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우울의 말들 - 그리고 기록들
에바 메이어르 지음, 김정은 옮김 / 까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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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대개 동시에 세 개의 차원에서 살아간다. 미래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저녁에 먹을 것을 사고, 누구와 약속을 잡고, 책을 쓸 계획을 세우게 한다. 과거는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과거에는 이것이 저랬고, 지금은 그것이 이렇다. 기억은 우리가 지금 이곳을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어떤 감정은 예전의 감정과 같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점차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우리를 지탱하고, 지금 우리가 한 발짝씩 걸음을 옮기게 해준다. 이렇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은 자신의 현재와 단절되고 소멸되어간다.          p.63

 

<이토록 놀라운 동물의 언어>의 저자 에바 메이어르가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우울증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직접 겪은 우울증에 대한 내밀하고도 솔직한 고백의 기록이자, 철학, 예술 등 다양한 관점에서 우울증을 이해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탐구의 글이다. 그녀의 우울증은 자주 결석을 하고 행동이 불량스러웠던 10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오랫동안 신경통을 심하게 앓아온 이모가 스스로 삶을 끝냈고, 그 일로 인해 세상 일이 항상 더 나아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열네 살에 시작된 우울증은 약 7년 정도 불규칙적으로 지속되었는데, 열일곱 에서 스무살 즈음까지의 몇 년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우울증을 겪는 이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나, 우울증의 치료 과정에 대한 글은 꽤 많다. 하지만 우울증의 구조와 의미를 살펴보고, 우울증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는 글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에바 메이어르는 계속해서 우울증을 다룬 예술가들의 작품들, 사상가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우울증을 이해하고자 했고, 노래를 만들고, 자화상을 그리고, 글을 쓰고, 반려견과 산책을 하면서 결국에는 우울증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전에 앓았던 우울증과 달리, 자살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별로 없었다"는 것은 그럴 계획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내 경험상, 우울할 때에는 죽음이 늘 가까이 있다. 어쩌면 우울증은 삶을 유보시킨다는 의미에서 죽음에 대한 일종의 계약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실제로 죽기를 원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울증은 마비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살도 아득한 경우가 많고, 어쨌든 우울하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런 생각도 내 상태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저 계속 몸을 움직였다.          p.133

 

우울증은 뇌에 영향을 미친다. 인지와 정서 기능을 조절하는 전전두엽의 활동이 줄어들고, 기억력을 담당하는 기간완 해마의 크기도 줄어든다. 이는 흥미의 감소, 집중력 저하, 사고력 감퇴, 괴로움과 절망감, 그리고 건망증으로 이어진다. 우울한 사람의 뇌가 이렇게 변한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변할까? 이 책이 바로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닐까 싶다.

 

사르트르의 <구토>,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카프카의 <단식 광대>, 그리고 프로이트, 푸코, 하이데거, 데리다 의 우울에 관한 사색과 통찰을 만날 수 있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자신이 열여덟 살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미래가 불투명했던 저자가 이렇게 언어를 통해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내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루고 있는 소재에 비해 이 책의 글들은 어둡고, 무겁기보다는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져 있다. 그 덕분에 매우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전적 에세이보다는 인문학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정신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엄청난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우울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우울증은 특별한 계기 없이 걸릴 수 있고, 현재 괜찮다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우울증에 대해서 이해하고, 공존하는 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우울증은 살면서 누구라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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