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대한 예의
권석천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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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도, 소현도, 지수도, 그 누구도 불행의 중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화 마지막 장면, 제인은 클럽 '뉴월드'에서 노래를 부르기 전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어쩌다 이렇게 한번 행복하면 됐죠. 그럼 된 거예요.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또 만나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
어쩌다 한번 행복하게,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면서, 누구도 혼잣말하게 내버려두지 않는 곳. 우리가 살아야 할 뉴월드, 우리의 신세계는 그런 곳이다.    p.59

 

그저 '사람답게' 사는 것조차 너무 힘든 세상이다. 어느 순간 '사람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 속 대사가 현실 속에서 그대로 구현되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는 짓은 괴물보다 더 끔찍한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매일 여러 매체를 통해 보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말에서 묻어나는 어감에 괜시리 뭉클해졌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마음, 악에 무릎 꿇지도, 용서하지도 않겠다는 마음'을 놓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을 의심해'본다.

 

칼럼이 나오는 날이면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독자들이 돌려가며 읽는 거의 유일한 글쟁이, ‘중앙일보의 송곳’으로 불리는 JTBC 보도총괄 권석천의 신작이다. 워낙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지만 굳이 그의 글을 찾아 읽지는 않았던 나로서는, 사회와 정치를 다루고 있는 글들이라 딱딱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어 놀라웠다. 영화 <조커>로 시작해 <곡성>, <스포트라이트>, <택시운전사> 그리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악인>,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 등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 속 이야기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희비극을 읽어내고 있어 누구라도 함께 공감하고, 분노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글이었다.

 

 

"여러분이 나아갈 사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나쁜 일'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겨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니까요. 차라리 불편한 사람이 되십시오. 불편한 사람이 된다는 건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원칙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원칙을 지키다 보면 여러분 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해고되진 않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히려 빛나는 경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불편해지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여러분이 그 어려움들을 돌파해내리라 믿습니다."   p.200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뉴스들은 눈을 의심케 하는 일들로 가득하다. 최근에 너무 충격적이었던 사건 중 하나는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자살사건이었다. 차를 만졌다는 이유로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을 당한 50대 후반의 경비원은, 이후 관리사무소에 끌려가 퇴직을 종용 당했고, 계속해서 협박과 폭행을 견뎌야 했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말았는데, 대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이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이기심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왜 사회는 점점 더 살기 좋아지려고 변화하는데, 사람의 가치는 점점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사람에 대한 예의는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최근 또 학대 받는 아이들에 대한 보도가 계속되고 있어 마음 한 켠이 시큰해진다. 우리는 왜 사람을 사랍 답게 대하는 법을 잊어 버리는 걸까. 태어날 때부터 악한 사람은 없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들을 저렇게 만든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닐까. 이 책은 극단적인 대립, 각자도생의 한국 사회를 통과하며 우리가 놓쳐버린 가치들을 되돌아본다. 착한 갑질과 나쁜 갑질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믿음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저자의 사유가 그럭저럭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그 위험한 장소에 왜 갔느냐?" 가해자의 책임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음모, 무고한 피해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모함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강남역 살인 사건 추모제 등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문제들로부터 록산 게이의 자전적 에세이 <헝거> 등으로 연결되는 서사는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들을 깨닫게 만들어 준다. 피해자에게 "합의하고 잊어버리라"고 종용하고, 가해자에게 "반성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과연 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제대로 지키면서 살아 왔는지 생각해 보게 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우리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그 순간,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는 그 순간, 반딧불이처럼 작은 진실들이 깜빡 거리며 캄캄한 밤을 밝히고 있는 것(p.236)'이라는 저자의 말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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