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하게 산다 - 저마다 생긴 대로, 열심대충 곤충 라이프
주에키타로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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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일상에 쫓기며 바쁘게 살다 보니, 가끔은 '느긋하게'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여유로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시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체크하면서 해치워야 하는 일상과 자신만의 생활 리듬으로 천천히 생각하며 움직이는 매일은 분명 다를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꽤 에너지 소모가 크기 때문에 느긋한 라이프를 즐기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저마다 생긴 대로, 열심대충 곤충 라이프'라는 부제와 '느긋하게 산다'라는 제목, 그리고 쓱쓱 대충 그린 듯한 곤충 그림들과 샛노란 빛깔의 표지까지.. 이 책은 펼치기도 전에 잠시 속도를 멈추고, 쉬어도 좋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책은 수십만 팔로워를 통해 발군의 재능을 입증해온 일러스트레이터 겸 만화가 주에키타로가 신개념 곤충 만화이다. 저자는 수채화풍의 독특하면서도 세밀한 그림으로 곤충 생태에 관한 묘사를 인간사와 유머를 적절히 섞어 '곤충'의 매력을 전파하는 작가다. 이 책은 2년간의 온라인 연재작 가운데 특히 화제가 된 에피소드를 엄선하고, 새로 50여 쪽을 덧붙여 완성했다. 참매미는 다가오는 여름을 위해 울음소리를 연습하고, 잠자리 유충은 잠자리가 되어 하늘을 날기 전에 물속에서 함께 했던 물방개와 인사를 나눈다. 라이벌인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는 애벌레였던 시절에 만나 번데기가 되고 성충이 되지만, 어쩐지 서로를 싸워서 이기고 싶지가 않다. 매일을 열심히 일했던 일개미는 주말 내내 푹 퍼져서 쉬다가 일요일 밤이 되자 우울해진다.

 

 

우물 밖으로 처음 나온 개구리는 뱀이라는 존재를 처음 만났기에 오히려 놀라지 않고 평온할 수 있었고, 우렁차게 우는 울음소리로 익숙한 매미 중에도 음치가 있었다는 사실, 열심히 일하는 존재의 상징이기도 한 일개미도 일하기 싫은 날이 있고, 영원한 라이벌로 불리지만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민달팽이는 새해 첫 꿈으로 멋진 집을 가지게 되는 꿈을 꾸고, 말똥구리는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 때 친구들에게 줄 말똥 선물을 열심히 굴리고 있지만 과연 다른 곤충들도 그 선물을 좋아할 지는 의문이다. 그 외에도 송사리 학교의 날라리, 두꺼비의 육아, 베짱이의 진로 고민, 일개미의 취업 상담, 번데기의 스키점프 등 곤충들의 일상들은 우리의 그것과 묘하게 닮아 있다.

 

 

만화의 등장인물은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 개구리와 개미, 메뚜기, 사마귀, 공벌레 등이다. 작가인 주에키타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생물 사육과 관찰을 좋아했고, 지금도 사슴벌레를 비롯해 여러 곤충을 기르고 있으며, 그러다 보니 어쩐지 인간 세계에서도 이런 광경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들을 의인화해서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의 세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이 만화는 곤충에게도 각각의 성격이 있고, 라이프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소소한 재미를 선사한다.

 

아이 덕분에 장수풍뎅이도 키워봤고, 현재는 달팽이를 키우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곤충들도 자세히 보면 저마다 성격과 행동 방식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흔히 생각하는 그런 이미지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곤충도 있고, 생각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주는 곤충도 있으니, 곤충사도 인간사와 별반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직접 곤충을 제대로 관찰해 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마도 이 책을 읽고 나면 풀숲에서 만나게 되는 곤충들이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신개념 곤충만화를 통해 색다른 힐링과 위로를 느껴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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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아이언 위도우 : 죽음을 삼킨 여자 1~2 - 전2권
쟈오 재이 시란 지음, 심연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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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업보 같은 건 없어. 아니, 있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해당되지 않아. 우리 같은 사람은 그저 남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으려고 태어난 거야. 삶의 거대한 흐름에 순응하며 살아갈 여유도 우리에겐 없어. 이 세상 그 무엇도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으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뭔가를 원할 땐 주변의 모든 것들과 맞서 싸워서 억지로 빼앗아야 해... 우린 어차피 다 죽을 거야. 그렇다면 적어도 언제나 꿈꿔왔던 일을 해봐야 하지 않겠어?"            - 1권, p.58

 

‘혼돈’이라는 지구를 침입자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개발된 거대 전투 병기 '크리살리스'는 남성 조정사와 여성인 '첩 조종사'가 한 팀이 움직일 수 있다. 대부분의 여자 조종사는 전투 중에 희생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가족들은 죽음에 대한 보상금을 받았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사회였기에, 여성들에게 삶은 두 가지 길밖에 없었다. 남성의 소유물이 되거나 남성 조종사가 모는 크리살리스에게 먹히거나. 그것이 여성들의 기를 소모하여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스포트라이트는 일부 남성 조종사들에게 향했다. 측천의 언니 역시 첩 조종사로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측천은 언니의 복수를 위해 자진해서 첩 조종사로 입대하기로 한다. 언니를 죽게 만들었던 스타 조종사인 양광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첩이 되어 그의 목을 그어 버리기 위해서.

 

측천은 도착해서 치른 기력 테스트에서 무려 624라는 압도적인 수치를 기록한다. 인류 중 단 3퍼센트 남짓만이 500 이상을 기록하는데, 500은 크리살리스를 활성화시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힘이다. 그런데 측천은 그 수치를 가뿐이 넘어선 것이다. 덕분에 무빈이 되어 죽은 언니보다 네 배는 높은 연봉을 받게 된다. 하지만 측천은 오로지 자신의 목적만 생각했다. 그리고 양광과 함께 탑승한 첫 번째 크리살리스 전투에서, 측천은 압도적인 ‘기력’으로 그를 파괴하고 홀로 살아남는다. 그렇게 측천은 '철의 미망인'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쓴다. 그리고 이것은 측천이 사회의 억압을 가뿐하게 이겨내고, 세상을 향해 펼쳐 보일 복수의 서막에 불과했다. 남성보다 강하다는 이유로 측천은 전투에 나가지 않는 기간 동안 감옥에 가두어게 되지만, 더 이상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측천은 여성을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해왔던 가부장제를 산산조각 내며, 그들의 악몽이 되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 중인 줄 알아? 여성은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라는 개념은 그저 그것이 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당신들의 바람일 뿐이야. 거짓 환상이지. 그게 아니고서야 왜 그토록 기를 쓰고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지? 왜 우리 몸을 힘없이 만드는 거야? 왜 성스러움을 주장하는 거짓 도덕을 우리에게 강요하는데? 불안에 떠는 너희 남자들이 겁먹어서 그런 거잖아. 우리에게 복종을 강요할 수는 있지만, 진심으로 너희를 사랑하고 존중해 달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는 걸 내심 알고 있으니까...."            - 2권, p.133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는 미색과 남성편력으로 유명한 희대의 악녀로 알려져 그 동안 여러 작품의 캐릭터로 변주되었다. 이번에는 SF 판타지 장르에서,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되어 등장한다. 여자가 귀한 존재인 남자의 그릇된 반쪽인 천한 존재로 취급받는 시대에 당당히 자신의 의지대로 주어진 운명을 바꾸고, 사람들이 정해놓은 틀을 부수는 영웅 캐릭터로 거듭난 것이다. 당돌하고 무자비하며 분노하는 여성 영웅을 그리고 싶었던 저자는 역사 속에서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측천무후'를 매력적인 소녀 캐릭터로 재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 속 인물인 장이치와 이세민을 등장시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삼각 관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미국 SF 판타지 작가 협회가 시상하는 안드레 노턴 네뷸러상 작가 부문 후보작에 올랐고, 2021 보스턴 글로브 베스트북과 북라이엇이 꼽은 ‘역대 최고의 공상 과학 소설 2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커다란 병기를 타고 움직이는 매카닉한 설정이 스펙타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독특한 삼각 관계 로맨스가 극에 재미를 더해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라라랜드, 헝거게임, 트와일라잇 등의 작품 제작에 참여한 제작사를 통해 곧 영화화될 예정이기도 하다. 속도감 있는 전개와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볼거리까지 가득한 작품이라 스크린에서 펼쳐질 이야기도 매우 기대가 된다. 어디서도 만난 적 없는 여성 영웅의 통쾌한 반전 서사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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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의 독서법 - 분열과 고립의 시대의 책읽기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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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책은 도피이자 안식이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데 익숙한 외동아이였다. 아버지가 옆면에 문과 창을 내 장난감 집으로 변신시킨, 판지로 된 냉장고 상자 안에서 책을 읽었다. 밤에 담요 밑에서 손전등을 켜고 책을 읽었다. 운동장에서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쉬는 시간 동안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차멀미를 하면서도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게다가 식탁에서도 읽었다. 어머니가 식사를 하는 동안 책읽기를 금지했기 때문에, 식탁에 앉아 가까이에 있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곤 했다... 나는 늘 읽을거리가 고팠다.         p.17~18

 

어린 시절 나는 책으로 집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 놀곤 했었다. 글자들이 울타리가 되고, 그림들이 지붕이 되어 아늑한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 지면 그 속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곤 했다. 이야기로 만든 집은 나만의 놀이터였고,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자, 안식처였다. 조금 더 자라서는 주말마다 집에서 꽤 먼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미로처럼 빼곡한 서가 사이를 헤집고 다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이 난다. 책은 나를 과거로 데려가고, 가본 적 없는 도시를 여행하게 해주며, 경험해 본 적 없는 미래를 보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정말 순수하게 책읽기의 기쁨을 만끽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서평가’라고 불리는 미치코 가쿠타니의 본격 서평집이다. 고전부터 동시대 작가가 쓴 소설, 회고록, 기술, 정치, 문화 분야 논픽션을 아우르는 99개의 서평이 수록되어 있다. 일본계 미국인 문학비평가이자 서평가인 가쿠타니는 <워싱턴포스트>와 <타임>을 거쳐 <뉴욕타임스>에서 무려 35년 가까이 서평을 담당했으며, 1998년에 비평 분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유명 작가들을 향해 독설과 혹평도 서슴지 않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서평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소설과 여러 드라마에서 언급이 될 정도로 하나의 문화 아이콘이 된 존재이기도 해, 그의 예리하고 신랄한 서평들이 궁금했다.

 

 

 

서사의 독창성, 음악적인 언어의 구사, 나보코프가 좋아하는 두 가지 취미인 나비 연구와 체스 게임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세부와 정확성에 대한 애정, 회화와 같은 직접성과 대가다운 솜씨로 장면, 기억, 감각, 또는 분위기를 그려내는 능력 등 나보코프가 작가로서 가진 수많은 재능이 이 눈부신 단편집 전반에서 드러난다. 이런 재능이 나보코프가 존 업다이크, 토머스 핀천, 마틴 에이미스, 존 드릴로, 제이디 스미스처럼 다양한 작가들에게 지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p.259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아메리카나>를 시작으로,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알베르 카뮈 <페스트>,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호프 자런 <랩 걸>,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이언 매큐언 <속죄>, J.K. 롤링 해리 포터 시리즈, 모리스 샌닥 <괴물들이 사는 나라>,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도나 타트 <황금방울새>, 타라 웨스트오버 <배움의 발견> 등 이 책에 수록된 아흔아홉 편의 글들은 길지 않지만,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서평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고전, 문학, 동화 등 국내에도 이미 출간되어 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각각의 서평은 한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하고, 하나의 테마로 여러 권을 묶어서 소개하는 글도 있다. 한 작가의 시리즈를 소개하기도 하고,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글로 풀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왜 이렇게 책을 사랑하는 걸까. 이 서평집을 읽다 보면 아주 오랫동안 책을 사랑해온 저자의 애정이 글 곳곳에 묻어나서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자연스레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는 책에 대해 '종이, 잉크, 접착제, 실, 판지, 천, 또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벽돌 크기의 이 마술 같은 물건은 실로 작은 타임머신'이라고 말한다. 책은 우리를 과거로 데려가 역사 속의 한 순간을 경험하게 해주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순간을 체험하게 해주니 그야말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책은 시간과 장소를 넘어, 국경과 역사를 가로지르고, 문화와 종교, 정치와 인종을 초월하게 해주는 장치이니 독서야 말로 '분열과 고립의 시대'를 무사히 살아내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치코 가쿠타니의 글은 우리가 처음 읽은 책의 이름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어 주는, 읽는 법을 가르쳐주고, 페이지의 단어들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던 바로 그 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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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3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금씩 읽고 있는데, 읽어야할 책 리스트가 엄청 길어지네요 ^^;;

피오나 2023-03-30 12:32   좋아요 1 | URL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많다는 것이, 읽고 싶은 책이 많다는 사실이 행복해지는 순간이죠. ㅋㅋㅋ
 
도미노 도미노
온다 리쿠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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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가 걸렸다.
잠깐만, 가바야가 정말 그렇게 말했나? 잘 생각해보자. 정말 그가 범인을 종이에 스라고 했나? 하루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 진상을.
맞아, 진상을 종이에 서서 넘길 것.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퍼진다.             p.41

 

간토생명 야에스 지사의 직원들은 오늘 초긴장 상태이다. 실적 압박에 시달리다 겨우 목표 금액을 채웠기 때문에, 마감 전까지 1억 엔짜리 계약서를 본사에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계약 건을 기다리느라 직원들 모두 지쳐 있는데다, 도착하면 도착하는 대로 마감 시간과 경쟁해야 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한편, 간토생명에서 자금을 지원해 매년 대극장에서 상연되는 아동 뮤지컬 <에미>의 오디션 현장에서는 초등학교 4학년인 마리카가 엄마와 함께 대기 중이다. 그 바닥에선 상당히 유명한 레이나가 뒤늦게 오디션장에 도착해 대기실이 술렁거린다. 친구이자 라이벌로 레이나를 마주한 마리카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 배역을 따낼 수 있을까.

 

젊은 관객층에게 인기가 많은 B급 할리우드 영화 <나이트메어>의 상영관에서는 다다시와 하루나가 범인을 추리하는 대결을 펼치는 중이다. 두 사람은 미스터리 동호회의 회장 자리를 두고 서로 겨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트메어>의 감독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미스터리 마니아라는데, 역시나 범인의 정체는 모두의 예상을 훌쩍 뛰어 넘는 것이었다. 한편 하이쿠 동호회 모임을 위해 도쿄에 처음 상경한 할아버지 슌사쿠는 미로처럼 복잡한 도쿄역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슌사쿠를 기다리던 동호회 회원들은 겉모습부터 어딘가 심상치않은 매서운 눈매를 가진 이들이었는데, 네 노인 모두 경시청을 은퇴한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슌사쿠를 기다리다 각자 흩어져서 그를 찾아 보기로 한다. 그 외에도 배신한 연인에게 복수를 계획 중인 여자와 신작 홍보차 일본에 방문한 미국인 호러 영화 감독과 그의 반려동물, 그리고 도쿄역에 폭탄을 설치하려는 테러 조직 '얼룩끈' 등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이들이 하나둘씩 도쿄역에 모여든다.

 

 

 

'아저씨, 라이터 떨어뜨렸어요."
마리카가 가와조에 겐타로의 뒤통수를 향해 그렇게 말한 순간, 눈부신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그때, 세계가 색을 잃고 모든 것이 흑백으로 변했다. 그 흑백의 순간에 그때까지 의미 없이 제각기 흩어져 있던 뭔가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하나로 이어진 것 같았다.
그 순간, 흑백 화면으로 변한 역의 중앙광장에서 동시에 사람들이 갑자기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순간, 그들을 강하게 연결시켰다.          p.227

 

이번에 온다 리쿠표 패닉 코미디 '도미노' 시리즈 신작이 나오면서 2001년에 발표되었던 <도미노>도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온다 리쿠의 작품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놓쳤던 작품이라, 시리즈로 표지 디자인을 통일해 나온 이번 버전으로 드디어 만나보게 되었다. 복잡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도쿄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에는 우선 등장 인물이 28명이나 된다. 정확히는 27명의 사람과 1마리의 동물이다. 이렇게 캐릭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펼치자 마자 도쿄역 지도와 등장 인물들의 한마디가 정리되어 있어 인물들의 미로 속에서 헤매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들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될 테니 말이다.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제각각의 사건들이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면서 아슬아슬한 도미노가 만들어 진다. 일단 하나의 조각이 쓰러지면 절대 멈출 수 없는, 연쇄적으로 하나씩 쓰러지는 도미노 게임처럼 차곡차곡 쌓인 이야기들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얽히고설킨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퍼즐 속에서 테러 조직이 도쿄를 날려버릴 계획을 세우면서 긴장감 넘치는 좌충우돌 스토리는 정점에 가까워진다. 100개의 장마다 화자를 바꾸면서 진행되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정신 없다는 생각이 한 번도 들지 않는 작품이었다.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 개성이 뚜렷한 자신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고, 군더더기 없이 속도감 있는 전개와 빈틈 없는 구성까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가 이리도 깔끔하게 연결이 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기존 온다 리쿠의 작품들에 비해 아주 경쾌하고, 색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이 작품을 만나 보자!! 온다 리쿠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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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사도들 - 최재천이 만난 다윈주의자들 드디어 다윈 6
최재천 지음,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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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축구 경기에서 승리하겠다는, 책을 한 권 쓰겠다는, 현악 사중주를 하나 작곡하겠다는, 또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겠다는 자기만의 삶의 목표를 세웁니다. 모두 다 인간이 세울 수 있는 가치 있는 목표들입니다. 우주의 의미에 대한 당신의 근심이 이들을 방해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나는 여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어쩌면 우주에는 아무 목적도 없을지 모른다. 내 삶도 어쩌면 궁극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정원, 멋진 서재, 훌륭한 아내 또는 남편 그리고 아이들이 있어서 내 삶은 무의미하지 않다."           p.174

 

인류를 뒤흔든 과학적 발견이야 많지만 다윈의 진화론만큼 심하게 세상을 흔든 것은 없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발견 정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게다가 다윈의 이론은 인간 자신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시각에 혁명을 일으켰다. 다윈은 두 가지의 유사한 종 사이의 경쟁으로 인해 하나가 멸종됐고, 오늘날 살아 있는 동물들은 과거에 살았던 모든 종에서 이런저런 식으로 선택된 종의 후예라고 말했다. 신이 자연과 모든 생물을 설계했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이 주류이던 19세기 초반, 인간이라는 존재가 신이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니라 진화의 산물인 수많은 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종의 기원>이 나온지 164년이 지난 지금, 왜 여전히 다윈이 중요한 것일까.

 

이 책은 이화 여자 대학교 에코 과학부의 최재천 석좌 교수가 우리 시대의 대표 다윈주의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인터뷰집이다. 비전문가가 묻고 전문가가 답하는 형식의 일방적 인터뷰를 묶은 책이 아니라, 사도들 간의 진솔한 담론집이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최재천 교수는 BTS의 팬덤인 ‘아미’가 다윈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BTS의 아미는 단순히 그들의 음악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BTS가 음악에 부여한 메시지를 체화한 다음 콘텐츠를 재생산해 적극적으로 전파해 BTS를 비틀스에 비견되는 세계적인 그룹으로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재야의 생물학자였던 다윈이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을 수 있게 된 배후에도 그를 둘러싼 팬덤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그의 제자와 사도를 자처하며 과학 분야 곳곳에서 활약하는 팬덤이 없다면 다윈과 그의 진화론은 확산되지도, 발전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바로 다윈의 아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의 기원> 출간 100주년이었던 1959년으로 돌아가 보면, 그때까지도 그 누구도 암컷이 자신의 짝짓기 상대를 선택한다는 성 선택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런 가설이 나오기도 했죠. 포식자가 수컷을 잘 잡도록 눈에 띄게 만듦으로써 나쁜 유전자를 제거하도록 한다는, 즉 종을 이롭게 한다는 가설이었죠. 그러나 이것은 몇 가지 계산만 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잘못된 가설이었습니다. 토머스 헌트 모건이 그 가설을 지지했던 걸로 알고 있고, 아마 헉슬리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p.325

 

다윈의 삶과 업적을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원전을 직접 읽는 것이겠지만, 사실 <종의 기원>은 그 유명세만큼이나 읽기 어렵다는 악명이 높은 책이기도 하다. 다윈 시대의 생명과학 지식과 용어에 대한 이해 부족, 엄청나게 다양하고 또 매우 생소한 생물들에 대한 관찰 결과와 수많은 인물들의 조사 결과가 인용되어 있으나 이들을 거의 알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본문에 소제목이 없어 읽어 내려가기가 매우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이 그 요인이다. 나 역시 몇 년 전에 <종의 기원> 초판을 주석과 함께 완역해 굉장히 현대적으로 해석했다고 하는 버전을 읽어 보았지만, 주석이 무려 2,200여 개에 달하는 그 책도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가 소화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이 책을 통해서 만난 평생 다윈을 붙잡고 생물학부터 철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치열하게 연구해 온 이들의 경험과 통찰에서 우러나오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다윈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50년 가까이 다윈 핀치(되새류)를 연구한 피터 그랜트와 로즈메리 그랜트 부부, 과학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헬레나 크로닌, 진화 심리학의 최전선에서 인간의 인지와 언어를 연구하는 스티븐 핑커, 유전학의 관점에서 다윈주의 통찰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킨 리처드 도킨스, 생물 철학자 대니얼 데닛, 식물학자 피터 크레인 등등 최채천 교수와 이들의 대화를 읽으면서 진화론에 대해서, 그리고 도대체 왜 다윈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최재천 교수는 인터뷰를 위해 만난 모든 이들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왜 다윈이 중요한가?"에 대해 묻는다. 그에 대한 학자들의 답변들은 모두 제각각 흥미로웠지만, 열한째 사도 제임스 왓슨의 답변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누구보다 간단하게 세상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다윈 없이는 생명을 이해할 수 없죠. 그리고 생명은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라는 말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게, 다윈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이 궁금하다면, 찰스 다윈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드디어 다윈' 시리즈는 <종의 기원>,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다윈 지능>, 그리고 <다윈의 사도들>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될 예정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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