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죽음들 -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과학수사에 남긴 흔적을 따라서
브루스 골드파브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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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그러나 사망 사건은 일어날 때마다 인간 경험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 죽으면, 충격을 받고 불쾌함을 느낀다. 죽음에 관한 해답이 필요하다는 욕구는 뿌리가 깊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사람은 왜 죽은 걸까?           p.37~38

 

서론을 지나면 사망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도배지가 벗겨진 침실에 누워 있는 여성, 빨랫줄에 옷이 가득 널려 있는 2층 집 아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성, 온갖 물건들이 널부러져 있는 산지기의 오두막, 차고와 침실 등 실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밀하게 만들어진 모형들이다. 타일 바닥의 무늬와 꽃무늬 벽지, 금이 간 바닥과 스탠드,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까지 정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라는 이름의 디오라마로 살인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이다.

 

 

이 책은 그렇게 폭력과 죽음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미니어처로 과학수사와 법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인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삶과 법의학의 역사를 담고 있다. 리는 1940년대부터 경찰을 교육하기 위해 실제 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디오라마는 현재 18개가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법의학 훈련에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저자 브루스 골드파브는 메릴랜드주 수석 검시관실 공공정보관으로 리의 디오라마를 관리하며, 그녀의 공식 전기 작가가 되었다. 그는 디오라마와 관련된 그림, 미술품, 서류들을 모았고 70년 된 이 디오라마의 보존 작업을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모든 작업 과정에 참여했다. 덕분에 디오라마들은 박물관에서 공개 전시되었고, 그를 통해 프랜시스 그레스너 리의 이름도 재조명된 것이다.      

                                                                                           

 

범죄 현장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법은 학생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증거를 하나하나 짚어주는 방식이 될 것이었다. 주의를 끄는 사진이나 자료 없이 실제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찾는 일은 이와 매우 달랐다... 문득 리는 오래전 어머니에게 만들어주었던 시카고 교향악단 디오라마와 더 록의 다락방에 있는 인형의 집 가구며 비스크 도자기 상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모리츠에게 말했다. "범죄 현장의 모습과 시신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배치한 모형을 내가 직접 만들면 어떨까요? 그걸 가지고 가르칠 수 있겠어요?"          p.275

 

20세기 중반만 해도 경찰은 과학적 살인 수사를 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은 경찰관도 많았고, 많은 경찰관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경찰 업무를 위한 훈련은 최소한에 그쳤다. 그저 힘이 세고 겁이 없으며 싸움을 말리거나 용의자를 완력으로 구속할 수 있다는 이유로 채용이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실정이니 사망 현장에서 경찰은 증거를 훼손하거나, 현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수사가 처음부터 난항을 겪는 일도 다반사였다.

 

리의 목표는 부패한 코로너 제도 대신 검시관을 현장에 투입하고, 갑작스러운 의문사에 관한 조사를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는 미국 최초로 법의학과를 하버드 의대에 개설하고, 경찰을 위한 살인사건 세미나를 열었고, 살인사건 현장을 미니어처로 만든 디오라마를 제작해 과학 수사의 발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여자가 대학에 가는 일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리가 다니고 싶었던 하버드 의대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이후 결혼을 하고,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시간이 한참 지나 51세가 되었을 때 병에 걸려 요양하며 우연히 같이 입원했던 검시관 매그래스를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진다. 매그래스 덕분에 법의학에 매료되었던 리는 법의학을 독학하며 엄청난 자료를 모았고, 이 모든 역사적인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그 시작이 50세가 훌쩍 넘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법의학과 과학 수사의 발전은 아마도 한참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그 추진력과 굳건한 믿음과 성실한 희생이 있었기에, 수많은 억울한 죽음의 이유가 밝혀지게 된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초창기 과학수사에 대한 히스토리와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만나 보자. 법의학과 과학수사에 관심이 있다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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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태양
린량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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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른에게는 이런 인생의 비밀이 있다. 다들 '목숨을 건 외줄타기'를 하면서 자랐다. 어른이 되려면 살얼음판을 건너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찌 보면 운이다. 나에게 자식이 생기고 나니 마음이 싹 변했다.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나는 자식이 어떤 '외줄'도 건너지 않길 바란다. 차차리 내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12미터 너비의 널찍한 시멘트 다리를 놓아주겠다. 나는 자식이 어떤 살얼음판도 건너지 않길 바란다. 차라리 내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고, 얼음이 깨진다면 아이를 물 위로 쳐들고 기꺼이 얼음물을 마실 것이다.         p.80

 

이 작품은 타이완의 국민 작가 린량이 쓴 에세이로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160쇄를 찍은 책이다. 린량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지만, 60년간 어린이 책을 쓰고 번역하고 연구한 타이완 아동문학의 거목이다. 이 책 역시 '아홉 살부터 아흔아홉 살까지 읽는, 세대를 뛰어넘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애니메이션과 뮤지컬로도 제작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신혼 살림을 시작한 단칸방에서 시작된다. 방은 너무나도 작았고, 주위는 시끄러웠지만, 작고 얄팍한 종이상자 같은 집이라도 둘이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타이베이대학병원 분만실 앞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심장을 두근거리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린다. 갓 태어난 딸아이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무엇도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부부는 눅눅하고 비좁은 단칸방으로 돌아온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그들 부부에겐 작은 태양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첫째 잉잉, 둘째 치치, 막내 웨이웨이가 태어나고 시끌 벅적한 가족의 15년 세월이 44편의 산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한테도 아버지가 있단다. 세상 모든 '아이'가 그렇듯 나도 '아버지' 역할을 맡고 나서야 '아버지'가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깨달았지. 엄청나게 '애가 타는' 일이건만 '대우'는 형편없거든. 그때 나는 '내 아버지를 찾아가 이야기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했어. 나날이 어려워지는 '시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두 아버지가 만나' '지혜의 불꽃'을 피워 알아냈으면 했지. 그러나 하늘 아래 살아가는 아버지의 반 이상에게 이는 헛된 바람이란다. 너무 늦었거든.         p.294

 

소소하지만 공감되는, 담백한 묘사들이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는 듯해서 읽는 내내 기분이 설레었다. '헐거운 수도꼭지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아내가 사각사각 옷 자르는 소리, 첫째가 나직이 문법 교과서 읽는 소리, 둘째가 사삭사삭 연필로 쓰는 소리, 막내가 고롱고롱 코 고는소리(p.34)' 등으로 그려지는 '우리 집 소리'들이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했다. 조용한 집안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는 린량의 모습이 자연스레 보였으니 말이다. 온 식구가 지켜야 하는 '가정 규칙'을 만들고,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풍경들이 정겹기 그지없다. 작가라는 직업적 특성상 남들이 잘 때 깨어 있고, 남들이 깨면 자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 린량이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며 책을 꺼내고, 음식을 찾아 먹는 에피소드도 아주 유쾌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부모의 위치에서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도 와 닿았다. 부모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심정, 나이를 먹은 만큼의 깊이 있는 시선이 페이지마다 가득해 배우고 싶은 부분들도 많았다. 린량은 아동문학을 ‘평이한 말로 이루어진 예술’이라고 정의했고, 아동문학은 이해하기 쉽고 통속적인 언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산문집을 읽어 보니 아직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그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언젠가 린량의 아동문학 작품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꾸밈없이 그려낸 린량의 다섯 가족 이야기는 따스하고, 유쾌하고, 다정하다. 서로를 배려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이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그의 가족사 15년을 만나게 되면, 우리 집, 내 가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질 것이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 날, 가족과의 추억을 기억하고 싶은 날, 이 책을 만나보길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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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쪽으로
이저벨라 트리 지음, 박우정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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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여름은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완만한 기복을 이룬 초원의 품에 안겨 잠에서 깼다. 창밖의 풍경에서 산업적 농업이 사라졌다. 파헤친 흙도, 기계도, 빽빽이 늘어선 경작지도, 울타리도 없었다. 대정원을 영구 목초지로 복원하는 작업은 참나무들에게 생명줄을 공급하는 것 이상이었다. 우리에게도 활력소가 되었다. 되풀이되는 고되고 단조로운 노역에서 벗어난 땅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듯했다. 그리고 땅이 휴식을 취하자 우리도 그랬다.          p.97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나무들이 뿌리째 뽑히고, 쟁기질과 화학약품으로 인간을 위한 경작지로 사용되었던 대농장을 물려받은 한 영국인 부부가 있다. 그들은 농장을 개선하고 사업을 성공 성공시키는 혹독한 과제에 급급해서 자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기가 끝날 무렵 15년만에 경작농업과 낙농 사업이 위기에 처했고, 그들은 실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농업을 포기한다는 결정을 힘겹게 내린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음부터였다. 거기서 그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한 것이다. 바로 그곳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야생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파헤친 흙도, 기계도, 빽빽이 늘어선 경작지도, 울타리도 없이 땅이 쉬기 시작하자, 그 동안 놓치고 있었던 자연의 폭발적인 반응을 느끼게 된 것이다. 곤충들이 입체 음향으로 낮게 윙윙거리는 소리, 무릎까지 올라오는 식물들, 그리고 나비떼와 메뚜기, 호박벌 등이 펄럭이고, 파닥거리고, 폴짝폴짝 뛰고, 윙윙거리는 것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토양 대부분이 척박한 상태이기 때문에, 먼저 그들의 땅을 원래의 '경작되지 않은' 상태로 되돌려야 했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넵에 비버를 들이는 것이 어쩌면 그리 먼 꿈은 아닐지도 몰랐다. 비버가 넵 호수의 버드나무들에서, 혹은 해머 연못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부지런한 새끼들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가장 어린 새끼들이 어미의 꼬리에 올라타는 모습이 그려졌다. 우리의 콘크리트 댐과 레고 블록 같은 조선대는 과거의 일이 될 것이다. 범람원에는 우리가 만들지 않은 나무 잔해 차폐물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우리가 팠던 볼품없는 인공 못들은 더 큰 웅덩이가 될 것이다. 스프링우드에는 왜림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p.373

 

황무지를 경작할 수 있는 땅으로 개간한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잘 개간된 곳을 '야생'으로 되돌리겠다는 말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농사와 땅에 대한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다. 실제로 그로 인해 이 프로젝트는 주변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농지가 파괴되고,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하자 동네 주민들은 분노에 휩싸였고, 보여지는 것 또한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경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으니, 점점 사람들은 불쾌해하기 시작했다.

 

사실 농부들이 땅을 경작한다는 것은 굉장한 시간과 돈과 육체노동이 함께 필요한 일이다. 양질의 경작토로 만들고, 제초제를 뿌리고, 써레질을 하고, 혼합씨앗을 뿌리고, 이듬해에 씨앗들이 싹틀 기회를 주도록 작업하고, 비료를 주고, 베는 작업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농부들은 땅을 경작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을 자신들의 노력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반발에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도 실험을 계속한다. 그곳이 다시 기능하는 생태계가 되도록, 야생생물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도록 말이다.

 

 

경작지였다가 재야생화된 3500에이커의 땅은 2009년까지 시급히 보호해야 할 15종의 동물들(박쥐 4종과 조류 11종)을 포함해 보존 중요성이 있는 60종의 무척추동물을 불러들였다. 또 2009년에 76개의 새로운 나방 종이 이 땅에 흘러들어와 현재 총 276종의 나방이 서식한다. 쇠백로, 알락해오라기, 검은머리흰죽지, 삑삑도요 등 이따금 찾아오는 동물도 늘어났다. 개체수가 많이 줄은 나이팅게일과 멧비둘기도 이 땅에서 발견되었고, 53마리의 롱혼 소, 23마리의 엑스무어 당나귀, 42마리의 다마사슴이 합류해 활기 넘치는 밀도와 복잡성을 만들어내면서 새로운 경관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 모든 과정을 단계별로 세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은 자연이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 버린다. 그리고 야생생물에 변화를 일으키고, 종종 파멸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이 궁극적으로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연이 이 지구에서 우리에게 주는 모든 것을, 그것의 가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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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
에바 메이어르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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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동시에 세 개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미래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저녁에 먹을 것을 사고, 누구와 약속을 잡고, 책을 쓸 계획을 세우게 한다. 과거는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과거에는 이것이 저랬고, 지금은 그것이 이렇다. 기억은 우리가 지금 이곳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어떤 감정은 예전의 감정과 같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점차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우리를 지탱하고, 지금 우리가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게 해준다. 이렇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은 자신의 현재와 단절되고 소멸되어간다.          p.63

 

<이토록 놀라운 동물의 언어>의 저자 에바 메이어르가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우울증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직접 겪은 우울증에 대한 내밀하고도 솔직한 고백의 기록이자, 철학, 예술 등 다양한 관점에서 우울증을 이해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탐구의 글이다. 그녀의 우울증은 자주 결석을 하고 행동이 불량스러웠던 10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신경통을 심하게 앓아온 이모가 스스로 삶을 끝냈고, 그 일로 인해 세상 일이 항상 더 나아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열네 살에 시작된 우울증은 약 7년 정도 불규칙적으로 지속되었는데, 열일곱 에서 스무살 즈음까지의 몇 년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우울증의 치료 과정에 대한 글은 꽤 많다. 하지만 우울증의 구조와 의미를 살펴보고, 우울증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글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에바 메이어르는 계속해서 우울증을 다룬 예술가들의 작품들,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우울증을 이해하고자 했고, 노래를 만들고, 자화상을 그리고, 글을 쓰고, 반려견과 산책을 하면서 결국에는 우울증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전에 앓았던 우울증과 달리,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별로 없었다"는 것은 그럴 계획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내 경험상, 우울할 때에는 죽음이 늘 가까이 있다. 어쩌면 우울증은 삶을 유보시킨다는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일종의 계약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실제로 죽기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울증은 마비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살도 아득한 경우가 많고, 어쨌든 우울하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런 생각도 내 상태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저 계속 몸을 움직였다.          p.133

 

우울증은 뇌에 영향을 미친다. 인지와 정서 기능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의 활동이 줄어들고, 기억력을 담당하는 기간완 해마의 크기도 줄어든다. 이는 흥미의 감소, 집중력 저하, 사고력 감퇴, 괴로움과 절망감, 그리고 건망증으로 이어진다. 우울한 사람의 뇌가 이렇게 변한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변할까? 이 책이 바로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싶다.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카프카의 <단식 광대>, 그리고 프로이트, 푸코, 하이데거, 데리다 의 우울에 관한 사색과 통찰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자신이 열여덟 살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미래가 불투명했던 저자가 이렇게 언어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내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루고 있는 소재에 비해 이 책의 글들은 어둡고, 무겁기보다는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그 덕분에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적 에세이보다는 인문학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엄청난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은 특별한 계기 없이 걸릴 수 있고, 현재 괜찮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울증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존하는 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우울증은 살면서 누구라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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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에 산다 - 자폐인이 보는 세상은 어떻게 다른가?
조제프 쇼바네크 지음, 이정은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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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를 지닌 아동 대부분은 걸음걸이와 전반적인 행동 방식이 조금 이상하다. 내가 교실에서 선생님의 지시에 자기들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금세 알아챘다. 아이들은 관찰력이 뛰어난 터라 그런 식으로 빠르게 학급 친구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집단 내에서 누가 인기가 많고 사랑받을지, 누가 외톨이가 될지도 빠삭하게 꿰고 있다. 어른들의 사회도 비슷한데, 단지 '세련된 위선'이 더할 뿐이다. 직접 때리는 대신 배제하는 어떤 말이나 태도를 활용해서 엇비슷한 결과가 생긴다.           p.40

 

이 책의 저자인 조제프 쇼바네크는 아스퍼거증후군으로 만 6세까지 말을 하지 못했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지적 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독학으로 10개 언어를 배웠으며, 프랑스 명문대 시앙스 포 졸업 후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시련과 실패를 겪으면서 살고 있다. 간단한 시간 약속을 하거나, 친구 모임에 나가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고, 사소한 결정을 내리는 데도 여전히 혼란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자폐증이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장애가 아니라 자신을 설명하는 하나의 특징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어디서도 만날 수 없었던, 자폐를 지닌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과 그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둡거나, 무겁지 않을뿐더러 유머러스 하기까지 하다. 이는 그가 세상을 살아온 태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얼마나 긍정적인지 보여준다. 우리가 쉽게 예상하는 자폐증과 아스퍼거증후군에 대한 상식이라는 것이 실재와는 얼마나 다른 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폐와 자폐인에 대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이 맞다. 다만, 우리의 편견이 색안경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게 만들고, 추측하고, 단정짓게 만드는 것뿐이다. 나 역시 자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다만 자폐를 가지고 있다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식으로 말을 할 지 매체에서 보아온 상황들로 그저 예상할 뿐이다. 그러니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내면세계를 상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편견을 깨고, 우리가 모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말이다.

 

 

 

어느 날 강연을 마쳤는데, 한 부인이 무척 놀란 표정으로 내가 웃을 줄 몰라야 하는데 왜 농담을 하느냐고 물었다. 어떤 어머니는 농담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되는 주제가 있고, 자폐증을 이야기하며 웃는 것은 상황의 심각성을 잊게 만든다며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이 웃는 존재라고 믿는다. 내가 운 좋게 교류할 수 있었던 자폐를 지닌 일부 성인들로부터 배운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아마도 그들의 풍부한 유머일 것이다. 물론 그런 면모는 잘 들여다보고 발견해내야 한다. 그들의 유머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p.296

 

이 책의 서문을 쓴 영화 제작자 소피 레빌은 저자를 처음 만나면서 선입견이 흔들렸다고 말하며 그의 외모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팀버튼의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 기이한 외모의 꺽다리 사내'가 느릿느릿한 목소리에 억양은 이국적이었지만 정확한 단어를 사용했으며 재치가 돋보였다고 말이다. 그는 청중들이 간간이 웃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며 강연을 하는 중이었다. 조제프 쇼바네크는 자신의 장애를 하소연하지 않고, 억울해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 성공의 수단으로 삼았다. 물론 수많은 자폐 아동들이 만 6세 전에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하고 평생 침묵이라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와 같은 사례가 앞으로 더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어눌해 보이는 말투와 여느 사람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자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쉽게 사회 속에서 이질감 없이 어우러지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폐인 스스로 자신이 세상의 어떤 틀에도 들어맞지 않음을 인지하고, 그 모습 그대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세상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줘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있어서 자폐증은 자기 키가 195센티미터이고, 체코 출신 프랑스인이라는 것처럼 여러 특징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람은 어떤 한 가지 설명에 가둘 수 없는 존재이고, 각각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고, 각자의 독특한 점 그대로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폐를 지녔든 아니든, 혹은 특정한 약점이 있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자신만의 모습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자폐증'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자폐증상을 겪고 있는 이의 내면 세계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 인생을 긍정하는 그의 삶의 태도에 감탄했고, 우리 모두 각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자폐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흥미로운 관점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의 설명으로 가둘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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