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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작가란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완성된 작품만 완벽한 상태에서 대중에게 공개하고 싶어하는 작가와 작품뿐만 아니라 일기나 잡다한 단상들까지 모두 공개해도 상관없다는 작가 말이다. 완전하게 탈고되지 않은 작품 외에, 그것에 이르기까지의 숱한 고뇌와 땀들까지 모두 공개될 필요도 없다는 말도 물론 일리가 있다. 과정까지 모두 아름다울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에 반해 작가의 온갖 일상들이 적나라하게 담겨져 있기에 문학적 가치가 전혀 없는 비문이나 오문들도 전혀 거리낌없이 공개하는 작가들도 있다. 그들은 그런 글들조차 모두 자신이기에, 완성되지 않은 것이지만 그것은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된 노르웨이의 작가 토마스 에스페달은 명백하게 후자이다. 그의 자전적 소설인 <자연을 거슬러>는 그렇기에 그의 삶 자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글 쓰는 일을 내 직업이라 생각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글을 써왔다. 글 쓰는데 맥이 빠지거나 문장이 잘 풀리지 않거나, 또는 소설 진행이 꽉 막혀 버릴 때면, 일기를 쓰거나 짧은 단상을 메모한다. 나는 이러한 짧은 기록들을 쓰는 일을 부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열한 권의 소설을 썼다. 짧은 단상을 메모한 공책만 해도 마흔 권이나 된다. 이 마흔 권의 공책이 저마다 소설 한 권만큼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토마스 에스페달은 노르웨이 현대 소설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라고 하며, 자국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장편소설을 출간하는 것이 북유럽 문학계의 주요한 흐름이었으나, 그는 중단편의 소설, 서신 모음, 수필 등을 주로 출간했고 작품이 갖는 뛰어난 문학성으로 인해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작가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특히나 그의 작품이 갖는 주요한 특징이 자전적 이야기를 빼어난 시적 언어를 통해 짤막한 형태로 응축해서 담는데 있다고 하니, 대략 작품의 분위기와 스타일이 짐작이 될 것이다.
사실 이 작품 <자연을 거슬러>는 제목도 그렇고, 표지에서 묻어나는 분위기도 그렇고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작품처럼 일종의 생태문학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제목에서 묻어나는 어감이 있으니, 표지는 좀 다르게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이 작품의 내용이 사랑과 이별, 그리고 탄생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법칙에 끊임없이 저항하고자 하는 한 남자의 투쟁을 담았으니 그런 내용적인 측면이었다면 아마 더 많은 독자들의 선택을 받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뭐 어쨌건 결론적으로 이 책은 표지와 제목에서 암시하는 생태문학은 전혀 아니었고, 생각보다 신선하고 독특했다.
우리의 삶엔 진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자연 속에서, 숲과 날짐승들에 둘러싸여 살지 않았던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사이의 사랑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결혼을 하려 한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는 롤러코스터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앉아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 같았다. 롤러코스터는 무서운 속력으로 돌고 또 돌았으며,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서로를 꼭 붙들고 있었다. 문득, 제자리를 벗어난 롤러코스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낯선 세계로 향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영역, 그러니까 흔히들 자연의 법칙이라고 일컫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가 태어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마도 거의' 없을 테니까. 대부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의 힘, 즉 순리대로 흘러가는 일을 인간이 어찌할 수야 당연히 없다. 그러니 이 책은 바로 그 자연의 법칙에 대항하려는 한 인간의 고독한 몸부림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은 다시 부자연스러운 사랑의 고백이 된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두 여자, 앙네테와 얀네를 통해 사랑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에 대해서 모두 경험한다. 사랑의 무한한 행복과 기쁨, 이별을 겪을 때의 불안감과 슬픔, 그리고 아내의 죽음 이후 운명의 무자비함과 남겨진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 깨닫게 된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떤 일을 하는 것도 그저 내 의지가 아니라 상황이 나를 그렇게 이끌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극중 인물이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전속력으로 달리는 롤러코스터 위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물론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의지가 분명히 작용을 했을 테지만, 나는 시작만 한 것 같은데 정신 없이 달려가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어. 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올바른 길인 걸까? 내가 지금 맞게 가고 있는 걸까? 싶은 생각도 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매 순간을 이루고 있는 감정들이 모두 진짜라는 전제하에, 그런 의문이 들더라도 그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순간들이 쌓여서 결국 그렇게 흘러온 거라면, 그것에 대한 책임 또한 자신이 져야 하는, 자신의 의지가 분명하니 말이다. 그래서 다소 '부자연스럽게' 보이기도 하는 그의 사랑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 매우 솔직하고, 진지하고, 후회 없이 당당해 보여서 참 좋았다. 어차피 인간의 유일한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절.대. 살 수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