 인생도 포기하는 대신, 제자를 가르치는 미술 학원을 운영하기로 한다. 그리고 줄곧 자신과 동등한 수준의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바란다. 그러다 다키모토 도코와 난조 하루토라는 뛰어난 재능의 천재 두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로 그녀의 인생은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재능을 지켜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너무도 다르지만 서로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 두 천재와 그들을 지켜보고, 도와주고, 질투하고,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아야사키 슌은 국내에 라이트 노벨 작품들이 주로 번역되어 있는 작가로 연애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이번 작품은 '연애 없는 사랑이야기'이자 압도적인 재능의 천재들이 빚어내는 청춘 예술 소설이다. 오글거리는 연애 소설은 딱 질색이라면, 색다른 사랑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