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거장 -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데이비드 W. 갤런슨 지음, 이준호 외 옮김, 박성원 감수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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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게 스타일을 선택하는 피카소의 능력은 하나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스타일을 창조하려는 세잔의 평생 탐구와는 전혀 다르다. 피카소는 활동 기간에 수차례 스타일을 빠르게 바꾸었듯이, 신속하게 구상하고 표현될 수 있는 아이디어로부터 여러 스타일을 종횡하는 그의 예술적 면모가 발현된다는 점을 반영한다. 반면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전한 세잔이 보여준, 하나의 스타일에 대한 확고한 천착은 그의 예술의 시각적 특성의 산물이며 그 요원한 목표를 완전히 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p.30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자 했던 욕망에 사로잡혔던 위대한 예술가라면 불가피하게 자기 삶의 단계와 작품의 질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젊을 때는 미래에 위대해져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기대할 것이며, 나이가 든 상태에서는 자신의 실력이 계속 향상되어온 것을 되돌아보거나, 나이 들수록 능력이 퇴보하지 않을까 걱정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술가 스스로 구체적인 자기 삶의 맥락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기에 일반성을 지닌다고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예술사들의 작품의 질이 나이에 따라 어떻게 그리고 왜 다양해지는가에 대해 그들의 생애주기를 분석해보면 어떨까. 


경제학자인 데이비드 W. 갤런슨은 창의성 경제학센터의 학술 책임자로 예술적 창의성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예술가의 유형을 천재에 가까운 ‘개념적 혁신가’와 대기만성형에 가까운 ‘실험적 혁신가’로 구분했다. 실험적인 혁신을 이뤄낸 예술가들은 미적 기준을 중시하며, 시각적으로 경험한 것을 실현하려 한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절차는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이 예술가들은 반복적으로 동일한 주제를 여러 번 다루고, 시행착오의 실험적 과정을 통해 하나의 주제를 점차 다르게 다룬다. 이들은 경력을 쌓아 나가면서 능력치를 서서히 높이고, 오랜 기간에 걸쳐 점점 더 나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전형적인 완벽주의자이다. 반면에 개념적 혁신을 이룬 예술가들은 특정한 아이디어나 감정을 전달하려는 욕구에서 동기를 얻는다. 보통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원하는 이미지와 과정을 명확하게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그림 그리는 행위는 체계적이다. 아이디어가 핵심이기 때문에 개념적 혁신은 보통 즉시 그리고 완벽하게 실행되고, 특정 목적을 달성하면 만족할 수 있다. 





실험적 접근법과 개념적 접근법을 구별하는 예술가들의 인식과 관련된 다른 예시들을 추가할 수 있지만, 여기서 논의된 내용만으로도 현대의 화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들이 두 유형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두 유형의 예술가들 간 차이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방법'이 아니라 그리거나 쓰는 '이유'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이해는 놀랍지 않다. 두 유형을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과 이것이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미치는 크나큰 영향을 고려할 때, 예술을 연구하는 이들이 발자크, 스티븐스, 포크너를 비롯해 중요한 현대 예술가들의 선례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다.                 p.344~345


개념적 혁신가가 단거리 주자라면, 실험적 혁신가는 마라토너다. 개념적 혁신가 대부분은 젊은 천재들로 활동 초기에 자신의 분야에서 대혁신을 불러오지만, 실험적 혁신가들은 보통 인생 후반기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나이든 거장들이다. 가장 위대한 두 명의 근대 화가인 폴 세잔과 파블로 피카소는 혁신가의 전형적인 두 가지 유형을 보여준다. 세잔의 그림 그리는 과정은 항상 경험적이지만 독단적이지 않았고, 일련의 규정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연 앞에서 자신의 느낌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의 진정한 목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향해 발전해가는 것이었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데 따른 좌절과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오래 살지 못할 수 있는 두려움 등 실험적 혁신가로서의 거의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피카소는 예술이 예술가의 발전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발견한 것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결실을 맺게 된 세잔과는 정반대로 피카소는 항상 다르고 예측할 수 없게 변화하는 작업 스타일을 보여줬으며, 자신의 예술에 대한 피카소의 확신 또한 세잔의 의심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런 식으로 방대한 수집과 연구를 토대로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세잔, 잭슨 폴록, 버지니아 울프, 로버트 프로스트, 앨프리드 히치콕과 같은 예술가들이 왜 ‘실험적 혁신’을 보여준 노련한 거장이었는지, 페르메이르, 반 고흐, 피카소, 허먼 멜빌, 제임스 조이스, 실비아 플라스, 오슨 웰스 등이 왜 ‘개념적 혁신’을 보여준 젊은 천재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 또한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예술가들이 그림을 만드는 과정, 특정 그림을 그리기 전에 수행하는 것들, 작업을 시작하기 전 계획 등을 통해 예술적 혁신의 두 가지 패턴에 대해 분석하고, 동시대 화가들을 넘어 근대 이전의 화가, 근대 조각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른 예술가 그룹에 분석을 적용한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경제학자이기에 가능한 지점들이다. 최고가 작품 제작 시 연령, 삽화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 제작 시 연령, 회고전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작품 제작 시 연령을 비교해 주요 화가의 전성기 연령을 정리한다거나 뉴욕갤러리 첫 개인적 개최 당시 화가들의 연령 비교를 통해 실험적 예술가와 개념적 예술가의 차이가 어떻게 다른지 한 눈에 보여주기도 하는 식이다. 경제학자와 예술 창의성이라니 너무 낯선 조합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분석할 수 있는 넓은 시야와 연구가 경제학자만의 독특한 관점을 만들어 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숨겨진 비밀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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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타임머신 블루스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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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임머신'을 둘러싸고 한바탕 배를 잡고 웃었다.

실제로 아주 잘 만든 타임머신이었다. 조작 패널에는 연수와 일수를 설정하는 곳이 있어 다이얼을 돌리면 숫자가 변경됐다. 플러스와 마이너스 스위치가 미래와 과거에 해당되는 모양이다. 다시 말해 십 년 후 미래로 가려면 플러스 10, 십 년 전 과거로 가려면 마이너스 10을 설정하는 것 같다.

"누가 만든 거지?"

"어지간히 한가하고 기술력이 있는 인간이겠지."             p.63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초판 출간 이후 16년 만에 탄생한 속편이다. 이 작품은 모리미 도미히코와 극작가 우에다 마코토의 컬래버레이션이라는 사실도 화제가 되었는데, 원안이 된 희곡 <서머타임 블루스>의 유쾌한 설정 위에서 ‘다다미 넉 장 반’ 등장인물 전원이 동분서주 활약하는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현지에서는 순식간에 10만 부가 판매되고,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도 했다. 


시모가모 유스이 장에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8월, 영화 동아리 '계'의 멤버들이 속속 모여들어, 아카시 군이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 촬영이 진행된다. 무사히 촬영이 끝난 후 '나'는 오즈, 히구치 씨 등과 함께 공중목욕탕에 갔다가 하숙으로 돌아왔는데, 오즈가 콜라를 쏟는 바람에 하숙에 하나밖에 없는 에어컨이 못쓰게 되고 만다. 그런데 촬영된 영상 속에서 오즈가 마당과 베란다에 동시에 찍혀 있는 장면이 발견된다. 쌍둥이도 아닌 오즈가 두 명이 된 것이다. 그 와중에 다다미를 뜯어 만든 것 같은 '타임머신'과 스스로 시간 여행자라고 말하는 촌스러운 청년이 등장한다. 그들은 타임머신을 직접 써보기로 하는데, 어제로 가서 고장 나기 전의 리모컨을 가져와보면 어떨까 계획을 세운다. 시작은 이렇게 사소하고, 하잘것없는 것이었는데, 이 사건은 개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은하계를 포함한 온 우주적 위기까지 초래하게 되는데... 과연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카시 군은 쪽빛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느끼는 건 우리가 그렇게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여기 책 한 권이 있다고 쳐요. 우리는 그 책의 내용을 단번에 알 수는 없어요. 책장을 한 장씩 넘겨가며 읽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지만 책의 내용 자체는 이미 한 권의 책으로 거기에 있어요. 먼 과거도, 먼 미래도 모두......"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그제야 이해했다.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말이군."             p.202


누구에게나 하루는 이십사시간이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시간을 멈추거나, 지나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여행하는 기계'라는 아이디어를 거듭해서 이야기해왔다.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인류의 근본적 조건에 대한 반역이자 신과 맞먹는 힘, 궁극의 자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굉장한 물건이 어찌하여 이곳에 등장한 것일까.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무계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상을 보내는 이들에게 말이다. 타임머신의 조작 패널은 연수로 최대 '구십구 년'까지 조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얼마든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미래로 가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겨우 하루 전으로 돌아가보기로 결정한다. 결말이 보이는 인생은 시시하니 미래는 안 되고, 쥐라기 시대에 가보고 싶지만 일억 오천만 년 전이라 너무 멀고, 그러다 타임머신이 고장날 수도 있으니 먼저 가까운 곳부터 시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해 보이는 일조차 좌충우돌 대소동극의 시작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 이야기의 재미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의 원안이 된 희곡 <서머 타임머신 블루스>는 극단 ‘유럽기획’에서 2001년 초연한 이래 수차례 재공연을 거듭해왔으며, 우에노 주리 주연의 실사 영화까지 제작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이다. 모리미 도미히코는 희곡의 시놉시스를 씨실 삼고 ‘다다미 넉 장 반’의 배경과 등장인물을 날실 삼아 두 작품의 매력을 기가 막히게 엮어냈다. '다다미 넉 장 반'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아 아쉬웠던 독자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속편이 아닐 수 없다. '타임 패러독스'라는 소재를 모리미 도미히코 특유의 입담과 유쾌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이 작품은 여전히 무모하고 바보 같지만, 순수함으로 빛나는 청춘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편에서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다다미 넉 장 반' 시리즈가 궁금했다면, 이 작품부터 만나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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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착각 -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차란 란가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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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다. 기억이 본질적으로 덧없는 것이라서 우리 인생이 훨씬 더 짧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기억 덕분에 과거를 잊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인간의 뇌는 경험의 저장고 이상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얼마나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망각은 기억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헤쳐나가며 이해할 수 있게 뇌가 정보를 중요도에 따라 정리하는 과정이 낳는 결과다. 우리가 의지가 깃든 선택으로 망각을 관리하는 데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면, 미래로 가져갈 풍요로운 기억을 직접 선별해서 정리할 수 있다.                 p.52


우리는 왜 방금 전 일을 잊어버릴까? 어떤 기억은 왜 잊히지 않고 계속 떠오를까? 우리가 어떤 일은 기억하고 어떤 일은 잊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 뭔가를 찾으려고 움직이다가 내가 뭘 찾고 있었는지 잊어 버리거나, 몇 시간 전에 먹은 식사 메뉴는 기억하지 못하면서,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음악은 기억했던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당시에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경험이 나중에는 기껏해야 희미한 조각으로만 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항상 기억의 작동 방식이 궁금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를 잘 기억하지 못해서,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사실 자체에 좌절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차란 란가나스는 '곧이곧대로 기억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니 '왜 자꾸 잊어버리는가?'를 묻지 말고, '왜 기억하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에 기여하는 다양한 메커니즘은 생존을 위한 과제에 맞춰 진화해왔다. 우리가 특정 정보를 잊어버리는 것은, 필요할 때 필요한 정보를 신속히 활용할 수 있도록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길 필요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사진처럼 정확하고 고정적인 기억보다는, 맥락에 맞춰 유연하게 변하는 기억이 우리에게는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기억은 돌에 단단히 새겨진 것이 아니라서, 우리가 방금 배우거나 경험한 것을 반영해 갱신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언뜻 듣기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 같겠지만, 기억 갱신의 촉매는 바로 기억을 떠올리는 행위 자체다. 기억을 떠올릴 때 우리는 수동적으로 과거를 재생하지 않는다. 기억에 접근하는 것은 '재생'과 '녹화'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것과 비슷하다. 머릿속으로 과거를 다시 더듬어볼 때마다 현재의 정보가 함께 따라가서 기억의 내용을 미묘하게 바꿔놓곤 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한 번 떠올릴 때마다 그 기억 속에는 바로 지난번 그 기억을 떠올렸을 때의 잔여물이 가득 퍼져있다.                 p.234


이 책은 오랫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기억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으며, 기억의 메커니즘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심리학 및 신경과학 교수인 차란 란가나스는 뇌의 구조와 원리 연구에 25년 이상 매진해왔다. 저자는 우리가 인생의 경험을 모두 기억할 수 없는 것은 기억이 본질적으로 선택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경험 중 극히 작은 일부만이 우리의 하고,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맥락’과 ‘도식’이라는 틀이라고 말이다. 그 장소에서 나는 소리, 색깔, 냄새 등을 통해 우리는 과거 그곳에 왔을 때의 기억들을 다시 붙잡을 수 있다. 이렇게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을 '맥락'이라고 부른다. ‘도식’은 일종의 정신적인 틀로, 반복되는 패턴이나 구조를 이용해 우리가 익숙한 환경에서 쉽게 정보를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맥락과 도식에 따라 정리를 해보자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망각은 기억력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뇌가 의도한 효율적인 정보 처리 매커니즘인 것이다.


기억의 실체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기억을 단순한 연상의 저장고로 보는 대신 인간이 서로 아주 다른 두 종류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가 재미있었다. 이는 토론토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던 톨빙 교수가 제시한 것으로 일화기억과 의미기억으로 구분했다. 의미기억이란 정보를 학습한 시기나 장소와 상관없이,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사실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일화기억은 일종의 '정신적 시간여행'이라고 부르며, 기억으로 인해 우리가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것 같은 의식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의식이 정신적인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개념에 대해 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인상 깊게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며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기억하고 학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뇌과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억과 망각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어 기억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해주는 기억의 놀라운 세계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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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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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곧 사반세기이건만 지금까지 타인의 의견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인 적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다. 그 때문에 걷지 않아도 됐을 가시밭길을 구태여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좀 더 일찍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기대를 접었더라면 나의 대학 생활은 지금 같은 모양새가 아니었을 것이다. 히구치 스승님 같은 정체불명 괴인의 제자가 되지도 않고, 심지가 미로처럼 꾸불꾸불한 오즈라는 인물을 만나지도 않고, 이 년을 허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아직 늦지 않았다. 가급적 신속하게 객관적 의견을 청해 응당 있을 수 있어야 하는 다른 인생으로 탈출하자.               p.128



모리미 도미히코의 대표작 <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가 한국어판 출간 17년 만에 전면개정판으로 다시 나왔다. 기존에 나왔을 때는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라는 제목이었는데, 이번에 제목도 바뀌었고, 동명의 애니메이션 캐릭터 디자인으로 표지도 새롭게 꾸몄다. 문고본 출간 당시 작가가 직접 개고한 내용을 충실히 반영했으며, 번역자 권영주 또한 전체 원고를 새로 가다듬었으니 기존에 읽었더라도 다시 한번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모리미 도미히코 특유의 엉뚱하고 예측불허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매력인 이 시리즈는 초판 출간 이후 16 년 만에 속편이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다미 넉 장 반 크기의 자취방에 틀어박힌  '나'는 2년간의 대학 생활을 돌아보며 한탄한다. 이성과의 건전한 교제, 학업 정진, 육체 단련 등 유익한 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려 보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1학년 시절부터 다시 되돌아본다. 당시 신입생들을 모으느라 여기저기에서 전단을 붙이던 동아리 중에 흥미를 느꼈던 곳은 네 곳이었다. 영화 동아리 '계,. '제자 구함'이라는 기상천외한 전단, 소프트볼 동아리 '포그니', 그리고 비밀 기관 '복묘반점'이었다.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나에게 모두 대학 생활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 중에서 내가 선택했던 것은 영화 동아리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애초에 화근이었지 않나 싶은 것이다. 내가 만약 1학년 봄에 영화 동아리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하나뿐인 친구이자 원수인 오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꿈같은 장밋빛 캠퍼스 라이프를 구가할 수 있었을까? 





문을 연 나는 다다미 넉 장 반에 발을 들여놓았다. 기괴한 일이로다. 뒤를 돌아보았다. 혼돈한 나의 다다미 넉 장 반이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반쯤 열린 문 너머에도 혼돈한 나의 다다미 넉 장 반이 있었다. 거울에 비친 방을 보는 것 같았다.... 문을 지나 내 방으로 돌아왔는데 그곳도 내 방이 틀림없었다. 오랜 수행을 통해 심담을 단련해 작은 일에는 동요하지 않게 된 나도 동요했다. 어찌 이런 괴현상이. 나의 다다미 넉 장 반이 둘로 늘었다. 문으로 나갈 수 없다면 창문을 여는 수밖에 없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진정하려 해보았다. 대략 팔십 일간에 이르는 나의 다다미 넉 장 반 세계 탐험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p.302


주인공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원수인 '오즈'는 공학부 전기전자공학과 소속인데도 전기도, 전자도, 공학도 싫어한다. 야채를 싫어하고 즉석식품만 먹어 안색이 달의 뒤편에서 온 사람 같이 심히 소름끼치고,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알랑거리고, 제멋대로고, 오만하고, 태만하고, 청개구리 같고 등등 칭찬할 점이 도무지 한 가지도 없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녔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오즈와 영화 동아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 나의 이야기가 첫 번째 <다다미 넉 장 반 사랑의 훼방꾼>이다.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가지 이야기는 각각 다른 동아리를 선택한 나의 대학 생활 이야기이다. 비슷하게 시작해서 마치 평행우주를 구현한 듯, 같은 인물, 같은 장소, 같은 소품이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같은 하숙집을 배경으로 오즈와 그의 스승, 러브돌 가오리씨, 고양이로 국물을 낸다는 소문이 있는 포장마차의 고양이라면, 점쟁이 노파의 예언,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카스텔라, 나방이 출몰하는 사건까지 같은 소재로 빚어내는 조금 다른 서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네 가지 캠퍼스 라이프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장에 있으니 특히 주의깊게 읽어 보길 권해주고 싶다. 우리는 가끔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 회한에 잠기곤 한다. 내가 그때 왼쪽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갔더라면, 그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의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황당무계하지만 유쾌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진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보지 않았을 미래에 대한 무해한 망상을 보여준다. 기발한 상상력과 입담으로 무장한 모리미 도미히코의 대표작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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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꽃 - 내 마음을 환히 밝히는 명화 속 꽃 이야기
앵거스 하일랜드.켄드라 윌슨 지음, 안진이 옮김 / 푸른숲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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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은 꽃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구상 미술에서 추상 미술로 전환하는 시기에 꽃의 형태를 연구하기도 했고요. 나중에 그는 "꽃의 조형적 구조를 더 잘 표현하려고" 한 번에 꽃 한 송이만 그리는 방법을 선호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사진 속 탁자 위에 놓인 꽃은 나무로 만들어진 꽃이랍니다. 케르테스에 따르면, 몬드리안은 자신의 작업실과 "어우러지게" 하려고 그 나무 꽃에 물감을 한 번 칠해두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사진 속의 꽃은 빛과 어둠의 구도 속에서 단연 눈에 띕니다.            p.3



꽃이 피어오르고 여기저기 꽃내음이 가득해지는 계절, 봄이다. 짙어지는 푸른 잎사귀, 천천히 부풀어 오르는 꽃봉오리, 들이마시면 아찔해지는 꽃향기까지... 지금 이 계절과 너무 잘 어울리는 책을 만났다. 아름다움의 대명사인 꽃처럼, 아름다운 책이다. 앙리 마티스, 에두아르 마네, 데이비드 호크니 등 예술가 48인이 그린 108가지 '꽃' 그림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고화질 도판과 원예 전문 작가의 해설을 함께 수록하고 있다. 




과감한 색채와 테크닉으로 유명한 마티스가 그린 꽃 그림은 의외로 지중해 바다가 보이는 창문 옆에 세워진 꽃병 속의 장미를 평온하고, 행복하게 그려냈다. 유화물감과 수채물감을 일본의 전통 재료와 혼합해 사용하는 후지타의 양귀비 그림은 꽃이 담긴 노란 물병의 컬러만큼이나 강렬하다. 건축과 인테리어 반면에서 유명한 매킨토시가 그린 아네모네는 너무도 생생해 꽃잎의 질감이 만져질 것 같다. 꽃의 색채와 형태를 매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배경을 최소화시켰던 프랑스 화가 판탱라투르의 그림은 꽃이 주인공이 되어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빛의 방향을 연극적으로 설정해 극적인 효과를 드러내는 니컬슨의 정물화는 독특한 무늬가 있는 시클라멘의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20년 동안 다작을 하다가 5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에두아르 마네의 생애 말미를 장식한 작품은 꽃 그림이었습니다. 마지막 대작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완성하고 나서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고 자부하던 마네는, 점점 제약이 많아지는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혁명적인 화가였던 마네는 미술계에 반발하면서도 비평가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열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꽃 그림을 그릴 때는 그 순간 눈앞에 놓인 식물에 주의를 집중했습니다. 인상주의풍의 가벼운 붓질은 그 그림들이 빠른 속도로 그려졌음을 보여주죠.              p.125



이 책을 통해 장미, 양귀비, 난초, 백합, 국화, 백일홍, 수선화, 제라늄 등 페이지마다 다양한 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화가들이 저마다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표현한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꽃 그림은 언뜻 보면 꽃의 생명력만큼이나 덧없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꽃 정물화는 사물의 본질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꽃병 속에서 천천히 시들어가는 꽃이든, 흙에서 자라나는 꽃이든, 그 찰나의 순간 포착해낸 꽃의 생명력은 그림 속에서 영원하다. 꽃을 자주 사는 편인데, 아무리 화려하고 값비싼 꽃다발이라도 그 예쁜 모습을 오래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럼에도 이제는 안다. 영원하지 않기에 더 아름답다는 것을 말이다. 




세드릭 모리스의 <관목>이라는 그림은 다양한 색감을 사용해서 정말 화려하다. 썩어가는 빨간 열매를 밀어내면서 풍선껌 같은 분홍색 꽃이 피어난다고, 봄철 꽃사과나무 가지에는 모든 계절이 다 담겨 있다는 표현이 정말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17~18세기에는 꽃이 엄청난 인기였다고 한다. 특히 네덜란드 사람들이 식물 수집의 선두에 서 있었고, 새로운 꽃 품종이 비싸게 거래되는 만큼 그 꽃을 그린 그림의 가격도 높아졌다고 한다. 덕분에 화가 라헬 라위스는 어마어마한 재산과 국제적 명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유럽 각국의 왕들에게서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라위스의 <꽃 정물>이라는 작품은 정말 꽃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메마른 일상을 바꿔보고 싶다면, 꽃을 한번 사보는 건 어떨까. 한 송이든, 한 다발이든 그 꽃으로 인해 하루의 색채가 완전히 달라질테니 말이다. 꽃은 예쁘지만 금방 시들어버리는 게 아쉽다면, 대신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이 책 속에 수록된 꽃들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 아름다움을 선사하니깐. 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달콤한 꽃내음이 나는 것 같은 이 책을 통해 꽃이 주는 위로와 기쁨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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