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필요할 때 - 알랭 드 보통 인생학교 소설치료사들의 북테라피
엘라 베르투.수잔 엘더킨 지음, 이경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날씨가 추워지면 어쩐지 공기도 퍽퍽해진 것 같고, 움츠러든 어깨만큼이나 사람들간의 관계도 삭막해지는 것 같고 그래서 그냥 마음이 쓸쓸해지곤 한다. 이런 계절엔 커다란 벽난로 앞에 놓여진 흔들의자에 무릎담요를 덮고 앉아서, 향이 좋은 커피와 함께 동화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갖은 시련을 겪지만 언제나 우리의 주인공이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착한 결말의 이야기, 현실에서는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마법 같은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어릴 때 안데르센의 동화 전집을 그렇게나 열심히 읽었던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현실과는 너무도 접점이 없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환상적인 이야기의 세계가 나를 매혹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동심이다. 마치 '진짜 처럼 보이는 거짓말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어낸 이야기, 만들어낸 세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속아넘어가 주고 싶은 그런 이야기를 구축하는 것 말이다. 모두 다 꾸며낸 이야기라도, 누군가 그걸 믿어준다면 그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사랑한다. 그 허구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따뜻한 온기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은 세계적인 유명 작가 알랭 드 보통이 런던에 설립한 인문학 아카데미 인생학교에서 2008년부터 문학치료 교실을 운영하고 있는 엘라 베르투와 수잔 엘더킨이 공동 집필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듯이, 문학치료사인 이들은 소설을 처방한다. 「인디펜던트」에서 책 추천 코너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의 다양한 의뢰인들에게 일대일로 소설을 처방하는 것이다. 세계문학상 수상작부터 베스트셀러, 3세계문학, 숨어있는 명작에 이르는 751권의 다양한 소설 리스트로 구성된 이 책은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마치 보물상자와도 같은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각 페이지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소설들은 우리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행복하게 해주기도 하고, 다시 사랑하고 싶어지게도 만들어준다.

이들이 소설 처방은 이런 식이다. <알코올중독일 때>는 스티븐 킹의 '샤이닝'을 추천한다. 술로 인해 패가망신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소설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들 테니까. <헌신하기 두려울 때>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추천한다. 충심과 사랑, 헌신을 제일로 치고 그 사실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만이 극중 안과의사의 아내처럼 행동할 수 있으니까. 문장이든, 소설이든, 어떤 관계든, 당신이 가치가 있다고 여기며 믿기로 한 것에 헌신한 보상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추천한다.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사랑의 힘이 모든 것을 이긴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주인공 덴고와 함께 기나긴 여행을 떠나다 보면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어질 거라고.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을 때>는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추천한다. 한정된 날들을 사는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인 매우 귀중하므로,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처럼 행동하는 대표적인 인물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키가 작을 때> J.R.R.톨킨의 '호빗'을 추천한다. 주인공 빌보 배긴스는 신장이 인간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빗족이지만 장대한 모험을 통해 엄청난 용기를 발휘하고, 가슴 속에서 뭔가 깨어남을 느끼며 위대한 영웅이 된다. <이가 아플 때>는 래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추천한다. 극중 브론스키가 치통에 고통 받다가 순간적으로 통증에 해방되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철길을 보고 있던 그의 기억에 피범벅이 된 그녀의 몸이 떠오르면서 육체적인 고통을 감정적인 고통이 넘어서게 된다. , 그 외 에도 너무도 기발하고 재미있는 처방도 많고,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힘이 되어주는 처방도 많으니 직접 읽어보아야 한다.

 

이 책에는 상황에 따른 책 처방 외에도 중간중간 소설 중독자들을 위한 '독서 질환'에 관한 팁도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책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강박적으로 책을 사들일 때>는 전자 책 리더기 혹은 '지금 읽는 중' 선반을 마련하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책에서 모든 요소를 빼고 글자만 남기면, 당신이 정말 책을 읽고 싶은 것인지 단지 가지고 싶은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책을 단지 '수집'하는데 열중하는 몇몇 소설 중독자들도 주위에서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전자 책으로 읽었는데도 정말 마음에 든다면 그때 아름다운 양장 본을 한 권 사서 책꽂이에 꽂아두라는 것이다. 혹은 전자 책 리더기가 맞지 않는다면 '지금 읽는 중' 선반을 하나 마련해서, 새 책을 한 권 사려면 우선 이 선반의 책을 한 권 읽고 책꽂이로 돌려보내 빈자리가 나야만 하는 걸로 규칙을 세우는 것이다. 기발하지만, 매우 공감되는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책 더미에서 원하는 책을 못 찾을 때>,<집안일에 책 읽을 시간을 빼앗길 때>, <배우자가 책을 읽지 않을 때> 등등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팁들이 잔뜩 수록되어 있다.

나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나 네 자매 중에 셋째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북적북적 시끄러운 집안이었다. 덕분에 책을 은신처 삼아 도피하는 법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고 할까. 가끔 부모님이 다투시거나, 언니들이 잔소리를 하거나, 동생이 말썽을 부릴 때, 나는 책을 방패 삼아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잘 골라 펼쳐 든 책 한 권은 방패이자 방화벽이며, 투명인간의 망토'라고 했던 에리카 종의 표현처럼 나는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 동안 보호받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지금도 책을 읽으면서 그 허구의 세계 속에서 자주 위안을 받는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미니 도서관을 담당하고 있다 보니 종종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할 일이 생기곤 한다. 그럴 때 나는 그들의 성격에 맞추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책을 추천해주곤 했는데, 그들이 책을 대여해가서 읽고 반납하러 와서는 짧은 소감을 얘기해주면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 이 친구도 책을 통해 위로 받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이 나를 져버릴 때마다 나는 책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나에게 적개심을 가질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상처를 줄 일도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뭔가만 삐끗하더라도 어긋나고, 깨어지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은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일상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를 바 없이 그저 견뎌야 하는 하루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 책만 있다면, 나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만나보아야 한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많구나 동질감을 느낄 것이다. 삶이 퍽퍽해서 사는 게 재미가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책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당신의 상황에 맞춘 처방으로 새해에는 삶이 무지개 빛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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