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 노트 -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지침서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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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은 삶의 후회를 줄이고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일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끝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더 충실하게 살기 위한 다짐이자 생의 매 순간을 음미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곧, 오늘을 더욱 사랑하고 내일을 준비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우리가 남은 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p.156~157


나이를 먹을수록 주변의 죽음에 익숙해지게 된다.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죽음이 가까운 이의 부고 소식을 차츰 접하게 되면서 더 이상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까. 다가올 죽음을 조금은 편하게 맞이할 수는 없을까. 


이 책은 서가명강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었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를 썼던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가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27년간 3,000건 이상의 부검을 수행하며 죽음을 통해 삶을 배워온 그는 우리에게 '좋은 삶'을 고민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좋은 죽음없이 좋은 삶도 없다고 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유한한 삶과 필연적 죽음을 마주하는 ‘실천적 방법’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을 담았다. 그리고 그 시작점으로 '나만의 엔딩 노트 작성'을 권한다. 실제로 자신도 일 년에 한 번 유언을 쓴다고 말하는 그는 이것이 단순히 죽음을 준비하는 것을 넘어 남은 인생을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만드는 여정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나는 일 년에 한 번 유언을 쓴다. 그때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현재 나의 위치를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앞으로의 삶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유언은 내게 삶을 향한 다짐이다...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얻게 되는 가장 큰 선물은 삶의 진정한 우선순위를 발견하는 것이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지, 누구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한 통찰을 제공한다. 삶이 끝날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더 진지하게 삶을 고민하고 더욱 의미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                p.228~229


저자는 법의학자로서 국내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 및 범죄의 부검과 자문을 담당하며 특별히 죽음과 인연 깊은 삶을 살아 왔다. 그 인연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더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닌 삶이라고 그는 말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살피고 돌아보는 과정에서 삶의 경건함과 소중함이 더욱더 절실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매일 죽음을 마주하면서 '죽음은 우리를 절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니 죽음을 준비할 시간은 더더욱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의 마지막 준비를 죽음이 눈앞에 있을 때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신체와 정신이 건강할 때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건강할 때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면, 적어도 죽음이 우리를 찾아왔을 때 후회할 일이 적지 않을까.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사유와 유한한 삶과 필연적 죽음을 마주하는 실천적인 방법에서 더 나아가 상실과 애도, 연명의료와 존엄사에 대한 논의로 확장한다. 현장 사례와 데이터, 여러 문헌과 연구를 근거로 ‘좋은 죽음’과 ‘좋은 삶’을 둘러싼 다양한 질문과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책 구매 시 받을 수 있는 '더 잘 살기 위한 30일 유언 노트'에는 매일 그날의 주제에 맞는 질문과 체크리스트, 오늘의 미션이 수록되어 있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별책부록이 책만큼 값진 내용을 담고 있는데, 초판 한정 증정품이니 놓치지 말고 활용해보길 추천한다. 죽음을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다면, 이 책을 통해 그 또한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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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석의 유럽 건축사 수업 - 한 권으로 읽는 유럽 도시의 시공간
양진석 지음 / 와이즈베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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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로마 건축은 도시를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는 건축을 도시적인 개념으로 승화시켜 마침내 '정복의 도시'로 진화할 수 있었다. 로마 건축의 발전은 뛰어난 기술력과 탄탄한 도시 인프라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건축을 도시 환경에 통합하는 일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세계의 중심Caput Mundi이라는 의식과 함께 집중화된 도로망을 통해 주변을 정복하고 장악해 나갔다. 그 배경에는 도로와 수로의 개발이 있다. 당시 로마 도로의 교점들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개선문과 출입문을 통해서 그 상징성을 표현했다.               p.42


모든 분야에 역사가 있듯이 건축에도 역사가 있다.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현대 건축은 서양 건축으로부터 출발했는데,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부터 비잔틴과 로마네스크, 고딕과 르네상스를 거쳐 바로크로 이어지는 양식의 변천사는 우리의 일상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이 책은 현대 건축의 모든 뿌리인 유럽의 건축사를 살펴본다. TV 프로그램 〈러브 하우스〉로 유명한 양진석 건축가는 수 년 동안 사회 오피니언 리더들을 대상으로 유럽 건축사 강의를 해왔는데, 이 책은 그 내용을 엮은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저자의 스케치를 포함,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가들의 걸작까지 유럽의 건축물이 한눈에 담기는 도판 180여 개가 수록되어 유럽 건축사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유럽 건축사를 그리스, 로마의 고전주의에 근거한 '로마 양식'과 로마를 계승함과 동시에 이를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했던 '비로마 양식',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스, 로마 건축을 시작으로 비잔틴, 로마네스크 건축, 고딕 건축, 르네상스 건축, 바로크, 로코코 건축, 그리고 19세기 전후부터 현재까지의 건축으로 장을 나눠 정리했고, 각 장마다 해당 양식을 엿볼 수 잇는 대표적인 현대 건축물들을 살펴본다. 




판테온 돔은 콘크리트를 틀에 찍어 만들었다면 두오모 돔은 벽돌을 지그재그 방식으로 쌓아 올려 결합력을 강화했고, 미세하게 벽돌 벽의 아래가 위쪽보다 좁아지게 쌓아 공중에서도 벽돌이 아래로 추락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쌓은 벽돌만 무려 400만 개라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오모 돔은 최초의 팔각형 돔으로 그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이렇듯 로마 스타일의 정수인 판테온 신전을 '오마주'하면서도 기술적으로는 발전한 형태의 건축물을 지어 올리는 것. 이것이 르네상스의 건축가들에게 주어진 1차 과제였다.              p.170


개인적으로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각 건축 양식에 맞는 키워드를 정리해준 것이다. 그리스, 로마 건축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조화와 비례를 꼽았는데, 조각과 세공 기술의 이면에 철저한 수의 비례로 정의된 미의 세계가 존재했고, 조화롭다는 개념 또한 엄격한 원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 건축을 승계해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이 로마 건축이라 그리스 건축이 장식적이라면, 로마 건축은 공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바실리카를 원형으로 한 성과 요새의 폐쇄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로마네스크 건축은 성과 교회, 수도원 건축이 주류로 육중한 울타리 담장과 수직성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2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중엽 중세 말까지 유럽에서 번성한 건축 양식인 고딕 건축은 첨탑, 뾰족한 아치, 플라잉 버트리스, 스테인드글라스가 특징이다. 신학과 문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적 세계관의 지평을 확장했고, 20세기 교회와 종합대학 건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부활 또는 재생의 뜻을 지닌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르네상스는 인간의 가치를 중시하고 예술가들이 이름을 찾은 시대이기도 했다. 르네상스 건축은 질서, 대칭, 비례와 같은 원칙을 중시했고 절대 왕정과 신흥 세력의 등장으로 새로운 도시와 문화를 탄생시켰다. 로마에서 르네상스 말기 매너리즘을 거쳐 비정형적 양식으로 발전한 것이 바로크, 로코코 건축이다. 기하학 대신 타원과 자유 곡선을 활용한 역동적이고 화려한 양식이다. 이후 동인도 무역과 식민지 시대를 통한 건툭의 다양성 시대가 도래해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이 발전한다. 세계 3대 근대 건축 거장의 시대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현대 건축과 로마와 비로마가 공존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단 한 권으로 3,000년의 유럽 건축사를 만날 수 있어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현대 건축을 읽기 위한 키워드가 궁금하다면, 쉽고 재미있는 유럽 건축사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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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째 열다섯 4 - 구슬의 미래 텍스트T 14
김혜정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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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신비로움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신비롭기 때문에 두렵고, 두렵기 때문에 신비롭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자신과 다른 야호와 호랑을 두려워하며 배척하기 시작했다. 신성시하던 분위기가 점차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괴물로 인식되면서 야호와 호랑은 세상에서 존재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가을은 야호족이 된 이후의 삶을 떠올려 봤다. 인간과 다른 종족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오백 년을 넘게 도망 다니기만 했다. 왜 도망쳐야 하는지 누구에게도 진지하게 묻지 않았다.. 들키게 되면 인간은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p.63~64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군 신화를 살짝 비틀어 여우에서 사람의 모습이 된 야호족과 범에서 사람이 된 호랑족이 공존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는 K 판타지 <오백 년째 열다섯>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네 번째 이야기가 나왔다. 판타지적인 설정이 배경이지만, 주요 서사는 중학생 소년,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현실적이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가을은 열다섯 살의 나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시리즈를 거듭해 가면서 점차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어른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어 매번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모습은 늘 다음번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최초 구슬의 주인이자 야호랑의 우두머리 원호인 가을은 오백 년째 열다섯 살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친구들은 어른이 되겠지만, 가을은 어른이 될 수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열다섯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직업을 가질 수도, 결혼을 할 수도, 부모가 될 수도 없다. 가을에게 신우라는 인간 남자 친구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에 대한 고민이 더 늘어났다.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질수록 신우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두려워졌으니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야호와 호랑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인간에게 정체를 숨긴 채 살아 온 야호랑들이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기로 결정하고 커밍아웃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다. 완전체 구슬 덕분에 미래를 보게 된 가을은 이 계획이 불러올 끔찍한 미래와 마주하게 되는데, 과연 가을은 프로젝트를 막고 야호랑을 지킬 수 있을까. 





완전체 구슬의 능력이 미래를 보는 거라면 가을은 그 능력이 별로 반갑지 않았다. 할머니와 엄마가 가을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모습과 신우가 어른이 되어 아빠가 된 모습은 가을이 미리 알고 싶은 미래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점쟁이나 역술가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이미 지나온 과거를 알아맞히기도 하고 다가올 미래를 알려 주지만 정작 현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어제와 내일에 매달리느라 오늘을 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가을은 오백 년을 넘게 살면서 오늘을 잘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113


전편에서 수백 년 동안 가족처럼 지냈던 휴로부터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게 되고, 을과 신우, 그리고 휴의 삼각 관계 로맨스도 이야기에 소소한 재미를 더해주었었다면, 이번에는 유정의 또 다른 삼각 관계가 펼쳐진다. 유정이 오백 년 동안 좋아한 현에게 고백을 하지만, 현은 유정을 친구이자 동생, 누나로서 좋아한다고 거절의 뜻을 전한 것이다. 실망한 유정의 앞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휴가 처음으로 구슬을 나눠 준 율이다. 율은 역사속에서 킹메이커로서 많은 일들을 해왔었는데, 그만큼 유명하고 또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야호족 중에서도 잘생긴 걸로 유명한 율이 유정에게 관심을 보이고, 결국 그에게 고백을 받게 되고 유정이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해 본 건 2천 년 만에 처음이라는 율의 고백에 흔들리는 유정은 둘 다 좋아하면 안되겠지만, 한 명만 선택하기 너무 어렵다고 고민한다. 


한편, 율의 주도로 야호랑의 커밍아웃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동안 인간들 속에서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는 야호랑은 정체가 발각될 때마다 괴물로 몰려 고통을 당해 왔다. 율은 야호랑의 정체를 당당하게 드러내면 더 이상 우리를 함부로 해칠 수 없을 거라며 모두를 설득하고, 세상에 야호랑의 정체를 당당하게 드러내자고 말한다. 가을은 보수적인 본야호와 본호랑이 반대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모두들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해 적극적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된다. 하지만 야호랑의 정체를 세상에 밝히자는 율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모두에게 가장 큰 위기가 닥치게 되는데... 가을은 야호랑의 미래와 가장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 시리즈는 오백 년 동안 열다섯 살로 살아온 여자아이라는 캐릭터 자체도 신선하고, ‘단군 신화’를 비롯해 ‘서동요’, ‘의좋은 형제’,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등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를 현대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결말과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이번 작품은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 시리즈를 만나온 독자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여운처럼 남겨준다. 십 대 독자들의 뜨거운 지지와 사랑을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신화와 옛이야기에 뿌리를 둔 한국형 판타지’로서 청소년 문학의 독보적인 역사를 쓰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이 매력적인 K 판타지를 지금 바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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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카페 도도 카페 도도
시메노 나기 지음, 장민주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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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든 마음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미레이는 여름날 1인 전용 카페에서 먹었던 푸딩을 떠올린다. 푸딩과 푸딩 틀을 나이프로 분리한 다음 접시를 덮고 뒤집는다. 틀을 빼내면 접시에 푸딩이 해방된 것처럼 떨어졌다. 뚜껑을 덮은 마음, 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때 주인장이 푸딩에 찔러 넣었던 미니 나이프를 보여주었던 것 같은데... '양날.' 양면성, 이면, 모든 방향. 한쪽만 보면 알 수 없는 진실이 있는 게 아닐까. 양면을 볼 때 비로소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p.104


도시의 어느 거리 한구석,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호젓이 자리한 작고 비밀스러운 카페가 있다. 카운터에 의자 다섯 개, 정원에 테이블 세트 하나가 전부인 작은 카페 도도. 주인장 소로리는 도시의 바쁜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이곳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1인 전용 카페라서 손님들은 모두 혼자서 방문한다. 오늘은 저녁에 문을 열고 얼마 안 되어 벌써 만석이다. 오늘의 추천 메뉴는 '안개 속의 페이스트리 파이'이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상황을 누군가 지켜보는 걸까 싶어 가슴이 철렁하면서 손님들은 페이스트리 버터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를 흠뻑 들이마신다. 안개 속에 있는 모두의 마음이 언젠가는 화창하게 개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로리는 손님들에게 오늘의 메뉴를 가져온다.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장 소로리는 키가 훤칠하고, 수줍은 눈웃음을 띠고 있는 남자다. 진지하지만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차분한 이미지에 비해 약간 덜렁대기도 하는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마다 인물들을 위로해주고, 고민을 해결해주는 신비로운 음식을 개발해 내 놓는데, 지난 1권과 2권에서는 이런 음식들이 등장했었다. 자기긍정력을 높여주는 주전자 커피, 비 내리는 날의 샌드위치, 나를 돌보는 달콤한 디저트 마시멜로 구이, 숲의 선물 버섯 타르트, 꿈에 잘 듣는 스튜, 행복을 가져오는 통사과구이 그리고 그대만의 정답 스패니시 오믈렛, 상처받지 않도록 오이 포타주, 시간을 되돌리는 버섯 아히요, 자신감을 주는 앙버터 토스트까지 이름만 보더라도 어떤 음식인지, 한번쯤 먹어보고 싶은 메뉴들이다. 겉보기에는 어디에나 흔히 있을 법한 주택가의 한구석에 이런 카페가 있다면 갑자기 초현실적인 공간에 빨려 들어온 듯한 기분도 들 것만 같다. 어쩐지 동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메뉴들이니 말이다. 




가라앉은 기분이 다시 떠오르길 기다리는 오차즈케. 

변함없이 독특한 메뉴 이름이군요. 소로리는 그날 방문하는 고객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레시피를 생각하나 봅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 모르겠네요. 소로리가 생각한 메뉴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저절로 이 숲을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고개를 숙인 채 골목에 나타난 이 손님도 틀림없이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테죠.              p.162


'카페 도도'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이자 마지막 이야기가 나왔다. <밤에만 열리는 카페 도도>, <카페 도도에 오면 마음의 비가 그칩니다>에 이어 <시간이 멈춘 카페 도도>이다. 사람들은 열심히 달리는 일상에서 잠시 도망치고 싶을 때, 도시의 떠들썩한 소음으로부터 떨어져 조금은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 이곳을 찾아 온다. 주인장 소로리가 개발한 ‘오늘의 추천 메뉴’에 따라 각 장이 구성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안개 속의 페이스트리 파이, 견디기 힘든 마음에 뚜껑을 덮는 커스터드푸딩, 흑백을 가르지 않는 케이크 살레, 가라앉은 기분이 다시 떠오르길 기다리는 오차즈케, 잠시 멈춤을 위한 미트소스 그라탱이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는 실직과 이혼으로 인해 평소 함께 하던 도예 교실 동료들과 편하게 어울릴 수 없고, 누군가는 의류 업계에서 일하면서 프리랜서 판매원에게 경쟁심을 느끼며 위축되어 있고, 또 누군가는 근속 연수가 긴 베테랑임에도 매번 혼잡한 지하철 역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이다. 직장에서 퇴직 후 엄마를 도와주다 혼자 베이커리를 운영하게 된 누군가는 계약 만료를 앞두고 가게 이전 때문에 고민이다. 


이렇게 나이도 하는 일도, 성격도, 처해 있는 상황도 모두 다른 4명의 여성들은 카페 도도를 통해서 멈춤의 시간을 가진다. 지치고 힘든 손님들이 카페 도도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 받고,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독자들도 힐링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카페 도도를 찾아온 손님들은  ‘오늘의 추천 메뉴’ 한 접시로 위로 받고 다시 삶을 향해 걸어간다. 우리는 더 많이, 더 많이, 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며 살고 있다. 사실 행복의 허들을 내리면 아주 작은 일에도 만족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 작품은 행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손님들의 이야기도 재미있고, 특별한 이름이 붙은 오늘의 추천 메뉴를 만나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실제로 도쿄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따뜻한 이야기들이 탄생했는데, 카페 도도같은 곳이 정말 있다면 치유와 회복이 필요한 날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워줄 음식과 깊고 향긋한 커피 향이 반겨주는 곳, 카페 도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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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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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애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더니 그가 전화기를 든 이후 처음으로 질문을 한다. 지금 내가 한 말들 알아듣겠어? 바움가트너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애나의 숨이 멈추고, 말이 멈추고, 전화선이 죽어 버린다.            p.77


10년 전 전혀 예상치 못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노교수 바움가트너는 그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30년 이상 함깨 했던 애나는 그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그럼에도 남겨진 이는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날씨가 아주 좋은 봄날 아침이었다. 바움가트너는 서재에서 글을 쓰다 필요한 책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부엌에서 나는 냄새에 가보니 아침으로 먹을 달걀을 삶던 냄비가 타버렸고, 그걸 들어올리려다 손을 데고 만다. 일주일에 두 번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던 플로레스 부인의 딸이 전화를 걸어와 아버지가 다쳐 어머니가 일을 못가게 되었다고 울먹이고, 바움가트너는 어린 소녀를 달래주느라 10분이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전기 회사의 계량기 검침원을 지하실로 안내하다 헛딛는 바람에 무릎과 팔꿈치를 다친다.


바움가트너는 이날 아침에만 두 번째로 아파서 소리를 지른다. 이제 그는 쓰고 있던 에세이도, 가져갈 계획이던 책도, 누이에게 전화를 걸기로 한 약속도 모두 까맣게 잊어 버린다. 이상한 사건 사고로 얼룩진 그날, 통증과 피로로 인한 안개 속에서 시커메진 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에게 <그때>라는 사라진 세계가 조금씩, 아주 미세하게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찢어지게 가난한 대학원 1학년생이던 때부터,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되고 이후 함께한 40년간의 세월,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양장점 주인이자 실패한 혁명가였던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 이르기까지.... 한 인물의 내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아내가 평생 써왔으나 한 번도 발표한 적 없던 글들과 바움가트너가 집필하고 있는 원고들이 그의 내적인 여정과 긴밀하고도 자연스럽게 뒤얽히면서 그는 비로소 과거를 두려움 없이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그에게는 엄숙하지만 의기양양한 순간, 평생 다른 어떤 때와도 다른 시간이다. 감정의 큰 파도가 일어 정신이 강인하고 때로는 마음마저 차갑고 단단한 이 남자를 삼킨다. 그의 내장에서 대양이 일렁이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며 그 자신으로부터 그를 끌어내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얼마나 작은지 깨닫는다.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수많은 작은 것들과 연결된 작은 것. 잠시 자기 자신을 떠나 삶이라는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수수께끼의 일부가 된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마흔두 살에 마침내 아버지라, 그는 생각한다. 42년의 실패와 좌절, 그러다 이제 적어도 이 하룻밤, 적어도 이 몇 시간 동안은 행복을 닮은 어떤 상태로 있을 법하지 않은 전환이 이루어졌다.                p.151~152


이 작품은 폴 오스터가 투병 중에 집필한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이다. 그의 1주기에 맞춰 출간된 이 작품을 가제본으로 먼저 만나보았다. 〈정원사〉라는 뜻을 가진 주인공 캐릭터의 이름때문인지, 본책의 표지가 정말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본책으로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싶다.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 허구와 환상을 넘나들며 한 사람의 삶을 그려나간다. 물론 삶 전체가 아니라 주인공이 70년이 넘는 인생 가운데 마지막 2년 정도라는 기간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읽다 보면 생애 전체가 느껴지는 것만 같은 이야기였다.


한 사람의 삶은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다.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헤어지고,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며 하루하루를 차곡차곡 쌓아 나간다. 바움가트너는 기억의 정원 속 나뭇가지처럼 얽혀 있는 삶의 조각들을 그러 모은다. 특히나 이 작품은 폴 오스터가 죽음을 앞두고 써낸 그의 유작이기에 더욱 절실하고도 감동적이다. 사람들은 언젠가 죽는다.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을 수도, 예상치 못했던 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삶이지만, 우리가 그 모든 일에 미리 대처할 수 없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맞이하게 되는 기쁨과 생각지도 못했던 비극에 망치로 두들겨 맞아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절망이 공존하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인 '상실'과 기억' 또한 갑작스럽게 우리를 찾아온다. 냄비가 그을리고, 그가 층계에서 굴러 떨어지던 날 견고하게 묻어 두었던 과거에 금이 가고 쪼개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밀도 높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상실과 기억에 관한 아름다운 사유를 보여준다. 왜 다른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지는데, 우연히 마주친 덧없는 순간들은 기억 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 걸까. 폴 오스터의 빛나는 마지막 이야기를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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