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시즌2 : 15 미생 (리커버 에디션) 15
윤태호 지음 / 더오리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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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있는 돌이 움직인다. 키워 죽이려는 의도다.
이 경우엔 키워 죽이는 게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이득이기 때문이다.
고수들의 바둑에서 바둑돌 하나 하나는 이처럼 죽어 가는 순간에도 최후의 1g까지 기름을 짜내듯 몸을 바친다.
비정하다는 점에서 바둑과 전쟁은 닮았다.            p.131

 

<미생>은 2012년 첫 연재 후 수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자아내며 가히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작품이다. 2014년에는 tvN 드라마로도 방영이 되어 최고의 드라마라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미생>은 2012년 1월 처음 연재를 시작해, 2016년 1월 시즌 2의 이야기로 이어졌고, 시즌 2의 13권까지 출간이 된 다음 출판사가 바뀌고 14권이 나왔다. 그리고 시즌 1, 시즌 2 모두 기존의 표지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새롭게 리커버 에디션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무려 4년의 기다림 끝에 신간 15권이 나왔다. 리커버 에디션부터는 표지가 실재의 공간에 가상의 인물을 그려 넣는 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생생한 오피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등장 인물들이 실제 극 중에서 매일같이 드나들어야 하는 곳을 실사로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어 더욱 생생하게 현실처럼 다가오는 표지이다. 윤태호 작가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읽다 보면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만화인지, 실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래서 실재의 공간에 그려 넣은 가상의 인물들이 어찌나 찰떡인지, 새삼스레 장그래와 오상식, 안영이, 김동식이 우리 중 누군가라는 생각이 든다.

 

 

기품, 습관을 변화시키는 건 수많은 시도를 거쳐야 가능하다. 기품, 습관이 바뀌지 않는 건 '지금 이 순간'이 너무도 중요하여 익숙하고 안전한 태도를 다시 꺼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화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손실을 각오하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매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이고 그토록 중요했다면 지금 당신의 모습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p.181

 

시즌 1의 이야기가 대기업의 이야기였다면, 시즌 2는 위태로운 중소기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대기업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는 중소 기업의 사원이 되었고, 오상식 과장은 오상식 부장으로, 김동식 대리는 과장이 되었다. 14권에서 전체의 프리퀄 스토리인 오상식의 과거 젊은 시절을 담으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빨간 눈’ 사연을 들려 주었다면, 이번 15권에서는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으로 ‘영업 3팀’으로 발령받은 장백기, 온길과 갈등을 빚는 김동수, CIC를 고민하는 천 과장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특히나 엘리트 코스를 착실하게 밟아온 장백기의 사연이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은 세상의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여전히 '미생'인 당신이 '완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가 완전히 살아 있는 자가 되기를 응원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회사의 당연하지 않은 요구를 당연한 듯 해내는 자신을 보면서, 먼지 같은 일을 하다 먼지가 되어 버렸다는 기분이 든 적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앞을 살필 기력도 없이 주어진 일을 허덕거리며 하다가 멈춰서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있을 것이다. <미생>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너무 유명한 작품이지만 아직 원작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혹은 이 작품이 궁금했는데 분량이 많아서 선뜻 도전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시즌 2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시즌 2는 아직 몇 권 안되고, 시즌 1의 이야기를 읽지 않았더라도 상관없이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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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작가
알렉산드라 앤드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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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플로렌스 대로가 천재라는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작가가 되려 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보낸 그 몇 년 동안, 플로렌스 대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그 황홀감을 사랑하게 되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그 짧은 시간만큼은 자신을 잊고, 원하는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것, 이 일을 잘만 하면 그녀 자신의 인생도 드디어 가치 있는 무언가가 될 수 있다니.           p.73

 

작가 지망생인 플로렌스는 뉴욕의 유명 출판사에 입사했지만 다른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늘 자신이 사는 세계 너머의 세상을 꿈꿨지만 출신도, 외모도, 능력도 평범했던 그녀에게 다른 사람이 될 기회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유부남 편집자와의 하룻밤을 계기로 그의 가족에게 접근해보려다 오히려 직장에서 쫓겨 나게 되고 열여섯 이후 처음으로 무직자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 그녀에게 한 편의 베스트셀러 작품으로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소설가의 조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그렇게 플로렌스는 비밀에 싸여 있는 작가, 헬렌의 보조가 되어 함께 지내며 일을 도와주게 된다.

 

그들은 자료 조사를 위해 모로코로 취재 여행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갑작스러운 사고로 헬렌이 죽게 된다. 사고 현장에서는 플로렌스 혼자 발견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헬렌이라고 알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젯밤 플로렌스와 헬렌은 식당에서 낙타 고기와 위스키를 마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경찰의 설명에 차가 바다에 빠졌고, 운 좋게도 늦게까지 바다에 나가 있던 한 어부가 목격해 플로렌스를 차에서 끌어내 구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무런 기억이 없다니, 그녀는 황당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놓치고 만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함께 발견된 소지품은 전부 헬렌의 것뿐이었다. 경찰과 사람들이 플로렌스를 헬렌으로 착각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헬렌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경찰은 차 안에 한 명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헬렌은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게다가 헬렌의 즉음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그녀밖에 없었다. 익명의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해 아는 것도 자신과 에이전시, 단 두 명뿐이었다. 세상이 궁금해하는 천재 작가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플로렌스는 헬렌이 될 작정이다.

 

 

 

플로렌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원피스를 내려다보다가 소리 질렀다. "그래서 뭐? 난 내 인생이 싫었어! 더 나은 인생을 원했다고.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야!?"
"더 나은 인생, 스스로 만들어야지. 훔칠 게 아니라."
플로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헛소리. 모두가 도둘질을 한다, 헬렌도 마찬가지. 그녀는 제니에게서, 그리고 그녀에게 베르디와 샤토네프 뒤 파프를 소개해준 사람에게서 더 나은 인생을 훔쳤다.             p.362

 

출판사와 에이전시, 익명의 베스트셀러 작가와 작가 지망생을 등장시켜 문학계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20개국에 판권이 계약되고, 유니버설 픽쳐스에서 곧 영화로 만들 예정인 작품인 만큼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고 흥미진진하다. 더 나은 인생을 꿈꾸는 것, 다른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삶은 크게 변화 없이 비슷비슷한 경로를 따라 진행된다. 원하는 누구든 될 수 있을 거라는 꿈은 어른이 되어 사회로 나가면서 점차 사라지고,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꿈꿔왔던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어떨까. 누구든 그 삶을 훔치고 싶다는 유혹에 시달리게 되지 않을까.

 

플로렌스라는 주인공이 도덕적이고, 성실한 호감형의 인물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녀가 완벽하지 않다는 점이 독자들에게 더 공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질투하고, 닮고자 하는 욕망은 그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일 테니 말이다. 변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 왔지만 변하는 것은 없고, 삶의 행로를 바꿔보겠다는 일념으로 나아가지만 헛수고일 뿐이었던 자신의 인생이 완벽하게 달라질 수 있는데, 그저 거짓말 몇 개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 기회를 정직하게 외면하고, 다시 평범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헬렌 행세를 시작한 플로렌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상상도 못할 반전이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신이 던져버린 양심과 도덕심을 가뿐하게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렇게 이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그렇게 이 작품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매혹적인 상상을 치밀하게 설계된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시켜 보여준다.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구성, 반전과 캐릭터 모두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새로운 누군가가 되고픈 욕망을 가져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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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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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는 평생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신문을 보아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논하지 않았고, 옛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옛일을 얘기할 때 거든 적도 없다. 마치 인생을 누군가에게 팔아버려 과거의 모든 것과 무관한 사람 같았다. 나는 지금도 시간의 구체성과 추상성에 대해 사색할 때마다 그 사건을 떠올린다.          p.24

 

지평선 위로 올라온 여명, 갖가지 색이 이어진 논밭, 해풍에 출렁이는 작은 어선이 바둑알처럼 풍경 속 점점이 놓여 있는 곳, 마을 너머로는 백사장과 바다가 보인다. 어디선가 찰카당찰카당, 찰카당찰카당. 허브, 바퀴축, 체인 자전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자 안개가 햇빛을 가려 검은 망사가 사방을 뒤덮은 것만 같다. 비 냄새가 느껴지고, 만져지는 듯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천천히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는 자전거, 정확히 말하면 도둑맞은 자전거에서 시작된다. 1992년 타이베이의 가장 큰 상가가 허물어지던 날, 주인공 ‘청’의 아버지가 자전거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는 툭하면 철마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꿔놨다고 말하곤 했다. 까막눈이었던 외증조부는 자전차를 도둑맞았다는 신문의 아주 짧은 기사를 소중하게 보관했고, 자전차 한 대를 갖고 싶다는 꿈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해 보이는 그 소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과도 맞닿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전차 한 대는 지금의 벤츠, 아니 집 한 채와 맞먹는 큰 재산이었다.

 

이야기의 화자인 '청'은 부모가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서야 얻은 아들이었다. 그는 자라 각종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독자의 편지를 받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사라지는데, 그 자전거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었다. 소설의 진실이 사실을 기반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따금 '진실의 기둥'이 나타나는데, 잃어버린 자전거가 바로 그가 소설에 세워놓은 '진실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독자의 말 한마디가 그물처럼 그를 휘감았고, 아버지의 실종 이후 감정적으로 묻어 두어야했던 상실감과 마주하기로 한다. 사라진 아버지와 자전거의 행방에 대해, 그 자전거가 거쳐온 여정을 거슬러 가보기로 한 것이다.

 

 

압바스는 그 일을 겪는 동안 자신이 점점 라오쩌우의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더 추상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정말 그렇게 느꼈어요. 이렇게 자전거를 타는 건 한 사람의 인생과 진정으로 만나는 것과 같아요."
"바쑤야의 인생을요? 아니면 라오쩌우?"
"둘 다요. 어쩌면 더 많이." 압바스가 말했다.     p.233

 

대만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대만의 국민작가 우밍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라진 자전거의 행방을 쫓으며 아버지의 과거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가족의 서사를 중심에 두고 식민 시대의 역사와 전쟁 등 대만 100년사가 함께 펼쳐지는 묵직한 이야기는 다양한 시대별 자전거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전거는 만들어진 시대에 따라 그 시대만의 것이 되는데, 지역성을 갖고 있어 자전차, 철마, 자행차 등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작가는 실제로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행복표 자전거 일곱 대를 수집해 직접 수리하고 조립하기도 했으며, 대만의 역사에 대해서도 철저히 고증하고 연구해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소설 속에도 중간중간 바이크 노트라고 해서 여러 자전거 모델들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통해서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아버지, 도둑맞은 자전거,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고, 삶을 지켜주고, 살아 남게 해주었던 물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잊혀진 시대를 소환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도 태우지 않은 허구의 빈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내가 절대로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서정적이고 우아한 언어로 시처럼 쓰인 이 섬세한 작품을 통해 신비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페달을 밟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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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왕 - 트랙의 왕, 러닝슈즈의 왕
이케이도 준 지음, 송태욱 옮김 / 비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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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내서 밖으로 나가면 자연히 걷게 되니까요/"

"신발은요?"

아리시마가 웃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가죽 구두든 뭐든요. 갑자기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시작하는 것. 그게 부상당하지 않고 오래 지속하는 비결입니다."

어쩐지 그것은 회사의 경영 방침과 일맥상통한 것 같았다.          p.53


교다 시는 일본식 버선인 '다비'가 일상적으로 신는 물건이던 무렵, 수많은 제작업체가 밀집해 있던 다비의 고장이었다. 하지만 시대와 복식이 변함에 따라 수요가 감소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업체는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다. 이곳에 백 년 동안 다비 제작을 생업으로 이어온 영세 기업 '고하제야'가 있다. 직원 스무 명, 평균 연령은 오십칠 세, 숙련공 중의 숙련공들만 남아 있지만 수요도, 매출도 하락만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장래성이 전혀 없는 사업을 운영하느라 힘겨운 미야자와 사장은 거래처 직원의 제안으로 회사의 미래를 위해 신규 사업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것은 발 모양을 그대로 재현한 러닝슈즈였다. 그 상품이 인기가 있는 것은 '맨발 감각'으로 달릴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고하제야의 주력 상품인 지카타비 역시 맨발 감각으로 지면을 디딜 수 있었다. 기존의 제작 노하우를 활용한다면, 이런 러닝슈즈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미야자와는 과감히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지만, 현실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상품화하기 위한 샘플을 개발했지만, 번번히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리면서 높다란 시장의 벽 앞에서 번번히 좌절한다. 실적도 없고, 돈도 없고, 노하우도 없는 영세 업체가 세계적 스포츠용품 회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세상에서 돈이라는 가치관을 없애면 정말 필요한 것, 소중한 것만 남겠지요." 모기는 생각을 순순히 입 밖에 냈다.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당연한 것 중에 정말 소중한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유대도 그런 것 아닐까요?" 울컥 복받치는 것을 참으며 모기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절대 후회 없는 레이스를 펼치고 오겠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p.458


이케이도 준은  '소설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가장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작가이다.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는 무려 네 권짜리로 엄청난 분량의 작품이었지만, 단 한 페이지도 지루할 틈 없이 '읽는 재미'를 안겨주는 소설이었고, 이후에 나온 <변두리 로켓> 시리즈와 <일곱 개의 회의>, <루스벨트 게임>, <하늘을 나는 타이어> 등 출간된 모든 작품들이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완벽한 재미를 선사했었으니 말이다. 그의 작품들은 매번 아주 두툼한 페이지에 등장인물도 많지만, 군더더기가 없고 구성이 짜임새가 있어 가독성이 좋다. 언제나 기본적인 구도는 영세한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맞서 싸우는 식이지만, 은행, 자동차, 운송회사, 로켓 부품 등 소재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도 매번 새롭게 느껴진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직장인들의 통쾌한 반란과 도전이야말로 이케이도 준의 특기인데, 이번 작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재미를 선보인다. 일본식 버선만 백 년째 만들어온 영세 기업이 러닝슈즈를 개발해보겠다고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고, 한때 유망주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재활 훈련 중인 육상선수와 회사의 이익보다 선수들과의 신뢰를 더 중요하게 여기다 직장을 잃게 된 러닝슈즈 전문가의 이야기가 함께 어우러져 시련에 좌절하더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케이도 준은 언젠가 길고 고된 싸움이 끝나면 밝은 미래가 찾아오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꿈을 향해 전진하는 모든 일하는 사람에게 존중과 응원을 보내는 따뜻한 드라마를 그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만 누적 6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고, TBS에서 10부작 드라마로 제작되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엔터테인먼트 소설과 스포츠 소설의 장점을 잘 버무려 이케이도 준 특유의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매일을 성실하게, 물러서지 않는 열정으로 정진하는 이들의 뭉클한 이야기를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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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일리아스 - 트로이의 노래 한빛비즈 교양툰 22
동사원형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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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고전 작품들은 이미 읽어 보았거나, 언젠가 읽으려고 책장에 두었거나, 반쯤 읽다가 지루해서 덮어 두었거나 하는 식으로 구매를 했든 빌려 보았든 한 번쯤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전혀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이다.  일단 두껍고, 어려워 보이기 때문인데, 이번에 이런 부담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책을 만났다. 바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웹툰 형식으로 재구성한 교양만화다.  




이 책은 10년간 이어진 트로이 전쟁 막바지 51일 동안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총 15,693행의 위대하고도 장대한 서사시 <일리아스>를 제대로 된 고증과 화려한 작화, 그리고 탄탄한 각색을 통해 '교양툰'으로 재탄생시켰다. 지식웹툰플렛폼 이만배에서 10주 연속 1위를 기록한 화제의 교양툰이자, 한빛비즈의 교양툰 시리즈 스물두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인 '동사원형'은 고대 서양의 문명을 동경하는 역사 덕후다. 고대 로마사를 좋아해 학회 참석 등 다방면으로 공부하는 작가인 그는 이 작품의 구성과 각색에만 1년 이상 걸렸을 정도로 충실히 고증했다. 덕분에 이 책을 통해 <일리아스>를 처음 읽는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쉽고, 재미있게 서양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위대한 서사시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리아스>의 주제는 바로 '분노'이다. 원작의 1권 1장 1절의 첫 구절 또한 이렇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다. '사소한 다툼과 오기로부터 시작된 작은 분노, 이로 인해 생겨난 고통과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분노, 분노의 연쇄 끝에서 분노를 수용하고 용서를 통해 평온을 찾는 일련의 과정'이 <일리아스>의 주제라고 이 책은 말한다. 


저자는 <일리아스>가 높으신 분들의 현학적인 문학이 아니라 마치 현대에 사는 우리가 TV 드라마를 보듯 평범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듣는 서사시였기 때문에 이러한 주제와 요소들을 넣었다고 설명한다. 덕분에 영웅들을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과 가까운 존재로 묘사했는데, 내용을 읽다 보면 각종 치정극과 막장 스토리에 깜짝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2천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리아스>가 칭송받는 고대 그리스 문학이며, 우리는 대체 왜 <일리아스>를 읽어야 하는 걸까.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일리아스>는 수백 년 동안 입을 통해 내려온 것을 호메로스가 집성, 정리해 완성한 것이라 분량도 방대하지만 등장하는 인물과 내용도 복잡하기 그지 없다. 트로이 전쟁을 중심 사건으로 온갖 전설들이 덧붙여지면서 완성되었기에 그야말로 길고 긴 이야기라 문턱을 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일리아스>를 처음 읽는다면,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이 만화로 먼저 시작하면 어떨까. 


이 책은 복잡한 인물 관계도와 주요 캐릭터 설명, 그리고 그리스군과 트로이군의 지휘관, 민족, 함선의 수, 지역을 도표로 알아보기 쉽게 정리했고,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지도에 표기해 고전 중의 고전인 <일리아스>의 문턱을 제대로 낮춰주고 있으니 말이다. 초판 한정으로 캐릭터 설정, 작업 구상노트, 채색 전 스케치 등이 수록되어 있는 제작 노트를 특별 부록으로 받을 수 있으니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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