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를 관계의 우주라고 부른다. 우주는서로가 있음으로 성립한다. 서로라는 말은 당신과 내가 고유하고 독립적인 하나의 행성이라는 의미다. 동등과 존중의 거리를 품고 있는 존재들이 서로 사이를 가질 때 그것을 우주라고 한다. 사이와 서로는우리라는 말처럼, 인류가 발명해낸 아름답고 황홀한 천체물리학 개념어다.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과 에세이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이유는 대부분 위로나 공감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마도 삭막한 인간 관계, 팍팍한 일상의 고단함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이 딱히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같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당신 때문에 내가, 나 때문에 당신이, 우리는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말이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은 구성원들과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장점이지만, 바로 그것이 누군가는 지옥을 경험하고, 삶의 벼랑 끝으로 몰게 하는 무서운 지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사람 사이에 필요한 최적의 거리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내 생각과 당신의 이해 사이에서, 불필요한 오해 없이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일까.

림태주 시인은 말한다. 살아보니 삶의 전부가 관계였다고. 어쩌면 지구는, 관계의 힘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관계의 비밀스러운 원리와 은유법을 알고 싶어 별과 사막과 날씨와 천체물리학을 참고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나와 당신의 사이를 관계의 우주, 관계의 물리학에 빗대어 풀어내는 은유는 표현 자체도 참신했지만, 무엇보다 저자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공감하고 위로 받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수많은 책들을 읽어 왔지만, 이 책에서 표현하는 색다른 접근 방식은 굉장히 신선했고,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새로운 시각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는 자주 잊는다. 나에게 나의 입장이 있듯이 당신에게는 당신의 입장이 있다는 사실을. 삶은 관계의 총합이고, 관계는 입장들의 교집합이다. 상대방이 없는 관계란 성립 불가능하고, 모든 상대방은 각자의 입장으로 존립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성이라면, 저 별빛 하나하나가 다 입장들이다. 별빛이 반짝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어둠 속에 별이 있는 줄 알아보겠는가.

'당신과 나의 만남이 우연처럼 쉽고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난하고 지극한 운동의 결과'라는 말은 굉장히 로맨틱하게 들리기도 한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부단히 애쓴 필연과 두려움을 이겨낸 행운의 결과였다'고 생각한다면, 사실 관계가 조금 삐걱거리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더라도 가뿐하게 이겨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게나 어렵게 이어진 관계였는데, 내가 지금 이 사소한 걸로 흔들리면 안 되겠다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지구별에는 수많은 관계가 있고, 그 관계의 힘으로 지구는 자전하고, 태양의 둘레를 공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계의 우주에서 알게 된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관계는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한다고. 어떤 물리적 관계는 우아하게 도약해서 관계의 화학으로 나아간다고.

여타의 심리학서나 에세이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바로 저자가 시인이라는 점에서 오는 특별한 감성이 아닐까 싶다. 절절한 감정을 자아내려는 문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뭉클해지거나, 담백하게 관계에 대한 철학을 풀어내는 글에서도 설레임이 느껴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쉽게 술술 읽히지만, 자꾸 페이지를 들춰서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에 생겨난 모든 사이들을 우주에 비유하고, 사람을 얻고 또 잃는 말과 태도의 얄궂음을 이야기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사유하고, 스스로에 대한 오해와 마주하며 외로움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이 책은 그 동안 만나왔던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다룬 책들 중에서도 단연코 최고가 아니었나 싶다. 사실 이런 류의 책들이야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지만 놓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기에 대부분 한 번 읽으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 책은 곁에 두고 자꾸 펼쳐서 읽고 싶은 책이다. 문장도 좋고, 은유도 색다르고, 사유도 깊이가 있어 에세이지만 마치 시처럼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맺고 끊고 적당한 거리를 주는, 사이의 균형에 서툰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다이아나의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국민 8,000만 명이 8N8 사냥감의 적이다. 어린이, 노인, 환자, 교도소 수감자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명이 대대손손 편하게 먹고 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8N8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이 이런 황당한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렇겠지.

시청자 절반이 팩션 드라마를 다큐멘터리로 여기는 나라라면 안 될 것도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이라고.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당신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그리고 만약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실행해 옮길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바로 거기서 출발한다.

한 때 잘나가는 밴드에서 드러머로 활동하며 자작곡을 연주했었던 벤은 현재 커버 밴드에도 못 끼는 곳에서 해고 당한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해고였고, 술이나 마시려고 가려던 차에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린다. 남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해가며 구해줬더니 소녀는 아저씨 때문에 다 망쳤다며 돈이 날아갔다고 소리친다. 그리고 찾아간 딸의 병원에서 전부인인 제니퍼는 딸이 자살을 시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실 벤의 딸 율레는 4년 전 자신이 운전하던 차로 교통 사고가 나 두 다리를 잃었고, 일주일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현재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미심쩍은 상황들 때문에 딸이 살인미수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굳어 지려는데, 갑자기 건너편 호텔 옥상의 대형 스크린에 벤의 사진이 뜬다. 아까 자신이 구해줬던 여자의 이마에서 본 것처럼 얼굴에 8자가 그려진 채로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

 

정부에서 살인 복권을 발행한다. 단돈 10유로만 내면 누구나 죽이고 싶은 한 사람을 추천할 수 있고, 88일 저녁 88분에 추천된 모든 후보자들 중에서 한 명을 뽑는다. 제비 뽑기로 선정된 8N8 사냥감은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약 12시간 동안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 처벌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살인을 포함한 모든 위법행위를 용서하겠다고 공표하고, 사냥감을 포획하여 죽이는 데 성공한 사냥꾼은 상금 1,000유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독일 국민 전체, 수천만 명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사냥감을 죽이려 들 수 있다는 얘기다. 벤은 생각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상황이 진짜일 리 없어. 장난일 거야. 하지만 올해의 살인 복권이 추첨되고, 그 대상자로 베를린에 사는 심리학과 여대생과 벤이 지목된 것이다. 과연 벤은 온 세상이 참여하고 있는 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까. 모두가 그를 죽이려고 들텐데, 그는 누구를 믿고 믿지 말아야 할까.

 

“벤, 만나서 반가워요.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준비되셨나요?”

벤은 끄덕였다. 그런 다음 다이아나의 요구를 알아차리고 얼른를 터치했다.

“고마워요, . , 그럼 물을게요. 자유롭게 딱 한 명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세요?”

벤은 스마트폰을 내리고 주위를 살폈다.

만약 오늘, 지금, 현재, 하룻밤 동안 범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될 추방자 한 명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를 추천할까? 당신이라면 이런 살인 복권에 누군가를 추천하겠는가? 혹은 당신이 사냥감으로 선출된다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믿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의 상금을 마다하고 당신을 숨겨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재미는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음'에 있다. 그 동안 만나왔던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두툼한 페이지를 숨쉴 틈 없이 달려가 범인이 밝혀지고 난 다음에도 해결과 해소의 안도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그 어떤 예정된 것에 대한 불안감, 그러나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것에 대한 기대감까지 차오르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들은 오직 피체크의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다. 이번 작품 역시 초반부터 온 세상이 지목한 살인 게임의 사냥꾼이 된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은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긴장감을 부여하고, 숨 막히는 도심 속 추격전은 흡사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제바스티안 피체크는 영화 <더 퍼지>를 보고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미국 정부가 하루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를 허락하는 미래 세계가 등장하는데, '미래에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된다'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에 매력을 느꼈다고. 거기서 그는 '현재 모두가 한 사람의 적이 된다'는 현실적 아이디어로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누가 당신을 해치고 모욕하고 화나게 했나요?

혹시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마녀사냥이 먼 이야기가 아닌 요즘, 살인 복권이라는 작품 속 설정이 허구의 그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적을 것인가. 혹시 누가 내 이름을 적지는 않을까.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이라니, 상상만해도 오싹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간단히 말해 부인은 모든 것을 잘해냈고 좋은 삶, 자신이 원하는 삶, 모든 사람이 원하는 삶을 꾸렸다. 지금 여기에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있었다. 거미 무용수의 사진처럼 리처드슨 부인은 이런 삶이 당황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클리블랜드의 고요하고 우아한 지역사회 셰이커하이츠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규칙이 많은 곳이었다. 도로 구획부터 주택 외벽 색깔 등 셰이커하이츠의 모든 것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나고 자라 지역 신문 기자가 된 리처드슨 부인과 그녀의 남편인 변호사 리처드슨은 네 자녀들과 함께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처드슨 부인은 부모가 물려준 작은 집을 세놓고, 그곳에 미혼모인 미아와 그녀의 딸 펄이 이사를 오게 된다. 예술가인 미아는 그들 모녀가 겨우 먹고 살 정도만 돈을 벌 수 있는 시간제 일자리를 얻어 일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매일 자신의 예술 작업을 하면서 보냈다. 그들 모녀는 미아의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이동해왔고, 이번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정착하기로 한다.

리처드슨 가족의 네 자녀들은 고3인 렉시, 2인 트립, 1인 무디, 그리고 열넷인 막내 이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디는 금방 펄과 친구가 되고, 매일 같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펄은 무디와 함께 그의 집에서 리처드슨 가족들과 점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태생과 배경이 전혀 다른 두 가정의 아이들은 서로의 삶에 이끌리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펄은 리처드슨가의 아이들이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자신감, 리처드슨 부부의 고상함을 동경했고, 반대로 무디는 미아 모녀의 예술적인 떠돌이 생활 방식을 낭만적으로 느낀다. 렉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동생 이지보다 펄과 더 자매처럼 지내게 되고, 펄은 잘생기고 매력적인 트립과 사랑에 빠진다.

 

 

 

"그게 신경쓰이는 거군요, 그렇죠? 당신은 상상할 수 없는 것 같네요. 왜 누군가는 당신과 다른 삶을 선택하는지. 왜 누군가는 넓은 잔디밭이 딸린 큰 집과 멋진 차와 사무직 말고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지, 왜 누군가는 당신이 선택한 것과 다른 것을 선택하는지."

이제 미아가 리처드슨 부인을 살필 차례였다. 부인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가 얼굴에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다는 듯이.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무언가를 놓쳤을 까봐. 자기가 원하는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포기했을 까봐."

평생 질서 있고 엄격한 삶을 살았던 리처드슨 부인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자, 사과 한마디 없이 자기만의 규칙을 만드는 듯한 미아가 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리처드슨 부인의 오랜 친구인 린다가 버려진 아기를 입양하게 되면서 그들의 미묘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친모가 나타나 양육권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미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리처드슨 부인이 분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기자라는 것을 이용해 미아의 뒷조사를 하게 되는데, 상상치도 못했던 숨겨진 과거의 비밀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대단히 영리하고, 굉장히 놀라운 작품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예리한 문장, 탄탄하게 짜임새 있는 구조, 페이지를 바삐 넘기게 만드는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 그리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삶에 대한 질문들. 이 정도로 묵직한 울림을 남겨주는 작품들은 대부분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내는 과정이 지난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너무도 술술 읽힌다. 마치 티비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일상들이 전개되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사연들이 모두 공감되고, 이해되는, 그래서 나의 이야기이기도, 혹은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영리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그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독특한 모녀 관계가 등장한다. 리처드슨 부인과 막내 이지의 관계, 그리고 미아와 펄의 관계. 자세한 이들의 사정은 언급하지 않겠지만, 절대 평범하다고는 볼 수 없는 관계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이 처해 있는 독특한 상황을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해의 눈으로 보고 싶게 만드는 힘 또한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 사소한 행동,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 그들이 품고 있던 생각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서 뒤에 이어질 사건의 단서가 되고, 복선이 된다. 누구나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씨처럼 지니고 있는 삶에 대한 의문과 억눌렀던 욕망들이 있게 마련이니까. 이 작품은 바로 그 불씨를 피어 오르게 만드는 발화점과도 같다. 때로는 이렇게 모든 걸 완전히 태워버리고 나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곳은 내가 무서울 때 숨는 곳이야."

"뭐가 무서운데요?"

"무서워하는 데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 말을 결코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진실된 말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는 서른 한 살 때 자신의 첫 작품이었던 <유럽의 교육>에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폴란드를 배경으로 숲 속에 숨어 살며 독일 점령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다.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속에서 부모를 잃은 열네 살 소년 야네크는 추위와 배고픔, 희망이 사라진 전쟁의 한 가운데서 쇼팽의 폴로네즈를 듣고 감동한다. 독일 군인들에게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몸을 파는 열 여섯 살 소녀 조시아가 원하는 건 오직 사랑하고 먹고 따뜻하게 지내는 것뿐이었는데, 그 소박한 바램조차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로맹 가리는 극중 인물 중에서 가장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인물인 도브란스키를 통해서 희망을 이야기한다.

 

이후 예순 한 살 때 그는 에밀 아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다. 이 작품의 화자는 열네 살 소년 모모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그녀가 맡아 기르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성매매를 하는 엄마들이 아이들을 맡기거나,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었다. 모모 역시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수용되었던 끔찍한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고, 늙고 뚱뚱해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칠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힘들어 한다.

 

모모는 엄마가 자신을 보러 오게 하기 위해 복통과 발작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위험한 무단 횡단을 하며, 마약 하는 친구들을 사귀는 등 문제 행동만 골라서 한다. 하지만 모모는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로자 아줌마가 병을 앓고 죽어갈 때 곁에서 그녀를 보살핀다. 누군가에게 버림받고, 상처받고, 가진 것도 없는 두 사람이 좁고 냄새 나는 아파트에서 서로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은 뭉클하고, 아름다웠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 주는 드리스 씨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한 번만 읽어도 충분한 소설은 읽고 나서 가급적 책꽂이 멀리, 한 구석에 놔둔다. 한번 더 읽고 싶은 소설은 서재에서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위치 혹은 잘 보이는 곳에 놓아 둔다. 그래서 언제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으면서 단어와 문장과 행간과 이야기 속을 들여다보곤 한다. <자기 앞의 생>은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뒤로 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몇몇 문장들과 몇몇 장면들을 나는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된 버전은 무려 일러스트 버전이다. 사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세계 문학들에는 대부분 삽화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글자가 빽빽하고, 페이지가 두꺼운 책을 선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자에서는 미처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이미지만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열네 살 소년 모모와 그 눈에 비친 세상이 세피아톤의 일러스트 약 80컷으로 보여지고 있는 이 작품은 원래의 이야기와 일러스트가 마치 하나인 것처럼 느껴진다.

극 초반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겪고 난 뒤 모모는 생각한다. 사랑해야 한다고.

열네 살 소년 모모가 깨우치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생의 비밀을 이렇게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만날 수 있다니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름답고, 뭉클하고, 눈부신 작품이었다. 아직까지 이 작품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은 꼭 일러스트 버전으로 읽으시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당신만은 행복해져야 해요. 그와 반드시 헤어지세요. 햇빛 아래서 활짝 피는 꽃이 되세요.”

-'당신만은 행복해져야 해요. 그와 반드시 헤어지세요'중에서

얼마 전에 어떤 프로그램을 보다가 분통이 터졌던 적이 있다. 한 여자가 남자친구에게 결혼은 언제쯤 할 생각이냐고 묻는데, 상대방 남자는 우리가 사귀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당황한 여자는 함께 잠을 자고, 데이트를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사귀는 게 아니고 뭐냐고 되묻는다. 남자는 네가 좋아서 함께한 것은 맞지만, 자신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고, 너랑 사귀거나 결혼할 생각은 없다는 거였다. 여자는 울며 매달린다. 그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자신을 만나 달라고. 그러자 남자는 말한다. 지금 여자 친구와 헤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고, 너만 괜찮다면 지금 이대로도 나는 좋다. 다만 네가 힘들어질 테니 결정은 네가 하라는 거다. 여자는 고민한다. 내가 과연 이 남자를 계속 만나도 괜찮은 걸까.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저런 남자라면 그 동안 함께한 시간마저 아까우니 당장 헤어지라고 여자에게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라고. 사랑은 그 다음이라고. 그리고 이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연애 문제를 누군가에게 상담하기 보다는, 남의 연애 문제를 들어주고, 조언을 해 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의 다양한 연애 상황들에 대해서 듣고, 같이 분노하고, 같이 안타까워했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사랑을 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라 누가 잘하고 있고, 누가 잘못하고 있다고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 공통점은 누구든, 혹은 어떤 방식의 사랑이었든 간에 그것이 끝나고 났을 때 쉽게 훌훌 털어버리거나, 자책하지 않거나, 과거의 연인에게 집착하지 않기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였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돌보기 시작하는 당신에게, 사랑이 끝나고 당신은 더 좋아질 거라고 말해주는 이 책은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스킬은 사랑하는 법도 사랑 받는 법도 아닌 이별하는 법입니다. 이별을 통해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우고 더 나은 사랑을 위해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더 잘 이별하기 더 잘 사랑하기'중에서

이 책의 저자인 디제이 아오이는 일본에서 35만 명의 SNS 구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은 상담자로 이미 유명하다. 저자는 말한다. 깨진 사랑 앞에 덩그러니 남은 자신이 싫어지지 않도록, 이별이 할퀴고 간 상처의 통증을 견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그런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썼다고. 이별을 당한 사람에게, 혹은 사랑의 유효기간이 다 됐을 때 노력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애초에 상냥한 이별 따윈 없으니 깔끔하게 헤어지는 연인인 척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는 충고를 하기도 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 친구를 여전히 사랑한다는 여자에게 사랑 운운할 때가 아니라고, 한시라도 빨리 물리적인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기도 하고, 만나선 안 되는 나쁜 남자들의 속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별을 겪었을 경우, 충분히 사랑했으니 마음껏 이별하고, 그걸로 인한 상처를 받았다면 아픔을 딛고 성장해야 한다고 말해준다.

가끔은 '애인이 없는 사람보다 애인밖에 없는 사람이 더 불행하다고' '쓸데없는 연애 따위 할 필요 없다고' 따끔하게 조언하기도 하고, 상대의 행동이나 말 때문에 상처 받은 이들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니 반드시 그와 헤어져 행복해져야 한다'고 토닥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상대를 너무 사랑하느라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주체적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너무도 와 닿았다. 그리고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올 테니 미련을 떨쳐 버리고, 나답게 살 수 있도록 위로해주는 말들이 참 따뜻했다.

 

사랑이란 누구에게나 어렵게 마련이고, 이별로 인한 슬픔 역시 매번 겪을 때마다 힘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 사랑이 끝나고 나서 더 멋진 내가 될 수 있도록, 떠나는 사람보다 앞으로 만날 사랑을 더 소중하게 생각해보자. 미련 따윈 집어 던져 버리고, 징징댈 바엔 엉엉 울어버리고 툭툭 털어내 버리자. 아프다고? 정말 다행이다. 안심하고 마음껏 울어 보자. 세상에 흘려서는 안 되는 눈물 따위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늘 내리는 비는 내일 피는 꽃을 위한 것이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