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질녘에 집에 갔더니

현관에 아버지가 죽어 있었다.

별일이 다 있네, 하고

아버지를 넘어 안으로 들어가봤더니

부엌에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이 시는 다니카와 슌타로의 <해질녘>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충격적인 도입부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이런 식이면 형도 죽었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욕실에 형이 죽어 있었다'로 이어진다. 집안 풍경은 이리 처참한테 평상시와 다름없는 해질녘이라고 마무리되는 이 시의 방점은 '내일이 아무 소용 없는 것 같은'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가스레인지에 불이 켜져 있길래 불을 끄고 스튜의 맛을 보고, 국수 배달 오토바이의 브레이크 소리도 일상처럼 들리고, 이웃집 아이가 거짓으로 울고 있는 소리도 다 들리는. 그래서 너무도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는 화자는 그 충격을 내일이 소용없는 오늘이라고 말한다.

<탄생>이라는 시 역시 굉장히 노골적이고, 현실적인 어법으로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머리가 막 나오기 시작했을 때 아기가 묻는다.

"아버지, 생명보험은 얼마짜리 들었어?"

나는 황급히 대답한다 "사망 시 삼천만 엔인데"

그랬더니 아기가 말한다

"역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출산하는 과정은 보통 성스럽다거나, 아름답게 묘사되기 마련인데, 이 시에서는 아기가 부모와 일종의 거래를 하며 세상에 나올지 말지 결정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네 방에 텔레비전도 있다고 구슬리고, 남편은 디즈니랜드에 데려가 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먹히지 않자 급기야 아내는 입덧은 이제 질색이라며 소리지르고, 남편은 안 나오면 엉덩이를 때려주겠다며 위협해서 겨우 아기가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이 무슨 황당한 상황 전개냐 하겠지만,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현대에 부모, 자식 간의 도리라는 게 잊혀진 지 한참인 요즘에 너무도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너무도 씁쓸하고, 처참한 광경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일본의 국민시인이라는 일본 현대시의 거목 다니카와 슌타로가 시력 63년을 맞아 출간한 기념 선집이다. 시인 신경림의 추천사처럼 "순진무구한 생각에서 나온 듯 느껴지는 시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깊은 시가 있고, 말의 재미에 흠뻑 빠진 시가 있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시도 있다. 또한 유연하고 독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없으며, 잘난 체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장난도 너무나 진지하고, 친근한 어투에 술술 읽히는 내용은 매우 적나라하기도 하다. 일상에서 리듬을 만들어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광활하고 깊다.

솔직히 말해서

책은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있고 싶었다

<>이라는 시에서 자신이 책이 된 것보다는 흰 종이, 그 이전에 나무로 있고 싶었던 책은 이미 벌어진 결과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책으로 된 자신을 읽어본다. 검은색 활자로 쓰여진 글자들을 읽으며 책은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한다.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는 것 때문에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조금 기뻐진다.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단 받아들이고 수긍하면, 주어진 상황을 조금 여유 있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도 생기게 마련이다. 잔혹 동화처럼 무시무시한 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귀여운 시도 있으니 시인의 시 세계는 그야말로 너무 다양하고 폭이 넓었다.

'벌서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는 그의 시는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글을 펼쳐낸다. 시인의 나이는 차치하고 시력으로만 따져도 환갑이 넘었는데, 나이가 무색하도록 신선하고, 기발한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언어에서 리듬이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각적인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시가 존재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 시를 단 한번도 읽지 않고 인생을 보내는 사람, 그런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그런 이들에게 조차 권하고 싶은 시집이다. '시를 읽는 즐거움의 하나는 삶을 일상과는 다른 관점으로 돌이켜보는' 것이니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Jeanne_Hebuterne 2015-05-29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솔직히 말하면`이 찍는 방점에 놀랐어요. 조르바였다면 `아니 그걸 이제 알았단 말이오, 두목? 어서 술이나 한 잔 하러 갑시다.`라고 말하고 금새 술집을 향했을 것 같아요. `짧게 할 수도 있는 말을 왜 저렇게 길게 할까?` 하고 술자리에서 슬그머니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들려요.

피오나 2015-06-02 07:43   좋아요 0 | URL
이런..답글이 늦었네요^^;; 말씀들으니 정말 조르바라면 그런 대사를 했을 것 같아요. 하핫. 어려운 시도 있고, 쉬운 시도 있었는데.. 시인처럼 나이가 들어서 한번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