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박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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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른 손님에게 서점 주인이 말한다. 이 책은 손님에게 팔고 싶지 않다고. 뭐 이런 이상한 서점이 다 있을까. 또 이런 일을 당한 손님은 얼마나 황당할까. 내가 내 돈 주고 책을 사는데, 내 마음대로 책을 살 수 없다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방 주인은 왜 손님과 언성을 높여가면서 피곤하게 살까.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책방은 바로 파리, 센 강 위에 떠 있는 독특한 수상 서점, 종이약국이다. 손님의 상처와 슬픔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책으로 처방하는 것이 바로 주인인 페르뒤 씨가 책을 파는 방식이다. 페르뒤 씨는 말한다. 자신은 의사들이 결코 진단하지 못하는 감정들과 고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들을 치유하고 싶다고. 그런데 어떻게 잠깐 한 사람을 보고 그의 고통을 짐작하거나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손님에게 팔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여자 손님의 손에서 살며시 <>을 빼냈다.......

그러자 그 여자 손님은 서점 주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요?"

"막스 조당은 손님에게 맞지 않아요."

"막스 조당이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요?"

". 손님에게 맞는 타입이 아니에요."

"내 타입이라고요? , 그렇군요. 지금 나는 이 서점에서 책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리고 싶군요. 남편감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고요."

"실례지만, 손님께서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는 것보다 어떤 책을 읽으시냐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그는 귀와 눈과 직관을 이용했다. 상대방의 몸에서, 태도와 움직임, 작은 몸짓에서 어떤 감정이 그를 굴복시키고 압박하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책은 의사인 동시에 약이기도 해요.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하죠. 손님이 안고 있는 고통에 맞는 적절한 소설을 소개하는 것, 바로 내가 책을 파는 방식입니다." 라고 한다. 이 남자가, 이 여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일까? 이들의 삶의 동기는 무엇일까? 이들은 자신 이야기의 조연일까? 자신의 스토리에서 남편, 직업, 아이들, 일이 텍스트를 야금야금 모조리 차지하는 바람에 자신을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는 약 삼만 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단다. 그것도 현재 유통되는 백만 권 이상의 책에 비하면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라며.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8000권이 이 서점에 있고, 그는 사람에 맞추어 치료법을 작성해서 책을 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르뒤 씨가 치유하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과거에 갇혀서, 처참한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수십 년을 외면하던 그 순간과 마주하게 된 그는 드디어 과거와 마주서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종이약국을 출항시켜 과거를 향한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또한 매우 흥미롭다. 우리들 대부분 그렇지 않나. 남의 일에 간섭하고 충고를 하는 건 잘하면서, 자기 자신의 일에는 그렇게 객관적일 수 없어서 방치해두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종이약국과 함께 하는 여정은 그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위안'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나와 같은 누군가, 혹은 내가 과거에 겪었던 상처와 현재의 내 모습과 닮은 그것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소설의 목적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거나, 혹은 내가 되고 싶은 누군가를 찾거나, 혹은 위로 받고 치유되거나, 그저 책을 읽는 시간에 힐링이 되는 것 말이다.

페르뒤 씨는 그 얇은 책을 집어 들었다. 조당은 여기저기 연필로 밑줄을 긋고 그 옆에 질문들을 써 놓았다. 책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읽히고 싶어 한다.

독서는 끝없는 여행이다. 기나긴, 그야말로 영원한 여행. 그 여행길에서 사람들은 더 온유해지고 더 많이 사랑하고 타인에게 더 친근해진다. 조당은 그 여행을 시작했다. 이제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세상과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걸 가슴속에 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문학을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하다. 작년에 읽었던 <소설이 필요할 때>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듯이 문학치료사가 사람들에게 소설을 처방하는 것이다.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서 전 세계의 다양한 의뢰인들에게 일대일로 소설을 처방했던 문학치료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알코올 중독일 때는 이런 책을, 사람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는 이런 책을,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을 때는 이런 책을 읽으라는 식으로 기발하고 재미있는 처방도 있었고,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힘이 되어주는 처방도 있었다. 그래서 책의 역할이 이렇게까지 다양할 수도 있구나,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이 나를 져버릴 때마다 나는 책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나에게 적개심을 가질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상처를 줄 일도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뭔가만 삐끗하더라도 어긋나고, 깨어지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은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일상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를 바 없이 그저 견뎌야 하는 하루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 책만 있다면, 나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종이약국>처럼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면 그냥 막 힘이 난다. 책의 가치가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누군가는 그 가치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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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팩스 부인 미션 이스탄불 스토리콜렉터 38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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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강도에 납치범으로 지명수배가 된 60대 중반의 할머니, 그녀는 지금 가슴에 총 구멍이 난 죽은 남자랑 약에 흠뻑 취한 여자를 태우고 어디론가 급하게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외모는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할머니이지만, 지금 경찰에게 여권을 압수당하고 쫓기는 신세에다, 어깨가 떡 벌어진 우락부락한 남자 두 명도 그녀를 찾아 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국은 월요일 아침이겠구나. 미국이었더라면 지금쯤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여긴 이스탄불이고, 벌써 월요일 오후 4시라니. 이런 생각을 하자 부인은 두 발이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정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워졌다. 이스탄불에 왔다는 것도, 어쩌다가,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편에서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던 스파이가 되어, 첫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던 폴리팩스 부인에게 두 번째 임무가 시작된다. 특정 날짜에, 특정 장소에서 물건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전혀 조건이 까다롭지 않았던 멕시코에서의 임무도 위험천만하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벌였던 스파이로서의 소박한 활약으로 인해 임무가 끝난 뒤에도 자신의 조용한 인생이 한층 충만해졌다고 느끼고 있다. 마치 생각만 해도 절로 빙그레 웃음 짓게 되는 새로운 차원의 인생이 생긴 것만 같이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지금 당장 한 가지 임무를 맡아주실 수 있느냐고. 그것도 지금 당장, 30분 내로 결정을 내리고 출발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는 가라테 수업과 다과회에 참석하는 게 전부였던 폴리팩스 부인이었으니 임무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임무는 바로 이스탄불에서 왕년에 유명했던 여자 스파이와 접선해야 하는 것이었다.

위험하지 않아 보일 정도로 간단한 임무였지만, 역시나 오지랖 넓은 폴리팩스 부인이었기에 그녀의 일정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 경찰에게 여권은 뺏기고, 접선하기로 했던 상대는 누군가에게 납치되고, 함께 온 동료는 살해되고, 그러다 살인 혐의까지 뒤집어쓰고 지명수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문득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를 깨닫는다. 평생 경찰과 엮일 일이라고는 주차 딱지 떼이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지명수배를 당해서 우방 국가의 경찰에게 쫓기고 있고 전국적으로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낯선 나라 터키에 올 때 함께 온 동료는 죽어버렸고,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조차 잃어버렸고, 결국 영국에서 온 사회부적응자 청년과 공동묘지에서 만난 불량배 공갈범과 함께 탈주를 하고 있는 게 그녀의 신세였으니.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긴박하고, 답이 안 나오는 우울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유쾌 발랄하다. 공포에 굴하지 않고, 시련에 좌절하지도 않고, 자신을 방해하는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그녀 특유의 성격이 역시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 순간, 이름 붙일 수 없는 부드러운 깨달음이, 살아 있다는 기쁨이 밀려온 것은 지금이 예기치 못한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위험 끝에 찾아온 안전, 굶주림 끝에 찾아온 따뜻한 음식, 기진 맥진한 끝에 찾아온 휴식 때문이었다. 새로 사귄 낯설고 멋진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꽁꽁 둘러치고 살아가는 안전이라는 것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삶을 가로막는 벽이고, 기만이고,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폴리팩스 부인은 이제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일인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들 일행이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있을 때, 폴 팩스 부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산기슭까지 이어지는 구불한 길과 그 위에 늘어선 오두막들을 바라보며, 태양이 막 먼 산을 넘어가며 노을이 지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무에진의 기도소리가 맑고 청명한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데, 그녀는 순간 벅차 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이 순간을 꼭 기억해둬야지. 나중에, 꼭 돌아와서 이 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봐야지.

나는 바로 그 순간에 폴리팩스 부인과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순진해서 어수룩해 보이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세월만큼의 현명함과 노련함을 보이던 그녀의 진정한 감성과 맞닥뜨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순간에서도 명랑 발랄하고, 무한 긍정의 마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어제까지 내 곁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시체가 되어 버리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타국에서 어떤 행동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좋을 때 잘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나쁜 상황에서도 여유와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폴리 팩스 부인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각한다. 갑자기 마음속에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에 있는 햇볕 좋은 자신의 집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내가 겪는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결혼하고 애를 키우면서 조용히 살다가, 무려 60대 중반의 나이에 별안간 이렇게 위험천만한 직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 꼭 바람이 불어서 책장이 갑자기 휙 넘어간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실수도, 우연도, 사고도 아니었고, 오로지 그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선택의 결과였다.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마치 운명의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간절히 바랬던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더라도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때가 있다. '어떤 거대한 힘이 인생의 모든 출발과 도착을 끌어당기고, 조정하고, 배열하고, 짜 맞춰서는, 결국엔 엄청난 일을 성사시키고 마는' 그런 마법과도 같은 일이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또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폴리팩스 부인이 과연 이번에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게 될런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직접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당신이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아직 한번도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야 말로 이 책을 집어들 시간이니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게 될 당신을 내가 진심으로 부러워한다는 것만 알아두시길. 당신도 이 책을 통해서 폴리팩스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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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 크로니클 셜록 시리즈
스티브 트라이브 엮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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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년 가까이 손꼽아 기다린 <셜록:유령신부>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특히나 이번 크리스마스 특별판(실제로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개봉하는 바람에 신년 특별판이 되었지만;;;;)이 기대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극장에서 개봉을 한다는 것과 현대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셜록이 원작의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버전이라는 데 있다. 애초에 원작을 재해석해서 스마트폰을 하는 셜록과 블로그를 하는 존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감각적인 인물로 재해석한 것이 BBC의 셜록이었기에, 이번 스폐셜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셜록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동안 숱하게 변주되어 왔던, 그러니까 우리가 익히 알던 셜록 홈즈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을 보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창조한 현대의 셜록이 그만큼 매력적이고 임팩트가 강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셜록 크로니클 원서를, BBC에서 출간하고 바로 구입을 했었기에 작년 12월에 이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영어를 줄줄 읽어대지 못하더라도 하드커버 전체 올 컬러에 묵직한 무게감의 화보로서도 엄청난 퀄리티였기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방대한 분량의 읽을 거리 또한 가득이었기에, 어서 한국판이 나오길 기다렸었고, 그렇게 만난 셜록 크로니클 한국판은 완벽한 퀄리티로 기다림을 보상해주었다. 원서와 거의 한치의 오차도 없을 만큼 멋진 퀄리티를 고스란히 뽑아내어 책장에 나란히 두면 어떤 것이 원서이고, 어떤 것이 번역본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셜록 케이스북 때도 그랬지만, 비채의 빵빵한 사진 퀄리티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이 책은 촬영 현장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들과 가감없는 배우들의 모습과 제작 전후의 스토리, 그리고 대본 전개, 캐스팅, 세트, 의상, 소품 등에 이르는 전반적인 모든 것까지 마치 셜록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책이다. 물론 기존에 출간되었던 셜록 케이스북도 소소한 볼거리들과 깨알같은 정보들이 가득했지만, 케이스북에 비해서 크로니클은 두 배 이상의 엄청난 분량과 커다란 판형의 폼나는 하드 커버와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시크릿 화보들까지 풍성해 그야말로 셜록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스티븐이 덧붙여 말한다. "이 병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약간 자폐증이 있는 사이코 패스와 비현실적으로 착실하고 근면한 군인이, 극단적으로 대조적이어서 평생 만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존경하며 플랫을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장면을 찍게 된 겁니다..."

첫 번째 페이지를 펼치면 셜록의 대사가 두 페이지 가득 채워져 있는 대본부터 만날 수 있는데, 정말 대사량이 어마어마하다. 새삼 배우란 대단하다는 생각,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셜록이 왜 그렇게 중독성 있는 마성을 뿜어냈는지 납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게다가 셜록 시리즈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알겠지만, 대사의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지 않다. 마치 속사포 랩이라도 하듯이. 이 책에는 그 엄청난 양의 (게다가 논리적인!) 대사가 가득한 대본이 꽤 많이 실려 있으니, 그 또한 이 책을 읽는 깨알 같은 재미를 준다. 이 대본들 덕분에 단순한 화보집이 아니라 마치 스토리가 있는 소설처럼 읽히기도 한다는 말이다.

 

작가를 위한 바이블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파일럿 에피소드를 만들고, 이것을 90분짜리 세 편의 시리즈로 만든다는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캐릭터 성격을 요약해놓은 것인데, 실제로 이렇게 배우들이 캐릭터를 탄생시켰으니 말이다.

셜록은 원작대로 오만하고, 자신이 원할 때는 얼음처럼 냉담하지만 까불고, 현대적이고, 재미있게 표현할 것. 이라고 되어 있다. 무엇보다 빅토리아 시대에서 동면에 들었다가 2009년에 깨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명심할 것. 이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여기는 존에 대한 설명이 훨씬 더 긴데, 그도그럴 것이 기존에는 존의 역할이 매우 약소해서 마치 책 여백에 끄적거린 낙서 신세로 전락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를 훨씬 중요한 3차원적인 인물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존은 딱 부러지게 이해하긴 더 힘들지만 하나하나가 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설명으로 시작하는데, 방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작가 여러분은 존을 통해서 모험을 살릴 필요가 있고, 역시 존을 통해서 셜록을 알 필요가 있다. 최대한 셜록과 존을 묶어두어야 하고, 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할 것! 이라는 부분 말이다

 

 

"대단원의 일부는." 베네딕트의 말이다. "누가 자신을 구해줬는지, 그게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게 자신들의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셜록이 깨달은 것이죠. 셜록은 이 침착한 사격에 대한, 도덕성으로 똘똘 뭉친 군대 경력이 있는 사내에 대한, 자존심과 원칙의 사내에 대한 윤곽을 그리기 시작하고, 존이라는 사내가 파트너이자 사건기록자이자 친구가 되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뺨을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고, 자신을 구해준 사내가 유죄판결을 받도록 할 뻔하기도 한 것이고요."

캐스팅에 관한 비하인드도 흥미로운데, 사실 처음에 베네딕트의 어머니는 아들의 코가 셜록과 아주 달라서 셜록이 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어톤먼트>에 출연한 그를 보고는, 보자마자 감이 잡힌 듯 완벽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베네딕트는 셜록 홈스 소설을 읽으며 성장하지도 않았고 스토리를 다 알지도 못하지만, 등장인물과 장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대본을 읽어보자 정말이지 셜록 홈스 숭배자들이 썼다는 것이 바로 느껴졌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걸 보면 그가 얼마나 영리한 배우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배우들이 셜록 홈즈를 연기해왔었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개성을 가진 21세기의 괴짜 셜록을 탄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마틴에 관한 일화도 재미있다. 마틴은 평범한 것도 한 편의 시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는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이고, 매우 평범한 사람인 척하는 데에 전문가이고, 실제로 존 왓슨은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거다. 게다가 마틴이 연기하는 방식이 베네딕트의 연기 방향을 바꾸기 시작하기까지 했다고 이들은 말한다. 셜록 시즌이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마틴 역시 베네딕트처럼 엄청난 스타는 아니었지만, 영화 호빗 시리즈를 통해 시리즈 중간에 더욱 부각이 되면서 숨겨졌던 그만의 매력이 셜록에서도 더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책에는 이렇게 캐스팅 뒷 이야기뿐만 아니라, 베네딕트와 마틴이 각자의 캐릭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서로의 파트너 쉽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 실려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만들어준다

 

스티븐은 이게 두 사람의 관계의 핵심이라고 보고 있다....."처음에는 셜록이 존을 일종의 습득물로, 일종의 애완동물쯤으로 여겼어요. 두 사람의 관계에 그런 요소가 어느 정도는 있죠. 존은 셜록이 영원히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스스로 위험에 빠진다는 걸 상기시켜줍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죠." 마크의 말이다. "하지만 존은 셜록을 인간답게 만들어 불쾌해 보이지 않도록 하죠. 셜록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말입니다. 하지만 셜록의 친구는 셜록의 탁월한 정신에 대한 시금석이 되고, '굿모닝'이라는 인사조차 건넬 줄 몰랐던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배우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오직 크로니클에서만 만날 수 있는 정보들이라 더욱 소중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제작자와 감독, 존의 블로그를 맡아 쓴 작가, 특수효과 전문가, 의상 디자이너, 메이크업 아티스트 들의 뒷이야기와 BBC <셜록> 제작팀의 은밀한 기록보관소는 물론, 대본과 삭제 컷, 콘셉트아트, 스토리보드까지 엄청난 볼거리와 읽을 거리들이 잔뜩 무장하고 있으니 셜로키언들에겐 최고의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셜록 시즌1(Sherlock) |2010.07.25~2010.08.08|

1화 분홍색 연구

2화 눈 먼 은행가

3화 잔혹한 게임

 

셜록 시즌2(Sherlock) |2012.01.01~2012.01.15|

1화 벨그레이비어 스캔들

2화 배스커빌의 사냥개들

3화 라이헨바흐 폭포

 

셜록 시즌3(Sherlock) |2014.01.01.~2014.01.12.

1화 빈 영구차

2화 세 사람

3화 마지막 서약

 

, 그리고 1 2일에 스폐셜 버전이 극장판으로 공개되고,

대망의 셜록 시즌4 2016 4월 촬영 예정이라고 한다

 

 언젠가 셜록 홈즈에 관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실제 법과학자, 과학 수사 요원들의 인터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셜록 홈즈가 없었다면 오늘날 법과학도 없었을 것이다. 홈스는 최초의 과학 수사 요원이다. 그가 썼던 방식을 지금도 활용한다. 그는 백 이십 년이나 앞선 과학 수사의 선구자였다. 범죄 수사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그는 현대적인 법과학자이다."라고 말이다. 여기서 다들 눈치채셨는가. 이들은 모두 셜록 홈스가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보다 캐릭터가 더 많이 언급되고, 더 유명한 경우가 가끔 있긴 한데, 셜록 홈즈가 아마도 그 중 최고가 아닐까. 사실 실제로 셜록 홈즈가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경찰들의 수사 방식은 주먹 구구식이라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찾는 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목격자를 찾는 데만 집중했고, 현장은 경찰과 구경꾼들로 훼손되어 증거를 찾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코넌 도일의 목표는 과학 수사 방식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법과학자들은 셜록 홈즈가 처음 등장했던 주홍색 글씨를 두고 지금의 수사 방식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말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게 대단한 인물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21세기 현대로 완벽하게 옮겨놓았다. 그랬던 그가, 빅토리아 시대로 갔을 때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혹시, 그동 안 셜록 시리즈를 한 번도 보지 못했더라도 걱정할 것 없다. 셜록 크로니클 한 권이면 시즌마다 90분 분량의 세 편씩, 9편의 시리즈를 모두 본 것처럼 완벽하게 마스터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셜록의 팬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대체 왜 잘생기지도 않은 베네딕트 컴버배치라는 배우가 인기가 있는지 궁금한 분들에게도, 오로지 영화 매니아라 셜록:유령신부를 기다리고 있을 분들에게도, 이 책은 꼭 필요한 필수 아이템이다.

가격이 비싸다고? 노노. 책을 직접 본다면 절대 비싸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책 값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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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럼 붉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1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용 문신을 한 천재 해커, 비밀정보 조사원이자 깡마른 펑크족, 작고 단단한 몸으로 사적 복수를 가하던 여전사.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여주인공 리스베트 살란데르였다. 너무 많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조숙하지만, 내면적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부분도 있어 순진한 면도 가지고 있는, 굉장히 이율배반적인, 겉모습과는 정반대의 상반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두 모습의 전무후무한 여성 캐릭터. 바로 그 스티그 라르손이 창조한 히로인 리스베트 살란데르에게 오마주를 바치는 작가, 살라 시무카의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를 만났다. 추리, 스릴러 소설은 크게 두 부류이다. 플롯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가. 이 작품은 명백하게 후자이다. 따라서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트릭이나 반전이랄 것도 없고, 인물 관계도가 복잡하지도 않으며, 배배 꼬인 구성도 없어 매우 수월하게 읽힌다. 그러니 다층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고, 복잡한 플롯에 익숙한 추리 소설 독자라면, 이야기 구조가 너무 쉽고 단순한 거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확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매혹적인 캐릭터는 이 작품의 기술적인 아쉬움을 뛰어 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이 완벽하게 잘 쓰인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여주인공 루미키를 자세히 관찰하면, 그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다.

그녀의 부모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딸에게 붙여주었다. 그녀의 머리는 검은색이 아니었고, 피부는 갓 내린 눈처럼 빛나지 않았으며, 입술도 도드라지게 빨갛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딸에게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준단 말인가? 핀란드어로는 그리 나쁘지 않은 이름, '루미키'이지만 설령 그녀가 그림 동화 속 캐릭터라 해도 이건 옳지 않았다. 그냥 친가 쪽의 이름을 따서 스웨덴식으로 붙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이름에 걸맞은 외모를 갖추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염색약과 화장품만 있으면 가능하니까.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했다.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스물넷이었고, 그에 반해 살라 시무카의 루미키 안데르손은 열일곱이다. 모든 문제에 대해 신중히 고찰하는 그녀는 물리학과 철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급우들의 장난에도 가담하지 않고, 학교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는 그녀는 늘 혼자 식사를 하면서도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남들과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남들과 완전히 똑같기도 했다.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으려 애쓰며, 항상 모든 일에 방관적 입장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저 무난하게 살고 싶으면 어떤 일에도 참견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도 휘말리지 않고, 그저 투명인간처럼 있는 듯 없는 살기로 결심한 그녀의 이름은 루미키로,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하지만 동화 속 주인공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지는 않았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자신의 모습에 만족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이 그녀 인생 최대의 목표였으니 말이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루미키는 자신의 은신처이기도 했던 암실에서 기가 막힌 상황과 맞닥뜨린다. 암실 천장에 무수히 많은 5백 유로 지폐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암실 바닥은 불그스름한 갈색 얼룩들로 뒤덮여 있었고, 지폐 모서리에는 적갈색 얼룩이 가득하고, 말라붙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그 날 이후, 그녀의 평화롭고 조용했던 생활은 산산이 깨지고 만다.

", 이제 보니 우리 슈퍼 탐정님께서 컴퓨터 천재셨군그래."

투카가 조롱하듯 말했다.

"그래, 사실 난 에르큘 푸아로와 리스베트 살란데르의 사생아야." 루미키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카스페르가 과장된 동작으로 비워준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열일곱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일반적인 학원 액션물과는 차원이 다르다. 터프하고 총명한 루미키는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약한 십대 소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격투기 훈련으로 날렵하고 강한 육체를 지녔고, 자신의 의지대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연기할 수도 있었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더없이 건조하기만 해 너무도 시크하고, 독립적인 캐릭터였다. 과거의 어떤 상처로 인해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그 누구에게도 마을 열지 않고,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가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여러 모로 리스베트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고, 그래서 더 그녀의 과거가 궁금해질 정도로 말이다. 앞으로 이어질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시리즈의 다음 이야기 <눈처럼 희다> <흑단처럼 검다>가 손꼽아 기다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녀가 마음을 닫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그 일, 그리고 가족과의 비밀과 옛 남자친구의 정체까지 숨겨진 이야기들이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 부터 궁금해진다.

옛날 아주 먼 옛날, 공포를 알게 된 소녀가 살았답니다.

특히나 이 작품에서 매력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그녀가 피 묻은 돈 3만 유로를 발견한 이후, 어쩌다 보니 국제적인 범죄에 말려들어 조직의 보스가 여는 수상한 파티에 참석하게 되는데, 그곳에 참석하기 위해 변신을 하게 되는 장면이다.

눈처럼 흰 피부.

파운데이션, 파우더, 그녀의 피부색과 일치된 화장품이 잡티를 완벽히 감춰주고,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러워진 얼굴.

피처럼 붉은 입술.

립 라이너, 립스틱 한 겹. 살짝 닦아내고 또 한 겹. 그리고 붉은 립글로스.

흑단처럼 검은 머리.

단발로 자른 그녀의 앞머리와 한껏 부풀린 뒷머리, 검정색 염색.

그녀의 이름처럼, 완벽하게 백설공주처럼 변신한 그녀가 벌이는 활약은 여느 액션 영화 못지 않게 전개되지만, 이 장면 전에 전개되던 그녀의 너무도 시크하고, 터프한 면들을 보아 왔기에 이 순간은 마치 마법처럼 매혹적이었다. 한때 잔혹동화가 성인들에게 유행처럼 읽혔었는데, 사실 백설공주 이야기도 매우 잔혹한 면을 가지고 있다. 왕비가 손가락을 찔려이 피처럼 붉고 눈처럼 희고 흑단처럼 검은 아이를 원했고, 공주를 죽이고 심장을 가져올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왕비의 스토리까지 말이다. 그러니 북유럽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인들에게 친숙한 구전동화백설공주이야기를 교묘히 변주한 이 작품이 스릴러의 모습을 띤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백설공주는 그 눈부신 아름다움만큼이나 잔혹한 부분을 가지고 있는 비극이기도 하니 말이다.

누구나 어른이 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마련이다. 누군가는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스스로가 어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그 동안의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진 또 다른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알아버리기도 한다.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지만, 누구든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는 순간이기에, 신비롭고, 매혹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살라 시무카는 바로 우리의 주인공 루미키에게 그런 비밀을 감추어 두고 있다.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며, 아무리 상황이 암담해도 포기를 떠올려본 적이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던 루미키였기에, 그녀의 숨겨진 과거가 조바심이 나도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살라 시무카는 매우 영리한 작가이다. 이 작품이 그녀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출간 1년여 만에 48개국에 판권이 팔렸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다음 시리즈를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다. 이 작품은 이 계절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스릴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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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생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게 한 사람이든, 여러 사람이든 말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사랑한 사람과 침대를 함께 쓰고, 그를 닮은 아이를 낳고,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어릴 때 꿈꾸던 환상 속에 그리던 백마 탄 왕자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눈에는 너무도 멋진 사람을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혹은 우리가 나이를 먹게 되면 알게 된다. 누군가를 인생의 동반자로 선택한다는 건 생각보다 매우 어렵고도 두려운 일이라는 걸.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이라도 벌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애를 써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제도이니 말이다. 매 순간 더 좋아지고, 더 열정적으로 만드는 모든 일이 매우 '당연한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그리고도 한없이 이해해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니 누가 누군가를 평생에 걸쳐 사랑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끔 길을 걷다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노부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싶어서 말이다.

 

 

박범신 작가의 <당신>을 읽으면서 두터운 시간을 통과하는 사랑의 깊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흔여덟의 희옥은 이제 막 죽어 경직이 시작된 남편을 집 마당에 묻는다. 남편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것이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치매에 걸린 후 빠르게 예전의 모습을 잃어버렸던 남편 주호백. 파킨슨병과 당뇨와 고혈압은 평생을 아내와 딸을 위해 헌신해온 그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꿔 놓는다. 짜증은커녕 평생 동안 아내의 말에 토를 다는 일도 거의 없이 마치 충직한 시종처럼 살아왔던 사람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고, 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등 그녀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동안 가슴 속에 다른 남자를 품고, 남편과는 허깨비처럼 살았던 그녀가, 남편의 치매 때문에 일흔이 넘어서야 그를 사랑하게 된다. 치매가 아니었다면, 그가 평생 감추고 억눌러왔던 자신의 본능을 차례차례 그녀에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았다면, 죽기 전 절대로 도달하지 못했을 어떤 각성 같은 느낌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를 평생 혼자 바라보고 살았던 이가 죽고 나서야, 그를 한사코 보려 하지 않던 남겨진 이가 스스로도 몰랐던, 가슴 속에 쟁여져 있던 사랑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 것 말이다.

 

내가 조금 어렸을 때, 그러니까 결혼이라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는 막연히 가족이라는 개념이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주어지는 것 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수십 년을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과 하나의 가족을 이루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매 순간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무조건 희생해야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같은 곳을 바라보기 위해 수많은 것들을 공유해야 하는, 사실은 엄청난 노력이 바탕이 되어 유지되는 공동체가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결혼은 사랑의 문제가 아닌 책임의 영역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 또한 절대적인 포기와 희생을 통해서만 견고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점점 깨닫게 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 대한 사랑이 더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랑이란 그렇게 성숙해질 수록 더 깊어지는 모양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의 정신이 먼 과거의 기억으로 달려나가듯이, 이 소설은 현재의 죽음에서 자꾸 과거의 생으로 달려간다. 너무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그녀를 위한, 하고픈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끝이 되어버린 그의 사랑을 위한 진혼곡처럼 말이다.

 

함정임 작가는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의 마지막에 실린 작가의 말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 쓰기란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라고. 그녀의 이런 마음이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었던 탓인지, 낯선 곳에서 위안을 받기 위해 여행을 떠나듯이, 나는 소설 속 공간을 통해서 위안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쓰여지는 소설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시간을 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부부는 어느 날 존 휴스턴 감독의 <죽은 자들>이라는 영화를 보고 P선생과 인연이 있는 지인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다. P선생의 부음 소식을 듣던 날 공교롭게도 그들 부부는 겨울 여행 중으로 한국에 없었기에, 갑자기 날아든 비보에 망연자실했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두 명, 일산에서 두 명, 양평에서 한 명, 부산에서 한 명, 모두 여섯 명의 손님이 저녁 식사를 위해 모여든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여자는 남편을 보며 말한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고. 아무도 그날 초대의 목적이었던 P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날 모여든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P선생에 대한 추억은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사실 여자는 P선생이 좋아하는 장어요리를 준비했고, 누군가 부른 노래는 P선생의 애창곡이었으며, 누군가 가져온 들깨강정은 P선생이 자주 드시던 간식거리였으며, 누군가 가져온 박하차는 P선생이 정원에 심었다가 손님이 오면 따서 우려내 주시던 차였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P선생을 기억하는 정표를 하나씩 준비하는 것으로 선생을 추도했던 것이다.

 

바다 색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여섯 시로 일부러 저녁 식사 시간을 잡은 마음이나, 이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추도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고 뭉클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방식으로 기억되는 기분은 어떨까 싶어 부럽기도 했고, 남겨진 이들에게 이렇게 추억되는 거라면 죽음이라는 것이 따뜻한 걸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다. 주인공이 지켜봐야 하는 누군가의 죽음, 결혼식 삼일 전에 사라졌다, 십 년 만에 죽어서 돌아온 연인이 남긴 일정에 따라 프랑스 호텔들을 여행하는 이별의 방식, 우연히 만나 가슴에 담아둔 소녀의 죽음을 듣고 히말라야로 향하는 남자의 여행, 모두 그리움과 추억으로 향하는 기차표와도 같았다. 글을 읽는 순간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인물들의 감정에 빠지게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부산, 서울,, 경주, LA, 뉴욕의 맨해튼과 브루클린, 프랑스 남부 지역, 그리고 멕시코.. 이 소실 집에 실린 여덟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장소를 통해 독자들을 마치 여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도 만든다. 죽음으로 비롯되는 상실감, 이별 후의 고독,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 머물고 떠나는 것과 기억하고 잊어버리는 것 사이의 그 어떤 순간. 이상하게도 낯선 곳에서 위안을 받을 때가 있다. 우리가 가끔 가까운 이들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걸 낯선 이들에게는 편하게 내뱉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사회생활을 접고 가족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내게 되니, 한 해가 넘어가려는 이 시기의 무게 감이 여느 때와는 상당히 다르다는 걸 느낀다.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 이상 '사회적인 이름'을 갖지 못하게 된 ''에 대한 자의식이 점점 사라지면서,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직 사회에 남아 있는 나의 동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어린 시절 내 친구들 중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그들은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으며,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꿈꾸고 있을까. 가정주부가 되어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단순화되자, 사람들 간의 관계를 유지하고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선 긋기를 하느라 진땀을 뺐던 젊은 시절의 내가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그런 마음은 편혜영 작가의 <선의 법칙>을 읽으면서 더욱 깊어졌다.

 

여러 해 전 나도 극중 윤세오처럼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지냈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그녀처럼 밖에만 나가면 나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거나, 사람들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망상에 시달린 건 아니었지만, 사람이 꼴도 보기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일종의 은둔생활을 보냈었다. 한때 마치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도 된 듯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모여들 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당시에 내가 하던 일 때문이었는데, 그 일로 인해 뭐라도 이득을 얻으려고 하거나,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았던 이들이 꽤 많았었다. 물론 나도 나 자신의 아우라가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을 통해서 파급되는 것들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 그렇게 달려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선의처럼 보이는 행동들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시작은 그렇게 사리사욕 때문이었을 지라도 나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누게 된 이들은 그래도 결국 인간적인 교류를 하게 되지 않을까 믿고 싶었던 것도 같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나의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을 무렵부터 서서히 그들은 마치 신기루처럼 내 주변에서 하나 둘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던 선들은 여기 저기 끊어지고, 구부러지고, 흐려져 결국 희미한 흔적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극중 김명국의 말처럼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존재 아닌가' , '사람이라면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선의를 가졌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양보할 줄 아는' 그런 존재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름의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동안 집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두문불출 한 뒤에야, 그리하여 조건 없는 인과 관계를 믿지 않게 된 뒤에야, 결국 타인의 선의를 일단 의심부터 하게 된 뒤에야 그 시기를 겨우 견뎌낼 수 있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여러 해 전의 나를 집밖에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의 상처를 주었던 당시의 그들 중 누군가는 나를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선으로 그냥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책을 읽는 행위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해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다. 나처럼 바보 같았고, 나처럼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믿었던 미련한 사람이 여기도 있네 싶어 마음이 짠해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통해 윤세오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아볼 테고, 누군가는 신기정의 동생을 보며 자신의 가족을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수호를 보며 지긋지긋한 자신의 직장을 돌아볼 것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죽음에서 시작해 죽음으로 끝이 나는데, 그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선들의 조합이 매우 흥미롭다. 인물들의 이름과 이름을 연결하고 선으로 이었을 때,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 나오기도 하고, 가까워 보이던 이들이 실상은 그다지 관계가 없는 걸로 밝혀지기도 한다. 사실 인간 관계란 대부분 그렇다. 그저 제각각 섬처럼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잠깐 서로 연결되었다가, 다시 흩어지기도 한다.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그 누구와도 완벽하게 연결되어 살아갈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삶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여러 날에 걸쳐 찾았던 노력이 무색할 만큼 그들 사이에 이어진 선은 희미하다. 결국 이들의 선긋기는 거의 완벽하게 실패한다. 생이란 이렇듯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아무렇지 않게 배반하고는 한다. 위로 아래로, 사방으로 서로 연결되어야 했던 다단계와 관련되어 있는 관계들을 제외하고, 이 작품 속에서 제대로 선을 그을 수 있는 인간 관계는 거의 없다.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도 사실 별반 다를 게 없다. 친구도, 연인도 모조리 팔아야 하는 다단계보다도 더 못한 것이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그렇게 현실이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하고 서글플 때, 우리는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민하게 된다. 바로 김성중 작가의 <국경시장>에서처럼 말이다.

 

 

누구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매 순간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고, 빛나서 시간이 지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삶이 퍼펙트 하기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되돌아보면 내 삶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뭘 해도 나쁜 결과만 봐야 했던, 이렇게 계속 좋지 않은 일만 생겨도 되는 걸까 싶었던,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을 주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던 그런 시간들. 당시에는 세상이 전부 끝장나기라도 한 것처럼 절망했었는데, 어느새 지나고 보니 나는 그 순간들을 마치 남의 일이었던 것 마냥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굳이 기억을 지워버리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는 잊어버리고 싶었던 시간들이었을 테니 말이다.

 

, 기억을 팔아서 무언가 가치 있는 걸로 바꿔주는 곳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자신의 기억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없애버리겠는가? 어차피 우리가 생의 모든 순간들을 전부다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니, 그래 몇 가지 기억쯤 없어도 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자신만이 가지고 있던 그 기억들이 점점 사라지고 나면, 남아있는 ''를 온전한 ''로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기억이 없다면, 타인과 구분되는 것이 허울뿐일 터인데, 그럼 빈 껍데기처럼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기억을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다니, 극중 인물들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기억을 판다. 보통은 첫 거래에서 출생부터 두세 살까지의 기억을 판다고 하는데, 어차피 생각나지도 않는 기억이니 없어도 별 상관 없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씩 자신의 기억을 팔아 바꾼 화폐로 시장의 갖가지 물건을 정신 없이 사들이다, 결국 기억을 모조리 팔아 버리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기억이 모두 사라진 다면, 과연 그것을 ''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내가 ''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여기 있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들이 환상동화 같은 미스터리하고도 섬뜩한 이야기인데, 너무도 있을 법한 스토리라 잔혹 동화 같지만 그럼에도 어딘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삶을 파멸로 이끄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작품의 배경이 현실 같으면서도 환상적인, 꿈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섬뜩하다는 데 있다. 어디선가 멜로디 인형의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은 분위기로 가다가 갑자기 잔혹동화의 결말처럼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김성중 작가의 이야기는 모두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번뜩 정신이 들어보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세계 말이다. 그런데 그곳은 묘하게 자꾸만 빠져들고 싶은 세계이기도 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야기의 매력이란. 그러니 나는 이 순간에도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내 인생에 동행하고 싶은 수많은 책들 중에, 올해는 이 네 권의 책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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