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음도 언젠가 잊혀질 거야
스미노 요루 지음, 이소담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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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면 여기가 딱 꿈에서 깰 시점이네."
왠지 뭔가 치카가 기뻐할 만한 말을 하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느꼈을 내 의지에 조금이라도 부응하기 위해 치카의 말을 받았다.
"그러네, 그래도 개지 않았으니까 이게 꿈이 아닐 가능성도 조금은 커졌어. 이렇게 차근차근 진실의 농도를 높여갈 수밖에 없겠다."
진실의 농도, 우리가 여기 있다는 증명의 점도. 전쟁도 타인도 상식도 상관없이, 다른 누구도 아닌 진짜인 우리. 이 세계를 꿈에서 현실로 바꿔갈 방법.           p.123

 

누구나 살면서 기댈 곳이 하나쯤 필요하다. 이 고루한 삶을 버티게 해 줄 무언가. 두려움과 불확실성을 이겨낼 수 있는 무언가.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사는 게 너무도 지루하고 하찮게 느껴지는 고등학생이다. 그는 어느 날 자신만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버려진 정류장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를 만난다. 자신과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 분명한 그 존재로 인해 그의 삶에도 붙잡을 것이 생긴 것이다. 그로 인해 시시했던 일상이 특별해지기 시작한다. 오로지 눈과 손발톱만 빛나는 소녀 치카의 세계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년 카야는 그녀의 세계와 영향 관계를 확인하려고 평소에는 안 할 행동을 해보기도 하고, 각자의 세계에 알 수 없는 동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세계에 있든 다른 세계에 있든, 사람과 사람이 진정으로 공감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카야와 치카는 각자의 세계에는 없는 개념을 배우고, 각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며 그들만의 시간을 쌓아 나간다. 치카는 연인이라는 개념이 뭔지, 연애가 뭔지를 알지 못한다. 그녀는 결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가족을 만드는 수단 중 하나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녀에게 카야는 오직 한 사람, 특별한 존재 연인에 대해 알려주게 되고, 점점 치카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풋풋한 연애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된다. 오글거리지 않고 담백하며, 풋풋하고 신비롭다.  그렇게 카야의 시시한 일상에 치카가 점점 스며들어 오는데, 이것은 일시적인 꿈인 걸까, 영원히 깨지 않는 몽상인걸까. 

 

 

 

"잊어버리면 전부 거짓이 돼."
이번에는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두 번 왕복했다.
"거짓이 되지 않아. 우리는 잊어버려. 아무리 강렬한 마음도 조금씩 닳아서 얇아지고 사라져. 그렇다고 그때 우리의 마음이 거짓이 되지는 않아. 그때, 죽을 만큼 지루했던 것도, 마음을 쏟을 밴드와 만나 바뀌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카야가 치카를 좋아했던 그 마음도 전부 거짓이 아니야."             p.426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만나는 장소인, 카야에겐 한밤중의 버스정류장이고, 치카에게는 피난소인 그곳에 다른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서로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연결된 것은 장소가 아니라 두 사람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카야의 눈에만 보이는 치카는 그의 공상, 혹은 망상 속 존재인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의 만남 자체가 부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공상인지, 어디까지가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리는 모두 흡사 현실처럼 꿈을 꾼다. 태어나서 지금까지가 깨지 않는 꿈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치카는 꿈속이라도 너랑 만나서 기쁘다고, 자신은 그걸로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카야는 자신들이 만나는 세계를, 자신만이 아는 치카라는 존재를, 꿈에서 현실로 바꾸고 싶다.

 

스미노 요루 특유의 감수성이 돋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쉬운 문장으로 섬세하게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어느 순간 먹먹한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는 모두 매일, 평소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 속에서 진심으로 특별하다고 여길 존재를 만나고, 일평생 사라지지 않을 마음을 가슴에 품게 되는 순간이 없다면 삶은 시시하고 지루하고 의미 없는 시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지금'을 쌓아 올리는 수밖에 없다. 현실 속에서도 각자만의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렇게 이 세계를 꿈에서 현실로 바꿔갈 수 있는 방법을 다정하게 보여준다. '이 세상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아주 신비롭고 특별한 세계를 경험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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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서점 - 잠 못 이루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소서림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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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맡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던 할머니. 잠자리에서 흘러 지나간 환상들. 그 기억들은 여태 연서를 지탱하던 것들이었다. 현실에서 조금만 빗겨나가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공상. 그런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가슴이 떨렸다. 이 아이에게도 어쩌면 그런 환상이 만들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연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갈게요. 저도 어릴 때 누가 책 읽어주는 걸 정말 좋아했거든요."            p.32

 

어느 날, 어느 밤, 가던 방향을 잃었을 때쯤 만날 수 있는 서점이 있다. 벽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책장이 그득하고, 바닥에는 진녹색 카펫이 넓게 깔려있다. 마치 오래된 고목에 낀 이끼 같은 장소. 보통의 서점과는 다르게 음침하고 기묘한 분위기로 가득한 곳이다. 하지만 책을 살 필요도 없으며,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이다. 게다가 원한다면 서점주인의 낭독을 감상할 수도 있다. 서점주인은 무척이나 온화한 목소리로 끔찍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그런 다음 공포를 느끼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둥, 화를 돋우는지 달래는 건지 모를 말을 덧붙인다. 이곳은 바로 허상과 실재가 공존하며, 기억과 미래가 혼재하는 곳, 환상서점이다.

 

연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동화작가가 되겠다고 나선 뒤 2년째다. 그동안 총 일곱 번, 얼굴도 보지 못한 출판 편집자들에게 거절의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 받은 거절의 메일에는 해피엔딩이 아닌 결말에 대한 아쉬운 부분이 있어 유독 화가 났다. 자신은 동화의 그런 결말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이 그들의 말대로 상업성이 전혀 없는 것인지, 문득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연서는 산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어두운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다. 길을 헤맨 끝에 절벽앞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자진의 서점으로 연서를 안내하고, 그곳에서 검푸른 빛깔에 묵직한 두께의 책을 펼쳐 읽어 준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너머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연서는 울적한 날이면 서점을 찾게 된다.

 

 

 

여기엔 어떤 환상적인 이야기가 얽혀있을까? 그녀는 자주 하던 대로 허황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웃었다. 돌이켜보면 이게 바로 그녀가 동화를 쓰려고 한 이유였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을 떠올리는 단 한순간, 잠시 현실을 잊고 쉬어가는 찰나, 그런 때를 사람들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걸 이제야 다시 깨닫다니. 괜히 길을 헤맨 기분이었다. 아니, 헤맨 덕에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 서점처럼.        p.163

 

이 작품은 '밀리의 서재'에서 오디오북으로 먼저 공개되어 사랑받았던 작품이다. 오디오북이 소설화되어 전자책이 나오고, 이후 전자책이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방식은 처음이지 않을까. 게다가 단순한 매체 전환이 아니라 각 매체의 특성을 고려한 유기적 세계관 연결을 구현해 내며 최초의 역주행 열풍을 일으켜 출판 시장의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 오디오북을 일부러 찾아 듣지는 않는 편이라, 이 작품 역시 종이책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역시나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유명 성우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오디오북도 궁금해졌다. 고풍스러운 잔혹동화 스타일의 이야기와 동양풍의 판타지가 빚어내는 서사가 왜 오디오북으로 그렇게나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지 자연스레 짐작하게 만들었기때문이다. 특히나 종이책 버전이 오디오북의 서점주인이 들려주던 기묘한 이야기에서 세계관을 넓고 깊게 확장시킨 버전이라고 하니, 더욱 오디오북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환생을 거듭하면서 질기도록 이어지는 인연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이야기라 배우의 연기가 곁들여지면 더 근사할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한 사람은 영원을 살고, 또 한 사람은 영원히 기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어쩌면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한,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마법을 경험해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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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메타인지 공부력 - 하브루타로 쌓아가는 상위 1%의 힘
김금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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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 습관과 메타인지력이 저절로 키워지거나 얻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생각하고, 그 같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생각이나 단편적 지식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균형적인지 상대방과 함께 토론하면서 다양한 관점에 대해 고민하고 수정, 보완하는 연습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p.47

 

질문과 토론을 통해 생각하는 힘과 창의력을 키우는 하브루타 교육과 소위 ‘상위 1%의 공부법’ ‘공부 잘하는 법’으로 알려진 메타인지, 이 두 키워드를 직접적으로 연관지어 제대로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인 하브루타부모교육연구소 김금선 소장은 10여년간 하브루타 독서토론을 진행해오면서 메타인지를 발달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러한 연구에 대한 결실로 하브루타와 메타인지가 어떤 관계이며, 하브루타를 통해 메타인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실질적이며 구체적인 방법까지 모두 담겨 있다.

 

 

아이의 메타인지를 활성화하는 방법, 하브루타 방식으로 학습하는 방법, 메타코칭의 5단계, 좋은 질문 만드는 방법, 그리고 하브루타 메타코칭의 실제 사례들까지 효과적인 교육법들을 알려 준다. 자녀교육에 성공하는 부모를 위한 60개의 질문과 각 주제에 맞는 일화와 '탈무드' 이야기도 현실적인 도움을 준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질문'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대한 부분이었다. 메타인지를 키우기 위해서는 질문이 가장 중요하고, 하브루타의 핵심도 질문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들려주고, 그에 대한 다섯가지 유형에 맞춰 질문들을 만들어 보는 과정이 있었다. 간단한 이야기인데도 이렇게나 다양한 질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고, 책을 읽고 나서 그 내용에 관해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부모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기다려주는 것이다. 아이마다 이해하는 속도가 제각기 다르고, 받아들이는 강도도 모두 다르다. 부모와 아이의 이해력이 다른데도 부모는 재촉하기 일쑤다.... 아이의 메타인지를 높이는 방법은 속도와는 무관하고, 오히려 속도가 방해 요소라고 보면 된다. 모든 문제를 쉽고 빠르게 학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어려운 문제를 만나거나 그 문제를 틀렸을 때 받아들이기 힘들어질 수 있다.          p.264~264

 

아이의 생각 근육을 키우고, 토론의 달인으로 키우는 법도 메모해두고 싶은 부분이 많았다. 사실 나를 비롯해 지금의 부모 세대들은 주입식 교육을 받은 세대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시대는 완전히 달라졌다.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많은 분야에서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러한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부모들에게 아이의 메타인지를 높이기 위해서 어떤 것들 알아야 하고, 바꿔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일상에서 매일같이 하는 말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질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유년기에 정서적 안정감을 형성해줘야 한다는 것, 부정적 감정도 잘 표현하도록 감정 코칭을 하는 방법, 그리고 아이의 학습 능력뿐만 아니라 숨겨진 기질과 장단점을 발견할 수 있는 메타인지를 높여주는 과정이 모두 겉핥기식이 아니라 본질과 핵심을 파악해 제대로 알려주고 있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하브루타 메타코칭을 위한 감성 터치 카드’ 100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이의 메타인지를 높여주는 100개의 하브루타 질문을 통해 직접 아이와 생각을 주고받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절취선을 따라 잘라서 카드로 이용할 수 있도록 별책으로 되어 있고, 책의 후반부에는 해당 카드의 질문들을 어떤 상황에 사용하면 되는지, 해당 질문을 아이와 함께 주고 받는 대화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가이드가 되어 있다. 자기주도학습과 메타인지, 두 가지를 한꺼번에 키울 수 있는 일거양득 학습법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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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걸 배드 걸 스토리콜렉터 106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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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풀로 덮인 둔덕에 저격수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피자 가게가 아동 성착취 조직의 아지트도 아니며, 세상을 통제하는 비밀 결사 따위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마크 트웨인식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건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것들이다.          p.153

 

진실 마법사, 일명 인간 거짓말 탐지기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500명 중에 한 명꼴로 수가 굉장히 적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피험자와 친밀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적중률이 80퍼센트 이상 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대개 중년 이상으로, 형사, 판사, 변호사, 심리학자나 첩보 요원 같은 특정 직종 출신들이다. 그런데, 진실 마법사가 되기에는 너무 어린 십대 소녀가 바로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소녀는 참혹한 범죄 현장에서 발견되었는데, 과거도, 신원도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법원이 피보호자가 되어 위탁 가정을 전전하며 살았고, 현재는 가중 폭행이라는 죄목으로 소년원에서 보호되고 있다. 사회복지사의 요청으로 한 심리학자가 그 소녀, 이비 코맥을 보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다.

 

사이러스 헤이븐은 이비만큼이나 참혹한 범죄 속에서 홀로 살아 남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심리학자이다. 자신의 형이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수감되어 있는 상태이고, 그는 근친살인이라는 비극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이비가 자신과 유사한 경험을 했기에 더욱 그녀를 도와주고자 하고, 그녀의 보증인이자 보호자가 되기를 자처해 함께 지내게 된다. 한번 그들이 사는 저택 근처에서 한 유명한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소녀가 죽은 채로 발견된다. 사이러스 헤이븐은 범죄심리학자로 경찰의 수사를 도왔고, 살해된 소녀를 둘러싼 밝혀지지 않은 진상에 접근해 나간다. 이비는 자신의 능력으로 수사를 도우려 하는데, 과연 이들은 온통 추악하고 의심스러운 의혹으로 가득한 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 수 있을까.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니까."
나는 입 모양으로만 소리 없이 '집'이라고 말해본다. 단순한 개념이지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집은 장소인가? 언어인가? 문화나 기후나 지형인가? 사람들은 집을 떠나 향수병을 앓고 노숙자가 된다. '집'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른가? 그 의미는 각자가 만들어가야 하는 건가? 그게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나?         p.508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들은 국내에 꽤 많이 출간되어 있는 편이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6권, 스탠드 얼론으로 2권이 나와 있다. 이번에 나온 신작은 새로운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사이러스 헤이븐이라는 심리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시리즈로 현재까지 총 3권이 나와 있다.  마이클 로보텀은 시리즈의 첫 작품인 <굿 걸 베드 걸>로 골드 대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품의 후반부에 잠깐 언급이 되는데, 조 올로클린이 사이러스 헤이븐의 대학교 스승이라고 하니, 이어지는 시리즈에서는 함께 등장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그 재미와는 별개로 두툼한 두께만큼이나 느린 이야기 진행으로 책장을 넘기는 속도를 느리게 만들었다면,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는 앉은 자리에서 백여페이지를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진 ‘진짜 페이지 터너’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구성, 문장, 복선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데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독보적인 아우라가 이야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상대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십대 소녀 이비 코맥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히로인 리스베트만큼이나 강렬한 마력을 발산한다. 과거의 트라우마와 특별한 능력,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비밀까지 앞으로 이어질 시리즈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 올로클린이 파킨슨병을 앓는 심리학자로 육체와 정신 모두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는 캐릭터였다면, 사이러스 헤이븐은 어린 시절 근친살인이 일어난 집에서 홀로 살아남아 엄청난 지옥을 경험했던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시리즈를 지속시키는 캐릭터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2018년 <The Other Wife>이후 조 올로클린 시리즈의 신작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이후로 로보텀은 사이러스 헤이븐 시리즈 세 편을 매년 출간하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이어지는 작품인 <그녀가 착했을 때 When She Was Good>, <당신 옆에 누워 Lying Beside You>는 원서로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중이다. 내가 원서를 천천히 읽어 내는 동안, 번역본이 국내에 빨리 나와주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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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이 신경 쓰입니다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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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밤나무에는 밤이 잔뜩 열렸다. 아버지가 나뭇가지로, 혹은 나무에 올라가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탐스런 밤을 땄다. 그걸 엄마가 신발 신은 발로 밟아 솜씨 좋게 껍질을 벗겼다. 오사카의 아파트 단지에서 보던 부모님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그때 '과거'가 있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부러웠다. 어린이인 내게는 추억의 양이 너무 적었다.         p.13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별로 필요하지 않고, 지극히 사소한 일이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이는 것들이 있다. 감자 샐러드에 어떤 식재료를 넣는지, 나의 궁극의 몽블랑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백화점 지하에 있는 식품매장, 이웃집의 화분 상태, 슈퍼나 편의점의 아이스크림 코너, 은행에 비치된 잡지의 종류 등등.. 이 책은 마스다 미리의 소소한 일상 풍경들을 그리고 있다. 인생에 별 필요 없는 확인을 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일상은 소박하지만 귀엽고, 진지하지만 코믹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꼭 필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사거리 신호등이 전부 '빨강'이 되는 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마음, 다양한 사람의 작은 아름다움이 거리에 흩어져 있을지도 몰라 자신도 모르게 매번 확인하게 된다고.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슈퍼에서 장을 보다가 남의 바구니 안을 슬쩍 보면서 식구는 몇 명일까, 어떤 가족 구성일까, 상상하는 시간, 남의 집 창문을 들여다보는 듯한 조금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 소소한 관심의 순간이다. 거리에서 길고양이와 눈이 마주치는 잠깐 동안의 행복, 회식하고 돌아가는 길에 부동산 가게의 배치도를 보는 여유, 이따금 보게 되는 나비를 만나며 잠시나마 나비의 기분이 되어보는 즐거움... 매 페이지마다 맞아. 맞아.를 연발할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날마다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질 수밖에 없고, 다른 누구와도 교대할 수 없다. 잠시 그 짐을 내려놓고 정리정돈 책 속의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아~무것도 없네." 하고 개운해하고 싶은 밤도 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을 많이 만난 날일수록 헤어진 뒤 혼자 영화를 보고 돌아갈 때가 많다. 일단 다른 세계에서 쉬었다 가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p.138

 

별 볼 일 없는 일상의 수많은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세계를 이토록 다정하고, 담백하고, 따뜻하게 그려내는 작가가 또 있을까. 마스다 미리의 작품 속에는 그냥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기분 좋은 일, 의미가 없더라도, 뭔가 이득이 생기지 않더라도 그냥 그 순간으로 충분한 행복들이 가득하다. 작은 행복이 여러 개 모여서, 그 소소함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어른의 행복이라는 걸 아는 나이라면 더 공감하며 읽게 될 것이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보통의 매일이 지금처럼 계속 이어지는 것이 진짜 행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보니, 이제는 안다.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아있게 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아주 보통의 어떤 날이라는 것을. 그저 스쳐 지나갔던 일상의 수많은 날들 중에 어느 한 순간이 오래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의 오늘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의 긍정 마인드가 내게도 전염되는 기분도 들어 마음이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도 들고 말이다.

 

별 생각 없이 지나치면 중요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싶을 만큼 작은 일상 속 순간들, 우리에게도 매일 같이 벌어지는 평범한 나날들. 그런데 마스다 미리는 그 속에서 기어코 반짝거림을 발견해낸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마스다 미리의 소소한 글과 그림을 통해서 일상 속 작은 여유를 느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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