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숨막힌데 도망갈 곳도 없고, 정말 지쳤을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여기서 시간을 딱, 멈춰버리고, 딱 한달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쉬고 싶다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인터넷, 전화 연결도 하지 않고, 간단한 요기만 하면서 종일 책만 보면서 쉬었으면 좋겠다고. 혹은 정말 정말 되는 일도 없고, 일도 안 풀리고,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을 때는... 아 진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 내지는 이곳이 아닌,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며칠만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 제인에게 닥친 그 숱한 불행과 사건, 사고들 속에서도 그녀가 잠시 부러워졌다. 바로 이런 대목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그 후 삼주 가량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파스칼의 <<팡세>>에는 '인간의 불행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작은 방에 홀로 틀어박혀 있지 못하는 것에도 비롯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3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작은 방에서 홀로 지냈고, 행복했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잠에서 깨 오트밀과 커피를 만들었다. 동틀 무렵 밖으로 나가 해변을 걸었다. 집을 떠나면서 현관문에 걸린 온도계를 보니 영하 5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8시 15분이었다. 새벽 한기와 바다 바람 때문에 몸속의 나른한 기운이 싹 가시며 머리가 더없이 상쾌해졌다.
매일 아침, 다섯 시간씩 일했다. 동트기 전 기상, 아침 식사, 80분간 해변 산책, 그 후 다섯 시간 동안 원고 작업,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두 시간 동안 원고와 씨름했다. 그 후 다시 80분간 해변 걷기, 독서, 저녁식사, 다시 독서, 9시에 취침...
눈이 가득 쌓인 겨울, 난로에 장작불을 지피고 옆에는 수십권의 책을 쌓아놓고, 흔들의자에 앉아서 책을 보는 풍경. 식탁과 침대 옆 탁자에는 싱싱한 꽃이 꽂혀 있고, 냉장고에는 우유와 치즈가 넉넉하게 들어있고.. 나는 밖에 나갈 필요도, 누군가를 만날 필요도 없는 그런 상태말이다. 쓸데없는 고민에 빠질 필요도 없고, 뭔가를 신경쓰거나 걱정할 필요도 없는.. 그런 상태에서 딱 몇주만 보내고 싶은, 그런 때가 종종 있다. 계절은 꼭 겨울이어야 한다. 눈도 많이 오고, 추워서 밖에는 절대 나가고 싶지 않지만, 따뜻한 집 안에서 포근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불행과 위기를 겪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기거나, 혹은 그걸 기반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이 풀릴텐데.. 우리의 주인공 제인에게는 '엎친데 덮친격'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바로 그런 일들의 연속이다. 주인공 제인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부모의 이혼/불행한 결혼생활을 박차고 떠난 아빠, 그 이유가 제인때문이라고 원망하는 엄마
2.첫사랑의 배신
3.대학교수와의 밀회/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파국
4.펀드회사 입사/FBI의 요원이 회사로 찾아와 아버지가 이중첩자였다는 걸 알려줌/권고사직 당함
5.뉴잉글랜드 주립대 영문과 교수/사람들의 텃세
6.영화광 테오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임신/강의와 육아 병행/테오는 도와주지 않고, 여자가 생김/
7.테오의 배신/투자한 영화사의 부도, 채권자들의 협박/딸 에밀리의 교통사고/죽음
8.제인의 자살시도/실패/정신병원
9.모든 걸 정리하고 캐나다 캘거리로 간다.
10.캘거리의 도서관에 취직/
11.딸을 잃은 아픔을 치유하지 못함/소녀의 실종 뉴스
12.소녀의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아봄/사건추적/범인 검거
목록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수가 없을만큼.. 정말 파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사건, 사고들은 제인을 불행으로 몰아넣는다. 사실 이 중에 두 세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소설 한 편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다. 뭐 이리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되나, 싶을만큼.. 끊이없이 새로운 스토리가 펼쳐지지만... 사실 우리 내 인생도 마찬가지 아닌가.
몇년 전의 나를 떠올려보면, 현재의 나를 상상할 수가 없을 때도 있다. 그 당시 나를 알던 사람과, 지금의 나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은 분명 나라는 존재를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사람이란 환경에 맞춰 변화하는 존재이고, 그 환경이란 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면 다행이지만, 제인처럼 이런 일들만 계속된다면 글쎄.. 결국 어떻게 될지.. 상상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불행의 연속이라고 해서 이야기가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이, 또 이 책의 장점 중 하나이다. 이야기는 기차게 재미있고, 흥미롭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인생이란 경기장에서 강펀치를 연속으로 맞다보니, 어느 순간 제인은 넉다운 해버렸고,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자살 시도는 실패로 끝나버리고,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제인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방식을 선택한다.
모텔로 돌아와 전화로 일처리를 시작했다. 나를 세상으로부터 지우는 일.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비자, 디스커버리, 마스터카드에 전화해 모든 계좌를 취소했다.
..내 흔적을 깨끗이 정리하고 과거로부터 떠나왔다. 신용카드도, 노트북 문서도, 남아 있는 재산도 없었다. 현금 이천 달러와 여행자수표 천팔백 달러가 내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직장도 없고, 가족도 없고, 부양자도 없고, 의무도 없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존재의 순수에 근접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완벽하게 자유롭고 나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 대한 책임도 없는 상태... 그렇지만 생각처럼 내 영혼은 해방감이 느껴지거나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했다. 내 인생의 하드디스크를 다 지워도 디테일한 감정까지 다 지우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녀는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모든 게 낯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캐나다 캘거리로 가게 된다. 테오의 배신에 대한 충격과 채권자들의 협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증과 피로감에 강의시간에 집중하기도 어렵고, 그런 와중에 딸까지 택시에 치여 숨기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나라도 그녀처럼 차를 몰고 자살을 시도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만큼 절망의 너무 밑바닥까지 그녀가 내려가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살 실패와 더불어 정신 병원에서 몇달을 보내고 나자,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란 걸 깨닫고, 나를 망가뜨릴 수 없다면, 그럼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완전히 자신이란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전혀 다른 미지의 장소에서 그녀는 새로운 삶을 또 시작한다. 후반부의 이야기만으로도 한 편의 독립된 스토리가 나올 수 있을만큼. 그녀에게 또 많은 일들이 생긴다. 도서관에 취직을 하고,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러나 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을 잊을 수는 없어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에, 소녀의 실종에 대한 뉴스 보도로 한동안 떠들석해지고, 마침내 범인이 검거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지만, 그녀는 소녀의 아버지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다. 그 눈빛, 딸을 잃은 슬픔에 잠긴 그 눈빛을 알아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름의 조사를 하고, 사건을 추적한다. 이 부분은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리빙 더 월드>의 'Leaving'에서 'living'으로,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된다. 그래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캐나다 캘거리의 풍경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제인에게 완전히 동화가 되어, 그녀가 어디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찾아본 이미지이다. ㅋㅋ
마이클 더글라스의 작품을 읽다보면, '천일야화'가 생각난다. 죽음을 담보로, 죽음을 미루기 위해 밤마다 새로 지어내는 이야기말이다. 끝이 날 수가 없는 이야기, 더 듣고 싶은 욕망에 죽음까지 미루게 만드는 그 힘,, 왕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나머지 그녀를 죽이지 않는데 이야기는 무려 천일이 넘게 계속되었다는 너무나도 흥미진진한 스토리.. 아마도 그 천일야화에 필적하는 이야기 꾼이 마이클 더글라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의 전작을 모두 읽었고, 소장하고 있지만, 이번 책이야말로 그가 진정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듯이 끊임없이 다양한 스토리가 펼쳐지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자꾸만 보고 싶게 만드는 중독성이라고 할까.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틀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속에서 매번 끊임없이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건 정말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 그럴때 읽으면 분명히 위로가 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