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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때까지 기다려
오한기 외 지음 / 비채 / 2024년 9월
평점 :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음식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가리비 무스나 샴페인 젤리 같은 거요."
정민은 잠시 생각했다. 그는 가리비를 먹어본 적이 없었고, 샴페인을 마셔본 적은 있지만 그걸로 젤리를 만든다는 건 몰랐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샴페인 젤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미나리를 씹고 있던 입 안쪽이 아려오면서 군침이 돌았다.
"그럴 수 있을지도요." 정민이 말했다. - 한유주, '세계의 절반' 중에서, p.53
어느 날 갑자기 젤리 봉지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있잖아, 있잖아...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그렇게 심심풀이로 먹고 있던 곰돌이 모양 젤리들 중에서 어떤 젤리와 눈이 마주친다면 말이다. 아마도 화들짝 놀라서 젤리 봉지를 바닥에 쏟아버리지 않을까. 박소희 작가의 <모든 당신의 젤리>에는 말하는 젤리가 등장한다. 말하는 젤리에 따르면, 젤리는 원래 사람이었다. 췌장암 말기로 46세에 사망한 여성이었다. 죽기 전에 젤리가 되길 선택했기에, 죽기 직전 의식을 복사해서 젤리 사백 개에 똑같이 옮겨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젤리들은 각자의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인간의 경험과 내면을 사물로 옮기고, 그 사물이 움직이기까지 한다는 설정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그렇게 젤라틴으로 된 젤리는 자신의 소원을 하나만 들어달라고 하는데, 과연 젤리의 소원은 뭘까.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 살고 있는 나는 십 년 만에 서울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찾아온다. 자신이 이십 년을 넘게 산 오래된 집이지만, 근처에 와서는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어 미적대는 중이다. 나는 오랜만에 집에 오면서 행운의 상징이라는 슈톨렌을 사가지고 왔다. 집의 구조는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지고, 가족들과의 불편한 관계도 변하지 않았다. 나의 방은 에어비앤비로 쓰이고 있었는데, 현재는 손님이 없었음에도 어쩐지 남의 방 앞에 선 기분이 든다. 그들은 독일의 크리스마스 빵인 슈톨렌을 함께 나눠 먹으며 오랜만에 대화를 나눈다. 그 시간은 이들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줄까? 이지 작가의 <라이프 피버>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빵인 '슈톨렌'이 등장해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말린 과일과 설탕에 절인 과일껍질, 아몬드, 향신료를 넣고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른 후 슈거파우더를 뿌려 만든 독일식 과일 케이크인 슈톨렌은 럼향 가득 품은 달콤하고 쫄깃한 건과일의 맛과 꾸덕하고 깊은 풍미가 정말 근사하다.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서 만드는 빵이라서 더욱 특별한데, 그렇기 때문에 슈톨렌이 이들 가족에게도 어떤 역할을 하게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녹을 때까지 기다리자."
선영은 다시 혀를 내밀고 반짝거리는 사탕을 내밀었다.
"너도 해봐."
갑작스러운 선영의 권유에 나는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소스라치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침이 말라갔다. 잠시 후 내 혀의 온도에 서서히 사탕이 녹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단맛과 함께 쌉싸름한 맛이 퍼졌다. 추운 겨울 공기 속에서 더욱더 박하사탕의 화한 맛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다.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감탄했다. 새삼 이상하고 낯선 감각이었다. 모든 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 장 희원, '박하사탕' 중에서, p.170~171
다섯 명의 작가가 다섯 가지 ‘디저트’를 테마로 완성한 단편소설 앤솔러지이다. 오한기, 한유주, 박소희, 장희원, 이지 작가가 각각 초콜릿, 이스파한, 젤리, 사탕, 슈톨렌을 소재로 쓴 신작을 수록했다. 일부터 맛있는 디저트 가게를 찾아가서 먹어볼 정도로 디저트를 즐기고, 좋아하기 때문에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어 보았다. 사실 디저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결코 필요불가결한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즐겁고 아름다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산다는 건 매우 고단한 일이고, 달콤하고 예쁜 디저트는 하루를 버텨낼 수 있도록 도와주곤 하니 말이다.
오한기 작가는 <민트초코 브라우니>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부방을 운영하며 건전하고 무해한, 정상적인 소설을 쓰기 위해 애쓰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한유주 작가의 <세계의 절반>에는 다른 사람들의 전생을 보게 된 치과의사가 등장하고, 박소희 작가의 <모든 당신의 젤리>에는 죽어서 젤리로 다시 태어난, 말하는 젤리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를 부탁한다.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만큼이나 형형색색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었다. 디저트는 배를 채우기보다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이다. 책을 읽는 행위 역시 그렇지 않을까.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고, 우리를 지난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주니 말이다. 자, 맛있는 디저트와 함께 책을 읽을 시간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