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죽음들 -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과학수사에 남긴 흔적을 따라서
브루스 골드파브 지음,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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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사실이다. 그러나 사망 사건은 일어날 때마다 인간 경험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 죽으면, 충격을 받고 불쾌함을 느낀다. 죽음에 관한 해답이 필요하다는 욕구는 뿌리가 깊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사람은 왜 죽은 걸까?           p.37~38

 

서론을 지나면 사망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도배지가 벗겨진 침실에 누워 있는 여성, 빨랫줄에 옷이 가득 널려 있는 2층 집 아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성, 온갖 물건들이 널부러져 있는 산지기의 오두막, 차고와 침실 등 실사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밀하게 만들어진 모형들이다. 타일 바닥의 무늬와 꽃무늬 벽지, 금이 간 바닥과 스탠드,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까지 정교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것은 '의문사에 관한 손바닥 연구'라는 이름의 디오라마로 살인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이다.

 

 

이 책은 그렇게 폭력과 죽음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미니어처로 과학수사와 법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인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의 삶과 법의학의 역사를 담고 있다. 리는 1940년대부터 경찰을 교육하기 위해 실제 사건 현장을 그대로 재연한 작은 모형을 만들었는데, 이 디오라마는 현재 18개가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법의학 훈련에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을 쓴 저자 브루스 골드파브는 메릴랜드주 수석 검시관실 공공정보관으로 리의 디오라마를 관리하며, 그녀의 공식 전기 작가가 되었다. 그는 디오라마와 관련된 그림, 미술품, 서류들을 모았고 70년 된 이 디오라마의 보존 작업을 위해 전문가들과 함께 모든 작업 과정에 참여했다. 덕분에 디오라마들은 박물관에서 공개 전시되었고, 그를 통해 프랜시스 그레스너 리의 이름도 재조명된 것이다.      

                                                                                           

 

범죄 현장 사진이나 영상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방법은 학생의 목덜미를 잡아끌며 증거를 하나하나 짚어주는 방식이 될 것이었다. 주의를 끄는 사진이나 자료 없이 실제 범죄 현장에서 증거를 찾는 일은 이와 매우 달랐다... 문득 리는 오래전 어머니에게 만들어주었던 시카고 교향악단 디오라마와 더 록의 다락방에 있는 인형의 집 가구며 비스크 도자기 상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모리츠에게 말했다. "범죄 현장의 모습과 시신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배치한 모형을 내가 직접 만들면 어떨까요? 그걸 가지고 가르칠 수 있겠어요?"          p.275

 

20세기 중반만 해도 경찰은 과학적 살인 수사를 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다.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않은 경찰관도 많았고, 많은 경찰관들이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으며, 경찰 업무를 위한 훈련은 최소한에 그쳤다. 그저 힘이 세고 겁이 없으며 싸움을 말리거나 용의자를 완력으로 구속할 수 있다는 이유로 채용이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실정이니 사망 현장에서 경찰은 증거를 훼손하거나, 현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수사가 처음부터 난항을 겪는 일도 다반사였다.

 

리의 목표는 부패한 코로너 제도 대신 검시관을 현장에 투입하고, 갑작스러운 의문사에 관한 조사를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리는 미국 최초로 법의학과를 하버드 의대에 개설하고, 경찰을 위한 살인사건 세미나를 열었고, 살인사건 현장을 미니어처로 만든 디오라마를 제작해 과학 수사의 발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여자가 대학에 가는 일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리가 다니고 싶었던 하버드 의대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이후 결혼을 하고,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시간이 한참 지나 51세가 되었을 때 병에 걸려 요양하며 우연히 같이 입원했던 검시관 매그래스를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진다. 매그래스 덕분에 법의학에 매료되었던 리는 법의학을 독학하며 엄청난 자료를 모았고, 이 모든 역사적인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그 시작이 50세가 훌쩍 넘은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법의학과 과학 수사의 발전은 아마도 한참 더 늦어졌을 것이다. 그 추진력과 굳건한 믿음과 성실한 희생이 있었기에, 수많은 억울한 죽음의 이유가 밝혀지게 된 것이니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초창기 과학수사에 대한 히스토리와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만나 보자. 법의학과 과학수사에 관심이 있다면, 정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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