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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전거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3년 1월
평점 :

아버지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는 평생 자기 생각을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신문을 보아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논하지 않았고, 옛이야기도 하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옛일을 얘기할 때 거든 적도 없다. 마치 인생을 누군가에게 팔아버려 과거의 모든 것과 무관한 사람 같았다. 나는 지금도 시간의 구체성과 추상성에 대해 사색할 때마다 그 사건을 떠올린다. p.24
지평선 위로 올라온 여명, 갖가지 색이 이어진 논밭, 해풍에 출렁이는 작은 어선이 바둑알처럼 풍경 속 점점이 놓여 있는 곳, 마을 너머로는 백사장과 바다가 보인다. 어디선가 찰카당찰카당, 찰카당찰카당. 허브, 바퀴축, 체인 자전차가 달리기 시작한다. 하늘에서 검은 비가 내리자 안개가 햇빛을 가려 검은 망사가 사방을 뒤덮은 것만 같다. 비 냄새가 느껴지고, 만져지는 듯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속에서 천천히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는 자전거, 정확히 말하면 도둑맞은 자전거에서 시작된다. 1992년 타이베이의 가장 큰 상가가 허물어지던 날, 주인공 ‘청’의 아버지가 자전거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는 툭하면 철마가 우리 가족의 운명을 바꿔놨다고 말하곤 했다. 까막눈이었던 외증조부는 자전차를 도둑맞았다는 신문의 아주 짧은 기사를 소중하게 보관했고, 자전차 한 대를 갖고 싶다는 꿈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해 보이는 그 소망은 외할아버지의 죽음과도 맞닿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자전차 한 대는 지금의 벤츠, 아니 집 한 채와 맞먹는 큰 재산이었다.
이야기의 화자인 '청'은 부모가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서야 얻은 아들이었다. 그는 자라 각종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가 되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한 독자의 편지를 받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가 사라지는데, 그 자전거는 어디로 갔느냐는 질문이었다. 소설의 진실이 사실을 기반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따금 '진실의 기둥'이 나타나는데, 잃어버린 자전거가 바로 그가 소설에 세워놓은 '진실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독자의 말 한마디가 그물처럼 그를 휘감았고, 아버지의 실종 이후 감정적으로 묻어 두어야했던 상실감과 마주하기로 한다. 사라진 아버지와 자전거의 행방에 대해, 그 자전거가 거쳐온 여정을 거슬러 가보기로 한 것이다.

압바스는 그 일을 겪는 동안 자신이 점점 라오쩌우의 자전거와 한 몸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자전거뿐만 아니라 더 추상적인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고.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난 정말 그렇게 느꼈어요. 이렇게 자전거를 타는 건 한 사람의 인생과 진정으로 만나는 것과 같아요."
"바쑤야의 인생을요? 아니면 라오쩌우?"
"둘 다요. 어쩌면 더 많이." 압바스가 말했다. p.233
대만 최초로 맨부커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대만의 국민작가 우밍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라진 자전거의 행방을 쫓으며 아버지의 과거 발자취를 더듬어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가족의 서사를 중심에 두고 식민 시대의 역사와 전쟁 등 대만 100년사가 함께 펼쳐지는 묵직한 이야기는 다양한 시대별 자전거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자전거는 만들어진 시대에 따라 그 시대만의 것이 되는데, 지역성을 갖고 있어 자전차, 철마, 자행차 등으로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작가는 실제로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행복표 자전거 일곱 대를 수집해 직접 수리하고 조립하기도 했으며, 대만의 역사에 대해서도 철저히 고증하고 연구해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소설 속에도 중간중간 바이크 노트라고 해서 여러 자전거 모델들을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통해서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아버지, 도둑맞은 자전거,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고, 삶을 지켜주고, 살아 남게 해주었던 물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잊혀진 시대를 소환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구도 태우지 않은 허구의 빈 자전거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내가 절대로 가볼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서정적이고 우아한 언어로 시처럼 쓰인 이 섬세한 작품을 통해 신비하고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으로 페달을 밟아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