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필요할 때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소설치료사들의 북테라피
엘라 베르투.수잔 엘더킨 지음, 이경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날씨가 추워지면 어쩐지 공기도 퍽퍽해진 것 같고, 움츠러든 어깨만큼이나 사람들간의 관계도 삭막해지는 것 같고 그래서 그냥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이런 계절엔 커다란 벽난로 앞에 놓여진 흔들의자에 무릎담요를 덮고 앉아서, 향이 좋은 커피와 함께 동화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갖은 시련을 겪지만 언제나 우리의 주인공이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착한 결말의 이야기, 현실에서는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어릴 때 안데르센의 동화 전집을 그렇게나 열심히 읽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현실과는 너무도 접점이 없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적인 이야기의 세계가 나를 매혹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동심이다. 마치 '진짜 처럼 보이는 거짓말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어낸 이야기, 만들어낸 세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속아넘어가 주고 싶은 그런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 말이다. 모두 다 꾸며낸 이야기라도, 누군가 그걸 믿어준다면 그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사랑한다. 그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세계적인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런던에 설립한 인문학 아카데미 인생학교에서 2008년부터 문학치료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엘라 베르투와 수잔 엘더킨이 공동 집필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듯이, 문학치료사인 이들은 소설을 처방한다. 「인디펜던트」에서 책 추천 코너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의 다양한 의뢰인들에게 일대일로 소설을 처방하는 것이다. 세계문학상 수상작부터 베스트셀러, 3세계문학, 숨어있는 명작에 이르는 751권의 다양한 소설 리스트로 구성된 이 책은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마치 보물상자와도 같은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각 페이지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들은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다시 사랑하고 싶어지게도 만들어준다.

이들이 소설 처방은 이런 식이다. <알코올중독일 때>는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추천한다. 술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소설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테니까. <헌신하기 두려울 때>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추천한다. 충심과 사랑, 헌신을 제일로 치고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만이 극중 안과의사의 아내처럼 행동할 수 있으니까. 문장이든, 소설이든, 어떤 관계든, 당신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믿기로 한 것에 헌신한 보상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추천한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사랑의 힘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주인공 덴고와 함께 기나긴 여행을 떠나다 보면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어질 거라고.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을 때>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추천한다. 한정된 날들을 사는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인 매우 귀중하므로,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처럼 행동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키가 작을 때> J.R.R.톨킨의 '호빗'을 추천한다. 주인공 빌보 배긴스는 신장이 인간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빗족이지만 장대한 모험을 통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고, 가슴 속에서 뭔가 깨어남을 느끼며 위대한 영웅이 된다. <이가 아플 때>는 래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추천한다. 극중 브론스키가 치통에 고통 받다가 순간적으로 통증에 해방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철길을 보고 있던 그의 기억에 피범벅이 된 그녀의 몸이 떠오르면서 육체적인 고통을 감정적인 고통이 넘어서게 된다. , 그 외 에도 너무도 기발하고 재미있는 처방도 많고,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힘이 되어주는 처방도 많으니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이 책에는 상황에 따른 책 처방 외에도 중간중간 소설 중독자들을 위한 '독서 질환'에 관한 팁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강박적으로 책을 사들일 때>는 전자 책 리더기 혹은 '지금 읽는 중' 선반을 마련하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책에서 모든 요소를 빼고 글자만 남기면, 당신이 정말 책을 읽고 싶은 것인지 단지 가지고 싶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책을 단지 '수집'하는데 열중하는 몇몇 소설 중독자들도 주위에서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자 책으로 읽었는데도 정말 마음에 든다면 그때 아름다운 양장 본을 한 권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는 것이다. 혹은 전자 책 리더기가 맞지 않는다면 '지금 읽는 중' 선반을 하나 마련해서, 새 책을 한 권 사려면 우선 이 선반의 책을 한 권 읽고 책꽂이로 돌려보내 빈자리가 나야만 하는 걸로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기발하지만, 매우 공감되는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책 더미에서 원하는 책을 못 찾을 때>,<집안일에 책 읽을 시간을 빼앗길 때>, <배우자가 책을 읽지 않을 때> 등등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팁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나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네 자매 중에 셋째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다. 덕분에 책을 은신처 삼아 도피하는 법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 가끔 부모님이 다투시거나, 언니들이 잔소리를 하거나, 동생이 말썽을 부릴 때, 나는 책을 방패 삼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 골라 펼쳐 든 책 한 권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라고 했던 에리카 종의 표현처럼 나는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도 책을 읽으면서 그 허구의 세계 속에서 자주 위안을 받는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미니 도서관을 담당하고 있다 보니 종종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할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의 성격에 맞추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책을 추천해주곤 했는데, 그들이 책을 대여해가서 읽고 반납하러 와서는 짧은 소감을 얘기해주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이 친구도 책을 통해 위로 받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이 나를 져버릴 때마다 나는 책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나에게 적개심을 가질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상처를 줄 일도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뭔가만 삐끗하더라도 어긋나고, 깨어지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은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일상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를 바 없이 그저 견뎌야 하는 하루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 책만 있다면, 나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만나보아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구나 동질감을 느낄 것이다. 삶이 퍽퍽해서 사는 게 재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당신의 상황에 맞춘 처방으로 새해에는 삶이 무지개 빛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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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사서 볼만큼 용돈이 충분하지 않던 어린 시절. 나는 동네 책방이나 도서관에 가서 주로 책을 빌려 보았다. 책은 읽어야 하는 기간이 지나면 반납을 해야 했고, 반납하고 나면 다시는 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가능한 많은 문장들을 머리 속에 집어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많은 문장들을 다 외울 수는 없었으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정말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면 아예 전체 책을 필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사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책이란 건 눈으로 읽을 때와, 한 글자 한 글자씩 직접 옮겨 적을 때 전달되는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드는 섬세한 어휘들과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그 문장들은 나의 감수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렇게 나는 수많은 책들과 함께 질풍노도의 시절을 흘려 보냈다. 문장과 문장을 이어 단락을 만들고, 그 단락들을 이어 하나의 글이 만들어 질 때마다, 시시해 보이는 나의 일상들이 근사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니 종종 길을 걷다 우연히 책 속의 인물들을 마주치곤 한다. 지상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존재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보니, 나는 그 인물들에게서 위로를 받곤 했던 것 같다. 때로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때로는 쇼핑을 하던 백화점에서, 때로는 북적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어떤 문장들이 복병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소설 속 그 인물들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현실 속의 친구들 외에 여러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곤 하는 친구가 바로 <새의 선물> 속의 애어른 같은 열두 살 진희이다. 너무도 조숙하고 똑부러져서 아이처럼 느껴지지 않는, 하지만 유년 시절부터 삶의 이면을 보아 냉소적인 시선을 가져 안쓰러운 그런 소녀. 진희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면 먼저 스스로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으로써 지탱했고, 언제나 자신의 삶을 거리 밖에서 지켜보기를 원했다. 여섯 살 때 죽은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할머니에게서 자랐던 진희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면 자기만의 극기훈련을 했던 것이다. 실성해 목매달아 자살한 엄마와 사라진 아빠, 드러내놓고 애정표현 한번 하지 않는 외할머니와 이모, 삼촌과 함께 생활하는 열 두 살 소녀는 찬물을 조금씩 끼얹다 보면 얼마 안 가 물이 차갑다는 걸 모르게 되는 것처럼, 그러면 양동이째 끼얹어도 차갑지 않으니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똑똑히 느끼자고 생각했다. 어린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설정 자체가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고등학생이던 나랑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에 친근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 같다. 삶에 냉소적인 사람만이 삶에 성실하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까 행복한 일이 생겼을 때는 내가 그것을 잃었을 때를 미리 걱정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 헤어지게 될 때의 상실감에 대비하려고 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당시의 내가 왜 그랬나 싶긴 하지만, 뭐 그땐 나름 또래의 친구보다 많이 조숙했고, 생각도 많다 보니 나름 심각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나를 버티게 해준 건 은희경의 책이었다. 아직도 책장 구석에 손 때가 까맣게 타있는 낡은 책과 올 초에 한국문학전집으로 새로 출간된 책을 함께 보고 있자니, 1996년 겨울 고등학생이었던 나와 2014년 겨울 어느덧 아이 엄마가 되어 있는 나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내 친구들이 아이돌 그룹에 열광할 때, 나의 우상은 은희경 작가였다. 그래서 나는 구할 수 있는 그녀의 모든 책을 읽었는데, 아름다운 문장들과 예리한 표현들은 매 페이지마다 밑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켰었다. 소설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작품 속에서만은 그 인물들이 모두 다 '진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은희경 작가 특유의 생생한 묘사와 세밀한 관찰력이 인물들과 그들이 처해진 상황에 설득력을 부여해주어서, 어찌 보면 외로운 나르시스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인물들이었지만, 내가 동화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소설은 서사의 예술이지만, 나는 소설을 읽을 때 하여튼 그 인물과 만나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극중 인물들을 진짜라고 믿어야 그들이 처한 상황과 배경과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은희경 작가의 그런 '진심'이 참 좋다. 그래서 은희경 작가의 책을 처음 만난 지 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녀의 새로운 작품을 설레이며 기다린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누구나 연애를 했고, 나에게도 찐한 첫사랑의 달콤함이 찾아왔지만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별의 쓴맛을 봐야 했다.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는 법이 당연하거늘, 헤어짐 그 자체보다 과정에 있어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학과 선배이던 그는 후배들에게는 일종의 모범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교수들에게는 신임 받고, 동료들에게는 믿음직스러운 그런 남자였다. 거기다 스마트한 외모와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깔끔한 옷차림도 호감을 만들어주었기에, 우리 과에서 그에게 한번쯤 연정을 품어보지 않은 신입생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찌하다 보니 나와 인연이 되어 두 해 동안 우리는 연인이었지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문자로 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그가 과대표가 되고 나서 한달 쯤 뒤의 일이었다. 원래 나서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친구들의 호응에 얼결에 과대표가 되고 보니 그게 너무 적성에 맞았던지 학교를 바쁘게 누비고 다니던 그였다. 자연스레 나와 만날 시간은 차츰 줄어들었고, 그러다 다른 학과의 신입생 퀸카가 그에게 마음이 있어 한다는 소문이 잠깐 나기도 했지만, 나는 그를 믿었기에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 사랑을 하다가 마음이 변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없이 그저 일방적인 통보로 그만 만나자고 하는 건 함께한 두 해 동안의 시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나는 너무 상처받아서 그에게 이유를 따져 묻는 것도, 왜 그러느냐고 애원하는 것도 하지 못한 채 며칠을 앓아 누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학교에 나왔을 때는 이미 그는 소문 속의 그 퀸카와 커플이 되어 캠퍼스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내 생애 꼭 하루 뿐일 특별한 날>에서 미흔은 크리스마스 날 남편 회사 직원이라고 찾아온 젊은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며 아주머닌 아무것도 모른다고 집안을 한바탕 휘젓는다. 남편을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온 미흔은 남편의 애인을 만난 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그 이후 지독한 두통에 시달렸고, 남편은 바닷가 근처 시골 마을로 이사를 하자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윗집에 사는 남자 규는 그녀에게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유효 기간은 사 개월, 그 동안 서로를 허용하고, 누군가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게임은 끝난다고. 육체적인 탐닉에 빠져들게 된 그들의 게임은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간다. 권태에 사로잡혀 게임을 하듯이 사랑을 나누는 불륜 그 자체에 공감하기는 내가 너무 어렸지만, 미흔이 받았던 상처때문에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이해하고 싶었다. 스물한 살에 만난 남자가 그의 전 생애 동안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신 또한 단 하나의 남자만을 사랑하며 평생 하나의 생을 함께 사는 것이 꿈이었던 여자가 '순수'가 아니라 '순진'이 되어버리는 게 세상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행복이란 무지한 상태의 다른 말인 걸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바보 같았던 나 자신이 미워졌고, 그만큼 그런 나를 발견하게 만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감정이 쌓이다 보니 사랑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열정보다는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다는 식의 냉소가 더 익숙해졌던 것 같다. 물론 덕분에 숱한 연애를 경험했고, 나를 스쳐간 수많은 남자들 중에 소울 메이트를 찾아 지금은 결혼까지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후 나의 연애는 전경린 작가의 책 한 권 때문에 꽤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래서 내게는 지금도 최고의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는 전경린 하나뿐이다. 나는 여태까지도 이렇게나 발칙하고, 매혹적이고, 슬픈 연애 소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때로 책 속 어떤 문장, 어떤 행간에서 그 시절의 내가 보이는 경험을 한다. 나에게는 그런 책이 유독 많은데, 이상하게도 책이 출간되었던 그 시간, 내가 만났던 그 시기가 나에게 모두 특별한 경험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많이 반복해서 읽었고 아직도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문장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책이 있다. 바로 대학시절 방황하던 나를 잡아주었던 신경숙의 <외딴 방>이다. 나는 아빠와의 전쟁에 실패해 내가 원했던 학과가 아닌 취업률이 높은 학과에 들어갔는데, 그래서인지 학과 생활이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부에 흥미 없이 그저 학점만 채우려고 학교를 다녔고,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사고가 생겼다. 엄마가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셨고, 뇌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우리 가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엄마의 병실을 지키기 위해 학교에 미련없이 휴학계를 던졌고,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면 병원으로 가서 엄마 곁의 보호자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자면서 뭐랄까, 생각이 많아졌다. 몸은 지쳐가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은 빨리 흐르는데 나는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병원, 직장만 반복해 가다보니 내 삶이 방부처리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나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았고, 나만 홀로 외딴 공간에 놓여진 것 같았던 거다. 휴학했던 학교로 나는 다시 돌아가지 못했고, 결국 자퇴 후 아르바이트로 하던 일을 직업으로 하게 되었다. 그때 지친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가던 지하철에서 읽었던 책이 바로 <외딴방>이다.

이 책에서 서른 두 살의 소설가인 ''는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열여섯의 나를 떠올려본다. 구로공단 입구에 있던 직업훈련원에 들어가면서 살게 된 외딴방. 그곳에 간 것이 열여섯이었고, 거기서 뛰쳐나온 건 열아홉이었다.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는 희재 언니의 죽음 때문에 그 사 년의 삶과 좀처럼 화해하지 못했던 ''가 열여섯으로부터 십육 년이 흐른 어느 날,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나도 지금 내 삶의 '외딴방'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언젠가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이 시절을 떠올려보았을 때, 나도 이 시기를 그저 건너뛰고 싶은 시간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당시 나에게 주어진 상황들이 어렵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힘들다는 생각조차도 못했기에,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전부였던, 그저 매일 해결해야 할 일들을 마치면 얼른 자거나 일어나는 게 전부였던 시간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극중 ''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 같다. 대학은커녕 공장에서 일하며 겨우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공부하던 그녀가 작가가 되겠다는, 누가 보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었듯이 내 삶도 좀 오래 시간이 흐르면 이것 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 결국 엄마는 건강을 되찾으셨고, 현재까지 정정하게 잘 계시지만 나는 여간 친하지 않으면 그 시절 얘기를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왔다. 나 자신이 스스로를 무슨 비밀을 가진 사람으로 취급하며, 천성이 낙천적이었던 나를, 내성적으로 만들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에 마음을 매고 있음으로써, ,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극중 ''처럼 나도 그렇게 이 책을 붙들고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시절이 짧게 흘러가 버렸다.

 

김연수 작가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그 순간 우리가 예전의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인생은 신비롭다'라고 말했다. 누구든 그런 순간을 최소한 한 번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그날 이후의 나, 그날 이전의 나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완전히 색채를 달리하게 되는 그런 순간 말이다. 그것이 누군가한테는 결혼일수도, 대학합격이나 유학일수도 있고, 주식투자처럼 선택의 문제일 수도, 혹은 친구를 사귀는 순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삼십대를 앞두고 있던 2007년의 나는 그런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 망설이고 있었다. 직장생활도 어느덧 안정이 되고, 경력도 인정받아 숙련된 업무처리가 가능하던 이십 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정된 직장과 연봉을 버리고, 모험을 해보려고 하는 중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할 것 같았기에, 어쩐지 서른이 넘어 버리면 이런 무모한 도전 같은 건 해보지 못할 것 같았기에 말이다. 결국 나는 기존 연봉의 반 토막도 안 되는 급여에, 업무시간도 두 배나 되는 새로운 일에 무작정 도전을 하게 되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그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마치 내가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미친 듯이 열정을 퍼붓던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이해가 안된다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그 동안 쌓은 경력이 아깝지 않으냐,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앞으로 어떻하려고 그러냐 등등..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어차피 내 인생을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었던 일은 해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 선택으로 인해 리스크가 많더라도, 언젠가 후회하게 되더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화자인 '' '5월투쟁'이 끝난 후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던 대학생이다. 그는 방북 학생 대표 자격으로 베를린으로 건너가지만, 갑작스럽게 학생운동 지도부가 붕괴되고 교체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북한으로 들어가게 될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지, 아니면 독일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지 말이다. 그렇게 불확실하고 불투명하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내가 당시에 겪었던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매번 의도와 다르게 벌어지는 상황, 예상을 벗어나는 사고, 계획했던 것들이 한 순간에 무너지곤 하는 어긋남들이 평탄치 않은 삶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삶이야말로 살아있는 진짜가 아닐까 생각했다. 극중가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에게서 들은 온갖 사연들은 역사의 폭력에 의해 삶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물론 지금은 개인의 삶이 시대의 역사와 운명을 같이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공감이 갔던 이유는, 완전히 바닥을 치고 나서 남아있는 개인 각각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이며,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있으니 말이다.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는 것. '자기 자신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나의 그 무모한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당시에 이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 위로를 받았던 것을 고맙게 기억하고 있다.

 

얼마 전에 김연수 작가의 신작 <소설가의 일>을 읽는데, 이런 대목이 나왔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내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좋지만, 다시 태어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는 거다.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나부터 죽어야 한다는 것. . 이 얼마나 명쾌한 진리인가.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제일 먼저 내가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태어나려면 일단 내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건 내 쪽의 문제였다는 것.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단순하지만, 언제나 삶을 꿰뚫어 보는 명쾌함 때문이다. 언젠가 토머스 H. 쿡의 글을 읽다가 문장과 단락들이 빚어내는 분위기가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꼭 이렇게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뭐 김연수 작가의 말대로 굳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기다릴 필요가 뭐 있나. 그런 글을 쓰고 싶다면, 그만큼 쓰고 공부하고 노력부터 하면 되지. 너무 너무 맘에 드는 책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 책들은 읽겠어! 그러나 기약 없는 다음 생을 위해 아껴두는 것보다는 현재 생에서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느끼고 생각하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냔 말이다.

지금은 생후 60일을 넘긴 아기를 키우고 있어 사실 책을 읽을 시간을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는 아기를 키운다는 건 단 일분도 나를 위한 시간이 없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던 초보엄마라 매일매일이 전쟁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돌아버릴 것 같아도 매일 책을 읽는다. 젖을 먹이는 동안 한 손으로 책을 읽었고, 아기가 잠들었을 때 한밤중 어두운 거실 소파에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 보니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시간이 한참 걸려 새로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읽고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내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래서 시간에 쫓겨 읽느라 진도가 나가질 않아 조바심 낼 필요가 없는 그런 책 말이다. 특히 오늘 소개한 이 네 권의 책은 요즘 나를 새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당시에 너무 여러 번 읽어서 어떤 장면이 펼쳐져도 당황하지 않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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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시력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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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가 존경한다는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 카린 포숨의 신작이다. 기존에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 <돌아보지마>가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고, 꽤 오랜만에 나오는 작품이다. 카린 포숨은 누군가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에 관해서 묻자, “밤이 긴 북유럽 사람들이 즐겨 읽도록 썼다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북유럽의 스산한 날씨와 긴 밤에 어울리는 스릴러 작품들이 많이 유독 탄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밤부터 또 폭설이 내려 한파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추운 계절 긴 밤을 보내기에 북유럽 스릴러가 제격이 아닌가 싶다. 특히 카린 포숨의 작품은 플롯, 캐릭터 중심의 여타의 스릴러와는 완전히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든 장점이 있다. 누구든 재능이 있다. 누구든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썩어빠진 개인이란 존재하고, 나도 그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선 정신이 나갈 정도까지 심술궂게 바뀔 수 있는 썩어빠진 개인. 하지만 나는 별로 어렵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낼 수 있다. 예의 범절과 다정함, 친절을 흉내 낼 수 있다. 힘든 건 나쁜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다. 종종 내가 통제력을 잃으면 일어날 일, 실제로 간간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노르웨이의 한 작은 마을에 위치한 노인 요양원과 한적한 호수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주인공 릭토르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몇 년간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일해 온 릭토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남자이다. 그는 음식과 주스, 약을 방마다 갖다 주고 노인들이 잘 먹고 마셨는지, 알약을 삼켰는지 확인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몰래 주사는 매트리스 안에 놓고, 음식과 약은 변기 속에 쏟아버리며 물을 내리고 모든 흔적을 없앤다. 노인들이 사라지는 음식을 보며 창백하고 주름진 두 손을 무력하게 흔들지만, 그는 노인들이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못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데 밥은 먹어 무엇하냐는 식이다. 무력한 환자들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면서 그는 은밀한 즐거움을 느낀다. 중년의 그에게는 단 한번도 여자가 있었던 적이 없다.

 

 

내게 여자만 있다면, 나를 달래주고 위로해 줄 여자만.

그는 같이 근무하는 안나 간호사를 마음 속의 천사로 여기며 관찰한다. 그렇게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그에게는 고독과 외로움이 유일한 친구이다. 날마다 산책을 즐기는 그는 자주 공원에 오는 이들을 관찰한다. 신체장애를 겪는 어린 딸을 키우는 여자, 은퇴 후 뜨개질으로 시간을 보내는 여자, 서로를 탐닉하는 젊은 커플, 늘 술에 취해 있는 남자.. 그러던 중에 휴대용 술통을 놔두고 간 아른핀과 우연히 말을 나누고 집에 초대하면서 관계를 맺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완전히 하찮은 존재였다. 쳐다볼 것도 없고, 대체로 세계에 별 의미도 없고, 쉽사리 잊히는 존재. 이 깨달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몸을 돌려 내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원했고, 나를 기억해 주고 존중을 담아 내 얘기를 하기를 바랐다. 이런 갈망은 점점 커져 내 가슴과 머리를 채웠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꾸어야 한다.

어렵사리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된 아른핀과는 사소한 사건으로 금이 가버리고 만다. 그가 술을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었건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른핀이 그의 지갑 속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는 걸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지갑을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두고 시치미 떼고 대화를 하려는 아른핀을 보고 그는 이가 덜덜 떨릴 만큼 분노를 느낀다. 잠시라도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였기에 그의 배반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폭발적인 감정을 그만 참지 못하고 분출해버린다. 고작 지폐 몇 장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지폐보다 자신의 믿음을 배반한 것에 대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릭토르가 우발적으로 아른핀을 죽이게 되는 것까지가 전반부, 이후 진행되는 후반부의 사건은 전.. 예상 밖으로 이어진다. 그는 시체를 수습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가지만, 어느 날 갑작스레 경찰의 방문을 받는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엉뚱하게도 요양원에서 일주일 전에 죽은 넬리라는 노인의 살해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다. ....도 그는 넬리를 죽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부분 바라만 보는 것뿐이에요.

보통 1인칭으로 전개되는 작품에서 독자들은 주인공, 즉 화자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릭토르는 일종의 소시오패스이다. 타인의 괴로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평범한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때로는 공포나 그 외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거기다 그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친구를 만들거나, 타인을 관찰하는 낙으로 살아가는 완전한 외톨이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돌아가는 상황이 모두 그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가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목인 '야간시력'은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자, 그가 처해진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칠흑같이 깜깜할 때도 표면과 공간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곳에서 시력이 좋다는 얘기다. 쿠거라는 동물이 있다. 야간시력이 매우 뛰어나서 어두운 달빛에서도 대낮처럼 먹이를 쫓아 미행할 수 있어 야간 사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동물이다. 쿠거는 비밀스러운 습성을 가지고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경계심도 매우 강한 동물이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먹이를 묻거나 숨기고 배설물도 땅에 묻는다. 나는 주인공 릭토르가 어쩐지 이 동물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야간시력이 뛰어난 것 외에도 말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근원적인 거리감에서 오는 공허감은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으로 연결된다. 분명히 릭토르는 '악인'이지만, 나는 카린 포숨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쩌면 우리도 어느 순간 악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명적인 고독은 누구라도 악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소시오패스인 릭토르가 안타깝고 가엽게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 심플한 플롯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주로 심리 묘사로 진행되지만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매우 독특하고, 매혹적인 겨울 밤을 선사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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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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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들과 웃으며 인사하고 출근했던 아버지가 회사에서 갑자기 중앙정보요원에 의해 끌려간다. 그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새로 산 라디오를 집어 들고 남편이 북한 방송을 듣기 위한 것이라고 법정에 간첩 증거로 제출된다. 아마도 책이 있었다면 그것이 증거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겐 뭐든 상관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의 아버지, 아들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끌려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인혁당 사건'이라고 알고 있는 그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에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 잡아들여 무고한 이들에게 형을 집행한 사건으로 이른바 '사법살인'으로 기억된다. 1960년대 당시에 사형되었던 이들은 2007년 재심에서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 받는다. 무려 사십여 년이 지나서야, 이미 죽고 사라진 다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권여선 작가는 이러한 국가적 폭력 자체보다는 그것이 개인에게 미치는 상처에 주목한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사건 자체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알려지고 정리되었으니 굳이 소설에서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없던 죄를 만들었던 그들이 그걸 다시 무죄판결 한다고 해서 긴 세월 동안의 상처와 고통도 없었던 것이 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바로 이런 소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통성명을 하고 서로가 일곱 살 동갑내기임을 확인했다. 원은 얼마 전에 언니가 보는 만화책을 몰래 훔쳐보고 '스파이'라는 말을 새로 배웠던 터라 그 말이 써먹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럼 이제 우리 목숨을 바치는 스파이가 되기로 하자."

"스파이?"

..."스파이는 비밀을 알아내는 간첩이야."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이라는 뜻이다. 고대의 토우는 장난감이나 주술적인 우상, 혹은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토우의 집이라는 것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산다는, 캄캄한 무덤을 뜻한다. 대체 얼마나 커다란 상처와 상실을 겪어야 사람이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느껴지는 걸까. 제목에서부터 아릿한 슬픔이 묻어난다. 이야기의 배경은 삼악산 남쪽의 삼벌레 고개이다. 가운데 바위, 양쪽 바위들의 돌출된 모습이 다족류 벌레가 머리를 꼿꼿이 치켜들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삼악동이라는 이름을 놔두고 그렇게 불리었다고 한다. 경사를 끼고 형성된 동네라 삼벌레 고개에서도 재산의 등급이 등고선의 높이에 반비례했다. 아랫동네에는 크고 버젓한 주택들이 있어 대부분 자기 소유의 집에 살았고, 중턱부터는 제집 사는 사람, 전세 사는 사람, 월세 사는 사람이 섞여 있었다. 윗동네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 전세나 월세도 못 내 일세를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삼벌레 고개 중턱의 우물 집이라 불리는 김순분의 집에 새 식구가 이사를 온다. 새댁 네 식구는 모두 넷으로 새댁과 남편, 큰딸 영과 작은딸 원이었다. 원은 동갑내기인 주인집 둘째 아들 은철과 친구가 된다.

그렇게 은철과 원은 스파이 놀이를 시작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얘기를 엿들어서 비밀을 알아내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려내기로 한다. 아이의 눈을 통해 전달되는 우물 집 식구들의 이야기,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는 천진난만, 때로는 유머스럽게 보여진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비밀은 때로 모르는 게 약이지만, 그들은 뭐니 뭐니 해도 목숨을 바치는 스파이였으므로' 무슨 일이든 악착같이 알아내고자 했다. 난쟁이식모, 순분네, 통잡 박가, 보험여자, 똥순이 할매, 원의 아버지 안덕규까지.. 두 아이가 관찰하는 모습 그대로 비춰진다.

순분은 두 아이를 안고 눈물을 훔치면서 원이 던진 수수께끼 같은 말을 생각했다. 눌은 놈도 있고 덜 된 놈도 있고 찔깃한 놈도 있고 보들한 놈도 있고, 그렇게 다 있다고 했지. 눌은 놈 덜 된 놈 찔깃한 놈 보들한 놈. 순분은 그게 마치 사내들에 대한 형용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원의 가족은 가을 단풍 산행을 하기 위해 김밥을 준비하다가 정보부 요원들의 방문을 받는다. 원은 그들을 따라간 아버지를 그 뒤로 볼 수 없었다. 결국 온몸에 푸른 멍이 든 채 죽어서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자주 찾아오던 무리 중에 두 명은 사형을 당하고, 셋은 감옥에 갇혔다. 이제 그들의 집에선 남겨진 이들이 살아 있어도 마치 무덤 같은 침묵이 흐른다. 남자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불안이 마을을 감싸도, 아이들은 커가고 남겨진 이들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삶의 잔인한 진실이다. 어린 소년, 소녀의 장난처럼 담백하고 유쾌하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은철의 사고 이후 어둑하고 무겁게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남겨진 이들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 탓이 아닌지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실 그 죄책감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아닌데 말이다.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을 생기를 잃은 토우로 만든 것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누군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먹먹한 슬픔을 아릿하게 남겨준다.

오래 전 이곳에 삼악산이 있었지. 북쪽은 험하고 아득해 모르네.

남쪽은 사람이 토우가 되어 묻히고 토우가 사람 집에 들어가 산다네.

그래 봤자 토우의 집은 캄캄한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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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홍의 황금시대 - 긴 사랑의 여정을 떠나다
추이칭 지음, 정영선 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얼마 전에 탕웨이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중국의 천재작가 샤오홍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이다. 1930년대 격변의 중국을 배경으로 샤오홍. 루쉰, 딩링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과 사랑, 우정을 나누었던 그녀는 10년의 시간 동안 100여 권의 작품을 남기었고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천재 여류작가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까지 닮은 전혜린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한때 전혜린의 유고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끼고 살았던 적이 있던 터라, 샤오홍의 일대기도 매우 궁금했다.

 

가부장적인 집안의 분위기로 어린 시절 억압받은 삶을 살았던 샤오홍은 항상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연로한 할아버지만 그녀를 아꼈을 뿐, 어머니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외로운 신세였던 것이다. 그녀는 자라면서 점점 죽을 힘을 다해 낡은 악습과 투쟁하고자 한다. 여자로 태어난 것이 운명이라 말하는 고모에게, 자신은 운명에 순응하고 싶지 않다며, 여자로 태어난 이상 평생 동안 남자의 말만 들으며 살아야 한다는 건 동물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항변한다.

우리는 평생 그렇게 남의 말만 들으면서 살 수 없어요. 항상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길을 가야만 해요. 우리 세대에서는 불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는 가능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세대를 이어 용감하게 일어나 그들에게 저항하기만 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고모와 이모는 샤오홍이 하는 말을 다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 역시 영원히 남자의 말에 복종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해낼 수 없는 일이지만 너라도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며 샤오홍이 몰래 도망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게 그녀는 집에서 정해준 약혼자와의 혼사를 거부하고 스무 살에 집을 나온다. 그리고 하얼빈에서 샤오쥔을 만나게 된다. 그를 만날 당시 샤오홍은 임신한 상태로 남자에게 버림받아 여관방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샤오쥔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들은 혹독한 가난과 추위를 견디며 사랑을 나눈다. 샤오홍의 삶에서 그녀를 거쳐간 많은 남자들이 있었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사람은 샤오쥔과 루쉰이다. 그들 모두 그녀를 문학의 길로 안내했다. 샤오쥔의 영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대문호 루쉰에 의해 문단에 진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샤오홍의 연애 생활보다는 그녀의 작품과 글을 쓰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했는데, 이 작품은 작가로서의 뜨거웠던 삶보다는 주로 거침없고 자유로운 사랑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어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계속되는 전란 속에서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글을 써야 했던 그녀가 직접 보고 겪었던 것을 작품 속에 그대로 담아내어 진정 성을 더했고, 당대의 대문호 루쉰, 딩링과 같은 중국의 지성인들과 나눈 우정을 나누며 글을 썼다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진다.

나는 사랑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매번 누군가를 사랑하면 최선을 다해서 모든 걸 다 쏟아 붓지. 마치 이 생애의 모든 힘을 다할 셈으로 말이지.

 

어릴 때부터 자유연애를 갈망했던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부모님께 받지 못했던 사랑으로 인한 애정 결핍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충분히 받지 못했기에 사랑에 대한 갈망이 유난히 강했고, 누구라도 그녀에게 조금의 애정이라도 보이면 달려들어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보상을 얻고자 했지만 상대방이 주는 마음이 진심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기에 상처도 많이 받게 된다. 현실에서는 사랑에 연약한 여인이었지만, 작품에서는 진실을 담담하고 솔직하게 묘사해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고 하니 더욱 강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샤오홍은 작가로서의 뜨거웠던 삶뿐만 아니라 거침없고 자유로운 사랑으로 1930년대에 볼 수 없었던 신여성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샤오홍은 글을 쓰는 이유가 이보다 더 즐거운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래서 그 많은 고생을 이겨내고,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강인함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1930년대 항일과 혁명이라는 환란의 중국 역사 속에서 인간 내면의 세계를 따뜻하고 담담하게 탐구한 샤오홍, 그녀의 작품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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