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친이 지은 밥을 먹지 못한지 햇수로 7년째가 된다. 무척이나 밥에 대한 집념이 질기게도 강했던 모친이었다. 7년 전부터 모친이 해주는 밥은 영영 이별이나 마찬가지이다. (병원에 누운지 햇수만큼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와이프가 출근 전에 해 놓은 밥은 저녁에 한 끼 먹는다. 식어버린 밥에 온기의 맛은 없다. 매일 아침마다 출근하려면 바쁠 텐데 제발 밥하지 말라고 강권해도 와이프는 밥에 대한 집착도 역시 강하다. 해놓은 밥을 먹지 않으면 가끔 화도 낸다. 체념할 만도 한데 끝까지 밥해놓는 수고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하루에 해줄 수 있는 최적치가 밥이라도 해놓는 거라고 하지만, 다 식어 버린 밥에 매달릴 것도 아니라고 설득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차마 맛없어서,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없다고 실토할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한 끼만 먹겠다고 선언하고, 특히 탄수화물로 대변되는 밥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별 효과도 없었다. 밥을 안 먹으면 압력 밥솥에 그대로인 밥을 보고 상당히 섭섭해한다. 해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먹긴 해야겠지만 지겹다는 말도 못하고, 밥의 답습에 매달리고 싶지는 않는다.
와이프는 아직도 달걀 물 입힌 옛날 소시지 반찬을 좋아하고 자주 먹고 싶어 한다. 어릴 때 도시락 반찬에 노란 달걀을 입혀 지진 소시지 반찬의 부러움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나도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아직도 그 부러움을 떨쳐내지는 못한 것에서 역시 사람은 어릴 때 먹었던 밥의 기억은 평생을 가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난 좀 다르다. 그 결핍과 부러움을 현재까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계속 이어간다는 것의 답보성에는 난 저항하고 싶었다. 이젠 그런 그리움의 소시지 반찬에 여전히 연연해서 그 맛을 찾겠다고 하기에는 잊어도 되는, 아니 그보다 더 나은 맛의 음식이 널렸는데 굳이 찾는 것도 일종의 그 시절의 향수처럼 그리움일 것이다. 그리움이라고 모두가 다 다시 재현되어 저야 할 의무도 없지 않은가. 그런다 해서 같은 환경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면 차라리 대신의 다른 걸로 치환하면 될 일이다. 연연할수록 사람은 집착을 만들고 다시는 되돌릴 수없는 것들에 마음을 쓴다는 게 된다. 그런 결핍은 그때 시절로 똑같이 보상심리로는 해결될 수 없는 밥의 정서이기도 하다. 과거의 맛에 집착이란 오늘날의 보상심리의 맛과도 연결되니 찾으려 하는 거다. 그러나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시간은 집착과 아집을 낳기 마련이다. 과거의 부러움과 결핍이 상흔이 되어 아직도 비가 오면 욱신거려야 할 기억의 신경통처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밥의 정서는 어릴 적에 먹은 부족의 희소성에 대한 맛이다. 없으니 마음껏 채울 수없는 그 허전함이 만든 맛일 따름이다.
한민족 역사상 산업화가 되기 전 5,000년간 굶주린 사람의 유전자에는 배고품의 고통이 새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밥에 고깃국이다. 잘 살기 위한 것도 결국 이밥에 고깃국을 마음껏 먹고 싶은, 그 부족함이 오늘날의 과식 문화로 이어진 건 아닐까 싶었다. 부족이 과잉을 부른다. 당장 바빠서 시간이 없어 패스트푸드로 때웠다고 하면 당장 밥 먹을 시간도 없었음에 대해 측은지심도 발동되기도 하고 배고픔의 증상에 대해 안절부절할 수없는 두려움을 만들었다. 다 못먹고 살아왔던 민족이 피할 수없는 집착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밥상을 받기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말이나 휴일 아침은 와이프의 수고를 덜고 특히, 내가 지은 밥으로 함께 먹고 싶었다. 나도 밥 정도는 할 줄 아는 남자이고 싶었고 밥상을 받는 것에서 이제는 밥상을 차려 내는 것으로 변환하고 싶었던 이유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에 먹는 밥에서 이 책을 통해서 새로운 밥에 대한 메인이 되는 밥상을 차려 주고 싶었다. 밥을 어떻게 해서 새롭고 창작적인 밥맛을 만들어 내는 저자의 새로운 밥의 발상이 참으로 위대하기까지 하다. 받기만 하는 밥상에서 차려 주는 밥상의 매인이 밥으로써 전달되는 마음의 감정이입은 확실한 밥의 정서를 느끼게 되는 부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도 시골에 땅을 보러 갔다. 언젠가 시골 정착해서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밥이라도 시골의 담백한 밥 한 끼를 선물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온통 판매되는 식당의 혀끝에만 매달린 매식의 밥이 아니라, 자연의 근사한 밥상에 따스하게 갓 지어낸 밥으로 시골의 풍미가 한껏 들어가서 각종 재료들의 원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맛의 밥과 어우러짐을 퍼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루라도 어느 식당에서 사 먹는 밥의 결핍은 당장 매일매일 끼니는 해결하지만 너무나도 무미건조한 정서에 마음이 갈 리가 없다. 어떻게 하면 한 끼를 때우는 식의 사 먹는 밥은 그저 배를 채우는 허기의 대체일 뿐이다. 밥 한 끼를 먹음으로써 그 심리적인 정서의 포만감이 드는 밥상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저자의 노력이 만든 각종 밥의 레시피를 보고 꼭 따라 해보고 싶은 것의 이유이기도 하다. 밥에 넣을 각종 주 재료를 장만하는 과정은 도시의 식당에서 사 먹는 밥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다. 시골의 밭과 산에서 얻어낸 재료들과 어우러지고 그 계절과 부합되는 시간을 밥에 저장하며 새로운 맛으로 과정을 즐기는 묘미는 식당에서 사먹는 밥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제는 그 부족함의 결핍의 정서를 이겨내고 기아의 트라우마를 떨쳐내고 밥상 위에 피어오르는 밥의 냄새에서 우리의 행복이 밥 한 그릇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끼 그저 때우는 밥보다는, 한 끼조차도 근사한 예술적이고 창작적인 밥 한 그릇으로 우리 삶이 만들어내는 과정과 함께, 더불어서 윤택함이 밥의 찰기에 좔좔 흐르는 면면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한다.
PS : 본 포스팅 제목에 오타와 문법이 틀려 정정합니다. ~으로, ~으러. 아흑.