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시력 매드 픽션 클럽
카린 포숨 지음, 박현주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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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가 존경한다는 노르웨이의 국민 작가, 카린 포숨의 신작이다. 기존에 <누가 사악한 늑대를 두려워하는가> <돌아보지마>가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고, 꽤 오랜만에 나오는 작품이다. 카린 포숨은 누군가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에 관해서 묻자, “밤이 긴 북유럽 사람들이 즐겨 읽도록 썼다고 대답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북유럽의 스산한 날씨와 긴 밤에 어울리는 스릴러 작품들이 많이 유독 탄생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밤부터 또 폭설이 내려 한파가 시작된다고 하는데, 추운 계절 긴 밤을 보내기에 북유럽 스릴러가 제격이 아닌가 싶다. 특히 카린 포숨의 작품은 플롯, 캐릭터 중심의 여타의 스릴러와는 완전히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독특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누구든 장점이 있다. 누구든 재능이 있다. 누구든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우리 인간들은 바로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썩어빠진 개인이란 존재하고, 나도 그 중 하나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상황에선 정신이 나갈 정도까지 심술궂게 바뀔 수 있는 썩어빠진 개인. 하지만 나는 별로 어렵지 않게 다른 사람들을 흉내 낼 수 있다. 예의 범절과 다정함, 친절을 흉내 낼 수 있다. 힘든 건 나쁜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다. 종종 내가 통제력을 잃으면 일어날 일, 실제로 간간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노르웨이의 한 작은 마을에 위치한 노인 요양원과 한적한 호수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주인공 릭토르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몇 년간 요양원에서 간호사로 일해 온 릭토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남자이다. 그는 음식과 주스, 약을 방마다 갖다 주고 노인들이 잘 먹고 마셨는지, 알약을 삼켰는지 확인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몰래 주사는 매트리스 안에 놓고, 음식과 약은 변기 속에 쏟아버리며 물을 내리고 모든 흔적을 없앤다. 노인들이 사라지는 음식을 보며 창백하고 주름진 두 손을 무력하게 흔들지만, 그는 노인들이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못하고, 아무 쓸모도 없는데 밥은 먹어 무엇하냐는 식이다. 무력한 환자들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면서 그는 은밀한 즐거움을 느낀다. 중년의 그에게는 단 한번도 여자가 있었던 적이 없다.

 

 

내게 여자만 있다면, 나를 달래주고 위로해 줄 여자만.

그는 같이 근무하는 안나 간호사를 마음 속의 천사로 여기며 관찰한다. 그렇게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 그에게는 고독과 외로움이 유일한 친구이다. 날마다 산책을 즐기는 그는 자주 공원에 오는 이들을 관찰한다. 신체장애를 겪는 어린 딸을 키우는 여자, 은퇴 후 뜨개질으로 시간을 보내는 여자, 서로를 탐닉하는 젊은 커플, 늘 술에 취해 있는 남자.. 그러던 중에 휴대용 술통을 놔두고 간 아른핀과 우연히 말을 나누고 집에 초대하면서 관계를 맺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완전히 하찮은 존재였다. 쳐다볼 것도 없고, 대체로 세계에 별 의미도 없고, 쉽사리 잊히는 존재. 이 깨달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사람들이 몸을 돌려 내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원했고, 나를 기억해 주고 존중을 담아 내 얘기를 하기를 바랐다. 이런 갈망은 점점 커져 내 가슴과 머리를 채웠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꾸어야 한다.

어렵사리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된 아른핀과는 사소한 사건으로 금이 가버리고 만다. 그가 술을 내어주고, 이야기를 들었건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른핀이 그의 지갑 속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는 걸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지갑을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두고 시치미 떼고 대화를 하려는 아른핀을 보고 그는 이가 덜덜 떨릴 만큼 분노를 느낀다. 잠시라도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했던 남자였기에 그의 배반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내면에서부터 올라오는 폭발적인 감정을 그만 참지 못하고 분출해버린다. 고작 지폐 몇 장 때문이었지만, 사실은 지폐보다 자신의 믿음을 배반한 것에 대한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릭토르가 우발적으로 아른핀을 죽이게 되는 것까지가 전반부, 이후 진행되는 후반부의 사건은 전.. 예상 밖으로 이어진다. 그는 시체를 수습했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가지만, 어느 날 갑작스레 경찰의 방문을 받는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엉뚱하게도 요양원에서 일주일 전에 죽은 넬리라는 노인의 살해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다. ....도 그는 넬리를 죽이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대부분 바라만 보는 것뿐이에요.

보통 1인칭으로 전개되는 작품에서 독자들은 주인공, 즉 화자에게 감정 이입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릭토르는 일종의 소시오패스이다. 타인의 괴로움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고, 평범한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때로는 공포나 그 외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는. 거기다 그는 사람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친구를 만들거나, 타인을 관찰하는 낙으로 살아가는 완전한 외톨이이다. 하지만 그가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로 구치소에 수감되고 돌아가는 상황이 모두 그에게 불리하게 진행되는데, 이상하게도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그가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목인 '야간시력'은 주인공의 특별한 능력이자, 그가 처해진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칠흑같이 깜깜할 때도 표면과 공간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곳에서 시력이 좋다는 얘기다. 쿠거라는 동물이 있다. 야간시력이 매우 뛰어나서 어두운 달빛에서도 대낮처럼 먹이를 쫓아 미행할 수 있어 야간 사냥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동물이다. 쿠거는 비밀스러운 습성을 가지고 있어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경계심도 매우 강한 동물이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먹이를 묻거나 숨기고 배설물도 땅에 묻는다. 나는 주인공 릭토르가 어쩐지 이 동물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야간시력이 뛰어난 것 외에도 말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근원적인 거리감에서 오는 공허감은 무엇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고독으로 연결된다. 분명히 릭토르는 '악인'이지만, 나는 카린 포숨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쩌면 우리도 어느 순간 악인이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명적인 고독은 누구라도 악인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소시오패스인 릭토르가 안타깝고 가엽게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 심플한 플롯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주로 심리 묘사로 진행되지만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매우 독특하고, 매혹적인 겨울 밤을 선사해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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