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지구, 물러설 곳 없는 인간 - 기후변화부터 자연재해까지 인류의 지속 가능한 공존 플랜 서가명강 시리즈 11
남성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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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기후변화 시나리오대로 지속될 경우 2100년까지 3도의 기온 상승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이 경우 전 지구적인 생태계는 큰 재앙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인류가 인위적으로 지구의 기온을 상승시킨 만큼, 다시 인위적인 노력으로 기온 상승을 억제해야 한다. 유엔 중심의 국제적인 대응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한 이유다. 이를 위해서는 기후를 조절하는 해양과 극지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과학에서부터 그 답을 찾아가려는 것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지구환경 문제를 진단해 문제를 자각하게 한 것도 과학이었듯, 이 문제를 푸는 해결책을 찾는 것 또한 과학이다. 결국 과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p.136~137

 

현직 서울대 교수진의 강의를 엄선한 ‘서가명강(서울대 가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명강의)’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이다. 역사, 철학, 과학, 의학, 예술 등 각 분야 최고의 서울대 교수진들은 2017년 여름부터 ‘서가명강’이라는 이름으로 매월 다른 주제의 강의를 펼쳤으며, 이 배움의 현장을 책으로 옮긴 것이 바로 서가명강 시리즈이다. 이 책은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남성현 교수가 남극, 태평양, 인도양 등 수십 차례의 해양 탐사 경험을 바탕으로 지구의 환경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커피전문점,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일회용컵 사용을 금지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이 년 가까이 되었다. 플라스틱 쓰레기 대란 이후 일회용품 줄이기에 발벗고 나선 것인데, 매장 안에서 일회용컵 사용이 적발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기 때문에 초반에는 꽤 많은 업체들이 신경 써서 지켰던 것 같다. 하지만 점점 지키지 않는 곳이 많아 졌고, 올해 초 코로나 사태 이후 그마저도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가 점점 심각해지는 지구환경에 대해 우리가 '행동'으로 뭔가 하는 전부가 아닐까 싶을 만큼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문제에 대해 무심하다. 그런데 인간이 지구에 끼치는 영향과 지구가 인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직접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거친 바다와 싸우며 직접 데이터를 수집하는 과학자들이다. 그렇다면 지구과학자, 해양과학자라 불리는 이들은 왜 바다로 향하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자연재해와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문제와 거대 쓰레기와 자원 및 식량 부족 문제까지 지구가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희망은 결국 '바다'에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바다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지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해수와 수문 순환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면 푸른 행성 지구의 물부족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식량, 에너지, 자원 문제도 해양에 대한 과학적 이해에서 시작한다. 이를 근간으로 심해저 탐사, 해양생태계 관리, 에너지 추출 등의 기술을 발전시키면 무궁무진한 수산자원, 심해저 광물자원, 에너지 등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답은 바다에 있고, 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과학으로 열린다.    p.191

 

이 책은 태풍, 지진, 쓰나미 등 자연재해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러한 자연재해들을 실제로 경험해본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해도, <볼케이노>, <투모로우>, <해운대> 등의 영화를 통해서 자주 봐왔기에 자연이 인간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이 어떤 것인지는 대부분 알 것이다. 사실 자연 재해를 인간이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저자는 지구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자연재해를 미리 예측하고 재난과 재앙으로부터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대규모 지구환경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구온난화와 미세먼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몸으로 체감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미세먼지와 오존 농도의 증가 등으로 대기의 조성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대두되고 있는 인위적으로 환경을 조절하려는 지구 공학적 접근보다는 '과학'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우리 인류는 기후변화 등으로 전례 없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지구에서, 앞으로도 생존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들어 준 책이었다.

 

자연재해, 기후변화, 환경오염과 관련한 지구의 위기를 꼼꼼하게 분석하면서 짚어본 뒤, 마지막 장에서는 지구 관측과 데이터 과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제시하면서 앞으로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바다가 갖고 있는 잠재력'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하는 이유와 해양관측이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이야기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가 직면한 지구환경 문제들을 과학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이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지구과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역할을 하는 지 알게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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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코스트 블루스
장파트리크 망셰트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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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조르주드디돈으로 얼른 돌아갈 생각이야. 당신은 내가 저지른 이 소박한 일탈을 이해할 수 없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조차도 잘 이해가 안 돼. 나중에 설명할게. 분명 정신적 스트레스 문제인 것 같아. 난 늘 필사적으로 싸워왔어. 그런데 대체 무얼 얻겠다고 이러는 걸까? (그는 줄을 그어 이 문장을 지웠다.) 올해는 특히 힘들었어, 전력투구했다고. 가끔은 우리가 모든 걸 다 내려놓고선 산에 올라가 채소를 기르고 양을 치며 살았으면 싶기도 해. 걱정 마, 그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아니까.     p.87

 

마흔이 채 되지 않은 사내, 조르주 제르포는 파리의 대기업 중간급 임원이다. 어느 날 새벽, 메르세데스를 타고 19번 국도를 달리는 중에 자동차 사고 현장을 목격한다. 그냥 지나치려던 그는 사고 차량 안에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구조 의무를 등한시한 자신의 차 번호를 기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멈춰 선다. 그는 부상을 입은 남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고, 수속을 밟으라는 간호사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바깥으로 나와 버린다. 아내인 베아는 그렇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와버리면 어쩌느냐고 제정신이냐며 그를 타박하지만, 그는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게 싫었을 뿐이다. 며칠 뒤, 그들 가족은 여느 때처럼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명의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살해당할 뻔한다. 그들은 바다 속에서 갑작스럽게 제르포를 가격했고, 겨우 그 상황에서 빠져 나온다. 제르포는 며칠 전 자신이 병원에 데려다 준 교통사고를 당한 남자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제거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고, 분명한 건 두 남자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는 거였다. 제르포는 아내와 아이들을 휴가지에 그대로 놔둔 채, 경찰에 알리지 않고 무턱대고 도망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뒤를 쫓기 시작한 살인 청부업자들에게 반격을 하다 그 중 한 사람이 죽게 된다. 이성을 잃고 화제 현장에서 달리던 제르포가 정신을 차려 보니 알프스 산맥을 횡단하는 화물열차 안이었고, 그때 만난 부랑자에게 수표책을 빼앗기고는 기차 밖으로 추락하고 만다. 죽어가던 낯선 남자에게 베푼 아주 약간의 선의 때문에, 안정적이고 평탄했던 제르포의 삶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평범한 중년 남자는 전문 암살자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진심으로 놀란 것은 아니었다. 안락한 유년기와 성공적인 사회적 신분 상승으로 점철된 청년기를 보낸 후 겪은 최근 사건들로 인해, 그는 자신이 무적이라고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된 차였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우여곡절을 거쳐 간신히 도달한, 이 있음 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음에 깜짝 놀라는 것이 더 흥미롭고 어울려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제르포가 생각하는 본인의 이미지는 10년 전에 읽은 추리소설, 그리고 작년 가을 올랭피크 영화관에서 본 짤막하고 형이상학적인 고전 웨스턴 영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p.114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장파트리크 망셰트는 '네오폴라르'라는 새로운 범죄소설 장르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이다. 1950~1960년대의 정형화된 추리 소설을 탈피해 사회 비판과 실존적 탐구의 장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기존의 범죄소설들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편이다. 우선 분량이 굉장히 컴팩트하다. 판형도 살짝 작은 편이고, 페이지도 이백 이십여 페이지로 대부분의 범죄 소설들에 비해 가볍다.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풍경을 담담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게리 멀리건, 지미 주프리, 버드 섕크, 치코 해밀턴의 웨스트코스트 스타일 재즈를 들으며 외곽순환도로를 달리는 조르주 제르포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했던 작품은 그가 겪은 파란 만장한 피투성이 모험 이후 다시 같은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여전히 시각은 새벽 두 시를 넘었고,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웨스트코스트 음악, 주로 블루스였으며, 메르세데스는 시속 145킬로미터로 달리는 중이다. 제르포가 일상에서 부재했던 기간이 열한 달이었지만, 그는 다시 회사의 임원직을 되찾을 수 있었고, 아내인 베아는 다시 나타난 남편을 너무도 소중히 대했다. 8월에 그들 가족은 전처럼 휴가를 떠났고, 그들은 무척 근사하고 편안한 숙소에서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겉으로 보기에 제르포의 일상은 전과 다름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사념을 잠재우고 음악을 들으며 외곽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그의 삶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색다른 범죄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면, '프랑스 누아르의 혁신'이라 불리는 장파트리크 망셰트의 작품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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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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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황이 좀 비슷한 것 같지 않나요?"
"상황이라고 하시면?"
"이곳도 눈보라가 치면 외딴섬과 비슷한 조건이 만들어질 겁니다. 편지를 써서 초대한 것도 닮았고요."
"그렇군요." 이가라시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립된 호텔에서 투숙객이 한 명씩 누군가에게 살해될 거라는 말씀이시죠?"
"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저도 압니다만."    p.65

 

교코와 모리구치는 내년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라 돈을 아끼느라 설 연휴를 어떻게 보낼 지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눈으로 뒤덮인 산속에 있는 호텔의 사진과 함께 무료 숙박 초대장을 받게 된다. 개점 3주년을 기념에 도쿄에 거주하는 몇 명을 무료로 초청하는 이벤트를 하는데, 숙박비와 여행비를 모두 부담 할테니 방문해서 설경을 마음껏 즐긴 다음에 입소문을 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도착한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도호쿠의 호텔 관설장으로 향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 기차 역에서 호텔까지 설상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들어가야 했다. 호텔에 초대된 것은 여섯 명이었고, 호텔 주인은 그들이 어떤 공통된 이유로 선정이 됐는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유를 맞힌다면 상금으로 10만 엔을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회사원, 마사지 전문점 종업원, 철강회사 직원, 범죄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택시 운전 기사 등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여섯 명은 어떤 이유로 함께 초대된 것일까. 

 

 

한편 도쿄에서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강도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돈을 갈취한 다음 자신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세상이 나빠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강도는 사흘 동안 가게 세 곳에 연속으로 들어간 탓에 목격자들의 진술로 몽타주를 만들 수 있었다. 갈색 반코트에 흰 장갑, 권총, 똑같은 대사, 게다가 세 번 모두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드러낸 것도 이상한 범인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드러내면서 흰 장갑을 끼고 지문을 절대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범인을 목격한 사람의 제보로 강도 행각을 벌인 인물을 검거하게 되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닮은 수준이 아니라 판에 박은 듯이 닮은, 쌍둥이 형제였던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공범이라는 증거도 없었고, 그들 중에 강도질을 한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한다면 두 사람 모두 기소할 수 없다는 거였다. 공범 관계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한 명은 범인이지만 한 명은 아니라는 말이 되었고, 둘 중 누가 범인인지 증명하지 못한다면 의심만으로 처벌할 수 없으니 두 사람 다 무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쌍둥이인 점을 악용한 형제의 강도 행각은 갈수록 더 치밀해지고, 대담해지는데 과연 형사들은 그들의 범행을 막을 수 있을까.

 

 

왼편에 검은 계곡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계곡 쪽으로 깊은 눈 속을 기어갔다. 계곡 바닥에 떨어지면 눈이 온 몸을 감쌀 것이고, 그 눈은 한참을 녹지 않고 남아 몇 년이 흘러도 시신을 감춰줄 것이다.
경사가 급해진다. 이제는 기어갈 필요도 없다. 계곡을 향해 몸이 조금씩 미끄러져 간다.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깊은 계곡과 눈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입가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이걸로 됐다.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p.301~302

 

정말 오랜 만에 국내에 신간이 출간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종착역 살인사건>과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를 통해 만나봤었는데, 그게 벌써 6년 전이니 말이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데뷔 이후 6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누적 판매부수 2억 부를 돌파한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이다. 특히 열차나 관광지를 무대로 도쓰가와 경부가 활약하는 트래블 미스터리로 유명한데 국내에서는 작품들이 그다지 많이 소개된 편은 아니다. 이번 작품은 그의 초기작으로 클래식 본격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불리는데,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실제 극중에서 등장 인물들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사실 고립된 공간에 초대된 인물들이 한 명씩 누군가에게 살해된다는 설정은 여러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활용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거기에 여러 가지 설정들이 더 추가되어 탄탄한 트릭과 수수께끼로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이 추리소설의 메인 트릭은 쌍둥이를 활용한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밝히고 있다. 쌍둥이를 활용한 역할 바꾸기 트릭은 사전에 독자에게 알려야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진짜 트릭을 독자들이 알아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무려 4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낡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 지 않는 본격 미스터리의 고전으로서의 매력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도호쿠의 눈 덮인 호텔에 초대된 인물들에게 벌어지는 사건과 도쿄에서 벌어지는 쌍둥이 형제의 강도 사건은 어떻게 추리를 하더라도 전혀 연관성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별개의 이야기로 따로 진행되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두 사건이 교차점에서 만나게 되면서 만들어지는 결말 또한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출발하지만, 결말은 전혀 다른 느낌의 색다른 미스터리로 풀어내고 있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니시무라 교타로의 수많은 작품들이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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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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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도, 소현도, 지수도, 그 누구도 불행의 중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화 마지막 장면, 제인은 클럽 '뉴월드'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한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어쩌다 한번 행복하게,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누구도 혼잣말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곳. 우리가 살아야 할 뉴월드, 우리의 신세계는 그런 곳이다.    p.59

 

그저 '사람답게' 사는 것조차 너무 힘든 세상이다. 어느 순간 '사람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가 현실 속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는 짓은 괴물보다 더 끔찍한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여러 매체를 통해 보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말에서 묻어나는 어감에 괜시리 뭉클해졌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의심해'본다.

 

칼럼이 나오는 날이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독자들이 돌려가며 읽는 거의 유일한 글쟁이, ‘중앙일보의 송곳’으로 불리는 JTBC 보도총괄 권석천의 신작이다. 워낙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지만 굳이 그의 글을 찾아 읽지는 않았던 나로서는, 사회와 정치를 다루고 있는 글들이라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놀라웠다. 영화 <조커>로 시작해 <곡성>, <스포트라이트>, <택시운전사> 그리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 등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 속 이야기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희비극을 읽어내고 있어 누구라도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글이었다.

 

 

"여러분이 나아갈 사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쁜 일'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십시오.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원칙을 지키다 보면 여러분 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해고되진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빛나는 경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해지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여러분이 그 어려움들을 돌파해내리라 믿습니다."   p.200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은 눈을 의심케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최근에 너무 충격적이었던 사건 중 하나는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자살사건이었다. 차를 만졌다는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50대 후반의 경비원은, 이후 관리사무소에 끌려가 퇴직을 종용 당했고, 계속해서 협박과 폭행을 견뎌야 했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는데, 대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이기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왜 사회는 점점 더 살기 좋아지려고 변화하는데, 사람의 가치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사람에 대한 예의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최근 또 학대 받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고 있어 마음 한 켠이 시큰해진다. 우리는 왜 사람을 사랍 답게 대하는 법을 잊어 버리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들을 저렇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닐까. 이 책은 극단적인 대립,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를 통과하며 우리가 놓쳐버린 가치들을 되돌아본다. 착한 갑질과 나쁜 갑질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믿음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강남역 살인 사건 추모제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로부터 록산 게이의 자전적 에세이 <헝거> 등으로 연결되는 서사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에게 "합의하고 잊어버리라"고 종용하고, 가해자에게 "반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과연 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 왔는지 생각해 보게 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그 순간,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는 그 순간, 반딧불이처럼 작은 진실들이 깜빡 거리며 캄캄한 밤을 밝히고 있는 것(p.236)'이라는 저자의 말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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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의 바다 Project LC.RC
김보영 지음 / 알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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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세상의 악의를 다 끌어모은 것처럼 생겼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툭, 하고 돌이 얹혔다. 이 사람에게 가졌던 호의를 포함하여 애인이나 가족에 대해 물어볼까 하며 두근두근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차게 식었다.
"악마 같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추하죠."
내가 말을 끊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추해졌어요. 하지만 추함은 악과 관계가 없어요. 둘은 서로 빗댈 것이 아니에요."      p.75

 

경호 회사에 다니는 무영은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는 조카 현이와 함께 동해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출장 다녀와서 내일 기차로 올 예정이라, 그들만 미리 출발하는 거였다. 그런데 출발 직전 재난문자가 울렸고, 대합실 TV 화면에는 동해안에 강도 6.2 지진이 발생했고, 해저화산 분출 가능성에 대한 속보 자막이 흐른다. 역무원들은 허둥지둥했지만 전광판에 탑승 안내는 예정대로 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도 관성적으로 기차에 오른다. 현이는 지진이 더 나서 집에 가는 차가 끊기면 좋겠다고, 그럼 집에 안 가고 이모랑 둘이서 살 수 있을 거라며 신나 했다. 그리고 무영은 오래도록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그때 현이를 잡았더라면.. 무슨 일이 났는지 알아보고 다음 차 타자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삼 년 후, 동해안의 해원마을에서 무영은 자가격리를 어긴 괴인들을 잡는 자경단으로 살고 있다. 지진이 난 그날 밤 해저화산 폭발과 함께 새 섬이 생겼고, 그로 인해 연안은 늪처럼 변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감염병이 창궐했다. 피부병과 골격 기형에 생선 비린내 같은 악취증을 동반하는 그 병은 현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세균에서 비롯된 것을 추정되었고, 감염 경로가 명확하지 않아 마을은 삼 년 째 격리 상태였다. 마을 주민 반은 격리 조치를 받은 중환자였고, 나머지 반은 그들을 돌보는 가족이었다. 현이는 병이 창궐한 지 며칠 만에 죽었고, 무영은 삼 년 째 밤마다 고통 속에서 청량리역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그날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시간의 끝을 잡고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은 그 마음. 회한의 순간들. 하지만 현실은 썩은 생선과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점령한 해안, 온몸을 더러운 천으로 둘러싼 병자들 틈에서 기약 없는 정부의 백신 개발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여행 가방을 든 멀끔한 행색의 남자가 마을에 도착한다. 감염학 연구소 직원이라는 그는 현장 조사를 위해 마을 출입 허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 무시무시한 풍경 속에서 무사히 조사를 마치고 보고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것이 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붙들어보고자 하는 최후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물고기 껍질처럼 늘어진 괴물을 애써 외면했다. 사실은, 내가 괴물과 마주쳤고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외계의 적을 처치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희의 눈은 절망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설령 어떤 상황이었더라도, 내 남편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인간처럼 보였다면 그런 식으로 목에 칼을 꽂지는 않았을 거라고.      p.93~94

 

작년에 공포 소설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문제작 <레드 훅의 공포>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라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들이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를 재창조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Project LC.RC'로 Project Lovecraft Recreate라는 뜻이다. 참여한 작가들은 홍지운, 김성일, 송경아, 은림, 박성환, 그리고 김보영, 이서영, 최재훈, 이수현 작가로 총 9인의 작가가 소설 7편과 그래픽노블 1편을 완성시켰다. 특히나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름다운 표지 이미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여덟 편의 작품들을 전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로 대표되는 독특한 신화적 세계관을 창조하여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인종차별주의자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러브크래프트의 새로운 공포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관, 기괴하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오마주하면서,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낡은 관념을 전복적 시각으로 다시 썼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여덟 편의 작품 중에서 내가 만난 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로 꼽히는 김보영 작가의 <역병의 바다>이다. '전염병이 창궐한 어촌을 배경으로 광기와 혐오의 비린내 가득한 SF 활극'인데, 전대미문의 팬데믹으로 격리와 혐오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현실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 속 역병과 코로나는 감염의 양상이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공포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성이나 공포문학의 전설을 오마주한다는 의의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감정은 공포'라고 말했다. 그 실체를 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오롯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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