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강도에 납치범으로 지명수배가 된 60대 중반의 할머니, 그녀는 지금 가슴에 총 구멍이 난 죽은 남자랑 약에 흠뻑 취한 여자를 태우고 어디론가 급하게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외모는 어느 동네에서나 만날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할머니이지만, 지금 경찰에게 여권을 압수당하고 쫓기는 신세에다, 어깨가 떡 벌어진 우락부락한 남자 두 명도 그녀를 찾아 다니고 있는 상황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미국은 월요일 아침이겠구나. 미국이었더라면 지금쯤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여긴 이스탄불이고, 벌써 월요일 오후 4시라니. 이런 생각을 하자 부인은 두 발이 붕 떠 있는 것만 같은 정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혼란스러워졌다. 이스탄불에 왔다는 것도, 어쩌다가, 무슨 목적으로 온 건지도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전편에서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었던 스파이가 되어, 첫 임무를 완벽하게 완수했던 폴리팩스 부인에게 두 번째 임무가 시작된다. 특정 날짜에, 특정 장소에서 물건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는 전혀 조건이 까다롭지 않았던 멕시코에서의 임무도 위험천만하게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벌였던 스파이로서의 소박한 활약으로 인해 임무가 끝난 뒤에도 자신의 조용한 인생이 한층 충만해졌다고 느끼고 있다. 마치 생각만 해도 절로 빙그레 웃음 짓게 되는 새로운 차원의 인생이 생긴 것만 같이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지금 당장 한 가지 임무를 맡아주실 수 있느냐고. 그것도 지금 당장, 30분 내로 결정을 내리고 출발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앞으로 며칠 동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일이라고는 가라테 수업과 다과회에 참석하는 게 전부였던 폴리팩스 부인이었으니 임무를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녀의 두 번째 임무는 바로 이스탄불에서 왕년에 유명했던 여자 스파이와 접선해야 하는 것이었다.
위험하지 않아 보일 정도로 간단한 임무였지만, 역시나 오지랖 넓은 폴리팩스 부인이었기에 그녀의 일정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는다. 경찰에게 여권은 뺏기고, 접선하기로 했던 상대는 누군가에게 납치되고, 함께 온 동료는 살해되고, 그러다 살인 혐의까지 뒤집어쓰고 지명수배가 되고 만다. 그녀는 문득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를 깨닫는다. 평생 경찰과 엮일 일이라고는 주차 딱지 떼이는 게 전부였는데, 지금은 지명수배를 당해서 우방 국가의 경찰에게 쫓기고 있고 전국적으로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낯선 나라 터키에 올 때 함께 온 동료는 죽어버렸고, 유일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조차 잃어버렸고, 결국 영국에서 온 사회부적응자 청년과 공동묘지에서 만난 불량배 공갈범과 함께 탈주를 하고 있는 게 그녀의 신세였으니. 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긴박하고, 답이 안 나오는 우울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유쾌 발랄하다. 공포에 굴하지 않고, 시련에 좌절하지도 않고, 자신을 방해하는 그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그녀 특유의 성격이 역시나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이 순간, 이름 붙일 수 없는 부드러운 깨달음이, 살아 있다는 기쁨이 밀려온 것은 지금이 예기치 못한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위험 끝에 찾아온 안전, 굶주림 끝에 찾아온 따뜻한 음식, 기진 맥진한 끝에 찾아온 휴식 때문이었다. 새로 사귄 낯설고 멋진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꽁꽁 둘러치고 살아가는 안전이라는 것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건 삶을 가로막는 벽이고, 기만이고,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폴리팩스 부인은 이제야 산다는 것이 얼마나 풍성한 일인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속에서 뭔가가 울컥 북받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들 일행이 말도 안 되는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위조 신분증을 만들고 있을 때, 폴 팩스 부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산기슭까지 이어지는 구불한 길과 그 위에 늘어선 오두막들을 바라보며, 태양이 막 먼 산을 넘어가며 노을이 지고 있는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무에진의 기도소리가 맑고 청명한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데, 그녀는 순간 벅차 오르는 감정을 느낀다.
이 순간을 꼭 기억해둬야지. 나중에, 꼭 돌아와서 이 나라의 진정한 모습을 봐야지.
나는 바로 그 순간에 폴리팩스 부인과 사랑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순진해서 어수룩해 보이다가도,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어른이 젊은 사람 앞에서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로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지'라고 세월만큼의 현명함과 노련함을 보이던 그녀의 진정한 감성과 맞닥뜨린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순간에서도 명랑 발랄하고, 무한 긍정의 마음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어제까지 내 곁에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시체가 되어 버리고,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고,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타국에서 어떤 행동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는 말이다. 좋을 때 잘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나쁜 상황에서도 여유와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폴리 팩스 부인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생각한다. 갑자기 마음속에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에 있는 햇볕 좋은 자신의 집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 내가 겪는 일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결혼하고 애를 키우면서 조용히 살다가, 무려 60대 중반의 나이에 별안간 이렇게 위험천만한 직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 꼭 바람이 불어서 책장이 갑자기 휙 넘어간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실수도, 우연도, 사고도 아니었고, 오로지 그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선택의 결과였다.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마치 운명의 장난이라도 되는 것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간절히 바랬던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더라도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할 때가 있다. '어떤 거대한 힘이 인생의 모든 출발과 도착을 끌어당기고, 조정하고, 배열하고, 짜 맞춰서는, 결국엔 엄청난 일을 성사시키고 마는' 그런 마법과도 같은 일이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또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폴리팩스 부인이 과연 이번에도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게 될런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직접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당신이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아직 한번도 읽지 않았다면, 이번에야 말로 이 책을 집어들 시간이니 말이다. 이 책을 처음 읽게 될 당신을 내가 진심으로 부러워한다는 것만 알아두시길. 당신도 이 책을 통해서 폴리팩스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