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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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 <쌍옥적>을 읽으면서, 정탐소설이라는 명칭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탐정소설이나 미스터리의 장르를 100여 년 전에는 정탐소설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의 사람들도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읽었던 건지가 참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정명섭 작가의 신작을 설명하는 데 '경성 정탐소설'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연히 이 작품 속에는 당시에 이런 류의 소설을 사람들이 즐겨 읽었는지, 어떻게 읽었는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묻어나 있어서 실제 내가 경성으로 들어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류경호는 사건에 휘말린 이후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독립 운동가도 아니고 친일파는 더더욱 아니었던 그는 정탐소설을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죽은 이인도 기수는 모험가를 꿈꾼 몽상가였고 말이다. 그런 두 사람 중 한 명은 토막이 나서 비참하게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살인자로 몰렸다. 단지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으며 류경호가 박길룡에게 물었다.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설계와 시공을 맡았던 조선인 총독부 건축과의 조선인 기수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것도 살해당한 후 토막 나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대자 형태로 여기저기 흩뿌려진 채로 말이다. 얼마 남지 않은 조선총독부 낙성식을 앞두고 일본 경찰은 조사는커녕 조용히 덮으려고 하고, 이 일로 조선총독부 내의 조선인들이 위기에 처하자 육당 최남선의 부탁으로 류경호가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다. 류경호는 흥미위주의 사건과 가십들을 주로 다루는 잡지사 별세계의 기자였다. 그는 집안에서 서자였던 터라 유학까지 다녀와서도 가족과의 문제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던 차에 정탐소설에 빠져 소설의 주인공처럼 추리하는 버릇이 생겼고, 똑똑하고 관찰력이 좋았던 터라 실제로 주변의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해주었던 이력도 있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이나 다름없는 총독부 안에서 벌어진 토막살인사건은 거대한 미로 같았다. 총독부의 거대하고 압도적인 이미지에 류경호는 난감했지만, 이 살인 사건을 제대로 밝히지 않을 경우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모두 쫓겨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사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사건 해결은 녹록지 않았고, 총독부 안의 조선인들은 단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삶을 송두리째 파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극중 류경호가 셜록 홈즈의 팬이기 때문에, 작품 곳곳에 그것을 이용한 추리도 등장해 이야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물론 추리 소설 자체로서의 매력보다 경성을 배경으로 한 시대 소설로서의 장점이 더 두드러진 작품이긴 했지만 말이다

"사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사람의 경력과 인생이 걸린 문제일세. 그 사람은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고 독립운동가는 더더욱 아닐세. 지금 이 땅에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만 살고 있겠는가? 대다수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일세. 최소한 그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해야지."

그 동안 만나왔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대부분의 작품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항일 투쟁'이라는 소재였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과 무장독립운동 단체 의열단의 리더 간의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이 펼쳐졌던 영화 <밀정>, 그리고 일제강점기였던 1933년을 배경으로 한국 독립군 저격수와 폭탄 전문가 등이 모여 친일파 암살작전을 벌였던 영화 <암살>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이들과 조금 다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에 의해 다들 잊고 있던 사실, 일제 강점기에도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거다.

이 땅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만 있는 줄 아십니까? 99퍼센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대체 무슨 명목으로 그들의 삶을 파괴하려는 겁니까?

사실 일제강점기라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들만 존재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위해 지냈고, 하루하루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우연찮게 접한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 우리가 몰랐던 그 시대의 사람들 이야기를 접하고, 자신이 알던 역사 속에는 그들이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겨놓지 않았던 삶이라도,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대한제국을 암시하는 토막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잡지사 기자와 조선인 건축사들을 비롯한 보통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일제 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실존 인물과 가상의 인물이 함께 등장하고, 실존 취미잡지 <별건곤>에서 영감을 받아 극중 통속잡지 '별세계'가 만들어져 기자 류경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추리소설 이전의 명칭인 '정탐소설'로 불리길 바란다는 작가의 말처럼, 격동의 시대 경성이 매우 리얼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떠난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언론인 최남선과 도쿠토미 소호,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박길룡 기수 등 실존 인물들의 생생함과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중간중간 등장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지게 만들고 있어 더 흥미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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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토리노를 달리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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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국내 첫 에세이가 동계 올림픽 관전기라는 게 사실 놀랍지는 않다. <마구> <백은의 잭>, <질풍론도> 등 스포츠를 소재로 한 추리 소설들을 그 동안 발표해왔었고, 스노보드 마니아답게 스키점프 등 동계 스포츠를 워낙 사랑하는 걸로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 관전기를 정말 유쾌 발랄하게 풀어낸 작품이 바로 이 책이다.

"전에 얘기했지만 이 녀석은 원래 고양이야. 그래서 여권 같은 거 없는데 괜찮을까?"

아저씨는 무책임한 말을 했지만 구로코 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에게 여권이 필요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소설이니까 괜찮겠죠."

"그렇겠지."

". 아무 문제없습니다. , 가시죠."

간단히 말이 정리돼버렸다. 뭐 이렇게 대충인 사람들이 있을까. 평소에도 늘 이런 식으로 "소설이니까 괜찮을 겁니다" 라고 말하는 게 틀림없다.

이 책이 정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거다. 바로 그의 애묘인 유메키치가 이 책의 화자라는 것. 어느 날 갑자기 고양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다. 나이는 스무 살쯤 되었을까. 거울로 보기에는 상당한 미남이라고, 유메키치가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이 된 유메키치에게 아저씨(히가시노 게이고)가 피겨스케이트 경기를 보며 말한다.

"! 올림픽에 나가라. 금메달을 따서 나한테 은혜 갚으라고."

 하계 올림픽에 비하면 동계 올림픽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지 않은 스포츠이다. 나만 해도 봅슬레이는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 도전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되었고, 스키 점프는 영화 국가대표를 통해서야 멋진 스포츠라는 걸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 동계 올림픽의 스포츠 종목들에 대해 팬심을 자랑하며 열변을 토하는 귀여운 아저씨 히가시노 게이고와 얼렁 뚱땅 자신에게 올림픽 출전을 시키려는 주인이 어이없는 애묘 유메키치의 모습은 이우일의 일러스트와 너무도 잘 어우러져 읽는 내내 킥킥 거리며 배꼽잡고 웃게 만들어 주었다. 올림픽 마법으로 고양이가 사람이 되어 함께 올림픽 관람을 한다는 유쾌 발랄한 상상이 어처구니 없다기 보다 낯선 스포츠들을 친근하고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고 할까. 암튼 이 책은 역대 가장 웃긴 올림픽 생중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그가 자국의 동계 스포츠 선수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각 경기 별로 막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내년 우리의 평창 올림픽도 국내 소설가들이 평창 올림픽 관람기 같은 걸로 써주면 참 좋겠다 싶은 마음도 들고 말이다.

달력을 보고 겨울이 왔다는 것을 알아도, 일본 어딘가에서 눈이 내리고 때로 재해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저씨에게 그걸 깨닫게 하는 게 스노보드이다. 스노보드에 빠지면서 아저씨는 설국을 알았다. 아저씨는 일기예보를 체크하며 훗카이도와 니가타의 기후를 예상하는 게 취미인데, 최근 들어 눈보라와 대설, 눈사태 피해를 걱정하게 되었다.

겨울과 싸우며 살아간다.........그 상징이 동계 스포츠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야생을 되찾는 일 아닐까. 겨울의 마법은 그것을 내게 알려주었는지 모른다.

다들 알다시피 2018년 동계 올림픽이 내년 2월에 강원도 평창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나가노 동계 올림픽 이후 20년 만에 3번째 개최이고, 대한민국에서는 최초로 개최되는 동계 올림픽이며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 이후 30년 만에 대한민국의 두 번째 올림픽이다. 이걸 계기로 국내에서도 동계 올림픽 종목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까 기대하는데,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책은 그 가이드로 제 역할을 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동계 스포츠 자체에 대해 관심이 생겨야, 선수에게도 호기심이 생기고, 관람을 할 때 포인트도 생길 테니 말이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일본 내에서 위상이 낮은 편인 동계 올림픽의 부흥을 노려 이런 에세이를 쓰게 된 걸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하고 있을 땐 너무 힘들지만 골인했을 때의 그 커다란 성취감 때문에 계속 하게 된다는 동계 스포츠만의 매력은 엉뚱한 고양이 청년과 투덜대는 소설가에 의해 무심한듯 시크하게 보여지고 있다.

"아저씨, 진심으로 나한테 스키점프를 시킬 셈이야?"

"무슨 소리야. 당연히 진심이지. , 우물쭈물하지 말라고."

금메달을 따서 주인에게 은혜를 갚으라는 소설가와 언제까지 나를 고양이 취급할 거냐며, 아저씨한테 갚을 은혜 같은 건 없다는 고양이 청년의 우격다짐은 정말 만화처럼 유쾌하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동계 스포츠의 배경과 각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동계 올림픽 경기 분석까지 틈틈이 이어지며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중간중간 툭툭 던져진 이우일의 재치 넘치는 일러스트 또한 너무 재미있어서 스포츠에 관심이 없던 이들마저 몰입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고 말이다. 작년에 만났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200년 시드니 올림픽 관전기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할까. 히가시노 게이고가 동계 올림픽,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계 올림픽을 관전해서라기 보다, 각 작가 특유의 문체와 분위기가 자아내는 재미가 너무도 달라 비교해서 읽는 맛도 있을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이우일의 일러스트가 함께 하는데, 그가 그려낸 히가시노 게이고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너무도 작가들의 특징을 잘 잡아내고 있어 놀랍다. 스포츠나 올림픽 따윈 관심 없다고? <시드니> <꿈은 토리노를 달리고>를 읽어보자. 아마도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올림픽 스포츠에 빠져 들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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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그리고 축복 - 장영희 영미시 산책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비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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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제일 먼저 학교 교정을 떠올릴 것 같다. 학창 시절에 공부로 배워야 했던 시는 직유와 은유, 대구를 통해 분석하고, 이미지를 규정화시켜 머릿 속에 넣어야 했던 글들이었다. 그러니 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즐기고, 그대로 받아들였던 적은 글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좀더 일찍 만났더라면, 시를 이렇게 멀게, 어렵게 느끼며 살아오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뭐 그래도 합본 개정판이 출간된 지금에서라도, 이 책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에 관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관한 시는 발에 차고 넘칠 정도로 여기 저기서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연애 중일 때는 사랑에 관한 시만 눈에 들어오고, 이별한 후에는 슬픔과 그리움에 관한 시만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는 어려운 장르인 것 같으면서도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학의 장르이기도 하다.

 

T.S. 엘리엇의 시를 읽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돌아본다. 남의 인생은 크고 멋있고 위대해 보이지만, 내 삶은 작고 일상적이고 시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지를 뒤흔들 새로운 시작을 꿈꾸지만, 늘 여지없이 무너지곤 하는 것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일 테고 말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커피 스푼으로 뜨든 삽으로 뜨든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 한 잔 커피에도 삶의 향기는 있지 않을까요.' 라고. 나의 저녁과 아침과 오후의 일상이 별거 아닌 게 아니라고 말이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닙니다 (내 마음속에

지니고 다닙니다) 한 번도 내려놓을 때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당신고 가고

나 혼자 하는 일도 당신이 하는 겁니다. 그대여)

나는 운명이 두렵지 않습니다 (임이여, 당신이

내 운명이기에) 나는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진실된 이여, 아름다운 당신이 내 세계이기에)

이제껏 달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게 바로 당신이요

해가 늘 부르게 될 노래가 바로 당신입니다.

e. e. 커밍스는 시에 대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은 물론, 영어에서 대문자로만 통용되는 'I'도 소문자 'i'로 사용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시의 내용에서도 나보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랑의 원칙에 대해 고스란히 보여지고 있다.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가치와는 좀 많이 차이가 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말하니 내가 꼭 엄청 나이든 사람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하핫.. 어쨌건 그녀는 이 시에 대한 해설을 이렇게 마무리하고 있다. <사랑하므로 그 사람이 꼭 필요해서 '나와 당신'이 아니라 '나의 당신'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라고. 오랜 기간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기고, 그렇게 그 사람과 가족을 이루고 살다 보니.. 이제는 나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랑의 가치라서 어쩐지 가슴이 뭉클해진다.

주 오랜 기간 동안 스테디셀러였던 <생일> <축복>이 출간 11주년을 맞아 합본 개정판 <생일 그리고 축복>으로 재 탄생한 책이다. 장영희 교수. 그녀가 고르고 옮긴 영미시와 번역, 그에 대한 해설, 김점선 화백의 그린 화사하고도 멋들어진 그림이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는 문구가 무색할 만큼, 내용도 예쁘고, 그림들도 뭉클하게 아름답다. 장영희 교수는 49세에 유방암, 52세에 척추암이 연거푸 찾아왔을 때도 끝내 맞서 싸우고 이겨냈지만, 결국 56세에 간암을 선고 받고 1년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타계한 날은 화가 김점선 화백의 사십구재 날이기도 했다. 당시 투병 중이던 장영희 교수가 일 년 동안 연재한장영희의 영미시 산책을 부제로 사랑을 주제로 한 49편을 묶어생일’, 희망을 주제로 한 50편을 묶어축복이라 했다. 그리고 두 권이 통합되면서 판형과 함께 그림과 글씨도 대체적으로 더 작아지면서, 아름다운 삽화의 농도와 질감까지 살아나고, 더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많은 시들과 그에 대한 해설과 그 생각들을 이미지로 형상화 시켜 보여주는 그림들을 만나다 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생각해왔던 이렇게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되었다. 물론 나이를 먹어 연륜이 생긴다고 해서, 지혜롭고, 모든 일에 답을 갖고 있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것을 '되돌릴 수 없는 청춘에 집착하지 않고 지금의 내 계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 순간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살면서 말이다. 이 아름다운 책은 내가 매년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무게를 느끼게 될 때마다, 한번씩 다시 꺼내어 읽어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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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17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 《축복》 이 개정 합본으로 나왔군요. 저도 이 분의 글을 좋아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교수님의 글을 처음 접해서 좋아하게 됐습니다.

피오나 2017-03-18 11:24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도 만나보셨군요 ㅎㅎ 합본으로 출간된 개정판은 소장하기에도,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좋게 더 예쁘게 나왔더라고요. ^^
 
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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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중첩시키는 일을 하는 소설가를 만났다. 소설을 쓰는 일이 시간을 중첩시키는 일이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싶었다. 시간이 겹치거나 포개어진다는 건, 여러 개의 시공간이 뒤섞인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현재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무릇 소설은 긴 호흡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소설가들이 바라는 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면서, 모두들 긴 호흡이 어쩌고저쩌고하며 떠든다. 나에게는 갓난아이와 중간 아이가 있다. 두 아이들 때문에 숨 쉴 틈조차 없다. 내 글은 모두 짧은 호흡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숨이 가쁘다.

여자는 갓난아이와 중간아이, 그리고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두 아이들이 잠이 든 깊은 밤에 글을 쓰고 있다. 예전에는 밤낮 가리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밖에 시간을 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다가도 여유만 생기면 언제나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이유였으니 말이다. 남편은 주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지만, 티비 광고 문안이나 시를 쓰기도 한다. 그녀가 현재 쓰고 있는 글은 자신이 과거 뉴욕의 어느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쓰인 소설이다. 번역가 겸 도서 검토 위원으로 일하던 그 시절, 시간 속의 관계와 상황들을 그리고 있으나, 물론 그것이 모두 자전적인 것에서 기인하는지, 어느 정도의 허구가 섞여 있는지, 혹은 모두 상상 속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우리는 그녀의 글을 수시로 훔쳐 읽고 과거사를 의심하는 남편처럼, 아마도 그것이 실제로 그녀의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일 거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야기는 그렇게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소설 쓰기에 매달리는 여자의 현재와, 그녀가 쓰고 있는 소설이 극중극 형태로 교차 진행된다. 소설 속 그녀가 출판사에서 하던 일은 당시 미국 문단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한 주옥 같은 외국 작품을 발굴해 내는 것이었다. 문학이 설 자리를 읽어버린 비참한 위상이 단적으로 그려지는 그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한 작가를 발견하게 된다. 파멸과 붕괴에 맞서기 위해 글을 썼던 힐베르토 오웬이라는 작가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멕시코의 무명 시인 힐베르토 오웬의 그것으로 펼쳐진다. 그녀가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다니면서 그의 글을 읽고, 중요한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 나뭇가지에 붙이면서 여러 계열의 시간과 공간이 그만큼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에밀리 디킨슨,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에즈라 파운드... 그렇게 예술가 유령들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삶 속에서 그들은 무중력의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널찍한 집에서 우리 식구들은 가끔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그런데 보통 숨바꼭질과는 놀이 방식이 좀 다르다. 일단 내가 숨으면, 다른 식구들이 찾아야 하는 식이다. 숨바꼭질 놀이는 때로는 몇 시간씩 걸리기도 한다. 나는 벽장 안에 숨어 다른 삶, 그러니까 나의 것이되 동시에 나의 것이 아닌 어떤 삶에 관해 장문의 글을 쓴다. 내가 숨어 있다는 걸 기억해낸 사람이 나를 찾아내고, 중간 아이가 '찾았다!'라고 소리칠 때까지 놀이는 계속된다

한편 멕시코 영사관에서 서기로 일하는 오웬은 병마와 고독, 좌절과 가난에 시달리며 생의 남은 나날을 버텨내고 있다. 이야기가 오웬의 목소리로 전개되면서 시간은 192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여자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오웬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오웬은 지하철에서 빨간색 외투에 다크 서클이 짙은 미지의 여성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지하철을 새로운 시간이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설정한 것 또한 굉장히 매혹적이다. 현실과 과거의 시간이 겹쳐지고, 실재와 허구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내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그려내고 있었다. 현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작품 속의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더니, 그 속의 인물을 다시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유령들이 실재하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만들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거장 하면 보르헤스, 움베르토 에코, 카프카, 베케트, 제임스 조이스, 마르케스 등이 먼저 떠오른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환상의 요소를 가미한 작품도 있고, 언어와 구성에 실험성을 도입한 작품도 있고,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해서 현실에 꿈과 마술적 요소를 혼합한 작품들도 있지만, 사실 내게는 좀 만만치 않은 작가들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멕시코의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의 첫 번째 소설인 이 작품은, 기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서사에서 많이 벗어나 있고, 쓰인 방식 역시나 어렵지 않게 쉽게 다가와 신선했다. 그러면서도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해 매우 평범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매혹적이기도 했고 말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신선한 목소리'라는 홍보 문구가 무색하지 않을 만큼, 내게도 굉장히 신선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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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나 오래 기다렸던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나왔다.

 

 

 

국내 최초 출간이라는 타이틀이 있지만, 사실 오래 전에 시리즈의 네번째 작품인 <웃는 경관>이 국내에 출간된 적이 있다.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무려 14년만이다.

 

어쨌건 엘릭시르에서 다시 출발하는 시리즈라 전체 10권을 모두 다 만나볼 수 있을 것 같아, 매우 기대가 된다. 벌써 번역은 5권까지 다 끝났다는 소문도 있고 말이다. ㅋㅋ

 

 

3대 북유럽 경찰 소설을 보통 헨닝 망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들란두르> 시리즈, 그리고 마이 셰발, 페르 발뢰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꼽는다. 특히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요 네스뵈와 스티그 라르손 등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요 네스뵈는 이 시리즈를 일컬어 "범죄소설의 모범"이라고 했다.

 

 

국내에 출간된 헨닝 캉켈의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이다. 빠른 전개와 극적인 구성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북유럽 특유의 감성과 분위기가 매우 문학적인 시리즈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 출간된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에들란두르> 시리즈이다. 물론 지금은 모두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뭐 이미 읽어본 이들도 꽤 많을 거라고 짐작한다. 지금은 아이슬란드 작가들의 추리 소설이 몇몇 출간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매우 신선한 분위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자, 다시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돌아오면.. 국내 첫 정식 출간 기념으로 스페셜 패키지로 구매할 수 있다. 물론 특별 한정판이니 소진되면 종료된다.

 

 

책을 구매하면 이렇게 특별 제작 봉투에 담겨져 있다. 각각의 패키지 구성 엽서, 메모지와 함께 말이다. 내 돈 주고 내가 사면서 꼭 선물 받는 기분이라 포장을 뜯기 전부터 설레었다. ㅎㅎ

 

 

<로재나> 패키지 구성이다.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남기는 멘트가 쓰인 엽서 뒷면에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스톡홀름 지도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마르틴 베크의 범죄 수사 메모지.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 패키지 구성이다. 역시나 엽서와 메모지가 함께 들어 있는데, 메모지의 프린트가 두 책이 달라서 소장용으로 더 가치가 있다.

 

워낙 유명한 시리즈이기에 그렇지만, 시리즈의 첫 번째, 두 번째 작품 모두 서문부터 화려하다. <로재나>의 서문은 헨닝 망켈이 썼고,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의 서문은 밸 맥더미드가 썼다.

 

 

책의 옆면을 보면 제목 옆에 마르틴 베크(Martin Beck)의 M과 A가 보인다. 시리즈 10권을 모두 다 모아서 한꺼번에 세워두면 Martin Beck가 될 것이다. 원서의 책등은 이렇다. ㅎㅎ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한 출판사에서 내는 다른 잡지에서 각자 일하다가 만나게 되었고, 예전부터 품고 있었던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다 함께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스웨덴 사회가 십 년에 걸쳐서 변해가는 모습을 기록하고자 했던 그들은,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10권의 이야기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열 권의 시리즈는 사실상 삼백 개의 장으로 이뤄진 하나의 긴 소설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렇게 일 년에 한 권씩 완성하여 십 년 만에 시리즈가 마무리 되었다.

 

이 책을 열일곱 살에 처음 읽었다는 헨닝 망켈은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로재나는 어느 면으로 보나 어마어마하게 매력적인 책이다. 이 자리에서 자세한 플롯이나 범죄의 해결에 관해 누설할 마음은 없지만, 한 가지만 짚어두겠다. 아마도 <로재나>는 범죄소설에서 시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이야기로는 최초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기가 자주 길게 이어진다. 로재나라는 여성을 살해하여 예타운하에 던진 범인에 대한 수사가 답답하게 답보하는 시기다. 그러다가 불과 몇 센티미터쯤 진척이 있는가 싶더니, 또 덜컥 멈춰 선다. 마르틴 베크와 동료들에게는 하염없이 흐르는 시간이 절망의 근원인 동시에 필요악이다. 참을성이 없는 수사관이란 중요한 도구 하나가 부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로재나>는 경찰의 근본적인 덕목, 즉 참을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이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소설이다. 생생하고, 간결한 세련미가 있으며, 교묘한 연출에 따라 플롯이 전개된다. 이것은 현대의 고전이다."

그리고 밸 맥더미드는 이 시리즈를 1979년 미국에서 미스터리 소설 전문 책방에서 처음 만났다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책을 손에 넣는 방법은 내가 직접 가서 사 오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했다. 어마어마한 양을. 배낭에 담아 온 책들 중에는 빈티지 프레스 특유의 까만 표지를 입은 문고본 열 권이 있었다. 스웨덴의 부부 소설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함께 집필한 열 권의 범죄소설이었다." 그는 즐리언 시먼스의 <블러디 머더>를 일고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이 사십 년 전에 처음 등장했을 때의 가치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경찰 수사물이라는 하위 장르에서 클리셰가 되다시피 한 갖가지 핵심적인 장치들이 바로 이 열 권의 소설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세적인 한숨을 지으며 당연하게 여기고 마는 수많은 특징들이 바로 이들, 기자였다가 범죄소설가로 전업한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의 작품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 추리, 스릴러, 범죄, 경찰 소설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면 당장 이 책을 만나보길 바란다. 이 시리즈를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로 헨닝 망켈과 밸 맥더미드의 서문만큼 멋진 대답이 또 있을까 싶지 않은가. 이 시리즈 전체를 다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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