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약국
니나 게오르게 지음, 김인순 옮김 / 박하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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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른 손님에게 서점 주인이 말한다. 이 책은 손님에게 팔고 싶지 않다고. 뭐 이런 이상한 서점이 다 있을까. 또 이런 일을 당한 손님은 얼마나 황당할까. 내가 내 돈 주고 책을 사는데, 내 마음대로 책을 살 수 없다니 말이다. 게다가 이 책방 주인은 왜 손님과 언성을 높여가면서 피곤하게 살까.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책방은 바로 파리, 센 강 위에 떠 있는 독특한 수상 서점, 종이약국이다. 손님의 상처와 슬픔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책으로 처방하는 것이 바로 주인인 페르뒤 씨가 책을 파는 방식이다. 페르뒤 씨는 말한다. 자신은 의사들이 결코 진단하지 못하는 감정들과 고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감정들을 치유하고 싶다고. 그런데 어떻게 잠깐 한 사람을 보고 그의 고통을 짐작하거나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손님에게 팔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여자 손님의 손에서 살며시 <>을 빼냈다.......

그러자 그 여자 손님은 서점 주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요?"

"막스 조당은 손님에게 맞지 않아요."

"막스 조당이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요?"

". 손님에게 맞는 타입이 아니에요."

"내 타입이라고요? , 그렇군요. 지금 나는 이 서점에서 책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리고 싶군요. 남편감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고요."

"실례지만, 손님께서 어떤 남자와 결혼하느냐는 것보다 어떤 책을 읽으시냐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그는 귀와 눈과 직관을 이용했다. 상대방의 몸에서, 태도와 움직임, 작은 몸짓에서 어떤 감정이 그를 굴복시키고 압박하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책은 의사인 동시에 약이기도 해요.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하죠. 손님이 안고 있는 고통에 맞는 적절한 소설을 소개하는 것, 바로 내가 책을 파는 방식입니다." 라고 한다. 이 남자가, 이 여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공일까? 이들의 삶의 동기는 무엇일까? 이들은 자신 이야기의 조연일까? 자신의 스토리에서 남편, 직업, 아이들, 일이 텍스트를 야금야금 모조리 차지하는 바람에 자신을 몰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는 약 삼만 가지의 이야기가 들어있단다. 그것도 현재 유통되는 백만 권 이상의 책에 비하면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라며.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는 8000권이 이 서점에 있고, 그는 사람에 맞추어 치료법을 작성해서 책을 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르뒤 씨가 치유하지 못하는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과거에 갇혀서, 처참한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면서 말이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수십 년을 외면하던 그 순간과 마주하게 된 그는 드디어 과거와 마주서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종이약국을 출항시켜 과거를 향한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여행 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 또한 매우 흥미롭다. 우리들 대부분 그렇지 않나. 남의 일에 간섭하고 충고를 하는 건 잘하면서, 자기 자신의 일에는 그렇게 객관적일 수 없어서 방치해두곤 하니 말이다. 그래서 종이약국과 함께 하는 여정은 그저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위안'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나와 같은 누군가, 혹은 내가 과거에 겪었던 상처와 현재의 내 모습과 닮은 그것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소설의 목적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거나, 혹은 내가 되고 싶은 누군가를 찾거나, 혹은 위로 받고 치유되거나, 그저 책을 읽는 시간에 힐링이 되는 것 말이다.

페르뒤 씨는 그 얇은 책을 집어 들었다. 조당은 여기저기 연필로 밑줄을 긋고 그 옆에 질문들을 써 놓았다. 책은 바로 이런 식으로 읽히고 싶어 한다.

독서는 끝없는 여행이다. 기나긴, 그야말로 영원한 여행. 그 여행길에서 사람들은 더 온유해지고 더 많이 사랑하고 타인에게 더 친근해진다. 조당은 그 여행을 시작했다. 이제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세상과 사물과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걸 가슴속에 품게 될 것이다.

실제로 문학을 치료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긴 하다. 작년에 읽었던 <소설이 필요할 때>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듯이 문학치료사가 사람들에게 소설을 처방하는 것이다. 전화나 온라인을 통해서 전 세계의 다양한 의뢰인들에게 일대일로 소설을 처방했던 문학치료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알코올 중독일 때는 이런 책을, 사람에 정나미가 떨어질 때는 이런 책을, 기회를 잡는 데 실패했을 때는 이런 책을 읽으라는 식으로 기발하고 재미있는 처방도 있었고, 삶의 중요한 기로에서 힘이 되어주는 처방도 있었다. 그래서 책의 역할이 이렇게까지 다양할 수도 있구나, 새삼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다 보면 누구나 영원히 잊지 못할 순간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그 페이지의 한 문장, 하나의 단락, 그리고 숨겨진 여백을 통해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아주 잠깐이라도 주마등처럼 스치는 우리의 일생을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순간이다. 앞으로 펼쳐질 기나긴 우리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삶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세상이 나를 져버릴 때마다 나는 책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나에게 적개심을 가질 일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상처를 줄 일도 없는 거의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사소한 뭔가만 삐끗하더라도 어긋나고, 깨어지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은 마치 전투를 치르는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반복되는 일상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를 바 없이 그저 견뎌야 하는 하루가 되곤 한다. 하지만 나에게 책만 있다면, 나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도 특별한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종이약국>처럼 책의 힘을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면 그냥 막 힘이 난다. 책의 가치가 떨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누군가는 그 가치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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