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의 바다 Project LC.RC
김보영 지음 / 알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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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세상의 악의를 다 끌어모은 것처럼 생겼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에 툭, 하고 돌이 얹혔다. 이 사람에게 가졌던 호의를 포함하여 애인이나 가족에 대해 물어볼까 하며 두근두근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차게 식었다.
"악마 같다고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추하죠."
내가 말을 끊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추해졌어요. 하지만 추함은 악과 관계가 없어요. 둘은 서로 빗댈 것이 아니에요."      p.75

 

경호 회사에 다니는 무영은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는 조카 현이와 함께 동해로 떠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니와 형부는 출장 다녀와서 내일 기차로 올 예정이라, 그들만 미리 출발하는 거였다. 그런데 출발 직전 재난문자가 울렸고, 대합실 TV 화면에는 동해안에 강도 6.2 지진이 발생했고, 해저화산 분출 가능성에 대한 속보 자막이 흐른다. 역무원들은 허둥지둥했지만 전광판에 탑승 안내는 예정대로 떴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도 관성적으로 기차에 오른다. 현이는 지진이 더 나서 집에 가는 차가 끊기면 좋겠다고, 그럼 집에 안 가고 이모랑 둘이서 살 수 있을 거라며 신나 했다. 그리고 무영은 오래도록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곤 한다. 그때 현이를 잡았더라면.. 무슨 일이 났는지 알아보고 다음 차 타자고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삼 년 후, 동해안의 해원마을에서 무영은 자가격리를 어긴 괴인들을 잡는 자경단으로 살고 있다. 지진이 난 그날 밤 해저화산 폭발과 함께 새 섬이 생겼고, 그로 인해 연안은 늪처럼 변해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감염병이 창궐했다. 피부병과 골격 기형에 생선 비린내 같은 악취증을 동반하는 그 병은 현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세균에서 비롯된 것을 추정되었고, 감염 경로가 명확하지 않아 마을은 삼 년 째 격리 상태였다. 마을 주민 반은 격리 조치를 받은 중환자였고, 나머지 반은 그들을 돌보는 가족이었다. 현이는 병이 창궐한 지 며칠 만에 죽었고, 무영은 삼 년 째 밤마다 고통 속에서 청량리역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그날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그럼에도 시간의 끝을 잡고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은 그 마음. 회한의 순간들. 하지만 현실은 썩은 생선과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점령한 해안, 온몸을 더러운 천으로 둘러싼 병자들 틈에서 기약 없는 정부의 백신 개발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여행 가방을 든 멀끔한 행색의 남자가 마을에 도착한다. 감염학 연구소 직원이라는 그는 현장 조사를 위해 마을 출입 허가를 받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 무시무시한 풍경 속에서 무사히 조사를 마치고 보고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것이 다 어그러진 세상에서 어떻게든 이성의 끈을 붙들어보고자 하는 최후의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물고기 껍질처럼 늘어진 괴물을 애써 외면했다. 사실은, 내가 괴물과 마주쳤고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외계의 적을 처치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희의 눈은 절망 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설령 어떤 상황이었더라도, 내 남편이 인간의 모습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인간처럼 보였다면 그런 식으로 목에 칼을 꽂지는 않았을 거라고.      p.93~94

 

작년에 공포 소설의 거장 러브크래프트의 문제작 <레드 훅의 공포>를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빅터 라발의 <블랙 톰의 발라드>라는 작품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들이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를 재창조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Project LC.RC'로 Project Lovecraft Recreate라는 뜻이다. 참여한 작가들은 홍지운, 김성일, 송경아, 은림, 박성환, 그리고 김보영, 이서영, 최재훈, 이수현 작가로 총 9인의 작가가 소설 7편과 그래픽노블 1편을 완성시켰다. 특히나 그로테스크하지만 아름다운 표지 이미지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여덟 편의 작품들을 전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러브크래프트는 ‘크툴루’로 대표되는 독특한 신화적 세계관을 창조하여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작가이지만, 인종차별주의자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러브크래프트의 새로운 공포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관, 기괴하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오마주하면서,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낡은 관념을 전복적 시각으로 다시 썼다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여덟 편의 작품 중에서 내가 만난 것은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로 꼽히는 김보영 작가의 <역병의 바다>이다. '전염병이 창궐한 어촌을 배경으로 광기와 혐오의 비린내 가득한 SF 활극'인데, 전대미문의 팬데믹으로 격리와 혐오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현실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론 소설 속 역병과 코로나는 감염의 양상이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공포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의성이나 공포문학의 전설을 오마주한다는 의의를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매혹적이고 흥미진진한 작품이었다. 러브크래프트는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감정은 공포'라고 말했다. 그 실체를 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오롯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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