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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태양
린량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9월
평점 :
모든 어른에게는 이런 인생의 비밀이 있다. 다들 '목숨을 건 외줄타기'를 하면서 자랐다. 어른이 되려면 살얼음판을 건너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찌 보면 운이다. 나에게 자식이 생기고 나니 마음이 싹 변했다. 완전히 딴판이 되었다. 나는 자식이 어떤 '외줄'도 건너지 않길 바란다. 차차리 내 몸이 부서져라 일해서 12미터 너비의 널찍한 시멘트 다리를 놓아주겠다. 나는 자식이 어떤 살얼음판도 건너지 않길 바란다. 차라리 내 어깨에 태워 강을 건너고, 얼음이 깨진다면 아이를 물 위로 쳐들고 기꺼이 얼음물을 마실 것이다. p.80
이 작품은 타이완의 국민 작가 린량이 쓴 에세이로 지난 반세기 동안 무려 160쇄를 찍은 책이다. 린량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지만, 60년간 어린이 책을 쓰고 번역하고 연구한 타이완 아동문학의 거목이다. 이 책 역시 '아홉 살부터 아흔아홉 살까지 읽는, 세대를 뛰어넘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애니메이션과 뮤지컬로도 제작되었던 작품이다.
이야기는 신혼 살림을 시작한 단칸방에서 시작된다. 방은 너무나도 작았고, 주위는 시끄러웠지만, 작고 얄팍한 종이상자 같은 집이라도 둘이 함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흘러 타이베이대학병원 분만실 앞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심장을 두근거리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린다. 갓 태어난 딸아이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무엇도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부부는 눅눅하고 비좁은 단칸방으로 돌아온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그들 부부에겐 작은 태양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첫째 잉잉, 둘째 치치, 막내 웨이웨이가 태어나고 시끌 벅적한 가족의 15년 세월이 44편의 산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한테도 아버지가 있단다. 세상 모든 '아이'가 그렇듯 나도 '아버지' 역할을 맡고 나서야 '아버지'가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깨달았지. 엄청나게 '애가 타는' 일이건만 '대우'는 형편없거든. 그때 나는 '내 아버지를 찾아가 이야기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했어. 나날이 어려워지는 '시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두 아버지가 만나' '지혜의 불꽃'을 피워 알아냈으면 했지. 그러나 하늘 아래 살아가는 아버지의 반 이상에게 이는 헛된 바람이란다. 너무 늦었거든. p.294
소소하지만 공감되는, 담백한 묘사들이 눈앞에 그림을 그려주는 듯해서 읽는 내내 기분이 설레었다. '헐거운 수도꼭지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 아내가 사각사각 옷 자르는 소리, 첫째가 나직이 문법 교과서 읽는 소리, 둘째가 사삭사삭 연필로 쓰는 소리, 막내가 고롱고롱 코 고는소리(p.34)' 등으로 그려지는 '우리 집 소리'들이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했다. 조용한 집안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는 린량의 모습이 자연스레 보였으니 말이다. 온 식구가 지켜야 하는 '가정 규칙'을 만들고,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놀이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상의 풍경들이 정겹기 그지없다. 작가라는 직업적 특성상 남들이 잘 때 깨어 있고, 남들이 깨면 자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는 린량이 가족들이 깨지 않도록 소리를 내지 않으며 책을 꺼내고, 음식을 찾아 먹는 에피소드도 아주 유쾌하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 부모의 위치에서 자녀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도 와 닿았다. 부모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심정, 나이를 먹은 만큼의 깊이 있는 시선이 페이지마다 가득해 배우고 싶은 부분들도 많았다. 린량은 아동문학을 ‘평이한 말로 이루어진 예술’이라고 정의했고, 아동문학은 이해하기 쉽고 통속적인 언어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산문집을 읽어 보니 아직 한 번도 읽어 보지 못한 그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었다. 언젠가 린량의 아동문학 작품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꾸밈없이 그려낸 린량의 다섯 가족 이야기는 따스하고, 유쾌하고, 다정하다. 서로를 배려하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도 이런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이 들 것이다. 그의 가족사 15년을 만나게 되면, 우리 집, 내 가족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질 것이다. 어린 시절이 떠오른 날, 가족과의 추억을 기억하고 싶은 날, 이 책을 만나보길 적극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