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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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 집에 갔더니

현관에 아버지가 죽어 있었다.

별일이 다 있네, 하고

아버지를 넘어 안으로 들어가봤더니

부엌에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시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해질녘>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충격적인 도입부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이런 식이면 형도 죽었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욕실에 형이 죽어 있었다'로 이어진다. 집안 풍경은 이리 처참한테 평상시와 다름없는 해질녘이라고 마무리되는 이 시의 방점은 '내일이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은'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 있길래 불을 끄고 스튜의 맛을 보고, 국수 배달 오토바이의 브레이크 소리도 일상처럼 들리고, 이웃집 아이가 거짓으로 울고 있는 소리도 다 들리는. 그래서 너무도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화자는 그 충격을 내일이 소용없는 오늘이라고 말한다.

<탄생>이라는 시 역시 굉장히 노골적이고, 현실적인 어법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머리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기가 묻는다.

"아버지, 생명보험은 얼마짜리 들었어?"

나는 황급히 대답한다 "사망 시 삼천만 엔인데"

그랬더니 아기가 말한다

"역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출산하는 과정은 보통 성스럽다거나, 아름답게 묘사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아기가 부모와 일종의 거래를 하며 세상에 나올지 말지 결정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네 방에 텔레비전도 있다고 구슬리고, 남편은 디즈니랜드에 데려가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먹히지 않자 급기야 아내는 입덧은 이제 질색이라며 소리지르고, 남편은 안 나오면 엉덩이를 때려주겠다며 위협해서 겨우 아기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 전개냐 하겠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부모, 자식 간의 도리라는 게 잊혀진 지 한참인 요즘에 너무도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너무도 씁쓸하고, 처참한 광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국민시인이라는 일본 현대시의 거목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력 63년을 맞아 출간한 기념 선집이다. 시인 신경림의 추천사처럼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 또한 유연하고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며, 잘난 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난도 너무나 진지하고, 친근한 어투에 술술 읽히는 내용은 매우 적나라하기도 하다. 일상에서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광활하고 깊다.

솔직히 말해서

책은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있고 싶었다

<>이라는 시에서 자신이 책이 된 것보다는 흰 종이, 그 이전에 나무로 있고 싶었던 책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책으로 된 자신을 읽어본다. 검은색 활자로 쓰여진 글자들을 읽으며 책은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한다.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는 것 때문에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조금 기뻐진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단 받아들이고 수긍하면, 주어진 상황을 조금 여유 있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생기게 마련이다. 잔혹 동화처럼 무시무시한 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귀여운 시도 있으니 시인의 시 세계는 그야말로 너무 다양하고 폭이 넓었다.

'벌서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그의 시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글을 펼쳐낸다. 시인의 나이는 차치하고 시력으로만 따져도 환갑이 넘었는데, 나이가 무색하도록 신선하고, 기발한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언어에서 리듬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각적인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가 존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 시를 단 한번도 읽지 않고 인생을 보내는 사람, 그런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이들에게 조차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시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는 삶을 일상과는 다른 관점으로 돌이켜보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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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5-05-29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솔직히 말하면`이 찍는 방점에 놀랐어요. 조르바였다면 `아니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오, 두목? 어서 술이나 한 잔 하러 갑시다.`라고 말하고 금새 술집을 향했을 것 같아요. `짧게 할 수도 있는 말을 왜 저렇게 길게 할까?` 하고 술자리에서 슬그머니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요.

피오나 2015-06-02 07:43   좋아요 0 | URL
이런..답글이 늦었네요^^;; 말씀들으니 정말 조르바라면 그런 대사를 했을 것 같아요. 하핫. 어려운 시도 있고, 쉬운 시도 있었는데.. 시인처럼 나이가 들어서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블루베일의 시간 - 삶의 끝자락에서 전하는 인생수업
KBS 블루베일의 시간 제작팀 지음, 윤이경 엮음 / 북폴리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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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다큐멘터리 '블루베일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은 아주 우연히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봤던 걸로 기억한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봐 주는 수녀들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내 주변 누구도 아직 죽음을 맞이한 적이 없었던 터라, 실제 임종의 순간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실제 임종의 순간까지 고스란히 담아 내어 무심코 티비를 보던 나를 숙연하게 만들어 주었다. 50년 전 한국에 진출해 국내 최초이자 동양 최초 의 호스피스 시설인 갈바리 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들은 평생을 그렇게 생과 사의 순간에서 헌신하며 살아왔다. 사랑하는 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이들의 마지막 심정, 그리고 그런 순간들을 함께 하면서 겪게 되는 수도자들의 깨달음이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엄마, 엄마, 방금 전에도 숨을 쉬었는데... 왜 숨을 안 쉬어...."

중년의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울먹였다. 그는 죽은 어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아이를 낳고, 늙어 가고, 마침내 빈껍데기로 죽는 그 모든 시간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생의 비밀이 한꺼번에 그의 머리 위로 쿵 내려앉아 납작 깔린 모습이다. 남자 뒤에 있던 딸이 허둥지둥 앞으로 나와 어미의 얼굴을 감쌌다.

"아직도 따듯한데... 이렇게 따뜻한데...."

임종을 지키는 가족들의 황망함과 어떻게든 죽음을 붙들고 싶어 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그 가족들 뒤에 지난밤 할머니의 병실에서 오랫동안 기도했던 막달레나 수녀가 서 있다. 그녀는 조용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들의 삶의 뿌리가 뚝 끊어지는 것을. 무릎이 꺾이고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것을.' 말이다. 아직 내가 겪어보지 못한 죽음의 생생한 현장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지난 2013 12월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갈바리 의원의 100일간의 기록, <KBS다큐멘터리 블루베일의 시간>이 이번에 책으로 출간되었다. 강릉 호스피스 병원 갈바리 의원 100일간의 기록은 영상에서 미쳐 다 보여지지 않는 모습까지 그려져 있어 다큐멘터리를 봤던 이들에게도, 보지 못했던 이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되어 줄 것 같다.

몸이 죽어 가는 것을 인간인 우리가 막을 도리는 없다. 그저 닥친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수밖에 말이다. 죽어가는 이는 세상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매 순간 느낀다. 죽음을 앞두고 남은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하는지, 정답은 없다.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삶, 죽음 또한 처음 겪는 것이니 말이다.

“갈바리에서 한 달 넘게 지낼 때사랑한다, 고맙다교육을 많이 받았어요. 그 말을 진작 했더라면……. 임종이 가까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평소에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많이 하고 사는 게 좋구나, 엄마가 그런 귀한 깨달음을 주고 가신 것 같아요.”

누구나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고, 떠나버린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이라 하지 않던가. 평소에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나와 가까운 이들에게 자주 말해주고, 마음을 표현하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언젠가는 찾아오게 마련인 죽음을 간접적으로 겪고 나면 내게 남은 나머지 시간이 소중해 질테니 말이다. 매 순간을 감사하고, 충분히 행복하게, 뒤돌아봐도 후회 없도록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끝에 다다라서야 시작부터 잘못됐구나. 여기게 되는 삶도 있겠지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충만하게, 하고 싶은 대로 멋지게 살아온 삶도 있을 것이다. 살아 생전 어떤 삶을 살았던지 그에게 주어지는 죽음의 시간이란 사실 공평하게 찾아온다. 감동적이었던 다큐멘터리만큼이나 책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죽음을 겪고 나서야 삶을 배우지만, 그럼에도 아직 늦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선물처럼 감사하게 생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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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셰프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셰프의 24시간
마이클 기브니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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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세는 요리하는 남자이다. 한참 '먹방'에 관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쿡방' 모든 방송사를 휘어 잡고 있다. 바라만 보는 먹방보다는 직접 참여해볼 수 있는 쿡방이 더 즐거운 오락이 된 것이다. 요리와 일상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런 방송들은 집밥 열풍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의 추구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기다 젊고 실력있는데다 재미있기 까지 한 인기 쉐프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숲처럼 푸른 빛을 띠는 시실리안 피스타치오를 만져보니 부들부들하다. 깨물어보자 입 안 가득 즙이 퍼진다. 맛이 풍부하고 달콤하다. 처음 경험하는 맛이다. 아르간 오일 뚜껑을 열자 오일 향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오일이 병목을 타고 방울져 내려와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것을 낭비한다는 건 죄악이다. 얼른 혀로 훔쳐낸다. 감칠맛이 있고, 풍부하며, 고소하다. 이번엔 PX(페드로 히메네스) 식초를 맛보자 강렬한 달콤함이 좀 전의 진한 오일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다른 식초들과 다르게 향긋함을 풍기는 이 넥타는 농도가 짙고 여러가지 맛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책은 실제 셰프이자 작가인 마이클 기브니가 셰프의 그늘에 가려 주목 받지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주방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셰프의 오른팔, '수셰프(Sous Chef)'를 주인공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그가 특급 레스토랑 주방에서 겪는 24시간, 하루 동안의 모든 일들을 통해 그들의 삶 전체를 직접 느껴볼 수 있다. 수셰프라는 낯선 직책은 한 주에 7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셰프 옆에 딱 붙어 셰프의 바람을 실행하는 수행자이다. 그는 주방의 견습생처럼 요리를 어떻게 하고 레스토랑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배우려고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그런 기술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진정한 셰프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있는 것이다.

몇 해전 드라마 <파스타>에서 등장했던 매력적인 셰프. 주방에서는 까칠하지만 여자친구에게는 너그러운 멋진 남자 이선균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 쉐프." 아마도 그때부터 였을 지도 모른다.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환상이 사람들에게 생기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연예인을 능가하는 외모와 입담의 셰프들이 방송을 통해서 캐릭터화되면서부터 그것은 구체화되고 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이 일하는 주방이 전쟁터라는 것은 우리 일반인들이 실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주방은 완전히 딴 세상이기 때문에. 나는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기도 했거니와, 그들 쉐프들의 생활도 너무 궁금했기에, 실제 그들이 매일같이 전투를 치르는 그곳, 전쟁터를 한번쯤은 구경해보고 싶었다.

오후 시간은 드디어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혼돈의 시간을 잘 헤쳐 나와 모든 것을 내 통제 아래 두었다. 사실 너무 잘 해내서 셰프가 하나부터 열까지 하기로 했던 테린에 들어갈 가니쉬도 대신 구워줄 수 있는 시간도 남았다. 그것까지 해주면 셰프가 고마워하겠지 하는 기대를 한다. 눈은 긴장감에 여전히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만 이번에는 밖에 한번 나갔다 와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안정감이 찾아온다.

그런데 갑자기 셰프의 살찐 손이 내 어깨를 때린다. 안정감은 산산조각 나고 만다.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놓쳐 새끼손가락 끝을 거의 베일 뻔했다.

", 이제 말해보게." 셰프가 말한다. "잘 되어가고 있나?"

"그런 것 같습니다, 셰프."

"4시 반까지 가능한가?"

"(Oui), 셰프." 나는 대답했다. "언제나 가능합니다."

요리가 멋진 일이라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여러 가지 감각을 활용하는 거라는데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요리는 운동신경, 효율적인 움직임, 예민한 감각을 활용할 수 있는 장'이라고. 소스가 타면 냄새로 알 수 있고, 생선이 다 구워지면 소리로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리가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매 순간 새로운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이미 알고 있는 레시피가 있더라도, 이미 많은 경험을 했더라도, 지금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감각을 이용해 재료에 따른 다양한 독특함에 대처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활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주방 체험 24시간을 겪고 나니 요리사들이 일생 전체를 통해 겪게 되는 수많은 경험, 그 히로애락을 한꺼번에 보게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일생을 하루 안에 담아놓은 거라 전부는 아니겠지만, 주방이 전쟁터라는 것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저자인 마이클 기브니는 분명 요리사인데, 웬만한 소설가 뺨치게 묘사가 너무나도 멋지다. 덕분에 재료의 맛을 보는 것도, 요리를 하는 과정에 대한 것도 매우 리얼하다. 실제로 요리하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 같고, 요리의 향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다. 지금 요리하는 남자들에게 푹 빠져 있다면, 그래서 '쉐프'라는 직업에 마구 관심이 생겼다면, 이 책이 가장 핫한 아이템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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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왕 컬러링북 아름다운 고전 컬러링북 2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글, 이수희 그림, 최연순 옮김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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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는 나만의 베이커리를 테마로 한 컬러링북을 만났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특별하다. 바로 고전 명작에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더한 컬러링북이다. 아름다운 고전 컬러링북 시리즈는 첫 번째로  '어린 왕자'에 이어 두 번째 '눈의 여왕'이 나왔고, 이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나올 예정이다. 너무나 유명한 이 고전들은 아이들만 읽는 것이 아니라 어른 들을 위한 동화이기도 해서, 그저 글을 읽는 것보다 몇 배의 즐거움을 안겨 준다. 특히나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동화는 색다른 깨달음을 주기도 하고, 그 동화책에 직접 채색을 하면서 일러스트를 완성시키는 즐거움은 그 어떤 컬러링 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경험이 되어 준다.

 

컬러링 북이 초기에 인기를 끌기 시작할 무렵에는 굉장히 복잡한 도안들로 유명해졌는데, 갈수록 심플해지더니, 이제는 이렇게 일부는 색감이 들어가 있는 상태로 나오기도 한다. 일부 색감이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채색을 하다 보니, 내가 꼭 동화책을 완성시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더욱 열심히 하게 되는 것도 있더라.

 

특히나 아이가 있다면 동화를 읽어주고 함께 채색까지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경험이 될 것 같다. 힐링이라는 테마로 무수히 쏟아지는 수많은 컬러링북 중에서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경험으로서는 이 책이 가장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나 단순한 이미지로도 동화의 내용을 한 컷에 담아내고, 그 분위기를 느껴질 수 있게 한다는 건 참 대단한 것 같다. 그림이 줄 수 있는 힘을 컬러링 북을 통해 새삼 깨닫게 되곤 하는 것 같다.

 

 

, 우선 그림을 하나 골라 채색 준비에 들어갔다. 이상한 건 색연필이 그래도 36가지 색상이나 되는데, 항상 채색을 하다 보면 색이 부족한 거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색감을 감각적으로 배치를 못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가지, 두 가지 색칠을 할수록 더 많인 색깔에 욕심이 생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채색을 하다 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게 되어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래서 컬러링북에서 다들 '힐링'을 찾겠다고 하는 거겠지만 말이다. 고전을 읽는 가장 감각적인 방법이 바로 이 컬러링 북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잊고 사는 동심과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고, 독창적인 일러스트를 채색하면서 상상력도 키워가고 말이다. 컬러링 북은 스트레스 해소뿐만 아니라 일종의 '명상' 효과도 주는 것 같다. 괜히 '컬러링 테라피'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피곤하고, 지치고, 짜증나는 일들이 가득 쌓였을 때는 컬러링 북으로 현실을 잠깐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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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죽음
리사 오도넬 지음, 김지현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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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리에겐 그런 애정과 온기가 필요하다. 표백제와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집이 아니라. 그러게 진의 시체를 일주일 동안이나 집 안에 방치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는 늦게나마 나 자신을 단단히 나무랐다. '시체는 바로 바로 묻자.'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크리스마스 이브이자 자신의 생일에 부모님을 뒤뜰에 묻어야 했던 열다섯 살의 소녀를 떠올려본다. 다섯 살 때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었고, 여섯 살 때부터 동생을 유모차에 끌고 다녔으며, 일곱 살 때는 장을 보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시작했던 지나치게 조숙한 소녀. 동네 사람들에게 어린 엄마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실제 소녀의 부모였던 진과 이지는 전혀 부모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집에 무슨 일이 있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무책임한 부모 덕분에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든 알아서 해결해야 했던 두 자매는 그러던 어느 날, 쓸모 없긴 했지만 그래도 부모였던 진과 이지 마저 영영 잃어버린다. 아빠인 진이 죽고, 다음 날 엄마인 넬리가 헛간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것이다. 재미있는 건 언니인 마니는 동생인 넬리가 약에 취한 아빠를 베개로 눌러 죽였다고 알고 있고, 동생인 넬리는 반대로 언니가 그랬다고 믿고 있는 것.

어쨌거나 마니는 아동복지부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들 자매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다시 위탁 가정 양육 프로그램에 끌려가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었기에, 부모의 시체들을 뒤뜰에 파묻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체를 방에 있는 침대 위에서 뒤뜰까지 끌어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시체에선 액체가 새어 나왔고, 살점이 떨어져 나오고, 고약한 냄새에다 체액이 사방으로 튀는 바람에 온 집안이 엉망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시체들 위에 표백제를 뿌리고, 아빠는 땅에 묻고, 엄마는 쓰레기봉투에 옮겨 담아 헛간 밑에다 쑤셔 박는다. 그리고 엄마가 묻힌 땅에 라벤더를 심는다. 무슨 감상적인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래 묻힌 시체를 최대한 감추려고 말이다.

이 무슨 섬뜩하고 기괴한 이야기란 말인가. 열다섯, 열둘의 두 소녀가 아무리 애정이 없기로서니 그래도 부모인데, 부모의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하는 광경이라니. 설정만 보자면 무슨 공포물의 서두 같기도 하고, 엽기 잔혹 동화의 시작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이 책의 시작 부분에 이런 경고 문구라도 하나 있어야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경고. 이 작품은 당신의 정신건강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설정만 보자면 이 작품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나 이언 매큐언의 <시멘트 가든>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다소 어두운 두 작품에 비해 이 작품은 일종의 블랙 코미디처럼 이상하게도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를 전혀 자아내지 않는다.

마니는 부모가 죽고, 시체를 묻고 나서의 상황을 이렇게 간단히 정리한다. 그들이 어릴 때부터 엄마와 아빠는 그들 곁에 있어주지 않았고, 필요할 때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 둘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다.>라고.

넬리에게 마니가, 마니에게 넬리가 있으니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외로운 여정이 되었을 테니. 그래서 나는 자매끼리 비밀을 나누고 간직하도록, 비밀을 통해 둘의 유대가 강해지도록 놔두고 있어. 유대감은 중요한 거야. 그게 있어야 삶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어떻게든 계속 걸어나갈 수 있으니까. 비록 개 한 마리와의 유대감일지라도 말이야.

잉글랜드 여왕처럼 고색창연한 말투. 뛰어난 바이올린 실력. 해리 포터에 푹 빠져 해리 포터가 쓴 거랑 똑같은 동그란 안경까지 쓰고 다니는 약간 괴짜. 친구도 별로 없고, 잘 웃지도 않고. 하지만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저 남들이랑 조금 다른 열두 살의 넬리. 이따금 엑스터시도 하고 마약을 하지만 즐기지는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스크림 노점 차량의 주인 아저씨와 섹스를 하고, 세상만사 다 초월한 것 같은, 유년 시절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애 어른 열 다섯살 마니.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변태라고 부르는 옆집에 사는 동성애자 할아버지 레니. 이야기는 이렇게 세 인물의 관점에서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두 자매에게 보호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레니는 두 아이를 도와주려고 집으로 불러 음식도 해주고, 보살펴준다. 이제 자매는 레니의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이웃들의 눈에 띄지 않게끔 뒷문으로 몰래 드나드는데, 사실 걱정할 필요가 있나 싶은 것이 하나같이 눈 뜬 장님들이라 부부가 사라진 것도, 그래서 두 아이가 고아가 되었다는 것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게 그들은 가족과 비스 무리한 관계를 맺어가고, 시간이 지날 수록 두 자매의 친구들과 선생님들, 그리고 정부의 관계자들도 그들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낸다. 그들을 속이기 위해 세 사람은 점점 더 거짓말을 거듭하게 되고, 그렇게 증폭되는 이야기는 복잡해지는 상황만큼이나 다채롭게 흘러간다. 우리는 마니가 되었다가, 넬리도 되었다가, 다시 레니가 되어 가면서 그들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점점 미스터리의 한 가운데로 빠져 든다. 왜냐하면 1인칭 서술자인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독자인 우리가 그저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누군가를 속이거나, 오해하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 작품이 팩트로만 볼 때는 어둡고 끔직하고 우울하지만, 실제 진행되는 스토리가 마냥 그렇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불행과 비극 속에 있지만, 실제 어린 두 자매가 느끼는 것은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넘어서는 거라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가의 글 솜씨에 그저 속수무책으로 어린 두 소녀의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체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거칠지만 순수하고, 무기력해 보이지만 당차고, 어둡지만 밝기도 한, 이 매력적인 작품이 작가의 데뷔작이란다. 세상에나.

아무런 준비 없이 이 작품을 만났다가는 시작부터 당황스런 전개에 정신건강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읽게 된다면 분명 당신은 이 작품을 읽기 전과 조금은 달라질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흡입력 있고, 재기발랄하고, 충격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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