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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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좀 비슷한 것 같지 않나요?"
"상황이라고 하시면?"
"이곳도 눈보라가 치면 외딴섬과 비슷한 조건이 만들어질 겁니다. 편지를 써서 초대한 것도 닮았고요."
"그렇군요." 이가라시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립된 호텔에서 투숙객이 한 명씩 누군가에게 살해될 거라는 말씀이시죠?"
"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저도 압니다만."    p.65

 

교코와 모리구치는 내년 가을에 결혼할 예정이라 돈을 아끼느라 설 연휴를 어떻게 보낼 지 고민중이었다. 그런데 눈으로 뒤덮인 산속에 있는 호텔의 사진과 함께 무료 숙박 초대장을 받게 된다. 개점 3주년을 기념에 도쿄에 거주하는 몇 명을 무료로 초청하는 이벤트를 하는데, 숙박비와 여행비를 모두 부담 할테니 방문해서 설경을 마음껏 즐긴 다음에 입소문을 내주기만 하면 된다는 거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도착한 것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도호쿠의 호텔 관설장으로 향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라 기차 역에서 호텔까지 설상차를 타고 두 시간 정도 들어가야 했다. 호텔에 초대된 것은 여섯 명이었고, 호텔 주인은 그들이 어떤 공통된 이유로 선정이 됐는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이유를 맞힌다면 상금으로 10만 엔을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회사원, 마사지 전문점 종업원, 철강회사 직원, 범죄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 택시 운전 기사 등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여섯 명은 어떤 이유로 함께 초대된 것일까. 

 

 

한편 도쿄에서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강도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돈을 갈취한 다음 자신이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세상이 나빠서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강도는 사흘 동안 가게 세 곳에 연속으로 들어간 탓에 목격자들의 진술로 몽타주를 만들 수 있었다. 갈색 반코트에 흰 장갑, 권총, 똑같은 대사, 게다가 세 번 모두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드러낸 것도 이상한 범인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드러내면서 흰 장갑을 끼고 지문을 절대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범인을 목격한 사람의 제보로 강도 행각을 벌인 인물을 검거하게 되지만,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닮은 수준이 아니라 판에 박은 듯이 닮은, 쌍둥이 형제였던 것이다. 문제는 두 사람이 공범이라는 증거도 없었고, 그들 중에 강도질을 한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한다면 두 사람 모두 기소할 수 없다는 거였다. 공범 관계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한 명은 범인이지만 한 명은 아니라는 말이 되었고, 둘 중 누가 범인인지 증명하지 못한다면 의심만으로 처벌할 수 없으니 두 사람 다 무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쌍둥이인 점을 악용한 형제의 강도 행각은 갈수록 더 치밀해지고, 대담해지는데 과연 형사들은 그들의 범행을 막을 수 있을까.

 

 

왼편에 검은 계곡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계곡 쪽으로 깊은 눈 속을 기어갔다. 계곡 바닥에 떨어지면 눈이 온 몸을 감쌀 것이고, 그 눈은 한참을 녹지 않고 남아 몇 년이 흘러도 시신을 감춰줄 것이다.
경사가 급해진다. 이제는 기어갈 필요도 없다. 계곡을 향해 몸이 조금씩 미끄러져 간다. 시간이 갈수록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깊은 계곡과 눈이 온몸을 집어삼켰다. 입가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이걸로 됐다.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으니까.     p.301~302

 

정말 오랜 만에 국내에 신간이 출간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종착역 살인사건>과 <명탐정 따위 두렵지 않다>를 통해 만나봤었는데, 그게 벌써 6년 전이니 말이다. 니시무라 교타로는 데뷔 이후 6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누적 판매부수 2억 부를 돌파한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이다. 특히 열차나 관광지를 무대로 도쓰가와 경부가 활약하는 트래블 미스터리로 유명한데 국내에서는 작품들이 그다지 많이 소개된 편은 아니다. 이번 작품은 그의 초기작으로 클래식 본격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불리는데,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시키는 설정으로 시작된다. 실제 극중에서 등장 인물들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사실 고립된 공간에 초대된 인물들이 한 명씩 누군가에게 살해된다는 설정은 여러 영화나 소설 등에서 자주 활용되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거기에 여러 가지 설정들이 더 추가되어 탄탄한 트릭과 수수께끼로 지루할 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작가는 서두에서부터 '이 추리소설의 메인 트릭은 쌍둥이를 활용한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밝히고 있다. 쌍둥이를 활용한 역할 바꾸기 트릭은 사전에 독자에게 알려야 공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진짜 트릭을 독자들이 알아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무려 4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낡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 지 않는 본격 미스터리의 고전으로서의 매력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도호쿠의 눈 덮인 호텔에 초대된 인물들에게 벌어지는 사건과 도쿄에서 벌어지는 쌍둥이 형제의 강도 사건은 어떻게 추리를 하더라도 전혀 연관성이 보이지 않을 만큼 별개의 이야기로 따로 진행되는데, 후반부에 이르러 두 사건이 교차점에서 만나게 되면서 만들어지는 결말 또한 너무 흥미로웠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출발하지만, 결말은 전혀 다른 느낌의 색다른 미스터리로 풀어내고 있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니시무라 교타로의 수많은 작품들이 국내에 더 많이 소개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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