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영란은행이 10 파운드 지폐의 새 얼굴을 발표하기 전 논란이 있었다. 현재 5파운드에 그려진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2016년, 윈스턴 처칠로 바뀌면서 화폐에서 '여성'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소요는 잦아들게 된다. 10 파운드의 주인공은 바로 제인 오스틴이었던 것!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은 트위터를 통해 "<이성과 감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결정"이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2017년 오스틴이 그려진 화폐가 유통될 때까지 여성 위인이 잠시 부재할 터지만, 10파운드 전임자가 찰스 다윈이고 고액권으로의 승진이라는 점은 논란을 불식시킬 만 하다. 현재 영국의 화폐에는 엘리자베스 프라이(5파운드), 찰스 다윈(10파운드), 아담 스미스(20파운드), 매튜 볼턴과 제임스 와트(50파운드)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화폐의 얼굴은 나라의 얼굴이므로, 그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을 명확하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고액권 화폐의 인물이 신사임당이 된 것은 '위인'이라기보다는 '전통적 여성상'에 방점이 찍힌게 아닌가 한다. 영국 화폐를 장식한 첫 여성 위인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었고, 엘리자베스 프라이는 사회개혁가, 인권운동가이다. 그리고 제인 오스틴은 잉글랜드 남부 중산층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찰스 디킨스와 함께 19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의 국민 작가다. 그에 비하면 사임당의 위인으로서의 업적은 머리를 긁적이게 한다. 문예와 회화에 재능이 있었다고 하나, 시대나 사조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사임당은 왜 5만원권의 얼굴입니까, 사회에 공헌한 점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엔 뭐라고 답해야 할까.
미국에서도 화폐에 여성의 얼굴을 싣자는 운동이 있다. 수정헌법 19조에 의해 여성 참정권을 보장받은 1920년으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2020년, 20달러 지폐가 목표다. 좁혀진 후보는 4명으로 엘리너 루즈벨트, 로자 팍스(인권 운동가), 해리엇 터브만(노예 해방 운동가), 윌마 맨킬러(첫 여성 체로키 족장)이다.
어쨌거나 5만원권의 얼굴은 신사임당으로 정해진지 오래고, 인기가 많아 시중에선 찾기 힘든 귀한 몸이 되셨다. 그러고 보면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발전 과정 속에 한국의 나이팅게일, 프라이, 오스틴이 있었을 것이다. 번뜩 떠오르지 않을 뿐... 어쩌면 비비안 마이어처럼, 우리가 그의 작품과 업적을 모르는 채로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지 모른다. 다만 여성이 화폐의 얼굴이 되었어도 여권 신장을 반영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 이미지가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관이라 생각하니 씁쓸해 진다.
아무튼 10파운드의 얼굴로 선정될 정도로 오스틴의 위상은 대단하다. 생전에 소설 4편, 사후 2편이 묶여 출간되었는데, 모든 작품의 영상화가 이루어졌다. 또 소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거나 패러디한 작품도 여럿인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려 한다.
먼저 제인 오스틴을 다루고 있는 작품은 두 가지가 있다. 2007년 드라마 <제인 오스틴의 후회, Miss Austen regrets>와 영화 <비커밍 제인>이다. 영화는 앤 해서웨이와 제임스 매커보이가 주연을 맡았다. 오스틴의 유족은 해서웨이가 너무 예뻐서 주연을 맡는 것을 반대했다고 하는데 미국인 배우가 영국의 국민작가를 연기한다는 것도 별로였을 것 같긴 하다. 사실 이 영화는 상당한 각색을 거친 터라 실제 제인과 톰의 관계를 과하게 표현한 감이 있고, <오만과 편견>의 주인공과 겹쳐 보이도록 연출했다.
BBC 드라마 <제인 오스틴의 후회>는 제인이 언니 카산드라와 조카 패니에게 보낸 서간들에 기초한 이야기로, 제인의 말년을 그리고 있다. 조카 패니가 호감을 가진 남성에 대해 상담을 하면서, 제인은 거절했던 지난 날의 청혼에 대해 회상한다. 제인은 오빠의 병문안을 갔다가 만난 젊은 의사를 좋아하게 되지만 젊은이의 눈은 패니를 향하고, 나이듦에 씁쓸함을 느낀다. 이 드라마는 작가 오스틴의 삶을 보여준다. 요즘 인기가 많은 톰 히들스턴이 패니의 상대역으로 등장한다.
<이성과 감성>(1811)
개인적으로, 1995년 이안 감독이 연출한 <이성과 감성>이 제일 좋다. 이안에게 두번째 베를린 황금곰상을 안겨준 영화이기도 하다. 엘리너 역을 맡은 엠마 톰슨이 각본에 많이 참여했으며, 촬영 초기에는 감독과 배우 간 다소 잡음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대단한 점은, 동양인 남성 감독의 연출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에 흐르는 오스틴 특유의 섬세한 감성이란! 이안은 정말 천재다.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윌러비에게 배신당한 메리앤의 방황을 그린 씬이 일품이다. 메리앤 역은 케이트 윈슬렛, 브랜든 대령은 알란 릭맨 그리고 에드워드 역에는 휴 그랜트가 출연한다.
2008년, BBC에서도 <이성과 감성>을 만들었다. 여주인공들은 다소 낯설지만 남자 배우들은 영드를 본 분들이 반가워 할만하다. 엘리너와 메리앤의 오빠인 존 대시우드 역은 <닥터후>와 <셜록>의 각본을 맡고 있는 마크 게이티스가 맡았다. 윌러비 역할은 도미닉 쿠퍼로, 아이언맨 아빠 하워드 스타크 하면 아실 분이 많을 듯 하다. 브랜든 역할은 데이비드 모리시, 에드워드 역은 <다운튼 애비>의 댄 스티븐스가 연기한다.
<오만과 편견>(1813)
1995년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을 빼 놓을 수 없다. 전무후무한 인기를 자랑했으며, 클래식답게 전세계 여성들의 지지를 받은 다아시 역의 콜린 퍼스가 출연한다. 총 6개의 에피소드로, 각색을 거쳤으나 원전에 가까운 훌륭한 작품이다. 특히 유명한 건 '영국 TV 역사상 잊지 못할 순간'에 뽑힌 콜린의 호숫가 씬. 리지를 잊지 못해 미친듯이 다른 일에 전념하는 다아시, 그래도 열기를 주체못해 호수에 몸을 던진다. 수영 후 옷을 대충 걸치고 귀가하는데 리지를 만나, 당황하며 수줍어 하는게 포인트다. 원작엔 없는 장면인데 이 장면의 여파로, 콜린은 <세인트 트리니안스>에서도 분수에 퐁당 빠지고 <오만과 편견 다시 쓰기, Lost in Austen>에서 여주인공은 다아시에게 호수에 들어갔다 나오라고 한다. 이 호숫가 씬은 다아시의 인기를 공고히 하고, 오스틴의 대중적 인기에 불을 붙였다. 리지 역의 제니퍼 일리는 미국인으로, 최근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 출연했다.
2005년 영화 <오만과 편견>은 보다 극적이고, 감성적이다. 네더필드 저택을 떠나는 리지를 마차로 에스코트한 후 돌아서는 다아시의 손을 클로즈업 한다거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와중 리지를 향한 다아시의 고백은 로맨스 영화답다. 사연있어 보이는 얼굴의 매튜 맥퍼딘은 영드 <스푹스>로 알려져 있다. 맥퍼딘은 먹는 걸 좋아해서 살이 잘 찌는 편으로, 다아시 역할을 위해 급하게 체중을 감량했다고 한다. 리지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는 조 라이트의 영화 <어톤먼트>와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제인 베넷을 연기한 로저문드 파이크는 최근 영화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 역으로 알려졌으며 키티 역을 맡았던 캐리 멀리건은 드라마 <노생거 사원>의 이자벨라 쏘오프를 연기했고 , 영화 <언 에듀케이션>과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역으로 알려졌다. 곧 개봉할 토머스 하디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에서 주연을 맡았다.
<오만과 편견>의 현대 버전, 2001년과 2003년 개봉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 1, 2>는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브리짓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난 마크 다아시(이혼남, 변호사)의 쌀쌀맞음에 재수없어 하는데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콜린 퍼스가 방황을 마치고 '다아시'로 돌아온 작품으로, 브리짓 역의 르네 젤위거가 ‘All by myself’에 맞춰 립싱크하는 장면이 유명하다. 브리짓, 마크와 삼각관계를 이루는 역은 휴 그랜트가 맡았다. 소설로는 3편도 나온 걸로 아는데, 어디선가 다아시에 대한 루머를 들었다. 그게 맞다면 소설도, 영화도 보고 싶지 않다…
<오만과 편견 다시 쓰기, Lost in Austen>은 2008년 ITV에서 방영되었다. 아만다 프라이스라는 여성이, 자기 집 욕실에서 <오만과 편견>의 리지 베넷을 만난다. 욕실 안의 통로를 통해 리지는 21세기로, 아만다는 소설 속으로 여행을 하며 벌어지는 내용이다. 예상대로 아만다와 다아시가 이루어진다. <닥터후>의 리버 송, 알렉스 킹스턴이 베넷 부인으로 나오며 리지 역할의 젬마 아터튼은 드라마 <테스 더버빌>의 테스 역을 맡기도 했다. 참고로 앤젤은 에디 로드메인이 연기했다.
<Death comes to Pemberley>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2013년 BBC에서 방영되었다.< 오만과 편견>의 다아시 커플이 결혼한 지 6년이 흐른 후, 펨벌리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러 온 위컴 부부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다아시 역은 매튜 리스가 맡았는데 미드 <브라더스 앤 시스터즈>로 유명해 졌으며, 최근 <아메리칸스>에서 위장 KGB요원으로 열연 중이다. 리지 역은 <블리크 하우스>의 애나 맥스웰 마틴, 위컴은 매튜 구드. 리디아는 <닥터후>의 컴패니언인 제나 콜먼이 맡았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좀비>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2016년 개봉할 예정이다. 세상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고 있고, 엘리자베스 베넷은 좀비를 물리치는 여전사로 나온다. 다아시는 리지의 용맹함에 반해 청혼하고, 설정만 특이할 뿐 줄거리는 원작과 비슷하게 흘러간다. 이 영화가 기다려지는 이유는 11대 닥터, 맷 스미스가 콜린스로 나오기 때문이다. <왕좌의 게임>의 찰스 댄스와 레나 헤디도 캐스팅 명단에 있는데, 라니스터처럼 피 튀기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맨스필드 파크>(1814)
2007년, ITV는 '제인 오스틴 시즌'을 기획하여 <맨스필드 파크>, < 노생거 사원>, <설득>을 촬영하고 1996년작 <엠마>를 묶어 방영하였다. 패니 프라이스 역은 <닥터후> 뉴시즌의 컴패니언인 빌리 파이퍼가 맡았고, 에드먼드는 블레이크 릿슨이 연기한다. 릿슨은 2009년 드라마 <엠마>에서 엘튼을 연기한다. 메리 크로포드는 <대지의 기둥>, <에이전트 카터>의 헤일리 앳웰이 맡았다.
<엠마>(1815)
1995년 케이트 베킨세일과 마크 스트롱이 주연한 ITV 드라마, 같은 해 비버리힐스를 배경으로 재해석된 <클루리스>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알리시아 실버스톤이 청춘스타로 나와 큰 인기를 끌었으며, 젊은 시절의 폴 러드와 브리트니 머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요즘 세대에는, 실버스톤과 제레미 시스토와의 카드 돌리기 게임 장면이 유명하다. 1996년에는 기네스 펠트로 주연의 영화가 개봉했으며, 유언 맥그리거가 등장한다. 2009년 BBC 드라마 <엠마>에는 로몰라 가레이와 조니 리 밀러가 주연을 맡았다. 로몰라 가레이는 <어톤먼트>에서 성인이 된 브리오니를 연기했고, 최근 벤 휘쇼와 함께 한 <디 아워>는 호평을 받았다. 이 드라마의 각본은 BBC 시대극 <제인 에어>, < 북과 남>, <나사의 회전>을 쓴 샌디 웰치가 맡았다.
<노생거 사원>(1818)
<노생거 사원>은 오스틴이 처음으로 쓴 소설이지만, 출판문제가 있어 마지막 소설인 <설득>과 함께 묶여 오스틴의 사후 출판된 작품이다. 2007년 ITV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에서 캐서린은 펠리시티 존스가, J. J. 필드는 헨리를 장난기 있는 인물로 해석한다. 각색은 캐서린의 상상을 풍부하게 채색하며, 주인공 둘 다 귀엽다. 필드는 영화 <오스틴랜드>에서 다아시를 연기하는 배우로 나온다.
<설득>(1818)
2007년, 제인 오스틴 시즌으로 ITV에서 방영된 드라마이다. 드라마 <핑거스미스>와 영화 <해피 고 럭키>를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은 샐리 호킨스가 앤 엘리엇 역할을 맡았다.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에서 진저 역으로 등장했다. 웬트워스 대령은 <스푹스>스타, 루퍼트 펜리-존스가 맡았다. 펜리-존스는 현대판 잭 더 리퍼를 다루는 드라마 <화이트채플>에서 강박증이 있는 수사반 경위로 등장한다. 드라마는 상당히 정적인 분위기로, 앤의 내면을 보이기 위해 헤드샷을 많이 잡는다. 라임의 바닷가는 두 주인공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고, 각색을 거친 앤 엘리엇은 보다 행동력있는 캐릭터가 되었다. 웬트워스를 찾아 바쓰를 질주하는 마지막 장면과, 호킨스의 연기가 아주 좋다.
<오스틴랜드>는 2013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작가 스테프니 마이어가 제작을 맡았다. <오만과 편견>의 남주 다아시에 푹 빠진 여주인공이, 제인 오스틴 테마 리조트에 가서 리젠시 시대를 체험하는 이야기이다. 드라마 <펠리시티>, <아메리칸스>와 영화 <어거스트러쉬>로 알려진 케리 러셀이 주연을 맡았고, JJ 필드가 '오스틴랜드'에서 다아시로 등장하는 배우 역을 맡았다. 실제로 바쓰에 있는 '제인 오스틴 센터'에 가면, 스태프들과 함께 리젠시 시대를 체험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 북클럽>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2007년 개봉한 영화이다. 오스틴 작품 읽기를 취지로 모인 클럽의 멤버들이 자신이 고른 책의 주인공들의 상황과 오버랩되며 전개된다.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편집이 매끄럽지 않달까 내용이 뚝뚝 끊기는 면이 있다. 각색 과정에서 상당 부분 삭제된 듯 하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읽어야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 벨로, 캐시 베이커, 에밀리 블런트, 휴 댄시가 출연한다.
※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북과 남>
빅토리아 시대의 오스틴이라 불리는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작품이다. 대산세계문학총서에서는 <남과 북>이라 이름붙여 나왔다. 개스켈은 그녀가 살던 시대(산업화)를 반영하여 오스틴보다 큰 틀에서 사회, 경제적인 삶을 다룬다. 전통적 가치가 여전한 남부 여성 마거릿과 개혁적이고 냉철한 북부의 사업가 손튼과의 만남과 로맨스, 자본가/노동자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주제의식을 떠난 로맨스 면에서도 시청이 아깝지 않다. 손튼의 공장에서 목화가 눈처럼 날리는 장면과 떠나는 마거릿을 보던 손튼이 되뇌는, "Look back... Look back at me."는 인상깊은 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